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한쪽 귀에 대해서 길게 썼다가 지웠다. 적다보니 쭉쭉 늘어나는데 누가 그렇게까지 읽고 싶을까. 오래되고 사적인, 그런 건 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날들의 기억. 오감 중 어떤 걸 포기할 수 있으려나, 문명 없고 편리 없는 자연 속에서 인간의 감응체계란 어떻게 달라질까, 감각의 내력과 진화를 쫓은 이 책을 읽으면 아무래도 그런 생각이 든다.
한데.. 책의 일부를 재밌게 읽고 전자책으로 소장(구판)해두었던 책인데 다시 읽으니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흥미롭지 않은 건 아니다. 인간의 감각이라는 우주를 조각조각 맞추어 가는 글, 그래서일까 몽환적으로 느껴지는 문체는 매력적이다. 그때는 분명 재밌었는데? 처음부터 읽어나가려니 조향사와의 인터뷰에 이르러 진기하고 호화스러운 향기 묘사를 읽으려니 책은 덮어두게 되었다.
9월부터 본격 뜀박질을 시작하고 인적이 드문 시간에 다니게 되면서 주변에서 내게 많이 해준 얘기가 무릎 조심하라는 것과 ‘몸조심’이었다. 둘 다 조심은 해보겠는데 그게 내 역량 안에서 가능한 건지 감사한 마음으로 끄덕거렸다. 무릎은 어떻게 조심하는 건지 방법을 몰랐던 걸로 판명나고 겨우 백일 남짓 되었는데 나간 거 같다. 일상 생활할 때 오른쪽 무릎이 뒤로 젖혀지는 느낌이 나서 겸사겸사 좀 쉬고 있는 차에, 할 만한가 시험삼아 며칠 나다녀 보았더니 이제 왼쪽 무릎이 아프다. 돌아와요 도가니.. 병원에 가보고 무릎 조심하는 방법을 깨우치면 슬슬 달래서 컨디션 복귀할 수 있겠지, 무릎은 나가리되어도 낙망하지 않으며 지낸다. 몸조심은 글쎄.. 내가 나가고 싶은 시간대를 단념하고 가 보고 싶은 곳을 끊어야할테지. 여름에 뒷산에 다니면서는 훤한 대낮이어도 멀리서 낫을 휘휘 들고 걸어오는 남자(아마 산림 관리 근로자)만 보고도 조심이란 건 내 몸뚱아리를 겨냥하는 말이란 걸 실감하지 않았던가. 가로등이 환히 밝히는 수변을 새벽에 지나칠 때 매번 다리 너머 불 꺼진 길에 대한 궁금증을 접곤 했다. 내가 누릴 수 없는 고요. 경계심 없이 어둠으로 입장하는 것에 대한 동경. 빛 한 점 없는 세계에서의 감각은 어떨지. 조심에 관한 한, 깨달음은 없고 체념만 있을 뿐이다.
책얘기.. 올리버 색스는 박물관을 이렇게 예찬한 바 있다.
“책에는 아쉽게도 실물이 없고 단어만 존재하지만, 박물관은 실물을 조목조목 배열함으로써 ‘자연의 책book of nature’이라는 경이로운 메타포를 구현한다.
…
그러나 내가 과학박물관에서 진정한 현현epiphany을 경험한 것은 열 살 때였다. 나는 과학박물관 5층에서 주기율표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독자들이 알고 있는 끔찍하리만큼 세련되고 현대적인 스타일의 주기율표가 아니라, 벽 전체를 뒤덮고 있는 견고한 직육면체 블록들이었다. …주기율표 속에 해당 원소가 실제로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그 원소들이 우주의 기본적인 빌딩 블록이라는 게 실감이 나고, 전 우주가 사우스켄싱턴에 소우주 형태로 존재한다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주기율표를 보았을 때 나는 ‘진리는 곧 아름다움’이라는 느낌에 압도되었다. ”
박물관은 이렇게 우리를 매혹한다. 비물질/물질에서부터 존재하는(했던) 것들을 모두 망라하는 구현. 박물학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감각의 박물학> 저자 다이앤 에커먼이 쓰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 나는 색스의 이 박물관 예찬의 연장선에서 생각하고 읽었던 것 같다. 다만 요즘의 나는, 어떤 것들이 기록되고 남았는지, 선별과 범주화에서 누락되는 것들이 더 궁금하다.
얼마전 새로 나온 에피소드에서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작가인 트레버 노아는 “백인들은 박물관 참 좋아하죠.” 박물관 가보면 백인들이 ‘우리가 여기다 이것도 지었지, 저것도 했지, 좋은 시절이었지’ 뒷짐지고 다닌다며 “혹시 박물관에서 백인 못 보신 분 있나요?”하며 너스레를 떤다. ‘기록하기’로부터 배제된 범주를 시작해보면 어떨까. 좌절되고 폄하된 것들, 개인적이고 사소해서 꺼내지도 않았던 경험들, 그것도 감각에 대해서라면 더 많은 그물망이 펼쳐지지 않을지. 그렇게 책은 일기에도 한번도 써보지 않은 조각 난 기억을 상기하게 하고 덮은 책은 어느 때보다 말이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