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도 읽기 힘든 날은 얇은 책 아무거나 집어 한 페이지를 사진 찍기로 한다. 그러면 그 문단, 그 꼭지. 조금은 읽게 되네. 찍고 공유만 할 거야, 같은 생각도 유용해지게.

쌤소나이트 가방에서 꺼낸 웨딩드레스는 의외로 멀쩡했다. 변색된 부분도 없었고 구김도 심하지 않았다. 청담동의 어느 웨딩 부자재 가게에서 구입한 가장자리에 레이스를 돌린 3단 베일도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어디서 본 건있어서 이 드레스를 사진으로 남긴 다음 작별 인사를 고한뒤 비닐에 싸서 다른 버릴 물건들과 100리터짜리 종량제쓰레기봉투에 담았다. 아이를 갖지 않았으니 대를 이어 물줄 일도 없다. 딸을 가졌다고 해도 물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아이에게 물려줄 것보다 물려주지 말아야 할 것으로 가득한 것 같다. 깨끗하고 검소하고 상냥한 신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부지런하고 현명하며 맑은 피부와 적당한 몸매를 유지하는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나아가 당당하고 진취적인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까지도. 마흔두 살의 봄, 스물넷의 웨딩드레스와 함께 나는 이 모든 것을 차곡차곡 봉투에 담아 폐기했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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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7-12 2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봐!!! 당근마켓이 있다규!!!! 지구를
사랑한다는 그짓말

유수 2023-07-12 21:13   좋아요 2 | URL
그래서 당근마켓 나오는 챕터도 있어욬ㅋㅋㅋ 도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