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쓸모 -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들
박산호 지음 / ㅁ(미음)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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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쓸모는 나도 잘 안다고 생각한다. 쓸모를 논할 일도 아니고, 없어도 상관 없다는 걸 안다. 한 시절을 나게 해주었던 가슴 속 소설 한 권이라면, 그 이상 말이 필요할까. 
이걸 제목으로 한 데는 이유가 있을 테다. 어디서든 효율, 동선, 능률, 가성비와 최적화를 찾는 세태라서 그럴지 작가가 이 독후 에세이에서 얘기하는 소설의 쓸모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저자는 스릴러를 전문으로 번역하시는 분인데 나는 저자가 번역한 책 중 스릴러는 아닌, <자기만의 산책>을 재밌게 읽고 나서 이 번역가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아직 목록에만 올려 둔 <토니와 수잔>도 좋아했던 영화의 원작이 된 책인 줄 여기서 알았네.) 코르셋과 치마 입고 하루 종일 걷고 산을 오르던 빅토리아 시대 여자들의 발자취를 좇아가는 그 책을 읽는 게 그렇게 짜릿했고 그 덕에 번역가의 다른 책들도 따라 다녔다. 지금은 연재를 쉬고 계신 (듯한) 모 포탈의 연재 콘텐츠도 재밌게 읽었고, 여러가지 이유로 이 책 나왔을 때 반갑게 집어들었다. 

즐겁게 책 읽어 본지가 언제인지. 
물론 요즘의 나도 좋은 책들, 가슴과 머리를 열어주는 책을 보려고 노력한다. 그치만 책을 처음 펼치는 마음이 일견 비장한데다 읽다 보면 자주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이 생긴다. 활자와 멀어지는 일상에 대한 보복심리로 겨우 몸을 일으켜 책을 어기적어기적 고르는 상황이라 즐거운 읽기와는 다소 멀다. 그런 내가 예전엔 책을 어떤 마음으로 봤더라..하는 게 이 책을 읽을수록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소개하는 책들 중 읽지 못한 소설에까지 공명하게 된다. 소개하는 책이 재밌을 거 같아서, 좋은 리뷰라서, 혹은 소설의 쓸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설 읽는 독자의 재미 자체에 이입하게 되기에. 

읽는 동안 시간이 얼마 흐른지도 모르다가 고개를 들고서야 목이 뻐근하다는 걸 안다. 읽으면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 구경하고 조금씩 그를 알아가며 어떨 때는 아주 속을 모를 사람 누구를 닮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들기도 하고. 실제로는 마주칠 일 없는 사람일지라도 소설에서 만나면 내키지 않아도 이이를 따라간다. 그 시절엔 이렇게 살아도 됐다고? 무해하고 결백한(ㅋㅋ) 편견과 사생활 침해를 통해 다른 이를 이해할 구석, 나 역시 이해받을 구석을 하나씩 마련해 갔던 읽기. 읽는 이 각자가 생각하는 소설의 쓸모를 겹쳐보게 하는 에세이다. 

AI가 대체할 직업으로 가장 먼저 꼽히는 게 번역가라지만, 글쎄.. AI가 독자마저 대체할 게 아니라면야.(다 해처먹??!!) 어떤 번역가들은 대체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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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7-14 10: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수님의 번역가(편애라도) 찐사랑....소설 찐사랑... 나는 소설 사랑한다면서 바깥으로 나도는 나쁜 독자... 읽어도 꼭 도망칠 소설만 읽고 내상으로 피토하는 독자... 나두 이렇게 맑고 가만하게 독후감 쓰고 싶지만 이번 생은 어렵겠음...(자꾸 순화하게 되네요 성지라 댓글마저 ㅋㅋㅋ)

유수 2023-07-14 10:55   좋아요 2 | URL
사드 읽으심??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07-14 11:01   좋아요 2 | URL
네 권을 끝으로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 보지 말자... 근데 마저 읽을 게 칠조어론이라 그놈이 그놈...

유수 2023-07-14 11:13   좋아요 2 | URL
으샤샤 반님 올해는 치우는 해인가 봅니다. 체하지 마소서…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07-14 11:45   좋아요 2 | URL
알라딘이 적립금 너무 안 뽑아줘서(리뷰 월17편 썼음 참가상이라도 좀 주라구) 우씨 이달엔 책 거의 안 살거야(거의 는 보험으로 붙이는...) 이러고 집에 쌓인 거나 치우자! 하는데 자꾸 고전 명작 명저 냅두고 그래버렸네요... ㅋㅋㅋ

난티나무 2023-07-14 1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 사지….

유수 2023-07-15 10:48   좋아요 0 | URL
전자책도 중고도 기약이 없어보이죠? 세일즈포인트 슬펐음.

서곡 2023-07-14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분의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그 에세이 잘 읽었답니다 ‘자기만의 산책‘ 재미 있어 보이네요 기억해둬야겠어요 굿나잇요!

유수 2023-07-15 10:46   좋아요 1 | URL
제가 그 책 재밌다고 한마디도 적은 적이 없더라고요. 페이퍼 기원! 셀프 기원!
 

한 줄도 읽기 힘든 날은 얇은 책 아무거나 집어 한 페이지를 사진 찍기로 한다. 그러면 그 문단, 그 꼭지. 조금은 읽게 되네. 찍고 공유만 할 거야, 같은 생각도 유용해지게.

쌤소나이트 가방에서 꺼낸 웨딩드레스는 의외로 멀쩡했다. 변색된 부분도 없었고 구김도 심하지 않았다. 청담동의 어느 웨딩 부자재 가게에서 구입한 가장자리에 레이스를 돌린 3단 베일도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어디서 본 건있어서 이 드레스를 사진으로 남긴 다음 작별 인사를 고한뒤 비닐에 싸서 다른 버릴 물건들과 100리터짜리 종량제쓰레기봉투에 담았다. 아이를 갖지 않았으니 대를 이어 물줄 일도 없다. 딸을 가졌다고 해도 물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아이에게 물려줄 것보다 물려주지 말아야 할 것으로 가득한 것 같다. 깨끗하고 검소하고 상냥한 신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부지런하고 현명하며 맑은 피부와 적당한 몸매를 유지하는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나아가 당당하고 진취적인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까지도. 마흔두 살의 봄, 스물넷의 웨딩드레스와 함께 나는 이 모든 것을 차곡차곡 봉투에 담아 폐기했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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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7-12 2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봐!!! 당근마켓이 있다규!!!! 지구를
사랑한다는 그짓말

유수 2023-07-12 21:13   좋아요 2 | URL
그래서 당근마켓 나오는 챕터도 있어욬ㅋㅋㅋ 도사님
 

밑줄

….알게 모르게 착한 아이로 살아가길 강요당했던 분들도 이렇게 일기를 써보시길 바란다. 인간은 원래 사소한 것 때문에 마음을 다치고, 유치한 것에 분노한다. 그런 마음을 자각하고 자신을 위로하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거리를 두고 지켜보면서 마음이 흘러가는 방향을 아주 미세하게 조정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일기쓰기보다 더 좋은 방법을 상상할 수 없다. 다만, 아무래도 온라인 일기보다는 종이에 쓰는 일기를 더욱 추천한다.
그리고 종이 일기장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곳에 숨길 것! - P64

내 직업을 번역가라고 밝히면 집에서 일하니 아이도 살뜰하게 챙겨주고 얼마나 좋아요? 하며 아주 부러워하는 남자들의 생각과 달리 따뜻한 집밥도 그리 열심히 차려주지 못했다. 장을 보고, 그렇게 사온 식료품을 정리해서 냉장고와 찬장에 넣었다가 요리하고,식탁 위에 차리고, 설거지하는 일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정성과 에너지가 들어간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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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는 유난히 버거웠다. 둘째 아이의 고열이 며칠 내내 잡히지 않아 입원했고 초등학생 첫째 아이는 전학을 앞두고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있었다. 병원 밥을 안먹어서 피골이 상접한 지경인 둘째만큼 첫째의 속 시끄러움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어떤 (불유쾌한) 외부 자극도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첫번째로 보이는 반응인 아이니 더욱이 그러했다. 적응해서 잘 지내는 곳을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떠나야 한다는 게 세계의 첫 지각 변동일 거고, 그저 내 기우거나 지나친 노파심이라면 좋을 텐데. 이사가 구체적으로 정해지고 나서부터, 나름의 방식으로 이 아이를 안심시켜야 하니 시간과 공을 들여 설명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판단했다. 그럭저럭 잘 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주 아이는 전에 없이 악몽을 꾸고, 잠결에 하소연했다. 평소에 내가 들어본 말은 응, 엄마, 알았어, 그래, 좋아가 다였는데. 어둠 속에서 내 품에 안긴 아이는 전혀 다른 말을 하며 울먹였고 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뜬 눈으로 밤을 보낸 게 무색하리만치. 어제 밤에 무슨 말했는지 기억나?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피로했다.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것 같지 않은 느낌. 머릿속이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고 기분 전환은 혼자 읽는 것으로 하는 편인데 아무것도 읽지 못했기 때문에? 짬이 난다고 해도 어디에도 집중할 수 없고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하는 볼멘 상태로 보냈던 것 같다. 그 시간들이 나를 좀먹고 있음을 알면서도 도리 없이 자신을 내어주면서.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서점에서 책을 몇권 샀다. 주문하고 보니 동네 서점의 책들은 배송이 걸리기 마련이라 온라인에서도 샀다. 바뀐 온라인 서점의 상자포장이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 책 크기에 맞추어 박스가 재조립(?)된 형태였고 비닐테이프를 뗄 필요도 없었다. 사소한 것들에 감명씩이나 받으며 배송 온 박스들을 접어 분리수거하고 책들을 차곡차곡 쌓고 꽂으면서 정신 차릴 때쯤 모님이 선물을 보내주셨다. 아. 여기서 솔직해도 된다면 기쁜 마음보다 앞서 나가는 내 호기심. 뭐 고르셨을까? 이미 여기저기서 책을 사댄 내 허기와 보복심리의 연장선에서 급하게 링크를 열었을 때 본 책은, 내가 고른 것과 같은 책. 내 몸은 입원실 보호자 자리에 있는데 마음은 같은 책이 두권인 책상 위(아직 두번째 책이 도착하기도 전인데 망상)에서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날 위해 고른 것과 친구가 날 위해 고른 것이 일치한다는 것의 뭉클함. 그대로 말하는 것 이상 바람직한 표현을 못찾겠다. 그렇게 좋았고, 유월 내내 계속 덧났던 내 마음이 일순 달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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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0 0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0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0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1 0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3-07-10 08: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항상 그런 건 아니겠지만 마음과 마음이 포개지는 그런 순간이 있더라고요. 유수님에게 그런 순간이 있으셨다니 다행이고 또 그 순간을 엿보는 저도 마음이 너무 좋네요.

꿀꿀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런 날씨인데.... 아이들과 씨름하는 중간 중간 시원한 바람이(에어컨 바람이더라도 그런 시원한 바람이) 유수님에게 불어오기를....

2023-07-10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7-10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두 권이야 인싸는 좋은 책들이 막 한 번에 온니 좋아요 이러고 몰려오는 군요… 한 어린이는 몸이 아프구 한 어린이는 맘이랑 뜰 자리가 아프구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야 이런 생각도 나구 나는 안 아픈데 환자고 혼자 태평해서 미안한 여름이에요… 내 새끼 하나는 헛기침하는 틱이 생겼는데 나는 다들 모르는 척 냅두면 낫고 거기에 대해 자꾸 뭐라 하면 몇 년 간대 ㅋㅋㅋ하면서 혼자 (지가 오은영이야) 진단 내리고 방치하구, 또 한 새끼는 오늘 공부 다 했니? 게임 시간 안 남겼니? 성의 없이 체크하고 아이스크림 먹고 싶음 먹어라…하고 방치하고 에미는 7월에만 벌써 9권을 쳐 보고 있대요… 그냥 나쁜 새끼 여기 있다고 일러봤습니다….힘 내라고 안 할게! 애기들은 힘내서 얼른 나으렴 엄마 힘들게 하지 말고!!!ㅋㅋㅋ(지극히 엄마 중심적 관점)

유수 2023-07-10 12:06   좋아요 2 | URL
ㅋㅋㅋ 우리의 새끼들.. 너네는 힘내고.. 엄마들은 좀 더 널부러져서 책이나 볼게.. 7월 9권 뭔일이에요. 너무 좋다. 더 달려요. 전 동시대 과학책 별로 관심 없는데 ”과학책으로 힐링하신다는“ 글 써놓으신 거 보고 또 드릉드릉하더라구요.

반유행열반인 2023-07-10 12:04   좋아요 2 | URL
일단 힐링하기 위해 스스로 상처를 내는 나새끼는…사드의 ‘악덕의 번영’과 박상륭의 ’칠조어론3‘-마을놈들이 스님 산 채로 석굴암 같은 데 묻었고 책은 600쪽 넘게 남아서 나 진짜 큰일 났다고 한다… 하여간에 그런 병행 독서 하면서 좀 얇은 책들이랑 다음 힐링은 뭘로 할까 힐끔힐끔 하고 있습니다… 달리다 지치면 수1 쎈부터 다시 걸음마 하는 걸로 ㅋㅋㅋㅋㅋ

유수 2023-07-10 12:23   좋아요 1 | URL
칠조어론 나는 정말 모르는 세계.. 예전에 댓글 달렸을 때 아주 얼벙했던 스스로가 생각나네요. 수1쎈 크.. 추억 돋구요 ㅋㅋ

수이 2023-07-10 12: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겠다 유수님!! 부럽다 부러워!!!! 나 책 안 읽고 막 놀고 있다가 유수님 책 자랑 인증샷 보니까 책 읽어야겠다 싶습니다.

유수 2023-07-10 12:25   좋아요 0 | URL
잉! 저는 매번 수이님 포스트 보면서 한결같음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진짜로..
왕림&댓글 달아주셔서 넘 좋아요. 제가 로또를 사야대나..ㅋㅋ

2023-07-11 0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6 0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만의 요새 - 성폭력, 책임, 화해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박선아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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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책 뒷표지). 법이랑도 멀고 철학이랑도 먼 나는 바짝 쫄아서 책을 펼쳤던 것 같다. 한데 뒤로 갈수록 동시대 사건들을 많이 분석하는 덕분도 있고, 예상했던 것보다 쉬이 읽혀서 저자와 역자에게 황송한 마음으로 읽었다.(오타는 좀 보였음동) 학구적이고 원론적인 내용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도 맞지만 그렇다고 현실과 먼 이야기가 아니었다. 책은 뜨겁고 참여적이다. (표지가 찰떡이에욤)


“자율성과 주체성의 부정을 수반하는 수단화에는 깊숙한 내적 근원이 있다. 바로 교만이라는 악이다.“81


교만이라는 악덕이 구축해온 요새, 혹은 요새가 견고하게 방호해온 교만 자체. 다른 해악들과 차별화되는 교만의 특성을 단테의 신곡 중 연옥편을 가져와 설명한다. 신곡을 안 읽었고, 안 읽어본 얘기에 집중을 잘 못하는 편인데.. 교만을 형상화한 단테의 묘사가 책의 적재적소(철학이든 형법과 소송이든 판례에서든)에서 논지를 확장시키는 걸 볼 수 있었다. 책과 별개로 그런 통찰이 감탄스러운 데가 있다. 이런 게 철학인 걸까?? 


… 그들은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인간과 유사한 형상이 고리 모양으로 제 몸을 굽혀서 세상을 내다볼 수도 다른 사람들을 볼 수도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의 얼굴로는 밖을 내다볼 수 없기에 오로지 자기 자신만 들여다보게 되었고, 밖을 볼 수도 밖에서 보일 수도 없게 된다. 놀란 단테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라고 외친다. 베르길리우스는 그에게 “그들 고통의 무거운 짐”이 그들을 땅에 닿도록 짓누른다고 말한다. … 그들은 인간이면서도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온전하게 보지 않으며, 온전한 인간성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 자신만을 보는 것이다.

이 불운한 영혼들은 누구인가? ..단테가 이들의 무거운 악덕에 부여한 이름은 ‘교만’이었다. 그는 이 악덕이 나르시시스트적인 자기 집착의 다른 형태인 원망, 만성적 질투, 탐욕과 같은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교만으로 인한 자기 도취야말로 그 본연의 해악 외에도 다른 악덕들을 더욱 나쁘게 만든다는 맥락에서 가장 완전한 악의 수장이다.58


… 반면 교만한 자들에게는 자기 외에는 그 무엇도 실재가 아니다. 교만은 그 어떤 죄악보다도 외부의 실재와 맺는 근본적인 관계, 인간성의 기본 특성인 그 관계를 앗아가 버린다. 교만한 자들은 외부의 객체들에 대해 잘못된 선택을 하는 지점에 닿지도 못한다. 그들은 별개의 사물을 전혀 보지 못하고 오직 자신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세계와 관계하는 모든 일은 수단화의 형태를 띤다.63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주체성과 자율성이 손상된 개인, 여성이 대상화되어온 맥락을 서술한다. 

2부에서는 “이름조차 없었던 가해행위”였던 성희롱이 법개정을 통해 이룬 진보와 그 한계에 대해서,

3부는 요새의 구체적인 모습, 권력을 가진 자들이 가해자로 군림하는 것을 가능케 했던 구조적 병폐와 개혁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세계적으로 저명한(했던) 공연 예술계 인사들의 성범죄를 짚어보는 7장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마사 누스바움은 예술적으로 우리를 고취시켰던 사람이 타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의 분노와 허탈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시대라도 인간의 사랑과 자유가 종교와 권위를 항상 이긴다고 믿은 모차르트와 오직 사랑만이 탐욕의 잔인함으로부터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고 암시했던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를 우리 시대에서 최고로 잘 해석해 내는 이들 가운데 하나인 이 남자가 완벽한 통제 아래 젊은 예술가들을 괴롭히며 그들에게서 미래의 사랑과 기쁨을 빼앗아가는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매우 잔인한 역설이다.292 (리바인)



수치를 모르는 이들의 작업물은 어떻게 되는가? … 물론 예술의 가치는 존재 그 자체다. 그렇다면 그들의 음악을 듣지 않을 이유는 없다. 적어도 리바인의 작업은 들을 수 있고(뒤투아나 대니얼스의 작업은 안 들을 수 있다.) 거기에서 감동을 받을 수도 경탄할 수도 있다. 듣는 내내 우리는 인간의 마음과 사랑과 웃음이 해로운 잔인함과 어두컴컴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숙고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315



음반이고 책이고 태워야 하나.. 아니 책이 무슨 죄야. 어디가서 그 영화 제일 좋아했던 게 나새끼라고 말도 못해.. 왜 죄스러움이 내 몫인 거야ㅅㅂ.. 황망했던 감정이 다시 떠올라 나는 아직 다 추스르지 못했는데.. 이어서 마사 누스바움은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한참 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온 숱한 가해 증언들은 지지부진 사라졌..사라지게 했으면서 은퇴를 앞두었거나 병들고 노쇠해지고 나서야 이들이 끌어내려진 것이 과연 온당할까,라는 질문. 가해자들의 효용이 다했기에, 말하자면 버리는 카드처럼 떼어주고 끝나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공연 예술계의 기회주의적인 도덕적 기준과 한참 늦은 피해자 구제에 대해서 짚는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대니얼스가 성악가로서 전성기를 지나지 않았을 때도 이렇게 용기 있는 입장을 취했을까?”288


“리바인이 예술적 기량이 뛰어나서 재정적 성공의 주요 원천이었을 때에는 다들 그를 비호하느라 조사를 거부했다. 리바인이 늙고 병들어서 더 이상 돈을 벌어다 주지도 못하고 예술을 창조하지 못하게 되자, 그래서 다른 누구를 학대하지도 못할 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피해자들을 보호했다.”297


이건 중요한 물음이다. 미투의 시대를 지나고 있지만 범죄자들에게 죄를 묻고 마땅한 형벌을 지우는 건 사실 타이밍의 문제라고 느껴질 때가 많으니까. “요새”를 간과해서는 안될 또 하나의 이유다.    


”스타 파워가 부패하는 것을 막을 해결책이 있을까? 앞서 본 네 명과 같이 그들의 가해 행위와 그들의 스타파워가 다 지나간 뒤에야 정의가 구현되는, 다 늙은 스타들을 위한 해결책이 아니라 스타가 여전히 빛나고 있을 때 가해의 싹을 애초에 자를 수 있는 좋은 해결책은 없을까?306


”나아갈 길 - 악의 없는 책임의 의무, 굴복 없는 너그러움“이라는 제목의 결론은 희망적이다. 아니, 희망적이라기 보다는 희망을 가지라고, 그냥 가지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느낌이랄까. 책 중간중간 교만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도 이상주의적이었고. 

에이 근데 읽는 내가 그렇게 느낄 것도 저자는 이미 알고 계시고 ㅋㅋ 희망이 있든 희망이 없든 이렇게 살거니까 그 말이 맞을 거라고 눈 딱 감아버리기로 한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이 페이지를 찍어 공유했다. 


“정당화된 비난과 끝없는 경계의 시대에 나는 페미니스트들이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기 바라는 여성들처럼(미투의 시작을 다룬 그 영화의 제목은 <그녀가 말했다>였지..,) 우리는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기로 마음먹어야 한다. 우리에게 동의하거나 어쩌면 동의하지 않는 남성들의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 행실이 좋았던 이들과 안 좋았던 이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상상력의 문화인 대화의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어느 정도는 아직 정당하지도 않고 정당화될 수도 없는 신뢰를 가져야 한다. 이성이 지지해 줄 희망이 없는 곳에서도(사실 희망은 언제나 이성에 의해 완벽하게 지지받지 못한다.) 페미니스트들은 희망하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한다.391





+레이디 가가 언급 맞닥뜨려서 무장해제됨ㅋㅋ 

+케이트 만 <다운 걸> 올해 읽은 책들에서만 몇번째 언급되는데 번역서 나왔음 좋겠다… 

+미국적 교만, 젠더적 교만 다룬 부분도 특히 좋았다. 칼날이 역시 더 벼려진 게 느껴져.

하지만 또 기억해야 할 것은, 교만의 문제를 온전히 개인에게 책임 지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교만한 자들은 교만에 빠지지 않기가 쉽지 않은 이 사회를 만든 장본인은 아니다. 많은 가능성을 가졌던 소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더라면 트라야누스가 될 수 있었을 그 소년이 잘못된 길로 빠졌을 경우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자비심을 느낄 여지가 생긴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이 교만한 사람들을 얼어붙은 지옥으로 밀어 넣기보다는 화해와 개심이라는 대안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 P85

그래서 법의 쓸모가 대두된다. 특정 개인과 상관이 없다는 점, 의지할 데 없는 선의의 사람들을 지켜 준다는 점, 여성의 평등을 위한 투쟁에 개인적으로 관여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의 행위에 대하여 명백한 법의 효용만을 보면 된다는 점이 바로 법의 유용함이다. - P159

직장 내 성희롱은 달랐다. 범죄가 만연한 곳인데도 법이 그것을 단지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법 자체가 이미 교만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남성들은 다른 남성들을 들여다보되 여성들의 경험이나 직장에서 여성의 자율성이 천편일률적으로 부정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하지 않았다. 법은 남성들과 함께 자기 내부만을 들여다본 것이다. - P198

때때로 사람들은 한 가지 종류의 교만에 좀 더 강력하게 매달리는데, 이는 다른 종류의 교만에 대해 불안을 느낄 때 특히 두드러진다. 계급, 인종, 정치 권력, 직업, 다른 지위상의 이점들에서 취약함을 느낄 때 남성들이 매달릴 수 있는 단 하나의 교만은 바로 남성이라는 젠더적 교만이다. 이러한 젠더적 교만은 모든 사회에서 그리고 그 사회 내 모든 집단 속에서 학습되며, 내세울 만한 다른 강점이 없는 남성들에게 우월감을 느낄 여지를 준다.

젠더적 교만은 여성을 법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종속시키는 문화에서는 대가를 거의 치르지 않아도 되며 아주 손쉽게 공고화된다. - P66

세상에는 창작이라는 영역 내에서의 내면적 자유와 그 바깥에서 살아가는 방식 사이의 경계를 완벽하게 유지할 수 있는 많은 예술가들이 있다. 하지만 이 신화는 너무도 만연해서 많은 이들에게 자기 충족적인 예언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성공을 위해 사회 규범을 깨뜨리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예술가는 규범을 위반하지 않고서는 창조할 수 없는 습관에 물들어 버린다. 흥미롭게도 그 신화라는 것은 압도적으로 남성적 창조성에 관한 것이고, 남성들에 의해서 남성들을 위해 쓰인다. 그 신화가 주로 성적 규범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 또한 흥미롭다. 창조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도둑질이나 강도짓을 허용된다고(?) 믿는 예술가는 내가 아는 한 없다. 이는 그저 소수의 재능 있는 남성들이 상습적으로 자신들이 성적 우위에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실재를 인정하지 앟ㄴ는 남성적 교만에 의거해 갈망해온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쓰는 간편한 방법일 뿐이다. - P270

차이가 있다면 탐욕적인 사람들은 적어도 땅(돈과 소유물로 해석할 수 있겠다)을 보지만 교만한 사람들은 몸을 휘어 자기 자신만을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돈은 단순히 신분 상승을 위한 토큰이어서 그 자체로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탐욕과 교만은 함께 잘 어울리고, 교만은 탐욕이 변할 수 있는 문을 열지 못하게 만든다.
교만과 탐욕은 에로티시즘을 망가뜨려 여성을 돈과 신분의 토큰으로 보는 뻔한 시선으로 이끈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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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7-09 08: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어려운 책 읽고도 찰떡같이 써 주셨네요…중간중간 마음의소리 추임새 뭔가 내가 쓴거 같다 ㅋㅋㅋㅋㅋ(나는 무식해서 어려운 책 이제 잘 못 볼거 같아요…)

유수 2023-07-09 18:17   좋아요 1 | URL
괄호 속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찰떡이라는 말씀 기쁘네유…

은오 2023-07-11 0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단테 신곡 가져와서 한 비유가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저는 신곡을 장바구니에 담았고...... 사놓고 안 읽을 것 같지만 책이 너무 예쁘게 빠져서 인테리어용으로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유수 2023-07-11 08:41   좋아요 2 | URL
저는 신곡 그림책을 담았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중에 신곡 인테리어 사진 보여줘요. 책장속 지옥 연옥 천국..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07-12 22:14   좋아요 3 | URL
아니 근데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기 골 뭐 할아버지는 어디 미운 놈 있으먼 신곡 권한다 그랬구 ㅋㅋㅋ저두 지옥까지 보고는 아 진짜 개재미없네 이러고 연옥 안 가고 그냥 지옥에 남은지가 몇 년 됐네요...ㅋㅋㅋㅋㅋㅋ

유수 2023-07-12 23:44   좋아요 2 | URL
미운 놈을 골방에서 미워하지(제 얘기) 책을 권하는 분이 계시군요. ㅎㅎㅎ 저도 이 책 아니었으면 그냥 무지렁이(계속 무지렁이)로 살았을걸요. 마사 누스바움이 날 미워해?!

은오 2023-07-13 05:3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그나마 지옥파트는 읽을만하다는데 지옥읽기도 지옥인가봐요 ㅋㅋㅋㅋㅋ 가리지 않고 다 읽으시는 유열님께도 그렇다면.. 아아 난.. 아니근데 열린책들에서 나온 신곡 합본을 보십시오.. 너무 아름답지않나요? 제목도 신곡인게 인테리어용으로 허세채우기에딱..

반유행열반인 2023-07-13 09:34   좋아요 1 | URL
유수님 마사 너스봄이 견제할 정도의 유망주?? ㅋㅋ은오님 제 생각에 지옥 잘 그린 작품은 ‘신과 함께 저승편’(영화 말고 만화)으로 족하지 싶어요 ㅎㅎㅎ신곡은 기독교 세계관 궁금한 분들한테나 도움되지 않을까... 미감도 감동도 저한테는 그닥... (저자 옛날에 죽은 책은 까도 괜찮...안 죽었어도 까지만...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