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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U 1 ㅣ 사루 SARU 1
이가라시 다이스케 지음 / 애니북스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인류의 역사를 꼼꼼히 들여다 보면 때로는 한번도 마주칠 일이 없었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다른 문화권 사이에서도 놀랄만큼 흡사한 유사성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간단한 예로, 대홍수 같은 이야기. 대홍수에 대한 전설이나 설화, 민담은 전 세계 어떤 문화권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수백년동안 죽지 않고 살아있는 기이한 노인의 대한 설화도 그렇고, 난생 설화나 창조 설화들도 꼼꼼히 들어가보면 놀랄만큼 유사한 부분들이 많다. 이러한 유사성은 문화-인류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뿐 아니라 수많은 작가들에게도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소재가 아닐 수 없다. 탁월한 이야깃꾼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에 논리적이고 설득력있는 상상력을 보태 개연성을 부여하며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들을 뽑아내곤 한다. 대표적으로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같은 작품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과거 사건의 현대적인 재해석인 것이다. 이런 작품들에 활용되는 과거의 사건들은 뛰어난 소재의 역할을 해주지만, 논리적인 고리가 부족하면 바로 '허접한' 짜맞추기가 되어버린다. 특히 과거 사건과 현재 사건을 연결시키려면 그 인과관계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져야 가능하다. 인과관계 등 논리적인 개연성이 석탑처럼 아름답게 어우러지며, 차곡차곡 쌓여질때 비로소 그 이야기는 생명력을 얻는다. 즉, 완벽한 뻥이 되는 것이다. 다빈치 코드는 정말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완벽했기에 몇몇 기독교 단체에서는 이의를 제기하거나 판매금지 소송을 벌일 정도로 환상적인 석탑을 쌓아올렸다.
SARU는 그런 '그럴듯한' '잘 만들어낸' 이야기의 대표들을 꼽으라면 TOP5에 들어갈 만한 작품이다. 이야기는 1926년 명나라 자금성에서 일어는 의문의 폭파사고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어 1908년, 우리도 잘 알고 있는 퉁구스카의 운석 충돌로 인한 거대한 폭발, 1982년 아르헨티나 앞바다, 포클랜드 제도에서 교전중이던 아르헨티나와 영국군 일부가 실종된 사건이 일종의 프롤로그의 역할을 맡고 있다.
본격적인 사건은 현대에서부터 시작된다.
남미에서 죽은자들이 살아나고, 괴이한 힘을 가진 일행들이 등장하며, 파리에서는 한 소녀를 태운 차가 의문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 같은 시간대에 러시아에서는 빙하 아래 묻혀있던 거대한 원숭이의 시신을 발굴해내고, 파리에서 일어난 자동차 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소녀는 귀신들린 듯, 이상한 말과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소녀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찾아온 엑소시스트인 칸디드에게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는 소녀. 그녀는 자신이 신과 같은 능력을 지닌 존재로서, 가지고 있는 수많은 이름들을 알려준다. 그 중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이름은, 제천대성 손오공. 그리고 또 같은 시간, 다른 곳. 프랑스 앙굴렘에서는 부탄에서 온 승려 나왕 남걀과 일본에서 유학온 나나가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손오공을 품고 있는 소녀 한명을 중심으로 엑소시스트 칸디드와 부탄의 승려 남걀, 그리고 평범한 일본인 여성나나가 거대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그 사건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우리도 너무나 잘 알고있는 '1900, 90의 9년, 7의 달에 온다는 공포의 대왕' 과 관련된 사건으로 세계의 멸망과 관련된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 거대한 설정의 키가 되는 것은 바로 '원숭이 형태의 신' 이다.
작품 속에서는 인도의 신 '하누만' 과 중국어권 전역에 퍼져있는 역시 신과 같은 존재 '제천대성 손오공' . 그리고 초기 이집트 신화에서는 달의 신 '토트' 역시 원숭이의 하나인 비비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인도와 중국, 그리고 이집트는 모두 고대 인류 문명의 초기 발상지이다. 그리고 신화의 탄생 또한 문명의 발상시기와 함께 하므로, 전혀 교류가 있을 수 없었던 세 문화권에서 '신격화된 원숭이' 가 동일하게 등장한 것이다. 작가는 바로 이 점에서 이야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존재 'SARU'를 위치시키고 인류 역사에 크게 기록될만한 불가사의한 사건들을 끼워 맞춰나간 것이다. 그러면서 그 밖의 문화권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특징들까지 버무리고 가장 잘 알려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키워드로 넣으면서 독자들을 자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역사 속으로 유혹한다.
사실 글로 풀어보면 완전 생뚱맞은 설정과 내용이다. 설정과 이야기구조를 꼼꼼하게 살펴 들어가보면, 사건간의 개연성이나 연계성을 논리적으로 짜 맞추었다기보다 '신외신' 과 '손오공' 즉 'SARU' 라는 존재를 위해 억지로 끼워놓았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그러한 많은 설정과 세계관을 풀어내는데 거의 대부분을 등장인물간의 대화를 통한다. 즉. 작품 전체에 에피소드가 별로 없다. 등장인물들은 여기 가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저기 가서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이야기 전체가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작품이 재미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 문단의 앞부분에 언급했듯 '글로 풀어서' '꼼꼼하게 살펴 들어가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런 맹점에도 불구하고 굉장한 흡입력으로 이야기에 흠뻑 녹아들게 만든다. 한마디로, 어정쩡한 뻥으로 상대방을 완벽하게 속여 넘긴다는 것이다. 여기서 당연히 뻥치는 사람은 작가고, 속아넘어가는 사람은 독자이다. 거의 책을 드는 순간부터 덮는 순간까지, 이렇게 복잡하고 까다로운 설정을 한 호흡으로 쫙 풀어내는 작가의 재능이 놀라울 따름이다. 허무맹랑한 설정으로 시작해서, 중간중간 등장하는 마법들이나 드러나는 숨겨진 설정들 또한 말도 안되기 짝이 없지만, 적어도 작품의 세계관 안에서는 완벽하게 '말이 된다.' 그리고 주로 등장하는 굵직한 캐릭터들 또한 과하거나 부족함 없이 적당히 노출되며 이야기를 균형있고 세련되게 이끌어 간다.
오히려 이야기를 비교적 단순하게 풀어나간 덕택에 복잡하기 짝이없는 설정들이 보다 쉽게 독자들에게 와닿기도 한다. 큰 기교 없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풀려가는 이야기의 실마리들은 이가라시 다이스케가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터치와 그로테스크한 디자인의 크리쳐들과 어우러져 엄청난 시너지를 불러 일으킨다.
'팩션Faction' 이라고 부를만한 작품 [SARU]는 대단히 수준높은 작품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르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니악하고, '만화' 라는 매체에 거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국내에서는 결코 만나보기 쉬운 작품이 아니다. 분명 많은 독자들에게 '만화' 에 대한 개념과 만화를 보는 '눈' 을 몇단계는 업그레이드 시켜 줄만한 작품임은 틀림없다.
전지구적인 완벽한 뻥. 뇌를 릴렉스시키고 그의 완벽한 뻥에 빠져들어보자. 정말, 새로운 세상이 열릴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