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칼리버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9-3 아서 왕 연대기 3
버나드 콘웰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우리가 알고있는 역사의 대부분은 사실상 허구이다. 그렇다고, 역사가 모두 거짓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100% 진실만을 담고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역사' 라는 것은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 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실록과 같은 기록으로서의 역사서 또한 100%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실제로 왕들이 과거의 기록들을 지우거나 덧씌우기도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역사들은 그런 동시대의 여러 기록들을 서로 비교해보고 대조해보며 90%이상 '팩트Fact' 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건들을 위주로 논리적, 인과적인 추정들을 덧붙여 당시의 여러 정황들을 각종 유물과 유적들을 기반하여 '추정'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록이 남아있는 시대를 우리는 '역사시대' 라고 한다. 그리고, 그 이전. 체계를 갖춘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를 '신화시대' 라고 한다.

 

 '아서 왕'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신화시대의 이야기이다. 실제 영연방의 역사에서도 아서왕에 대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다뤄지지는 않는다. 대부분 신화시대의 이야기들은 [신화] 로 규정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중국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서왕 이야기는 중국의 하나라 우임금 이야기와 비슷하고, 우리에게는 치우천왕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아서왕 이야기는 후대까지 민담처럼 널리 알려지게 되고, 아서, 멀린, 란슬롯 같은 인물들 또한 입에서 입으로 넘겨지는 과정에서 점점 구체화가 되었고, 우리에게 흔히 알려져있는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와 같은 '소설' 이라고 보면 된다.

 

 [윈터킹]-[에너미 오브 갓]-[엑스칼리버]로 이어지는 버나드 콘웰의 아서왕 연대기는 보다 리얼리티를 추구한 작품으로, 실제 그 시대의 브리튼에 아서왕이라는 인물이 정말로 존재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지 - 충실하게 재현해낸 작품이다. 먼저 고대 브리튼에는 원주민 브리튼족이 있었다. 켈트족이 브리타니아를 침공하여 지배했고, 그 뒤에는 로마가 브리타니아를 지배한다. 로마가 멸망한 뒤에 게르만의 한 일파인 앵글족, 색슨족, 유트족이 정착하고, 후에 노르만족이 앵글로 색슨이 지배하고 있던 지역을 지배하기도 한다. 많은 민족들이 뒤섞여있고, 그 민족성 또한 뚜렷해서, 캘트족이 주를 이루는 웨일즈, 스코틀랜드와 앵글로 색슨이 주를 이루는 잉글랜드는 문화와 성격이 상당히 다르다.

 이 작품은 기원전 4~5세기경, 브리타니아를 지배하던 로마가 멸망한 뒤 앵글, 색슨, 유트족이 브리튼섬에 유입되기 시작한 무렵, 현재 잉글랜드의 남부지방을 무대로 하고 있다. 버나드 콘웰은 당시 사회는 국가의 개념보다는 족벌의 개념이 컸다. 즉, 일정한 군사를 지니고 있는 족벌 - 군벌들이 각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왕' 은 그런 군벌들의 대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아서는 둠노니아라는 지역을 통치하는 '유서왕' 의 서자로서 정당한 계승권은 없지만 그에게 충성을 서약한 휘하의 전사로써 꾸준한 활약을 통해 충분한 인맥을 쌓아 어느정도 자신만의 세력을 결집한 군벌로 그려진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진정 리얼할 수 있는 이유는 너무나도 '그 시대적인' 삶을 그려냈다는 것이다. 비가 많이오고 습한 기후인 브리튼 섬에서 살던 사람들은 적어도 물이 부족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로마인들처럼 목욕과 사우나를 즐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브리튼인들은 식민지배하의 사람들이었고, 로마가 다스리던 런던등과 같은 대도시가 아니었다면 로마의 우월한 문명을 접하지 못했을터다. 오히려 로마가 갑작스레 멸망하고, 브리튼에 살던 로마인들 또한 갑작스럽게 몰락하면서 기술의 정수들 또한 다 가지고 떠났을터다. 런던의 거대한 석조 건축물들과 목욕탕, 각종 신전들은 자신의 용도대로 쓰였을리 만무하다. 당연히 고대인들의 위생관념이 로만처럼 뛰어났을리도 없다. 브리튼의 원주민들은 로마가 남겨준 유산들을 활용하기보다, 그들이 무너뜨린 자신의 전통과 종교를 일으켜 세웠어야 할테도, 얼마 가지 않아 색슨족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고, 북쪽에서는 호전적이고 독특한 철기문화를 가진 강력한 켈트족의 압박에 맞서야 했을터다. 우리가 전해듣던 원탁과 아발론, 그리고 캐멀롯 같은 성채 요새와 같은 낭만적인 이야기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버나드 콘웰은 보다 현실적으로 이것들에 다가선다. 아서는 로만도, 색슨도 아닌 순수 브리튼인으로 그려진다. 멀린이 보여주는 주술들은 우리 식으로 따지면 무속인들이 보여주는 것들에 지나지 않으며, 브리튼 사람들의 삶 또한 처절하게 그려진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최대의 강점은 리얼한 전투에 대한 묘사이다. 브리튼은 면적이 넓긴 하지만, 척박한 영토가 더 많은 섬나라이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위생상태와 브리튼 섬의 토착 농산물들, 가축들과 농업기술, 축산기술등 삶의 질들을 따져봤을때 인구가 많을 리 없다. 전투라고 하더라도 많아봤자 수백, 과장해도 수천에 불과할 것이다. 이는 삼국지연의의 적벽대전에서 그려진 조조의 10만대군이 실제로는 1~2만에 불과했으며 그것도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것과 맥이 닿아있다.

 중국 대륙이기에 그나마 1~2만 정도로 추정할 수 있지, 브리튼섬이라면 수백에서 기천 정도나 가능했을터다. 버나드 콘웰의 아서왕 연대기는 그러한 숫자적인 부분에서 우선 현실적이고, 그려지는 전투 장면 또한 대단히 '그시대적' 이다. 순전히 체력과 완력을 가진 전사들의 숙련도에 따라 승패가 갈라졌을 당시의 전투. 전술이나 전형에 대한 개념도 쐐기형 공격전개나 원형 방패진 정도에 불과했을 터. 작품 속에서 아서가 뛰어난 군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탁월한 기병운용이었다. 보병위주의 전투에서 기병의 숙련도는 대단히 중요하다. 한때 유럽대륙을 제패한 몽골의 군세는 대부분 기병이었고, 몽골인 대부분이 3살때부터 말타기를 즐겼던 기마민족으로서 매우 숙련된 기병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작품 안에서 아서의 승승장구를 납득할 수 있다.      

 

 이러한 전투장면은 물론, 당시 평민들과 귀족들의 삶의 모습들, 의복묘사등 모두 세세하고 현실적이며, 특히 민초들의 삶을 무척이나 잘 그려내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조정래, 김훈등과 같은 뛰어난 역사소설가들이 당대 민초들의 삶을 자주 그리고, 무척이나 리얼하게 그려낸다는 점을 떠올리면 버나드 콘웰이 역사소설가로서 얼마나 뛰어난 식견과 역량을 지녔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점 들 덕분에 신화속의 아서는 현실, 실제 역사의 한 전장으로 사뿐히 내려앉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  작품의 화자는 아서가 아니다. 바로 데르벨이다. 데르벨이 나이를 많이 먹은 뒤, 이그레인이라는 왕녀에게 자신이 모신 주군이었던 아서에 대해 술회하는 방식인데, 일종의 액자식 구성이라고 봐도 무방할 이 서술방식이 이야기에 더욱 더 리얼리티를 불어넣어 준다. 화자인 데르벨은 물론, 아서와 그의 아내 귀네비어까지 모두가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충분한 결점이 있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훨씬 더 매력적이다. 그리고 데르벨은 이그레인에게 아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음유시인(바드) 들이 노래로 만드는 아서왕에 대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꼬집어준다. 불과 한세대만에 아서에 대한 이야기가 그토록 변질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현재의 우리에게 "너희가 알고있는 아서왕 이야기는 다 가짜야!" 라고 직접 말하는 것 같다.

 

 이러한 여러가지 역사소설로서의 장점들도 좋지만, 이야기 자체가 굉장히 재미있다. 아서는 권력욕이 전혀 없지만 자신의 서약에 떠밀려 끊임없이 전쟁터로 향하고, 사랑하는 여인 귀네비어와 함께 살 수 있는 작은 집과 작은 농장, 그것만을 바란다. 아서는 둠노니아를 평화롭게 하고, 색슨족을 몰아내고 언젠가는 자신의 권력을 다 내려놓고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러기에 그는 너무 유능한 사람이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야심가들이 모여든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자신이 하고싶은 일과는 너무나 큰 괴리가 있었고, 아내인 귀네비어는 왕의 꿈을 꾸는 여인이었다. 자신이 왕이 될 수 없으므로 남편이나 자식을 왕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대단히 영특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랜슬럿이나 갤러헤드도 등장하지만, 성배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브리튼의 거대한 솥이 등장하긴 한다.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대립들 중 하나는 거대한 종교적 충돌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 역사와도 직결되는 부분이어서 꽤나 관심깊었다. 기독교가 전 세계 문화권에 뿌리내린 방식은 거의 대부분 비슷하다.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며 공격적인 종교이다.

"세상에 신은 한분뿐이고, 그건 바로 내가 믿는 신이다. 즉, 네가 믿는 신은 신의 아니다"

초기 기독교는 안그랬을지 모르지만, 세상에 전파된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었다. 한 지역에 들어가서, 그 지역에 있던 토착신을 끌어내어 없애고, 그 신을 믿는 사람들을 개종시키거나 죽여서 없앴다. 우리나라에서 전통 종교가 없어지게 된 계기 또한 비슷하다. 우리는 일본의 압제라는 역사적 사건이 하나 더 있긴 했지만, 기독교라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파괴력은 그정도이다.

 이 작품의 두번째 권인 [에너미 오브 갓] 에서 그 과정이 보다 밀도있고 현실감있게 그려진다. 고대 브리튼 또한 다른 많은 문명의 신들처럼 다신교였다. 브리튼의 사람들은 내가 믿는 신과 네가 믿는 신을 인정했고, 네가 믿는 신이 나에게 줄 피해를 막기 위하여 다양한 종교적 관습들이 존재했다. 그것은 기독교의 율법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으로, 작품 내에서는 침을 뱉거나, 특정한 표식을 만들거나, 오줌을 누거나 하는 정도였다. 고대인들의 삶은 신과 하나가 되는 삶이었다. 신적인 존재들이 도처에 깔려 있었으며, 그들은 언제나 인간의 삶을 관장했다.

 [윈터킹] 에서 성공적으로 자신의 군벌의 입지를 다진 아서는 [에너미 오브 갓] 에서 종교적인 대립은 물론 귀네비어의 배신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접하게 되고, [엑스칼리버] 에서 자신을 배신했던 귀네비어를 이해하고 다시 받아들이며, 기독교와 색슨족들의 침입으로 초토화된 둠노니아를 바로잡은 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집 한 채와 앞뜰, 그리고 대장간이 있는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얻어낸다.  (물론 그렇게 끝나는 건 아니다.)

 

 버나드 콘웰의 아서 왕 연대기(원제는 The Warlord Chronicles로 '군벌 연대기' 쯤 될터우리가 알고있는 역사의 대부분은 사실상 허구이다. 그렇다고, 역사가 모두 거짓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100% 진실만을 담고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역사' 라는 것은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 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실록과 같은 기록으로서의 역사서 또한 100%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실제로 왕들이 과거의 기록들을 지우거나 덧씌우기도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역사들은 그런 동시대의 여러 기록들을 서로 비교해보고 대조해보며 90%이상 '팩트Fact' 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건들을 위주로 논리적, 인과적인 추정들을 덧붙여 당시의 여러 정황들을 각종 유물과 유적들을 기반하여 '추정'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록이 남아있는 시대를 우리는 '역사시대' 라고 한다. 그리고, 그 이전. 체계를 갖춘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를 '신화시대' 라고 한다.

 

 '아서 왕'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신화시대의 이야기이다. 실제 영연방의 역사에서도 아서왕에 대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다뤄지지는 않는다. 대부분 신화시대의 이야기들은 [신화] 로 규정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중국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서왕 이야기는 중국의 하나라 우임금 이야기와 비슷하고, 우리에게는 치우천왕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아서왕 이야기는 후대까지 민담처럼 널리 알려지게 되고, 아서, 멀린, 란슬롯 같은 인물들 또한 입에서 입으로 넘겨지는 과정에서 점점 구체화가 되었고, 우리에게 흔히 알려져있는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와 같은 '소설' 이라고 보면 된다.

 

 [윈터킹]-[에너미 오브 갓]-[엑스칼리버]로 이어지는 버나드 콘웰의 아서왕 연대기는 보다 리얼리티를 추구한 작품으로, 실제 그 시대의 브리튼에 아서왕이라는 인물이 정말로 존재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지 - 충실하게 재현해낸 작품이다. 먼저 고대 브리튼에는 원주민 브리튼족이 있었다. 켈트족이 브리타니아를 침공하여 지배했고, 그 뒤에는 로마가 브리타니아를 지배한다. 로마가 멸망한 뒤에 게르만의 한 일파인 앵글족, 색슨족, 유트족이 정착하고, 후에 노르만족이 앵글로 색슨이 지배하고 있던 지역을 지배하기도 한다. 많은 민족들이 뒤섞여있고, 그 민족성 또한 뚜렷해서, 캘트족이 주를 이루는 웨일즈, 스코틀랜드와 앵글로 색슨이 주를 이루는 잉글랜드는 문화와 성격이 상당히 다르다.

 이 작품은 기원전 4~5세기경, 브리타니아를 지배하던 로마가 멸망한 뒤 앵글, 색슨, 유트족이 브리튼섬에 유입되기 시작한 무렵, 현재 잉글랜드의 남부지방을 무대로 하고 있다. 버나드 콘웰은 당시 사회는 국가의 개념보다는 족벌의 개념이 컸다. 즉, 일정한 군사를 지니고 있는 족벌 - 군벌들이 각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왕' 은 그런 군벌들의 대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아서는 둠노니아라는 지역을 통치하는 '유서왕' 의 서자로서 정당한 계승권은 없지만 그에게 충성을 서약한 휘하의 전사로써 꾸준한 활약을 통해 충분한 인맥을 쌓아 어느정도 자신만의 세력을 결집한 군벌로 그려진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진정 리얼할 수 있는 이유는 너무나도 '그 시대적인' 삶을 그려냈다는 것이다. 비가 많이오고 습한 기후인 브리튼 섬에서 살던 사람들은 적어도 물이 부족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로마인들처럼 목욕과 사우나를 즐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브리튼인들은 식민지배하의 사람들이었고, 로마가 다스리던 런던등과 같은 대도시가 아니었다면 로마의 우월한 문명을 접하지 못했을터다. 오히려 로마가 갑작스레 멸망하고, 브리튼에 살던 로마인들 또한 갑작스럽게 몰락하면서 기술의 정수들 또한 다 가지고 떠났을터다. 런던의 거대한 석조 건축물들과 목욕탕, 각종 신전들은 자신의 용도대로 쓰였을리 만무하다. 당연히 고대인들의 위생관념이 로만처럼 뛰어났을리도 없다. 브리튼의 원주민들은 로마가 남겨준 유산들을 활용하기보다, 그들이 무너뜨린 자신의 전통과 종교를 일으켜 세웠어야 할테도, 얼마 가지 않아 색슨족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고, 북쪽에서는 호전적이고 독특한 철기문화를 가진 강력한 켈트족의 압박에 맞서야 했을터다. 우리가 전해듣던 원탁과 아발론, 그리고 캐멀롯 같은 성채 요새와 같은 낭만적인 이야기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버나드 콘웰은 보다 현실적으로 이것들에 다가선다. 아서는 로만도, 색슨도 아닌 순수 브리튼인으로 그려진다. 멀린이 보여주는 주술들은 우리 식으로 따지면 무속인들이 보여주는 것들에 지나지 않으며, 브리튼 사람들의 삶 또한 처절하게 그려진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최대의 강점은 리얼한 전투에 대한 묘사이다. 브리튼은 면적이 넓긴 하지만, 척박한 영토가 더 많은 섬나라이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위생상태와 브리튼 섬의 토착 농산물들, 가축들과 농업기술, 축산기술등 삶의 질들을 따져봤을때 인구가 많을 리 없다. 전투라고 하더라도 많아봤자 수백, 과장해도 수천에 불과할 것이다. 이는 삼국지연의의 적벽대전에서 그려진 조조의 10만대군이 실제로는 1~2만에 불과했으며 그것도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것과 맥이 닿아있다.

 중국 대륙이기에 그나마 1~2만 정도로 추정할 수 있지, 브리튼섬이라면 수백에서 기천 정도나 가능했을터다. 버나드 콘웰의 아서왕 연대기는 그러한 숫자적인 부분에서 우선 현실적이고, 그려지는 전투 장면 또한 대단히 '그시대적' 이다. 순전히 체력과 완력을 가진 전사들의 숙련도에 따라 승패가 갈라졌을 당시의 전투. 전술이나 전형에 대한 개념도 쐐기형 공격전개나 원형 방패진 정도에 불과했을 터. 작품 속에서 아서가 뛰어난 군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탁월한 기병운용이었다. 보병위주의 전투에서 기병의 숙련도는 대단히 중요하다. 한때 유럽대륙을 제패한 몽골의 군세는 대부분 기병이었고, 몽골인 대부분이 3살때부터 말타기를 즐겼던 기마민족으로서 매우 숙련된 기병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작품 안에서 아서의 승승장구를 납득할 수 있다.      

 

 이러한 전투장면은 물론, 당시 평민들과 귀족들의 삶의 모습들, 의복묘사등 모두 세세하고 현실적이며, 특히 민초들의 삶을 무척이나 잘 그려내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조정래, 김훈등과 같은 뛰어난 역사소설가들이 당대 민초들의 삶을 자주 그리고, 무척이나 리얼하게 그려낸다는 점을 떠올리면 버나드 콘웰이 역사소설가로서 얼마나 뛰어난 식견과 역량을 지녔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점 들 덕분에 신화속의 아서는 현실, 실제 역사의 한 전장으로 사뿐히 내려앉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  작품의 화자는 아서가 아니다. 바로 데르벨이다. 데르벨이 나이를 많이 먹은 뒤, 이그레인이라는 왕녀에게 자신이 모신 주군이었던 아서에 대해 술회하는 방식인데, 일종의 액자식 구성이라고 봐도 무방할 이 서술방식이 이야기에 더욱 더 리얼리티를 불어넣어 준다. 화자인 데르벨은 물론, 아서와 그의 아내 귀네비어까지 모두가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충분한 결점이 있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훨씬 더 매력적이다. 그리고 데르벨은 이그레인에게 아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음유시인(바드) 들이 노래로 만드는 아서왕에 대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꼬집어준다. 불과 한세대만에 아서에 대한 이야기가 그토록 변질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현재의 우리에게 "너희가 알고있는 아서왕 이야기는 다 가짜야!" 라고 직접 말하는 것 같다.

 

 이러한 여러가지 역사소설로서의 장점들도 좋지만, 이야기 자체가 굉장히 재미있다. 아서는 권력욕이 전혀 없지만 자신의 서약에 떠밀려 끊임없이 전쟁터로 향하고, 사랑하는 여인 귀네비어와 함께 살 수 있는 작은 집과 작은 농장, 그것만을 바란다. 아서는 둠노니아를 평화롭게 하고, 색슨족을 몰아내고 언젠가는 자신의 권력을 다 내려놓고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러기에 그는 너무 유능한 사람이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야심가들이 모여든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자신이 하고싶은 일과는 너무나 큰 괴리가 있었고, 아내인 귀네비어는 왕의 꿈을 꾸는 여인이었다. 자신이 왕이 될 수 없으므로 남편이나 자식을 왕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대단히 영특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랜슬럿이나 갤러헤드도 등장하지만, 성배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브리튼의 거대한 솥이 등장하긴 한다.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대립들 중 하나는 거대한 종교적 충돌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 역사와도 직결되는 부분이어서 꽤나 관심깊었다. 기독교가 전 세계 문화권에 뿌리내린 방식은 거의 대부분 비슷하다.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며 공격적인 종교이다.

"세상에 신은 한분뿐이고, 그건 바로 내가 믿는 신이다. 즉, 네가 믿는 신은 신의 아니다"

초기 기독교는 안그랬을지 모르지만, 세상에 전파된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었다. 한 지역에 들어가서, 그 지역에 있던 토착신을 끌어내어 없애고, 그 신을 믿는 사람들을 개종시키거나 죽여서 없앴다. 우리나라에서 전통 종교가 없어지게 된 계기 또한 비슷하다. 우리는 일본의 압제라는 역사적 사건이 하나 더 있긴 했지만, 기독교라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파괴력은 그정도이다.

 이 작품의 두번째 권인 [에너미 오브 갓] 에서 그 과정이 보다 밀도있고 현실감있게 그려진다. 고대 브리튼 또한 다른 많은 문명의 신들처럼 다신교였다. 브리튼의 사람들은 내가 믿는 신과 네가 믿는 신을 인정했고, 네가 믿는 신이 나에게 줄 피해를 막기 위하여 다양한 종교적 관습들이 존재했다. 그것은 기독교의 율법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으로, 작품 내에서는 침을 뱉거나, 특정한 표식을 만들거나, 오줌을 누거나 하는 정도였다. 고대인들의 삶은 신과 하나가 되는 삶이었다. 신적인 존재들이 도처에 깔려 있었으며, 그들은 언제나 인간의 삶을 관장했다.

 [윈터킹] 에서 성공적으로 자신의 군벌의 입지를 다진 아서는 [에너미 오브 갓] 에서 종교적인 대립은 물론 귀네비어의 배신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접하게 되고, [엑스칼리버] 에서 자신을 배신했던 귀네비어를 이해하고 다시 받아들이며, 기독교와 색슨족들의 침입으로 초토화된 둠노니아를 바로잡은 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집 한 채와 앞뜰, 그리고 대장간이 있는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얻어낸다.  (물론 그렇게 끝나는 건 아니다.)

 

 버나드 콘웰의 아서 왕 연대기(원제는 The Warlord Chronicles로 '군벌 연대기' 쯤 될터다)를 보며 지난해 완간된 이우혁 작가의 [치우천왕기] 가 떠올랐다. 서두에도 언급했지만 아서왕에 버금가는 동양의 전사는 바로 치우천왕이다. 이우혁의 '치우천왕기' 역시 뛰어난 작품이지만 애초에 '판타지' 라는 옷을 입고 나왔기에 상대적으로 현실감이 떨어졌다. 만일 치우천왕기가  바로 이 아서왕 연대기처럼 보다 리얼리티를 강조했던 작품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물론 치우천왕기는 애초에 판타지의 세계관 - 왜란 종결자와 퇴마록을 아우르는 거대한 '이우혁 유니버스' 의 안에서 기획된 작품이지만, 이우혁 작가의 뛰어난 필력을 생각해보면 정통 역사소설로 접근해도 괜찮았을 거라는 개인적인 의견이다. 무엇보다 아서왕 연대기가 가지고 있는 '주술' 이라는 것이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는 것을 보며 더더욱 그랬다.

 언젠가는 우리의 치우천왕기도 아서왕 연대기처럼 수준높고 뛰어난 작품이 되어 등장할 날이 있으리라 본다.

그만큼, 이 작품 [아서 왕 연대기] - [윈터킹],[에너미 오브 갓],[엑스칼리버] 는 탐나도록 멋진 작품이다.  

다)를 보며 지난해 완간된 이우혁 작가의 [치우천왕기] 가 떠올랐다. 서두에도 언급했지만 아서왕에 버금가는 동양의 전사는 바로 치우천왕이다. 이우혁의 '치우천왕기' 역시 뛰어난 작품이지만 애초에 '판타지' 라는 옷을 입고 나왔기에 상대적으로 현실감이 떨어졌다. 만일 치우천왕기가  바로 이 아서왕 연대기처럼 보다 리얼리티를 강조했던 작품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물론 치우천왕기는 애초에 판타지의 세계관 - 왜란 종결자와 퇴마록을 아우르는 거대한 '이우혁 유니버스' 의 안에서 기획된 작품이지만, 이우혁 작가의 뛰어난 필력을 생각해보면 정통 역사소설로 접근해도 괜찮았을 거라는 개인적인 의견이다. 무엇보다 아서왕 연대기가 가지고 있는 '주술' 이라는 것이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는 것을 보며 더더욱 그랬다.

 언젠가는 우리의 치우천왕기도 아서왕 연대기처럼 수준높고 뛰어난 작품이 되어 등장할 날이 있으리라 본다.

그만큼, 이 작품 [아서 왕 연대기] - [윈터킹],[에너미 오브 갓],[엑스칼리버] 는 탐나도록 멋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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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억 속의 색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권장도서
미셸 파스투로 지음, 최정수 옮김 / 안그라픽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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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색들을 보며 살아간다. 우리 주위에 색이 없는 물건은 없다. 이 세상은 온통 색색이다. 색이란 빛이다. 광원에서 나온 빛이 어떠한 물체에 맞아 반사되는데, 그 빛은 각각 고유의 색이 있다. 빛의 3원색인, 빨강, 파랑, 노랑. 어떠한 물체에 반사되는 빛은 이 3원색을 무수하게 많은 방법으로 섞으며 우리 눈앞에 휘황찬란한 색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색 = 빛' 이라는 것은, 즉 색은 파동이라는 것이다. 빛이란 광입자들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파동으로 인한다. 그리고, 이 파동은 사람의 눈 속으로 들어간다. 눈이란 무엇이냐? 바로 외부로 돌출된 뇌이다.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아기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먼저 뇌가 만들어지고, 무수한 신경다발들이 뻗어 나가게 되는데, 눈은 뇌의 일부분이 쭈욱 하고 튀어나오면서 만들어진다. 때문에, 인간은 눈으로 보는 것에 굉장히 빠르게, 그리고 때로는 무조건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세뇌를 시키거나 최면을 거는 등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려 할 때 우선적으로 시각적인 자극을 먼저 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쉽게 알수 있다.  

 결국 '색' 또한 인간의 정신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친다. 특히 색깔들은 각각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특징이 있다. 노란색이나 빨간색을 보면 따뜻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파란색을 보면 시원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갈색을 보면 흥분이 가라앉고 침착해지는 반응을 보이게 되는 등 말이다. 이러한 '색깔'의 특징은 때론 계급을 나누는 척도의 역할을 하기도 했고, 사회적으로 금기시 되기도 했다.  

 저자는 이렇게 '색' 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통념에 대한 의문 제기에서부터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이 책은 '색' color 에 관한 미셀 파스투로의 에세이 모음집으로서 때론 깊이있게, 때론 가볍에 수많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적어 내려간다. 감색 재킷에서부터 흰색 속옷. 그리고 파란 블루진. 그리고 스탕달의 [적과 흑] 그리고 노란색으로 도색된 자전거와 19세기에 선호하던 색들과 20세기에 선호하는 색들의 변화, 뿐만 아니라 색을 지칭하는 수많은 단어들은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저서까지.  온세상에 펼쳐져있는 눈으로 보는 빛으로서의 색 뿐 아니라, 우리의 관념과 통념, 이미지를 아우르는 색깔들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
 

 문득, 나도 기억속에서 '색' 을 떠올려 봤다. 나는 색칠쟁이다. 내가 하는 일은 하얀 종이위에 검은 선으로 그려진 그림을 받아 그 하얀 공간들을 여러 색으로 채우는 일이다. 정말 엄청나게 많은 색들을 집어 넣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새빨간 레드. 붉은색 종류는 대부분 좋아하지만 특히 버밀리온에 가까운 붉은색을 좋아한다. 피색과 불색의 중간쯔음. 색의 이름인 '버밀리온' 이 상징하듯, 불이 활활 타오르는 느낌이 나는 뜨거운 색이다. 사실 붉은색은 남자들에게는 금기시 되는 색이나 다름없었다. 최불암 시리즈에 등장했던 빨간내복은 조롱의 대상이었으니까. 하지만, 2002 월드컵, 대한민국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고, 한국 대표팀 중의 대표인 박지성은 세계 최고의 명문 클럽으로 이적하며 붉은 유니폼을 입었다. 팀의 애칭조차 '레즈' 였던 팀의 일원으로 많은 남자들의 우상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금기시 되었던 색인 붉은색. 오죽하면 우린 국민학교때 '빨간색으로 이름쓰면 죽는다' 라는 말을 미신처럼 믿어왔지 않은가. 하지만, 중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색이었던 붉은색. 우리에게 금기의 상징이었던 붉은색은 2002년, 그렇게 완벽히 깨지게 되었고, 나 역시 아무렇지 않게 여러 붉은색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색은 그렇게 사회의 통념 속에 숨쉬고, 우리의 일상속에서 숨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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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U 1 사루 SARU 1
이가라시 다이스케 지음 / 애니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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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의 역사를 꼼꼼히 들여다 보면 때로는 한번도 마주칠 일이 없었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다른 문화권 사이에서도 놀랄만큼 흡사한 유사성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간단한 예로, 대홍수 같은 이야기. 대홍수에 대한 전설이나 설화, 민담은 전 세계 어떤 문화권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수백년동안 죽지 않고 살아있는 기이한 노인의 대한 설화도 그렇고, 난생 설화나 창조 설화들도 꼼꼼히 들어가보면 놀랄만큼 유사한 부분들이 많다. 이러한 유사성은 문화-인류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뿐 아니라 수많은 작가들에게도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소재가 아닐 수 없다. 탁월한 이야깃꾼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에 논리적이고 설득력있는 상상력을 보태 개연성을 부여하며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들을 뽑아내곤 한다.  대표적으로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같은 작품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과거 사건의 현대적인 재해석인 것이다. 이런 작품들에 활용되는 과거의 사건들은 뛰어난 소재의 역할을 해주지만, 논리적인 고리가 부족하면 바로 '허접한' 짜맞추기가 되어버린다. 특히 과거 사건과 현재 사건을 연결시키려면 그 인과관계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져야 가능하다. 인과관계 등 논리적인 개연성이 석탑처럼 아름답게 어우러지며, 차곡차곡 쌓여질때 비로소 그 이야기는 생명력을 얻는다. 즉, 완벽한 뻥이 되는 것이다. 다빈치 코드는 정말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완벽했기에 몇몇 기독교 단체에서는 이의를 제기하거나 판매금지 소송을 벌일 정도로 환상적인 석탑을 쌓아올렸다.  

SARU는 그런 '그럴듯한' '잘 만들어낸' 이야기의 대표들을 꼽으라면 TOP5에 들어갈 만한 작품이다. 이야기는 1926년 명나라 자금성에서 일어는 의문의 폭파사고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어 1908년, 우리도 잘 알고 있는 퉁구스카의 운석 충돌로 인한 거대한 폭발, 1982년 아르헨티나 앞바다, 포클랜드 제도에서 교전중이던 아르헨티나와 영국군 일부가 실종된 사건이 일종의 프롤로그의 역할을 맡고 있다. 

  본격적인 사건은 현대에서부터 시작된다.  

남미에서 죽은자들이 살아나고, 괴이한 힘을 가진 일행들이 등장하며, 파리에서는 한 소녀를 태운 차가 의문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 같은 시간대에 러시아에서는 빙하 아래 묻혀있던 거대한 원숭이의 시신을 발굴해내고, 파리에서 일어난 자동차 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소녀는 귀신들린 듯, 이상한 말과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소녀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찾아온 엑소시스트인 칸디드에게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는 소녀. 그녀는 자신이 신과 같은 능력을 지닌 존재로서, 가지고 있는 수많은 이름들을 알려준다. 그 중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이름은, 제천대성 손오공.  그리고 또 같은 시간, 다른 곳. 프랑스 앙굴렘에서는 부탄에서 온 승려 나왕 남걀과 일본에서 유학온 나나가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손오공을 품고 있는 소녀 한명을 중심으로 엑소시스트 칸디드와 부탄의 승려 남걀, 그리고 평범한 일본인 여성나나가 거대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그 사건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우리도 너무나 잘 알고있는 '1900, 90의 9년, 7의 달에 온다는 공포의 대왕' 과 관련된 사건으로 세계의 멸망과 관련된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 거대한 설정의 키가 되는 것은 바로 '원숭이 형태의 신' 이다.  

작품 속에서는 인도의 신 '하누만' 과 중국어권 전역에 퍼져있는 역시 신과 같은 존재 '제천대성 손오공' . 그리고 초기 이집트 신화에서는 달의 신 '토트' 역시 원숭이의 하나인 비비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인도와 중국, 그리고 이집트는 모두 고대 인류 문명의 초기 발상지이다. 그리고 신화의 탄생 또한 문명의 발상시기와 함께 하므로, 전혀 교류가 있을 수 없었던 세 문화권에서 '신격화된 원숭이' 가 동일하게 등장한 것이다. 작가는 바로 이 점에서 이야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존재 'SARU'를 위치시키고 인류 역사에 크게 기록될만한 불가사의한 사건들을 끼워 맞춰나간 것이다. 그러면서 그 밖의 문화권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특징들까지 버무리고 가장 잘 알려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키워드로 넣으면서 독자들을 자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역사 속으로 유혹한다.  

 사실 글로 풀어보면 완전 생뚱맞은 설정과 내용이다. 설정과 이야기구조를 꼼꼼하게 살펴 들어가보면, 사건간의 개연성이나 연계성을 논리적으로 짜 맞추었다기보다 '신외신' 과 '손오공' 즉 'SARU' 라는 존재를 위해 억지로 끼워놓았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그러한 많은 설정과 세계관을 풀어내는데 거의 대부분을 등장인물간의 대화를 통한다. 즉. 작품 전체에 에피소드가 별로 없다. 등장인물들은 여기 가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저기 가서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이야기 전체가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작품이 재미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 문단의 앞부분에 언급했듯 '글로 풀어서' '꼼꼼하게 살펴 들어가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런 맹점에도 불구하고 굉장한 흡입력으로 이야기에 흠뻑 녹아들게 만든다.  한마디로, 어정쩡한 뻥으로 상대방을 완벽하게 속여 넘긴다는 것이다. 여기서 당연히 뻥치는 사람은 작가고, 속아넘어가는 사람은 독자이다.  거의 책을 드는 순간부터 덮는 순간까지, 이렇게 복잡하고 까다로운 설정을 한 호흡으로 쫙 풀어내는 작가의 재능이 놀라울 따름이다. 허무맹랑한 설정으로 시작해서, 중간중간 등장하는 마법들이나 드러나는 숨겨진 설정들 또한 말도 안되기 짝이 없지만, 적어도 작품의 세계관 안에서는 완벽하게 '말이 된다.' 그리고 주로 등장하는 굵직한 캐릭터들 또한 과하거나 부족함 없이 적당히 노출되며 이야기를 균형있고 세련되게 이끌어 간다.   

오히려 이야기를 비교적 단순하게 풀어나간 덕택에 복잡하기 짝이없는 설정들이 보다 쉽게 독자들에게 와닿기도 한다. 큰 기교 없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풀려가는 이야기의 실마리들은  이가라시 다이스케가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터치와 그로테스크한 디자인의 크리쳐들과 어우러져 엄청난 시너지를 불러 일으킨다.
 

 '팩션Faction' 이라고 부를만한 작품 [SARU]는 대단히 수준높은 작품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르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니악하고, '만화' 라는 매체에 거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국내에서는 결코 만나보기 쉬운 작품이 아니다. 분명 많은 독자들에게 '만화' 에 대한 개념과 만화를 보는 '눈' 을 몇단계는 업그레이드 시켜 줄만한 작품임은 틀림없다.    
전지구적인 완벽한 뻥. 뇌를 릴렉스시키고 그의 완벽한 뻥에 빠져들어보자. 정말, 새로운 세상이 열릴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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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나라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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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라는 종족은 스스로를 자각하면서부터 끊임없이 '탈脫동물' 을 표방했다. 인간이 이룩한 수많은 업적과, 인간사회가 켜켜히 쌓아놓은 장구한 역사 기록들은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가 여타 수많은 다른 동물들과 다른 종족임을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 친 흔적이다. 우리 인간종족은 동물과의 차별성을 끊임없이 스스로 되뇌이고 되뇌인다. 그것은 단순히 개와 고양이를 비교하는 정도의, 예를 들어 외모, 습성, 내장기관, 뇌의 용적, 사회구성 방법등의 표면적인 비교를 떠나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와, 인간이 아는 모든 종족들을 아우르는 차이점을 비교하는 초거대 프로젝트이다. 이 거대한 지구와, 지구의 수십억년에 이르는 엄청난 역사 안에서 '인간은 우월, 나머지는 모두 쩌리' 라는 전제 하에 시도되온 것으로, 그것은 인간 역사와 맥을 함께 한다.  

 인간의 '우월성' 은 인간의 '존엄성' 으로 묘사된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동일한 자격을 가지고 태어난다. 모두 '하늘' 혹은 '신' 이 특별히 '인간' 종족에게만 내려준 불가침의 영역으로서, 이 점이 인간이라는 종족을 지구의 주인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인간사회의 모든 기본적인 이념과 개념들은 모두 이 '존엄성' 에 기인한다. 

 허나, 이 존엄성이란 육체의 고통 앞에서는 모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존엄성으로부터 파생되는 수많은 '인간적인' 개념들은 자기 몸뚱이의 어딘가를 휘둘러대는 타인 앞에서, 광대뼈를 으스러뜨리는 오동나무 앞에서, 내장을 후비는 쇠鐵의 앞에서 속절없이 무시된다. 심지어 고통 앞에서 인간은 직립보행을 버리고, 네발로 기기도 한다. 존엄성이 무시되는 인간은 더이상 인간일 수 없다. 존엄성인 인간과 동물을 구별짓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차별성이기 때문이다. 차별성이 사라진 인간은, 인간 종족 전체가 쌓아올린 '동물과의 차별성' 전체를 일거에 상실하게 된다.  

 그렇다. '폭력' 이란 그렇듯 단순하게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파괴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치명적인 무기이다. 때문에, 인간을 동물처럼 부릴때는 폭력을 사용하는 편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타인을 조종하기 위해서는 존엄성을 무시해버리면 된다. 자존감, 자립심을 포함한 '존엄성' 에 기반한 모든 것을 일거에 무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인 폭력. 즉, 타인에게 폭력을 행한다는 것은 [그 타인을 동물처럼 부리고 싶다] 는 의중이 깔려있는 것이다. 

 1980년대, 대한민국은 인간답게 살고 싶은 인간들과, 인간을 동물처럼 부리고 싶어하던 인간들이 가장 뚜렷하게 양분되었던 시기였다. 그 시기는 단순했다. 그들은 몽둥이와 총을 들고 아무에게나 휘둘러댔으니까. 한번에 보였다. 그리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은 조금 교묘해졌다.  

그들은 돈과 언론을 이용해 자신들이 휘둘러대는 몽둥이와 총, 칼을 숨긴다.  

쌍용사태의 가해자들은 돈을 주고 용역을 고용해 노조원들을 폭행하고, 돈을 이용해 정치인들을 매수하고, 정치인들은 권력을 통해 법조인들을 조종해 가해자를 피해자로 바꾸고, 피해자를 가해자로 바꾸는 짓을 서슴치 않았다. 그와 결탁한 수많은 언론들은 끊임없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혼동케 하는 기사들을 써보내고, 진짜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무시하는데 여념이 없다. 

 주가를 조작해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 피땀흘려 모은 돈을 착복하고, 자살하게 만든다. 자살은 스스로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행위 자체를 포기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이 세상에서, 이 사회에서 도저히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을때. 존엄성을 잃고 동물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 뿐일때 택하는 마지막 선택지이다. 
 부산에서는 아직도 한 여인이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 우리는 보고 있지 않은가? 그 여인과, 그 여인을 지지하는 사람들 위에 쏟아지는 수많은 유형, 무형의 폭력들.  

 한창훈 작가는 책의 끄트머리에 한 꼭지를 빌려 '미움의 힘' 에 대해 언급했다. 

인간에게는 부정의 힘과 긍정의 힘이 공존하고 있다. 한 때 우리 사회에는 긍정의 힘에 대한 열풍이 몰아친 적이 있다. 사회가 그런대로 평안할 때는 긍정의 힘이 각광받는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하의 우리 사회에서 유행한 책들은 긍정의 힘이나 화내지 않는 법에 대한 책들이었다. 그것은 그 사회가 나름대로 긍정적인 기운이 가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부정의 힘이 맞다고 본다. 쉽게 용서하지 말 것, 눈에 보이는대로 믿지 말 것, 귀에 들리는 것만 듣지 말 것. 그 안에. 그 이면에. 수많은 음모들을 기억할 것. 

미워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쉽게 용서하지 말 것. 

 하지만,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를 좋아하는 것 만큼, 미워하는 것도 어렵다. 

그리고, 좋아하는 대상은 눈에 딱 들어오지만, 미워하는 것은 그 대상을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이 작품은 우리가 무엇을 미워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지는 않다. 어린 소년을 구타한 다른 소년들? 경찰서와 군청에 난입한 시위대들?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짓밟은 군인과 경찰들? 군인들과 경찰들에게 명령을 내린 통치자? 도시의 실상을 알리려고 했던 기자들의 입을 폭력으로 막은 윗선들? 죽어가는 친구들을 버리고 도망간 이웃들? 

어쨌든, '폭력' 그 자체는 우리가 반드시 미워해야 할 대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폭력이 만연하게 한 본질적인 사회의 구조. 어쩌면 우리는 대한민국 자체를 미워해야 할지도 모른다.우리는 너무나 쉽게 용서하고, 너무 쉽게 잊는다. 너무 쉽게 용서하고, 너무 쉽게 잊는 것도 미워해야 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사랑해야 할 것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우리가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하는 이유는 미워해야 할 것을 정확히 찾이 위함이고, 미워해야할 것을 찾는 이유는 사랑해야할 것을 찾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행위들은 단연, 현재와 미래를 살아내기 위함이다. 

미워하는 데에 함몰되면 과거에 파묻힌다. 누군가를 , 혹은 무언가를 미워하려면 이미 나에게 어떤 행위를 저지른 뒤여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오지도 않은 것을 미리부터 미워할 수는 없다.  결국 미움의 힘이란 과거에서 온다. 그렇기에, 미움에 힘에 함몰되면, 과거에 함몰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와 미래에, 사랑해야 할 것들을 놓쳐서는 안된다. 예를들어, 우리가 만들어낼 후손들. 자식들. 그들이 만들어갈 세상들.  미워하는 힘은 결국 사랑하기 위함일 터.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확실히 미워하고, 확실히 응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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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1초들 - 곽재구 산문집
곽재구 지음 / 톨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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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참 이상하다. 언제나 안정을 추구하지만, 안정 속에서는 금새 권태를 느낀다. 이런 아이러니한 감정들 덕에 한 사람의 일생은 각자 모두가 다이내믹하고, 파란만장하게 된다. 밖에서 보기에는 아주 평탄하고 심심해 보일 정도로 변화가 없어 보이는 사람도 내면을 들여다 보면 끊임없는 싸움에 만신창이가 되어있을 확률이 높다. 그 싸움의 주체들은 당연히 '안정' 과 '변혁' 이다. 
 

 시인이란 어쩌면, 그 치열한 내면의 싸움을 '초' 단위로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끊임없이. 눈을 깜박이는 순간에도 치열하게 안정과 변혁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 필연적으로 내면의 촉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을터다. 안정을 포기하고 변혁을 선택할 과감성. 다음의 변혁을 위해 현재의 안정을 택하는 현실성. 이 두 가지를 본능적으로 잡아내는 능력. 게다가 그 순간 순간을 즐길 줄 아는 사람. 안정을 택했을 때는 변혁의 시점을 기다리며 안정을 만끽하고, 변혁을 택했을 때는 안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 변혁 자체를 만끽하는 사람. 안정의 순간에도 오감의 촉이 꼿꼿히 세워져 있고, 변혁의 순간에는 오히려 오감의 촉이 부드럽게 누워 있는 그런 사람.
 

 [우리가 사랑한 1초들] 의 문장속에서는 변혁의 순간 속에서 만끽하는 여유가 한없이 느껴졌다. 문장문장마다 '만끽'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시간이란 강제적으로 소비하게 되는 재화이다. 유량이 정해져 있는 탱크에 붙어있는 절대로 잠글 수 없는 수도꼭지와 같다. 내가 아무리 재빠르고, 물을 받을 수 있는 양동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사용처와 사용법은 제한적이다. 다른 탱크에 옮겨 담을 수도 없다.  

유량이 정해져 있는 탱크와, 그 앞에 작은 양동이를 들고 있는 나. 그리고, 대부분의 물은 바닥에 흘리고 만다.

양동이 한 가득 물을 담아도 수도꼭지에서 물을 여전히 콸콸 흘러나온다. 아직 양동이 수십개, 혹은 수백개를 채우고도 남을 물이 탱크안에 남아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양동이는 딱 하나뿐이고, 그건 이미 꽉 차서 넘치고 있다.  결국 인생이란, 양동이 한개를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얼마전 타계한 스티브 잡스는 '단순' 과 '집중' 을 강조했다. 잡스의 방식에 따르면 이렇다. 양동이가 다 차기 전에 재빨리 물을 써버린다.짧은 시간동안 빨리 써야하기 때문에, 한 두 가지 일을 단순하게 선택해서, 집중해서 쏟아붓는 것이다. 물이 차는 동안 밭을 일구고, 물이 차면 빨리 그 밭에 부어버리고. 다시 물을 채우는 동안 밭을 일구고. 다시 그 밭에 빨리 붓고. 그렇게.  단순하게 선택하여 강렬하게 집중하는 것이다. 밭에서 곡물이 자라면, 그 사이에 빨리 다른 밭을 또 일군다.
 

 반면, 이 책은 완벽히 다른 접근이다. 물이 넘치건, 흐르건, 쏟건, 버리건, 쓰건.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다. 양동이. 그리고 ,물.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물이 양동이에 받아지며 내는 찰랑거림, 빛이 반사되는 반짝거림. 졸졸졸 하는 물소리. 넘쳐 흐르며 폭포처럼 떨어지는 물들. 흐르는 물들이 발가락 사이를 흘러가는 간지러움.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굳이 물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물과 양동이. 그 자체로 충분히 즐기는 것이다. 밭을 열심히 일굴 필요도, 빨리 다른 밭을 일굴 필요도 없다. 
 

 현대인들은 양동이에 차는 물에 쫓기며 살아가고 있다. 양동이에 물이 반쯤 차면, 뭐에 쫓기듯 미친듯이 곡괭이질을 한다. 내가 왜 밭을 일구는지도 잊어버린다. 밭에서 나는 곡물들을 맛보지도 못한다. 곡물을 수확하지도 못한다. 수확하는 사이에 양동이는 가득 차 넘쳐 흐를것이  뻔하고, 추수가 끝난 밭에는 물을 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가득 차있는 물들은 버리거나, 넘치는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시간에 쫓기며 산다.
 

 사람의 삶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1분 1초를 아쉬워 해 봤자, 밥먹고, 응가하고, 쉬하고, 잠자고, 잡담하고, 멍때리는 시간이 우리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한다. 깃털처럼 가볍고, 먼지처럼 하찮은 것들이 모이고 모여 일생이라는 커다랗고 중요한 탑을 쌓아낸다.

 너무나 하찮고 가벼운 1초. 그 1초들이 모여 1분을 만들고, 1시간을 만들고, 100년을 만든다.  

주변을 돌아보고,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남을 생각하고, 나의 자리를 생각하고. 내가 세상과 사람들에게 받은 것들을 돌려줄 방법을 생각하며 보내는 1초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누군가에게 강탈이라도 해서 소유해야 겠다고 생각하며 보내는 1시간보다 가치있을 것이다. 
 

 군대에서 첫 휴가나왔을때를 기억한다. 

2박 3일이라는 시간은 엄청나게 짧다. 매 시간별로 계획을 세워, 시간에 헐레벌떡 쫓긴다. 여자친구를 만나고, 쉬지않고 손을 만지작대고, 1초라도 붙어있으려고 하고, 영화를 한편이라도 더 보려고, 심야 영화를 보고, 잠을 안자고, 피자를 미친듯이 쑤셔넣고, 술을 쉴새없이 들이붓는다. 하지만, 말년휴가 쯤은 완전히 다르다. 일주일정도 받은 말년휴가는 잠자고, 빈둥대고, 컴퓨터 게임하고, 채팅하고, 여자친구 만나기도 귀찮아진다.  하지만, 난 그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첫 휴가 나오던 고속버스안의 기름냄새, 덜컹거리는 흔들거림 속에서 두근대는 심장, 수양록 뒤편에 빼곡히 적어내던 '휴가나가서 꼭 해야할 것들' 목록, 휴가나오기 전날 밤, 밤샘 근무를 하며 떠올렸던 계획들, 군복을 입고 처음으로 들어가보는 집. 현관에서 군화끈을 풀어내던 순간, 4개월만에 맡아보던 내 방, 내 이불, 내 옷에서 나던 먼지냄새와 새제냄새 속의 내 냄새. 엄마냄새. 아빠냄새.  


군대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년 6개월의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나이키 미쓸의 크기, 그 거대함, 산속 깊숙히 점점히 박혀있던 미쓸 조립공장들의 모습들, 우거진 계곡들과, 아침마다 눈 아래 펼쳐지던 거대한 운해. 콧속으로 파고들던 안개와도 같던 구름의 맛. 엄청났던 추위, 바람에 휩쓸린 눈 알갱이들이 볼속을 파고들던 고통. 쏟아질듯 가득한 별빛 아래 이마를 파고들던 철모의 무게와 어깨를 파고들던 M-16소총의 무게. 단단한 군화 바닥에 밟히던 이름모를 풀들과, 그 풀들의 냄새. 한없이 쌓이던 눈과, 그 눈속에 강아지처럼 뒹굴었을때의 느낌. 그리고 함께 생활했던 전우들과 나눴던 증오, 분노, 미움, 고마움, 우정, 따뜻함, 날카로움, 욕설들, 칭찬들. 
 지금 이 순간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다. 

사람의 삶은 단순하게 되풀이 되는 것 같지만, 분 단위, 초 단위로 쪼개보면 절대로 동일하게 반복되지 않는다. 우리는 쉼없이 변화하는 순간들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곽재구 시인은 바로 그러한,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따뜻하고 포근한 바람처럼 적어내려갔다.

작품은 전체가 아주 정중한 문체로 쓰여져 있다. 처음에 몇 페이지 읽었을때는, 아니, 왜 이렇게 정중한 문체야?? 좀 불편하다. 라고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작품을 읽어갈수록, 이런 정중한 태도가 곽재구 작가가 세상과 삶에 갖고 있는 자세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타고르의 시와 인도의 풍경들은 소중함을 증폭시켜주는 장치이다. 곽재구 작가는 자신의 삶은 물론, 자신을 인도로 이끈 타고르라는 시인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그러한 존경하는 시인의 발자취를 더듬는 그 순간들이 한없이 감사했던 것이다.
 

물론 자신을 감싸고 있는 수많은 타인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있는 나. 독자들. 이런 모든 순간들에 정중한 감사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만끽하자. 

사랑이라면 더 좋겠지만, 분노나 증오, 미움이어도 좋다.  지금 이 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감사히 만끽하자. 삶의 영광을.  눈 감는 그 순간까지. 

"삶의 영광이여. 이 모든 게 내가 받은 축복의 선물입니다.

지상에서 내 지친 여행이 끝나면 나는 한 차례 이 세상을 뒤돌아보고

내 생명의 신께 한 차례 손을 흔듭니다

안녕, 우리 또 봐요."

'안녕, 우리 또 봐요'(Farewell) 중에서...

안녕, 우리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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