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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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 어떤 기사에서 우리 세대를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똑똑한 세대' 라고 지칭한 것을 본 적이 있다. 20~30대 전체를 통칭하는 듯 한 그 묘사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역사상 평균 가방끈이 가장 긴 세대. 어마어마한 등록금으로 인해 수천만원의 빚을 지며 대학으로 대학으로 몰려들 수 밖에 없는 세대. 졸업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빚더미에 신음하며, 세대 구성원 대부분이 고시원으로 몰려들고, 종국에는 구직도, 연애도, 결혼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세대. 역사상 가장 똑똑한 세대이지만, 역사상 가장 무기력하며, 먹고사는 일이 가장 큰 문제인 세대. 486 세대는 우리 세대를 88만원 세대라고 부르며 무기력함을 질타하고, 우리 세대는 이런 세상을 만들어온 그 세대를 욕한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나락으로 가라앉는 현실은, 끊임없는 비에 잠겨가는 김애란 작가의 [물속 골리앗] 의 세계처럼 거대한 자연재해와도 같다.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풍경. 20대의 지상목표는 구직이고, 30대의 지상목표는 그 직장에서 버티는 것이거나 더 나은 직장으로 옮기는 것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출렁이는 흙탕물 뿐. 내 몸은 작고 약한 뗏목 위에서 잔뜩 긴장한 채 '버틸' 뿐이다. 언제 가라앉을지, 언제 부서질 지 모르는 한없이 나약한 판자떼기 위에 얹혀있는 나의 육체. 이 무시무시한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이미 죽어버린 부모의 몸을 붙든다. '캥거루 세대' . 그것은 88만원 세대의 또다른 이름이다. 신체적으로는 장성했지만, 부모의 주머니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세대의 다른 단상. 살기 위해서는 붙들 수밖에 없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말초적인 유혹을 탐닉한다. 이성에 매달리고 하루이틀밤의 유희에 집착한다. 온라인 게임속으로 빠져 자신을 잊고, 현실을 잊는다.  그것은, 그래. 현실의 고통으로 인한 갈증을 풀어주는 미지근한 사이다와도 같다. 오늘 하루를 이겨내게 해주고, 내일에 대한 의욕을 잠시 불러 일으켜주는 유희. 그것들은 우리 세대에게 있어 밥보다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세대에게 있어 가장 절망적인 것은 동 세대 안에서의 치열한 경쟁이다. 우리는 애초에 우리 윗세대와는 경제적으로 대결을 펼칠 수 없는 구조 안에서 태어났다. 우리 윗 세대가 영화 '매트릭스' 의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거대한 머신이라면, 우리 세대는 그 머신이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체 에너지를 공급하는 캡슐 속에 잠들어있는 인간들이다. 한 세대에서 2%안에 들어있는 사람들만이 윗세대가 만들어놓은 단상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세대 안에서 그 2%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경쟁, 경쟁, 경쟁. 도태된 자들은 무능하기 때문이다. 사회와 구조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도태된 내가 무능하기 때문인 것이라고 주입받는다. 수많은 고학력자들은 자신들이 사회가 원하는대로 최선을 다해 최상의 코스를 밟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직장도 얻지 못하고, 연인에게 버림받고, 부모의 집을 벗어나지 못했음에 큰 배신감을 느끼지만, 그것은 자연스럽게 "내가 못나서" 라는 자괴로 잉태된다.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대출을 받아서 대학, 대학원, 유학까지 모두 밟았지만, 남는건 아르바이트 자리와 10년동안 갚아도 모자랄 어마어마한 대출금 뿐인 것이다. 당연히 우리 세대는 '내가 못났으니',  '당연히 도태되지', '나는 졌다' 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윗세대들의 "네가 못났으니" , "도태되는건 당연하다" ,"넌 졌다." 라는 차가운 대거리로 말미암는다. 결국 이 세대의 모든 꿈은 결국 '돈' 으로 모아질 수 밖에 없다. 그 돈은 당연히 '먹고 살기' 위함이다. 무능하고 무기력한 세대.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부와 권력은 자기네들의 틀 안에서 고스란히 세습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하면 할수록 꼬여가고 가면 갈수록 절망스러워진다. 김사과 작가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처럼, 온통 절망속에서 분노만이 재생산된다. 사회에 대한 분노라기 보다는 자신에 대한 분노이다. 도태되고 나약하고 무기력한 나. 자신에 대한 분노는 폭력성으로 드러나고 무기력한 세대는 가상 세계속에 자신의 화신을 만들어 분노를 폭력으로 발산한다. 각종 비디오 게임과 온라인 게임, 그리고 연예인들. 타인의 아바타를 깨부수고, 살을 뭉개고 쥐어 뜯는 날카로운 톱날같은 악플을 끊임없이 달아댄다. 문득 이 세상이 지옥처럼 느껴진다. 순간순간 스쳐가는 말초적인 유희는, 잠깐동안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을 부시게 하는 점멸하는 빛과 같다. 세상에 자욱한 어둠을 확실히 인지하게 만들고, 더 어둡게 만들듯 절망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만들어 준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다시 말초적이고 순간적인 유희에 목메고, 다시 절망한다. 세상이 파괴되어 가는 느낌이다.

 

 수많은 가치관과 개념들이 변해간다. 김이환 작가의 [너의 변신] 은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관과 개념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절망적인 삶과 절묘하게 맞물린다. 결국 '자본주의' 란 욕망에 충실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욕망이 제 1순위이다. 자신의 정체성까지도 욕망에 따라 바꿀 수 있다. '돈' 만 있으면. 삶의 모든 가치는 '돈' 이다. 황석영 작가는 '낯익은 세상' 의 후기를 통해 "호랑이 꼬리를 잡고 달리는 소금장수 신세" 에 비유했다. '생명' 조차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다. 아니, 사람 그 자체를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다. 돈이란 욕망이고, 인간이란 욕망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개념속에서 사람은 욕망을 제어함으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욕망의 제어, 욕구의 제어는 인간성의 제 1 원칙이나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욕망과 욕구는 추구해야 할 제1의 원칙이다. 돈만 있으면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 세대는 욕망을 제어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욕망은 제어하는 것이라는 것조차 배우지 못했다. 그저 '돈' 만 있으면 다 할 수 있는것. 그래. 그것이라고 배웠다. 결국 인간은 욕망의 노예, 그리고 돈의 노예가 되었다. 우린 이미 그런 세계 속에서 태어났고, 배워왔으며, 자라왔다. 

 

 우리가 지켜왔던 전통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세계는 김성중 작가의 [허공의 아이들] 에 등장하는 세계처럼 허공으로 분해되어 가고 있다. 속수무책이다. 지킬 수도 없고, 지킬 생각도 없다.  그렇다. [물속 골리앗] 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끊임없이 물속으로 침잠하는 세상과 끊임없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세상. 이 두 작품은 이 작품집 안에서 가장 닮아있다. 마치 쌍둥이처럼 말이다. 그리고 가장 또렷한 이미지로 젊은 세대들이 느끼는 암담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헤쳐나가는 과정 또한 닮아있다. [물속 골리앗] 의 화자는 어머니와 함께 외딴 방에 고립되었다가 흙탕물이 넘실대는 위태로운 '바깥세상' 으로 나아간다. 어머니의 시체를 뗏목에 단단히 묶고,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절망적인 순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계속 살아가기 위한 원동력으로 삼는다. [허공의 아이들] 역시 비슷하다. 소년과 소녀 역시 종국에는 망망한 허공을 떠다니는 집 안에 고립된다. 그리고, 아마 소년 또한 소녀와의 기억을 삶에 원동력으로 삼아내리라.

 

 작품집은 비교적 어둡고 파괴적이다. 혹자는 '아니 뭐야 요즘 젊은이들은 이렇게 본단 말이야?' 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같은 세대로서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은 대단히 크게 공감된다. 이 작품집에 실린 작가들 대부분이 나와 비슷한 나이대이다. 지난해까지 작품들의 메시지가 주로 '소통' 이었던 것에 비해 확실히 최근에는 보다 농밀하고 직접적으로 현실의 암담함을 그리기에 주력하는 느낌이다. 그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흐름에 맞물려, 보다 대중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이미지들이 많이 포함된다. 작가들의 문장은 지나치게 꾸며지지도, 절제되지도 않은 담백하고 담담한 경우가 많으며, 확실하게 공간과 사물, 관념과 이미지가 혼재된 속에서도 명확하게 구분되는 느낌이다. 작가들이 그려내는 세상은 관념적이긴 하지만 상당히 구체적인 이미지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이 작품집에 실려있는 작품들 모두가 애매하거나 모호한 느낌이 전혀 없다. 위에 언급한 두 작품인 [물 속 골리앗] 이나 [허공의 아이들] 의 경우엔 상당히 SF적인 설정과 세계관이 보여지지만 대단히 현실적이다. 김사과 작가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의 흐름을 표현한 작품이지만, 그것들이 눈에 보이듯 또렷한 색채와 경계를 가지고 있다.

 

 비록 대부분의 작품들이 현실을 암담하게 그려내고 있지만, 화자들은 꾸준하게 시도하고 있다. 파괴되고 있는 현실과 자아를 그리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파괴하려는 시도는 아니다. 이런 파괴적인 '현실' 이 우리의 '자아' 를 파괴하고 있으며,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해야 이런 현실에 맞서 자아를 지켜낼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절망을 희망을 바꿀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인 것이다. 세상은 여전히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폐해가 드러나기 시작한 서구 유럽 사회들에 비해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긍정적인 요소는 바로 '역동성' 에 있다. 실제로 하루아침에 뒤바뀔 수 있는 역동성이 우리 사회엔 아직 존재하고 있다. 작가들은 현실을 파괴적으로 그려내지만 끊임없이 제시한다. 바로 그런 '현실' 에 적응해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말이다. 여전히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고, 소통에 목말라 하며, 대화하기를 멈추려 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알아가면서' 시작된다. 현재 20~30대를 구성하는 세대들은 주로 70년대 중반~80년대 후반에 태어났다. 급격한 과도기의 시대에 태어났고, 미성숙된 사회 속에 던져졌다. 우리는 미완성된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애매한 개인주의로 살아오고 있다.  세상이 더 나아질지, 아니면 더 암담해 질지는 잘 모르겠다. 그것은 온 지구가 물에 덮일때 까지 계속되는 비와 같고, 가루 하나 남지 않고 분해되는 세상과도 같다. 확실한 건, 절망도, 희망도 모두 삶이 계속 될 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낙오도 우리의 탓이 아니고, 가난도 우리의 탓이 아니며, 고립과 외로움도 우리의 탓이 아니다. 암담하고 어두움 속에서 캄캄하다고, 앞이 안보인다고 주저앉아 있으면 굶어 죽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 우리가 포기하고 주저앉는다면, 바로 그것이 우리 자신의 유일한 실수이자 잘못이 될 것이다. 우리는 빛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니면 어둠에 눈이라도 익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대화해야 한다. 뗏목을 만들어 흙탕물 속으로 뛰어들듯, 무너져 내린 아스팔트 사이를 펄쩍펄쩍 뛰어넘어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던 그 집으로 가듯.  
 또 하나, 가장 쉽고도 확실한 것 한가지는 [떠, 떠, 떠 ....떠]듬 거리면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든다면, 조금은 나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지켜야 할 것이 있을때, 삶에 작은 방향키가 생길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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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 지은 집 한국 건축]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혜로 지은 집, 한국 건축 - 우리 건축의 구조와 과학을 읽다
김도경 지음 / 현암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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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펜을 가지고 어떤 사물을 그대로 종이에 옮기기 위해서는, 그 사물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어느정도 필요하다. 그렇기에 그림을 공부하는 친구들은 인체 해부학을 공부한다. 자동차나 기차, 로봇 등을 그릴때도 마찬가지 이다. 자동차의 전반적인 구조를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는 화가가 그리는 자동차 그림과, 그저 자동차를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 화가의 자동차 그림은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때문에, 나 역시 이런 류의 건축에 관한 책들을 여러 권 보아 왔다. 특히 한창 만화가의 꿈을 키우던 무렵엔 '무협물' 과 '역사물' 에 대한 큰 관심이 있었고, 지금도 역시 그런 작품을 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에 한국 전통 건축물에 대한 책들은 차곡차곡 모아오고 있다.  그 중 현암사의 건축 서적들은 '전문지식' 의 범주 안에서는 최고라고 할 만 하다. 뭐 사실 '전문 서적' 의 카테고리 안에서 '현암사' 라는 브랜드 파워는 두 말 할 나위도 없으니, 불필요한 문장일수도 있을터다. 

 [지혜로 지은 집, 한국 건축] 은 특별히 한국 건축들의 공학적인 기술에 많은 비중을 둔 책이라 할 수 있다. 인류가 가혹한 지구의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몇가지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단연 '집' 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비 바람을 막아주고, 각종 포식자들로부터 몸을 보호하며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휴식' 을 취할 수 있는 공간. 인류에게 있어 '건축물' 만큼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인류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건축에 대한 공학적 지식을 쌓아왔다. 수학 같은 학문도 건축을 위해 연구되었고 개발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유희의 동물이다. 태생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기에, 인류가 만들어내는 건축물들은 튼튼할 뿐 아니라 아름답기도 하다.  

 한국의 건축물 중 가장 신기한 부분은 어디에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거대한 지붕이다. 한국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지붕이 가장 아름답고 신비하다. 켜켜히 쌓인 기왓돌과 유려한 곡선. 그 무시무시한 무게를 수백년간 지탱할 수 있는 원리는 과연 어떤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이 책 또한 지붕에 대한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사계가 뚜렷한 기후를 가지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습한 편이었다. 추위와 더위는 물론 눈과 비, 바람, 게다가 습기까지 막아야 했다. 게다가 산도 많다. 수많은 동물들과 곤충들로부터도 몸을 피할 수 있어야 했다.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지붕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요소로 발달하기도 했다. 지붕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을 지탱하는 기둥 또한 강해져야 했다.  

 이 책은 그렇게 조상들의 지혜가 녹아있는 책이다. 당시엔 지금처럼 공학 계산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애초에 건축공학에 수학이 체계적으로 들어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고대로부터 꾸준하게 축적된 지식들과 지혜들이 모여 그 토대를 어느정도는 구성하고 있었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고려시대 정칠각형을 그리는 방법이나 원형, 장방형 중심으로 그려진 평면도, 치수 재는 방법 등은 무릎을 탁 칠 정도로 절묘하다. 작도기나 콤파스 같은 것들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각도를 재고 원을 그리는 방법들은 끊임없이 개발되어 온 셈이다.  아치가 가지고 있는 인장력이나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힘을 전달하는 각도 등을 인류는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축적해온 것이다. 너무도 신비한 인간의 지혜. 너무나 뛰어난 우리 조상들의 지혜. 인류의 지혜를 너무나 쉽고 편하게 접해볼 수 있는 책. 엄청나게 많은 사진들과 보기 쉬운 설명용 일러스트들이 가득해서 건축에 전혀 식견이 없더라도 충분히 즐길만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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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속의 영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사유 속의 영화 - 영화 이론 선집 현대의 지성 136
이윤영 엮음.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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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신간 평가단이 아니었으면 절대 보지 않았을 책. 

 개인적으로 영화라는 매체를 아주 좋아하지도, 아주 싫어하지도 않는 중간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주로 극장에 찾는 이유도 데이트 아니면, 상상력을 거대한 화면에 담아낸 SF나 판타지류를 보기 위해서이고, 연애를 등한시하는 최근 얼마간은 극장에서 본 영화는 손에 꼽는다. 난 영화를 접할땐 문학이나 만화등과 비슷한 관점에서 접근한다. 거기에 시각적인 효과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다. 눈으로 즐기는 영화인데 글과 같이 스토리 텔링만 놓고 즐긴다는 것은 뭔가 좀 아쉽고 아깝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는 이야기는 물론 화면, 음향, 배우의 연기까지 모두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렇게 단편적인 조각들로만 접했던 [영화]. 이 책은 나와 같은 일반인들은 쉽게 접하기 힘든 이론서적일뿐더러 기존에 통용되던 영화에 대한 패러다임을 부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립해 나가는 과정이 담겨있는 책이다.  

 '이론 선집' 이라는 카테고리 답게 이 책은 여러 영화 이론가들이 영화를 나름대로 정의한 것을 모은 책이다. 1929년에 발표된 이론부터 시작되어 챕터가 진행될수록 1992년에 덧붙여진 내용까지 아우른다. 책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화 이론가들을 끊임없이 영화를 다른 무언가와 빗대며 영화에 대한 본질을 파헤쳐 간다. 일본의 하이쿠부터 시작해서 연극, 소설, 사진에 이르기까지. 예술로서 접근하기도 하고, 예술과는 별개로 접근하기도 하며, 촬영 기술을 다루기도 하고, 배우들의 연기를 다루기도 한다.  

 때문에 사실 영화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료한 대답을 얻기를 힘들다. 영화는 언어라고 하면서도, 예술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아니라고도 한다. 영화가 언어라면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 다른 장에서는 영화는 예술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지만, 예술은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책의 각 챕터들은 서로 다른 이론을 가진 완벽히 다른 각각의 영화에 대한 접근이라고 봐야 옳다. 때문에 초반에는 자꾸 앞  이론과의 연관을 찾으려고 애쓰는 바람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지만, 각 챕터를 별개의 책으로 보게 된 뒤로부터는 술술 잘 넘어갔다. 이런 이론 선집을 접해보지 못했던 개인적인 오류였던 셈이다. 

 이 책은 각 챕터별로 영화를 이론적으로 파고든 포인트 부터가 전혀 다르다. 물론 가장 초반에 등장하는 1929년에 씌여진 '영화의 원리와 표의문자' 챕터는 기본적으로 영화라는 개념 전체를 아우르는 도입부와도 같은 챕터이지만, 뒤로 갈수록 영화의 한 부분에 집중하게 된다. 그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점점 더 포괄적인 의미를 담아가게 되는 것이다. 가장 첫 챕터에 씌였던 칼럼은 영화를 일종의 함축적인 문자의 개념에서 접근했다면, 뒤로 가서는 영화 자체가 개념과 관념 전체를 표현해내는 일종의 행위로 본 것이다. 문자 - 언어 - 개념 그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발전해오고 본질 자체가 변화해가는 영화라는 매체를 보는 것은 상당한 재미였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은 단어들이 결코 어렵지 않게 쓰여졌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오히려 다른 영화 기법서들처럼 이런저런 전문용어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예를 들고 있는 수많은 영화 제목들이나 수많은 영화 관련 인물들의 이름이 가장 어렵게 느껴질 정도로 쉽게 잘 풀이되어 있다. 가끔 등장하는 전문용어들도 굉장히 쉽게 풀려 있으며, 탁월한 이론가들 답게 '남들에게 풀어서 설명하는 법' 을 아주 능숙하게 행하고 있다. 물론, 번역과 구성이 무척 쉽게 되어 있어서 책 자체에 상당히 공들였음을 알 수 있다.  

 알라딘 신간평가단이 아니었으면 결코 만나보지 못했을 책이지만, 영화 전문가나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더라도 한번쯤 접해볼 만한 책이다. 리뷰 마감을 늦춰가며 다 읽은 가치가 충분했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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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천왕기 세트 - 전6권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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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C통신의 '하이퍼 터미널' 접속음. 팩스의 접속음과 비슷한, 치~~ 하는 잡음과 삐요오 삐요오~ 하는 그 독특한 기계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사람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파랗고 까만 바탕 색 모니터 속에 픽셀로 찍혀있던 글자들. 그 안에서 생명력을 얻어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 수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중 단연 뛰어났던 것은 흔하디 흔한 귀신 이야기에, 흔하지 않은 등장인물들이 뒤섞인, 뻔하디 뻔한 퇴마 이야기에, 뻔하지 않은 드라마틱한 사람 사는 이야기들이 뒤섞인 이야기 [퇴마록] 이었다. 현실과 비현실, 상상력과 통찰력, 액션과 드라마, 전통과 현대,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들이 절묘하게 비벼진 [퇴마록] 은 한국형 퇴마물의 효시였음과 동시에 한국형 판타지의 출발점이었고, 영화로, 게임으로 변형되며 컨텐츠의 멀티 유즈의 첫 발자욱 - "원소스" 의 위대한 첫 발자욱이자 문단이나 평단의 인정이 아닌, 순수한 대중들의 지지로 빛을 본 첫번째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와 함께, 일본 문화 전면개방과 맞물려 일본 라이트 노벨이나 퇴마물 등 장르소설들이 급속도로 유입되며 한국형 판타지 소설들이 PC통신상에 우후죽순처럼 쏟아지기 시작했고, [퇴마록] 의 엄청난 성공과 더불어 그런 PC통신 출신 장르 소설들이 출판 시장을 휩쓸기 시작했다. 게다가 IMF 와 함께 소설 대여점이 합법적인 사업 형태로 인정받으면서 소위 "대여점 용" 장르 소설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으니, 그 발원지가 바로 PC통신, 그 아버지는 [퇴마록], 즉 PC통신계의 '본좌' 이우혁 작가일 것이다.

 이우혁 작가는 그렇게 자신이 만든 한국 판타지 소설의 필드 위에서 본격적으로 꿈을 펼치기 시작했다. 퇴마록 완결 이후 세상에 내놓았던 작품 [왜란 종결자] 가 그것이었다. [왜란 종결자] 는 당시 대여점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당시 한국의 판타지 소설과는 그 궤 자체가 완벽하게 다른 작품이었다. 대여점의 폭발적인 증가세와 더불어 함께 불어났던 한국 작가들의 판타지 소설들은 소위 '일본식' 판타지인 '로도스섬 전기' 나 일본 라이트 노벨인 '슬레이어즈' 의 아류작에 불과했다. 엘프, 정령, 드워프, 호빗 등 유럽식 판타지에 일본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화려한 액션, 그리고 한국 무협지 풍의 무공들이 뒤섞인 만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수준높은 이야기를 짜내는 작가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결국 유럽식을 일본식으로 가공한 라이트 노벨의 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한국 판타지 소설계에 등장한 [왜란 종결자] 는 '역시 이우혁'! 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 했다. 임진왜란이라는 익숙히 알려진 사건 속에 실제 역사에 기록된 인물들까지 녹여냈던 한국형 팩션(Faction - Fact와 Fiction을 섞은 합성어)이자, 대 유행했던 엘프, 드워프, 오크, 오우거 같은 뻔한 종족들까지 단숨에 배재하고 저승사자, 도깨비등과 같은 우리네 전통 설화에서 이끌어낸 종족들까지. 그리고 사용하는 아이템이나 기술들 또한 철저하게 전통적이었고,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들은 심지어 당시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재해석에 가까운 전개까지!! 진정 새로운 모습의 판타지 소설을 선보였던 것이다.

 당시에 그저 만화적인 상상력만으로 맘대로 아무렇게나 글을 써대던 수많은 판타지 작가들에게 '판타지 작가로서의 길' 을 정확히 제시한 작품이었다. '대여점' 은 신인 작가들에게는 최소한의 판매부수를 보장해주는 장점인 동시에, 중견 작가들에게는 대여점 이상의 책을 팔 수 없는 단점이기도 했다. 때문에 작가들은 단순히 누적부수를 늘려 수입을 늘리기 위한 글을 쓰는것이 대부분이었다. 그 와중에 등장한 [왜란 종결자] 는 철저한 자료조사와 역사고증, 그런 역사적 사건들까지 아우를 수 있는 폭넓고도 설득력 있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제대로 짜여진 판타지의 틀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왜란 종결자] 는 바로 이 작품을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았음 밝혀지며, 수많은 장르소설 팬들을 흥분시켰으니, 바로 [치우천왕기] 이다. 이 리뷰를 적고 있는 내가 수년 전, 군대 가기 직전까지 정말 열심히 읽었던 작품 [치우천왕기] !!

 당시 한국 판타지 문학계는 [왜란 종결자] 이후로  작가들 사이에서도 일대 격변이 일었고, 한국형 판타지를 만들기 위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으나, 몇몇 작품들을 제하고는 사실 습작에 무방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역시 그 와중에 등장한 [치우천왕기] 는 그야말로 한국형 판타지의 종결자였다. 역시 치밀한 사전조사와 엄청난 현장고증과 역사고증, 마치 실제 그 시대를 살았던 것 같은 치밀한 인물과 상황묘사, 배경묘사들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이었다. 5권인가 6권까지 읽어보고 군대에서 전역했으나, 치우천왕기는 완결이 나지 않았다. 후에 PC통신에서 열광했던 독자들이 그대로 넘어온 모 온라인 동호회와 각종 뉴스를 통해서 이우혁 작가의 송사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결국 치우천왕기는 201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완결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전에 다른 책의 리뷰를 통해 살짝 언급한 적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판타지 소설을 볼 때 '좋은 작품' 을 가늠하는 기준은 단연 '세계관' 이다. 물론 판타지 소설 또한 '소설' 이기 때문에 소설적 가치들도 따지지만, 특히 판타지에는 '세계관' 이라는 요소를 덧붙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사람들이 훨훨 날아다닌다고 치자. 이들이 어떤 원리로, 어떤 방법을 통해 어떻게 날아다니며, 날아다니는 사람들과 날아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의 차이는 무엇이며, 그런 것들이 설득력이 충분하냐는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훨훨 날아다니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면, 분명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다른 모습일 것이며, 사람들의 생각, 사상, 습관 또한 완벽하게 다를 것이다. 어쩌면 헤어스타일, 피부 색, 감각기관, 팔다리, 손가락, 발가락 갯수가 다를수도 있다. 어쩌면 네 발로 기어다닐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현재 모습으로 진화한 가장 큰 요인은 '직립보행' 때문이므로. 가느다란 뼈대 두개로 물이 가득한 가죽 주머니를 오른쪽으로 던졌다, 왼쪽으로 던졌다 하며 균형을 잡아가는 뇌의 능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진화의 결과물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 직립보행 할 필요 없이 날개로 파닥파닥 날 수 있었다면, 혹은 날개 없이 붕붕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었다면, 지금 모습처럼 진화했을리가 없다. 지금 우리와 같은 모습이면서 하늘을 날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에 걸맞는 타당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만약 마법을 쓰는 세상이라면 역시 사람들의 생각, 사상은 물론 사회의 모습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과 많이 다를 것이다. 그런 모든 것들이 바로 '세계관' 이고, 그것들을 얼마나 설득력있게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느냐가 바로 판타지 소설의 완성도를 좌우한다. 그런 기본적인 철저한 세계관이 정립되어있지 않다면, 그 작품은 판타지 소설이 아닌 그냥 상상력을 지맘대로 끼적댄 낙서에 불과할 따름이다.

 

 하물며,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파고 들어가는 작품이라면 어떨까? 역사의 반은 허구와 상상력으로 이루어져있다. 게다가 문자가 발명되기 전, 문명시대 이전 시대는 빈약한 후대의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할 수 밖에 없다. 중국 역사에서도, 하-은-주 시대는 전설시대로 분류되고, 비슷한 시기의 우리 역사인 고조선 시대 또한 그렇게 접근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우혁 작가는 아예 '판타지 소설' 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활용해 그 시대를 풀어냈다. 하지만, 역시 대가답게 철저한 현장 고증과 자료 검증을 바탕으로 설득력 있는 배경을 그려냈고, '신수' 와 '주술' 이라는 개념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그려냈다. 그 뿐아니라, 그 이후 시대에서는 왜 신수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고, 주술의 개념이 변화했을까에 대한 부분까지 짚어냈다. 그런 디테일한 부분들이 판타지 소설이지만 세계관에 대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뚜렷한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뚜렷한 인과관계를 통해, 세계관은 작가의 전작인 [왜란 종결자] 를 아우르고, 심지어 '맥달' 이 등장하기도 했던 [퇴마록] 의 세계까지 아우른다. 즉, 우리가 실제 살고 있는 현실 세계까지 아우를 수 있을 정도로 설득력 있는 '현실적인' 세계관이 완성된 것이다.

 

 작품의 초반부는 작가가 개정판 서문에도 밝혔듯, 지나치게 친절하게 세계관을 설명하려 한 부분이 존재한다. 발귀리 선인과의 만남에서는 8계에 대한 설정이 장황하게 설명되서 불필요하게 느껴질 정도이지만, 그 부분이 결국 [왜란 종결자] 의 세계관을 아우르기 위한 선행작업이었던 셈이다. 초반부를 넘어가면 본격적으로 치우천과 치우비로 불릴 희네와 나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전형적인 영웅 서사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치우천과 치우비의 이야기는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봐왔던 대하 소설들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즉, 판타지 소설이지만 허무맹랑하게 주인공들이 눈 앞에 시련들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다는 것이 아니다. '정립' 작가가 그려냈던 '광개토 대제' 처럼, 그리고 이문열 작가가 그려냈던 '대륙의 한' 의 근초고왕처럼 치우천과 치우비 형제는 죽을동 살동 말 그대로 피눈물을 흘려가며 차근차근 시련을 이겨낸다. 이야깃속의 등장인물들에게 시련이 크면 클수록 독자들은 더욱 깊이 이입된다. 우리가 영웅 서사의 원형으로 잘 알고있는 '니벨룽겐의 반지' 의 지그프리트를 예를 들 필요도 없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홍길동만 봐도 그가 겪는 시련은 평범한 것을 넘어선다. 서자로 태어나 거대한 사회적, 신분의 벽을 절감하는 것은 물론, 새어머니라고 부를수도 없는 아버지의 부인에게 목숨을 위협받는다. 가족도 배경도, 친구도 잃고 혼자가 되는 홍길동. 광개토대제나 근초고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맨몸으로 꿋꿋하게 일어나서 악한 길로 빠지지 않고, 선한 길을 걸어가서 끝끝내 자기 희생적인 신념을 지켜내는 인물, 그를 우린 영웅이라고 부른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치우천과 치우비 형제 또한 그러한 선천적 시련과 후천적 시련들을 하나 하나 이겨나간다. 그러한 끊임없는 시련에 괴로워하고, 수많은 위협과 유혹들, 그리고 수많은 의문, 의문, 의문들. 치우천과 치우비 형제는 때론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을 버려가면서도 끝끝내 나아간다. 나아가고, 나아가고. 너무 쉬운 길이 있어 보임에도, 피눈물을 흘리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가장 어렵고 험한 길을 꾸역꾸역 헤쳐나간다.

 

 현실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눈 앞의 시련을 쉽게 이겨내지 못한다. "나에게 왜 이런일이??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왜 나에게만?? 저 사람은 편하게 살고있는데, 왜 나만 괴롭고 어려워야되?" 너무나 쉽게 그렇게 단정짓고, 그러한 시련들로부터 피할 수 있는 가장 쉽고도 어리석은 방법인 '죽음' 을, 역시 너무나 쉽게 택한다. 그러한 정신적 나약함을 세대 전체로 돌릴수도 있을 테지만,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어느 세대에나 많았을터다. 세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정신적 강인함을 키울 수 있는 너무나 쉬운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독서일 터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프라 윈프리도 과거부터 전해오는 영웅적인 면모를 가진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흑인으로 태어나 인종차별을 당해왔고, 게다가 여성이었기에 성차별도 당했으며, 10대때 강간당하고 유산까지 겪었던 그녀가 수많은 사람들의 멘토로 인류 공동체에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가장 큰 역할은 단연 '독서' 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제 강점기, 시련에 빠진 민족을 위해 역사속 영웅들을 세상으로 내보냈다. 그렇다. 바로 역사와 역사속 영웅들을 사람들에게 '읽힌' 것이었다. 이러한 위인전들은 한 사람이 맨몸으로 최고의 위치에 오르는 과정을 보여줄 뿐 아니라, 시련에 처했을때,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거대한 의문이 생겼을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겨내는 마음가짐을 보여준다. 고통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회비용' 이란 것은 단순히 경제활동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불교에는 '인과율' 이라는 것이 있어서, 지금 내가 하는 이 악행은 언젠가 반드시 배가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고 말한다. 불교 뿐 아니다. 기독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금 나의 행동은 언젠가는 반드시 심판을 받기 마련이다. 원인과 결과. 그것은 세상 모든 이치를 관통하는 진리이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신념' 이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지불했는가? 그리고, 자신이 지켜내야 할 '신념' 과 자신이 지불해야 할 그것의 가치를 어떻게 비교했는가? 더 큰 것을 위해, 어떤 작은 것을 포기하는 것. 그 찰나의 선택에서 어떤것을, 어떤 마음으로 선택했을까.

 

 이우혁 작가가 [치우천왕기] 를 구상할 때, 단순히 책을 많이 팔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그 당시 이미 최고의 작가였고, 엄청난 인세를 벌어들이는 부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수년간 곰팡내 나는 고서적들을 뒤진 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이미 다른 작가들은 상상력만으로도 별의 별 말도 안되는 소설들을 쏟아내며 돈을 긁어모으고 있었고, 이우혁 작가 또한 검증된 스토리 텔러로써 아무 얘기나 써도 독자들이 달라붙었을텐데, 왜 그렇게 힘들게 자료 조사를 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인가?? 물론 그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겠지만, 그 욕심은 '한국의 영웅을 부활시킨다' 는 명제로부터 시작된 것일터다.

 '영웅' 은 어디에나 필요하다. 오죽하면 미국이라는 거대 사회와 거대한 문화의 주춧돌이 '슈퍼맨' 이었을까. 아직도 수많은 미국의 어린이들은 '슈퍼맨' 을 가장 닮고 싶은 위인으로 손꼽는다. 아이들은 단지 슈퍼맨처럼 날고싶다거나, 행성을 옮길만한 힘을 갖고싶어서 쫓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슈퍼맨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닮고싶어한다. 어떠한 적이 나타나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희생정신, 아무리 사악한 적도 인권과 생명을 존중해주는 자애심, 신념을 가진 행동에 한 톨 부끄러움이 없는 당당함. 완벽히 창조된 '캐릭터' 이지만, 슈퍼맨은 이야기를 통해 생명력을 얻고, 미국 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 완벽히 창조된 '캐릭터' 에 숨을 불어넣고 생명력을 부여한 것은 바로 '이야기' 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디테일하고 인과관계도 뚜렷하며 너무나 잘 짜여진 '이야기'. 슈퍼맨은 인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들의 세상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는 엄청나게 많은 고뇌를 겪고 시련을 겪는다. 인간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수많은 유혹에 시달린다. 그런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한 인간이 지구의 정복자가 아닌 수호자가 되기 위해서 과연 성장기 때 어떤 부모 밑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으며, 어떤 친구들과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욕망을 어떻게 제어했고, 차별을 어떻게 극복했으며, 나쁜 유혹들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이런 수많은 디테일함들이 수십년동안 꾸준하게 쌓이면서 '슈퍼맨' 은 한 '사람' 으로 각인되어 수많은 미국인들의 영웅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가 스포츠 스타들에 열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맨몸으로, 수많은 부상들과 위협을 이겨내고 거대한 상대를 당당하게 맞서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영웅을 본다. 리오넬 메시가 호르몬 이상증후군을 이겨내고 세계 최정상에 우뚝 서는 모습, 유럽에서 인종 차별과 부상을 끝끝내 이겨내며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각광받는 박지성의 '이야기' 를 통해서 말이다. 이우혁 작가는 우리에게 바로 그런 영웅이 이미 수천년 전부터 존재해 왔음을 보여주고 싶어했고, 그러한 '디테일' 을 획득하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투자했던 것이고, 결국 이렇게 우리 눈 앞에 '치우천왕' 을 보여주었다.

 동북공정에 맞선다는 단편적인 해석도 좋다. 그래봤자 가상인물이라는 비아냥도 좋다. 결국 판타지 소설이지 않느냐는 조롱도 좋다. 다시 말하지만, 미국 어린이들은 슈퍼맨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스스럼 없이 꼽는다. 욕심을 버리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며, 언제나 타인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가치를 최선으로 삼는 '스타워즈' 의 '제다이 나이트' 들도 있다. 중국이 숭배하는 영웅들은 다른가?? 그들이 숭배하는 탕왕이나 무왕 같은 영웅들도 모두 전설시대의 신화같은 인물들이다. 관운장은 어떠한가? 그들이 숭배하는 관운장은 역사속 인물 모습 그대로인가? 위에도 언급했지만 역사의 반은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허구이다. 그들이 숭배하는 것은 그 사람의 겉모습도 아니고, 그 사람의 업적도 아니고, 그 사람의 계급이나 지위도 아니다. 그들은 그의 정신을 숭배한다. 그리고 그들에겐 모두 공통점이 있다.

 목숨을 쉽게 여기지 않았고, 어떠한 시련 아래에서도 당당하게 그것에 맞서 극복해나가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사랑과 관용으로 아군과 적을 모두 포용했다는 것이다. 치우 형제처럼 말이다.  

 

 너무나 쉽게 '삶' 의 스위치를 내리는 세상이다. 그렇다. 때론 이 고달픈 삶 속에 태어난 것이 내 의지가 아니라면 적어도 계속 살지, 아니면 그만 여기서 멈출 지 정도는 내가 선택하게 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투정을 부리고 싶을때도 있다. 마치 불을 끄듯, 삶의 스위치를 내리고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이 편하게 생각될 정도로 극심한 고통과 시련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럴 땐, 지키고 싶은 것을 떠올려 보라. 치우천은 '세상' 이라는 큰 꿈을 꾸었지만, 동생인 치우비는 '형님' 이라는 꿈을 꾸었더랬다. 치베는 '우정' 이라는 꿈을 꾸었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이름없는 모든 사람들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주요 인물들처럼 크진 않았지만, 치우천이라는 인물을 바라보며 '자식' 이라는 꿈을 꾸었고,'아내' 라는 꿈을 꾸었으며, '집' 과 '자식' 이라는 꿈도 꾸었다. 그리고 당연히 '돈, 재물' 이라는 꿈도 꾸었다. 그 꿈은 이루고 싶은 꿈이었으며, 지키고 싶은 꿈이었고, 삶을 지탱해나가는 굵은 밧줄이었다. 

 어렵지 않다. 그러나, 쉽지도 않다. 하지만, 평생 한번 쯤 꿔볼 만한 것이다. 지금의 삶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울수록,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더 꿀 만하다. 언제나 영웅은 난세에서 나오기 마련, 또 아는가? 지금 이 책을 읽는 나나 당신이 '세상' 이라는 꿈을 꾼다면, 그리고 그것을 위해 다가오는 시련에 당당하게 맞설 준비를 한다면, 충분히 될 수 있다.

 '치우천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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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퍼스트 어벤져: 캡틴 아메리카(가제)] 의 국내 개봉을 앞두고 찾아온 그래픽 노블.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슈퍼 히어로를 꼽으라면, 슈퍼맨과 캡틴 아메리카를 꼽을 수 있다. 캡틴 아메리카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지지 못한 이유는 이름에서 드러나는 지나친 미국주의때문이다. 물론 미국인의 시각에서는 애국주의일테지만. 때문에 영화 역시 해외판은 제목에 '캡틴 아메리카' 에서 '아메리카' 를 떼어낼 것이라는 소식도 있다. 캡틴 아메리카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 싸우기 위해 개발된 슈퍼 솔저 계획의 일환으로 태어난 슈퍼 히어로로써, 베트남 전쟁이나 한국전쟁이 배경인 이슈도 있다. [캡틴 아메리카의 죽음] 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정발된 이 작품은 1세대 캡틴 아메리카인 스티브 브루스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원샷 프로젝트로, 총 3권으로 완결되는 작품이다. 리뷰도서로 선정되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영화 개봉을 앞두고 소개해볼 만한 작품이다. 

 

 

 아트북스에서 잘 만들어내는 치유계 작품. 좋은 그림과 좋은 글들이 적절히 어우러져 전처럼 좋은 택을 펴냈을 것 같다. 브랜드와 전례가 가지고 있는 인상이랄까. 각박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요즘, 한번쯤 읽으며 2011년의 전반기를 반추해볼 만 하다. 

 

 

 

 

 저자의 필모그래피가 놀랍다. 말 그대로 영화 평론계에서 무시무시한 스펙을 쌓아가고 있다. 평론은 제2의 창작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를 해석해주는 일은 영화 작가, 감독, 카메라 감독은 물론 사회적, 문화적 지식이 충만해야 가능한 일. 특히 사랑이나 연애와 연관지어 영화를 해석해 준다면 그 무엇보다 재미있을 터다. 책 소개에 나와있는 영화들도 대부분 낯익은 제목들. 과연 어떤사랑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영화와 연계시켜  풀어내줄지 기대 된다.  

 

 

 

  

 '그로테스크' 라는 용어의 정의를 알고있는가?? 그로테스크. 혐오감, 공포감, 두려움 등 인간의 마이너적인 성향을 모두 담고 있는 듯한 단어 '그로테스크'. 표현의 한 방법이기도 한 그로테스크는 과연 왜, 어떻게,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그 질문의 답을 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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