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을 따라 달리면서 거의 허물어질 것 같은 집들과 길가에서 자라는 풀,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 풍경을 보며, 아버지는 트럭을 몰고 어린 나는 아버지 옆 조수석에 앉은 장면이 거의 기억처럼 떠오른 것이다. 차창은 열려 있고 내 머리칼은 바람에 날리고, 차에 탄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다-어디로 가고 있었던거지? 하지만 그 장면이 내 어린 시절의 참담한 기억 중 하나는 아니었다. 오히려 내 안 깊숙한 곳에서, 저 아래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움직였고, 거의 어떤 감각을 느꼈는데 뭘 느꼈다고 할수 있을까?-아버지 옆에 앉아 낡은 빨간색 셰비 트럭을 타고 달리면서 느낀 그것은 거의 자유의 감각이었다. 지금 윌리엄 옆에 앉아 달리면서 나는 손을 휙 내저으며 거의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이들은 나와 같은 족속이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어느 집단에는 소속감을 가져본 적이 결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순간 여기 메인주 시골에 있었고, 방금 내게 일어난 일은 그 집들, 우리가 지나쳐 간 몇 채의 집과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이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같다 이해였다. 그건 이상한 감정이지만 진짜였고, 잠시 나는 이렇게 느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겠다고. 그리고 심지어, 그 몇 채의 집에 실제로 살고 있고 집 앞에 트럭을 세워놓은 그 사람들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을 사랑한다고. 거의 그렇게 느꼈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 P148

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문득 윌리엄과 함께 살던 시절에 결혼이라는 것이 내게 종종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 생생히 떠올랐다. 방안 가득 익숙함이 짙어지고, 상대에 대해 알게 된 사실들로 목구멍이 거의 꽉 막혀 실제로 콧구멍까지 밀고 올라온 것같은 느낌-상대의 생각이 내뿜는 냄새, 입 밖으로 나온 한 마디한 마디에서 느껴지는 자의식,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가면서 약간 씰룩이는 모습, 거의 알아차릴 수 없게 살짝 기울어지는 턱, 상대 말고는 아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들, 그런 걸 느끼고 살면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영원히 그럴 수는 없다.
친밀함은 그렇게 지긋지긋한 것이 되었다. - P177

윌리엄은 고단해 보였고, 손을 들어 내 말을 끊었다. 그리고반사적으로 콧수염을 쓸어내리고 일어서서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나를 떠나기로 선택했다고?" 윌리엄이 나를 돌아보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선택이라고, 루시? 사람이 살면서 정말로뭔가를 선택하는 일이 몇 번이나 될까? 말해봐. 당신이 정말 가족을 떠나기로 선택했어? 아니, 내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당신은 ••••••  당신은 그냥 떠났어. 그래야만 해서 그러는 것처럼. 그리고 나는 그런 불륜을 저지르기로 선택한 건가? 오, 알아. 안다고 책임이라는 거 심리치료사를 찾아갔었어. 혹시 내가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할까봐 말하는 건데, 조앤과 같이 찾아간 그 심리치료사를 계속 만났어. 한동안 혼자 찾아갔고, 그 사람이 책임에 대해 말하더군.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봤어. 루시그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고, 알고 싶어-정말로 알고 싶어사람이 뭐든 실제로 선택하는 건 언제인가? 당신이 말해봐."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사람이 뭔가를 실제로 선택하는건- 기껏해야 - 아주 가끔이라고 생각해. 그런 경우가 아니면우린 그저 뭔가를 쫓아갈 뿐이야- 심지어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걸 따라가, 루시. 그러니, 아니야. 나는 당신이 떠나기로 선택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잠시 후 내가 물었다. "자유의지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야?"
윌리엄이 잠시 두 손을 자기 머리에 갖다댔다. "오, 자유의지같은 개소리는 집어치워." 그가 말했다. 그는 말하면서 이리저리 서성였고, 흰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건 뭐랄까 잘은 모르겠지만, 자유의지에 대해 말하는 건 뭔가 쇠로 된 커다란 프레임을 씌우는 것과 같아. 나는 지금 뭔가를 선택하는일에 대해 말하는 거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오바마 행정부에서 일했던 남자가 있는데, 그는 거기서 선택을 돕는 일을 했어. 그리고 그가 말하길 정말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은 아주아주 드물대. 그리고 나는 늘 그게 아주 흥미롭다고 생각했어. 그게 사실이니까. 우리는 그냥 해-그냥 한다고. 루시. - P194

내가 기억하는 건, 작은 새가 내 마음을 통과하여 날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란이것, 하나의 생각이었다. 어쩌면 나는 나 자신을 죽여야 할지도모른다는 생각. 내가 기억하기로 그때가 이런 생각을 한 유일한순간이다. 그 생각은 작은 새가 마음속을 통과하듯 그렇게 왔다가갔다. 그런 생각이 내게 올 줄은 전혀 몰랐다. 그뒤로 그것에대해 계속 생각해보았는데, 내가 그랬던 건 아마 그 무렵 윌리엄이 조앤과 만나기 시작했고, 나는 그 사실을 몰랐지만 직감했기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결코 나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엄마다. 내가투명인간이라고 느끼지만, 나는 엄마다.
어린 시절 나의 어머니는 자살하겠다는 협박을 하곤 했다. 이•렇게 말했다. "어디 먼 데로 차를 몰고 가서 나무를 찾아 목을 매물거다." 나는 어머니가 진짜로 그렇게 할까봐 잔뜩 겁을 먹었다. 어머니는 말했다. "네가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나는없을 거다." 나는 매일 겁에 질려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는 매일 그대로 있었다. 그뒤로 나는 수업이 끝난 후에 학교에 남기 시작했는데, 매일 수업이 끝난 후 학교에 남았고 그렇게 하기 시작한 건 따뜻하게 있고 싶어서였고 우리집은 너무 추웠고, 나는 추운 게 늘 싫었다. 거기 남아 숙제를 할 수 있는 게 안심이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따금 어머니에 대해 할 거면 해버려요! 하고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자살할 거면 해버려요! 이런 뜻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정말로 그렇게 하면 그 작은 타운에서 이미 이상할 대로 이상한 우리가 더욱 이상해 보일까봐 걱정이되었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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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어떤 정보를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주의를 기울이면 그정보는 한시적인 작업기억에서 벗어나 해마로 전달되고 강화 과정을 거쳐 장기기억으로 저장된다. 이렇게 우리가 의식적으로 불잡아두는 장기기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이전에 일어난 일에대한 기억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른바 의미기억 semantic memory意味記憶은 학습한 지식, 삶과 세상에 관한 사실들을 저장해둔, 우리 뇌의 백과사전이다.
이런 정보는 학습 당시의 세부기억을 떠올리지 않고도 기억할수 있다. 의미기억은 언제 어디서 그 기억이 생겼는지 등과 같은개인의 경험과는 분리된 지식이다. 살면서 겪은 특정한 경험과도 묶여 있지 않다.
이에 반해 이전에 일어난 일, 특정 장소, 시간과 묶여 있는 정보는 일화기억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런 일화기억episodic memory逸話記憶들을 간직하고 떠올린다. "부다페스트에 갔던 때를 떠올려봐." 반면 의미기억은 그냥 알고 있는 정보의 느낌이 더 강하다. "부다페스트는 헝가리의 수도다." 일화기억은 개인적이고 언제나 과거에 일어난 일이다. 의미기억은 정보이기 때문에 시간 제약이 없다. 단순사실만 다룬다. - P76

같은 시간을 공부한다면 조금씩 나눠서 외우는 편이 벼락치기보다 유리하다. 기억의 간격효과spacing effect 때문이다. 기억할 정보를 일정 시간에 걸쳐 간격을 두고 외우면 그 내용이 해마에서 완전히 강화될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된다. 이렇게 나눠서 외우면 자신이 잘 기억하고 있는지 검증해보기도 쉽기 때문에 암기한내용이 매우 강력한 회로로 자리 잡는다(이제 곧 설명할 내용이기도하다).
그러므로 시험 직전의 밤샘 벼락치기는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 해마에 잔뜩 욱여넣은 정보를 아침에 토해내는 방식은 당장좋은 점수를 보장해줄지 모르지만 이렇게 공부한 내용을 다음 주혹은 다음 학년에도 기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공부할 내용을시간 간격을 두고 조금씩 외우면 더 많이 기억하고 덜 잊어버리게 된다.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기억하려는 정보에 반복적으로 스스로를 노출시키면 더 오래 기억하게 된다. 초등학교 2,3학년 때, 8곱하기 3이 24라는 사실을 수없이 반복하고 머리에 주입시키다•보니 결국에는 기억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작정 반복에의한 암기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기억은 정보를 뇌에 강하게 심는 과정과 뇌에서 정보를 꺼내오는 과정을 모두 포함한다. 학습하고 떠올려야 한다. 새로운 정보를 효과적으로 학습하려면 습득하려는정보에 뇌를 반복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은 물론, 학습한 정보를반복해서 꺼내야 한다.
그러려면 스스로 묻고 답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8곱하기 3이 24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되뇌기만 할 것이 아니라 ‘8곱하기 3이 뭐지?‘라고 스스로에게 반복해서 질문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답을 맞히면 학습한 정보를 인출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신경세포 간에 형성된 경로가 한 번 더 활성화되고 강화되기때문에 기억이 더욱 견고하게 자리 잡는다. 외우려는 내용을 반복해서 읽기만 한다면 정보를 수동적으로 보고 인지하는 행위만반복할 뿐, 정보를 꺼내오지는 못한다. 따라서 기억을 한 번 더 보강하는 추가 혜택은 누릴 수 없다. 반복해서 질문하고 답하는 것이 반복해서 읽기만 하는 것보다 효과적이다. - P79

앞서 소개한 것들만큼 엄두도 못 낼 수준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방법인 동시에 좀 더 평범한 대상을 기억하는 데 써먹을 수 있는 기법이 있다. 바로 장소기억법 혹은 기억의 궁전mind palace 이라는방식이다. 어디에 먹을 것이 있고, 어디가 숨기에 좋고, 안전한 보금자리로 돌아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은 선사시대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정보였을 것이다. 어린아이건 팔순 노인이건, 공부와 담을 쌓은 학생이건 천체물리학자건, 인간의 뇌= 물건들이 어디에 있는지 이미지화하고 기억하도록 진화했다.
기억의 궁전을 이용하면 시각과 공간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우리의 타고난 초능력을 발휘해 기억해야 할 대상을 물리적 장소들과 연상으로 묶을 수 있다. 물리적 장소들이 반드시 궁전에 있을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장소여야 한다.
가령 집이 기억의 궁전이라면, 집 안의 동선을 따라 여섯 개의장소, 즉 기억 보관 지점을 정해 시각적으로 떠올린다. 내 동선은우편함, 현관 앞, 현관 벤치, 부엌 조리대, 오븐, 싱크대의 순서다. 어떤 장소를 선택해도 상관없지만, 평소 실제 이동 순서와 동일한 순서로 배치되어 있고 쉽게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전화, 메모지, 필기구 없이 장을 본다고 가정해보자. 외부장치의 도움 없이 달걀, 바나나, 아보카도, 베이글, 치약, 화장지등 여섯 가지 물건을 기억했다가 사 와야 한다. 마음속으로 달걀은 우편함에, 바나나는 현관 앞에, 아보카도는 현관 벤치 위에, 베이글은 부엌 조리대 위 (아까부터 앉아 있는 오프라의 손 위)에, 치약은 오븐에, 화장지는 싱크대 안에 둔다. 오후에 마트에 간 나는 마음속으로 기억의 궁전 안을 걷는다. 머릿속으로 내 집 내부를 떠올리며 물건을 놓아둔 장소를 차례로 방문한다. 우편함을 열면 그 안에는 달걀이, 현관 앞에는 바나나가 차례차례 마음의 눈에보인다. - P86

예를 들어, 남편이 매일 저녁 6시에 은색 도요타 캠리를 몰고 귀가한다고 하자. 일주일에 다섯 번 같은 일이 반복된다. 그것도매주 남편의 차가 들어오는 모습이 매일 저녁 6시에 부엌 창문을 통해 보인다. 아마 아내가 보기에 남편이 귀가하는 모습은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그제 같을 것이다. 매일 거의 똑같기 때문이다.
이제 남편이 오늘 저녁 5시에 빨간색 페라리를 몰고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남편은 여장을 했고 조수석에는조지 클루니가 앉아 있다. ‘우와! 이런 일은 처음이야!‘ 이날의 경험은 모든 점이 그저 놀랍다. 놀랍다는 요소 하나만으로도 이날 저녁을 평생 기억할 사건으로 저장하기에 충분하지만, 아마 아내는 한술 더 떠서 주변 모든 지인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세상에, 그 사람 차가 들어오는데, 넌 얘기해줘도 못 믿을 거야!" 매번 다시 이야기할 때마다 아내의 두뇌는 기억을 재활성화하고 하나하나의 경험이 부호화되어 저장된 신경경로를 다시 강화하기 때문에 그 기억은 강력하게 자리잡는다. - P93

감정과 의외성이 편도체 amygdala 라는 뇌 부위를 활성화하고, 자극을 받은 편도체는 해마에 강력한 신호를 보낸다. 단순화하면 이런 식이다. "이봐, 지금 진짜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이거꼭 기억해야 돼. 단단히 저장해둬!" 그러면 뇌는 우리의 경험과연관해 우리가 어디에 있었고, 누구와 있었고, 언제였고, 그때 기분은 어땠는지 등의 세부적인 맥락을 포착해서 한데 묶는다. 감정과 의외성은 뇌 속을 요란스럽게 행진하는 대규모 취주악대처럼 신경회로를 자극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알아차리게 한다. 반복되는 일상에는 감정적 요소도 의외성도 없다.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가진 경험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기억을 곱씹는경향이 있다. 감정과 결부된, 의미 있는 이야기들을 되돌아보고, 다시 말함으로써 이 기억들을 더 강하게 만든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극히 감정적인 어떤 일을 경험한다면 소위 섬광기억 flashbulb memory閃光記憶이라는 것이 생성될 수도 있다. - P94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가리고 있던 짙은 안개가 걷히는 때는 6세 혹은 7세 정도다. 이제부터의 기억은 나를 중심으로 한 서사에 곁들여진 일화들이다. 7세 무렵의 기억이 내 인생기억을 엮은 텔레비전 드라마의 첫 시즌 첫 회를 보는 느낌이라면, 4세 무렵의 기억은 나와 상관없는 드라마를 아무 시즌이나 골라 중간부터보는 느낌일 수 있다.
왜 우리는 아주 어릴 때의 일을 조금밖에 기억하지 못할까? 뇌에서 언어의 발달은 일화기억을 강화·저장·인출하는 능력과 상응하여 일어난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세부적인 경험을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정리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연관된 해부학적 구조와 회로가 갖추어져야 한다. 따라서 성인이 되어 접근할 수 있는 기억은 경험을 말로 옮길 수 있는 언어능력을 갖춘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관한 기억이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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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미국에서의 계급이라는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완전히 이해한 적이 없었다. 그건 내가 밑바닥 출신이고, 그렇게 태어나면그 사실은 절대 당신을 진정으로 떠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건내가 정말로 그것을, 내 출신을, 가난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는뜻이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 같다.
하지만 내가 처음 캐서린을 만났을 때, 그녀는 나를 자기 친구들에게 소개하면서 조용히 내 팔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이쪽이 루시. 루시는 출신이할 게 없어." - P54

이걸 한번 이해하려고 해보라.
대형 코르크판이 있고 그 판에 지금껏 살아온 모든 사람의 핀이 꽂혀 있다면, 거기 내 핀은 없을 거라고 나는 늘 생각했다.
나는 내가 투명인간이라고 느낀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하지만 가장 깊은 수준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설명하기가 아주어렵다. 그리고 설명하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정으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내가 하려는 말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건 내가 자랄 때 우리집에는 욕실 세면대 위에 높이 걸려 있던 아주 작은 거울 말고는 거울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처럼 단순한 이야기일수 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아주 근본적인 수준에서 나를 투명인간으로 느낀다는 말 외에는.
이건 워싱턴 D.C. 공항에 붙들려 있던 그날 밤 나를 뉴욕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같이 타게 해준 그 부부 이야기다. 그때로부터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 때, 신문에서 내 사진을 본 그들이 코네티컷에서 열린 낭독회에 왔다. 여자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정말로 나를 아주 상냥히, 공항에서 함께 있을때보다 훨씬 상냥히 대했는데 그건 내 생각에는 그녀가 이제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보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공항에서 나는 그녀 뒤에 따라붙은 겁먹은 사람이었다. 낭독회가 있던 밤에 그녀가 얼마나 달랐는지, 나는 늘 그 사실을 기억한다. 책이 아주 잘 팔려서, 그날 낭독회가 열린 도서관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러니 아마도 그녀는 그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가 알지 못했을 것은, 그 많은 사람 앞에 서서 책을 읽고 질문에 답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이상하게도 하지만 너무도 진실하게도 내가 투명인간으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 P82

당신이 알아야할 것은,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이 그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둘 다, 자라면서 바깥세상의 문화를 접하지못했다. 우리 둘 다 자랄 때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다. 베트남전쟁에 대해서도 모호하게만 알다가 나중에 스스로 깨우쳤다. 우•리가 성장한 시기에 유행한 노래를 알았던 적도 없었고 들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더 자랄 때까지는 영화를 본 적도 없었으며, 일반적으로 쓰이는 관용구를 알았던 적도 없었다. 그렇게 바깥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 자란다는 게 어떤 것인지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집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둘 다 그렇게 느꼈다 - 스스로가 뉴욕시티의 전화선 위에 내려앉은 새들 같다고 느꼈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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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기적이라 할만큼 강력하고
믿을수 없을만큼 허술한

1센트짜리 동전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살면서 수천 번, 못해도수백 번은 보았을 테니 어떻게 생겼는지 금방 떠오를 것이다. 이미 기억에 새겨져 있을 테니까.
그럼 확인해보자. 동전 앞면에 새겨진 대통령 이름은? 대통령의 얼굴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주조 연도, ‘자유LIBERTY‘라는 글자, ‘우리가 믿는 신 안에서IN GOD WE TRUST‘라는 문구는 각각 어디에 있는가? 동전 뒷면에는 어떤 그림이 있는가? 지금 당장 동전의 앞뒷면을 보지 않고 정확히 그릴 수 있는가? 동전이 어떻게 생겼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데 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까? 내기억에 무슨 문제가 있나?
그렇지 않다. 기억은 제 할 일을 빈틈없이 잘하고 있다. - P12

잊힌 기억이 일시적으로 떠오르지 않는 것이지, 다시 말해 적절한 자극으로 잠금이 해제되면 도 기억나지 않던 <보헤미안 랩소디>가 누군가 첫 소절을 흥얼거린 순간 봇물처럼 입에서 흘러나올 때처럼), 아니면 영구히 지워진 것인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뭔지 도통 기억나지 않고 옆에서 아무리 자세히 가르쳐주어도 소용없을 때처럼)도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일반적인 건망증(지프를 세워둔 곳을 기억 못 하는 것)과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한기억 손실(지프를 소유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의 차이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또 기억이 의미, 감정, 수면, 스트레스, 맥락에 얼마나 크게 영향받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바꿔 말하면 뇌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을지 선택하는 데 우리가 개입할 여지가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억은 결국 우리가 기억하고 망각하는 것들의 총합이고 기억과 망각 모두 어떤 면에서는 과학인 동시에 예술이다. 오늘 경험하고 배운 것을 내일이면 잊을 것인가, 세세한 추억과 지식을 수십 년이 지나도록 간직할 것인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우리의 기억은 기적이라 할 만큼 강력한 동시에 허점투성이인 채로 제할일을 하고 있다. - P21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 하나하나는 우리의 경험에 대응하여 뇌가 물리적으로 영구적인 변화를 겪음으로써 만들어진다. 모르던 것을 알게 되었고, 오늘을 경험하지 않은 어제의 내가 또 다른 하루를 경험한 내가 되었다. 이제 오늘 있었던 일을 내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뇌가 변했다는 뜻이다. - P27

아이들이 축구하는 모습은 레이디 가가나 해파리 또는 굴의 향과 아무 연관이 없지만, 이 찰나의 개별적인 경험들이 서로 연결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시간이 흐른 뒤 하나의 기억으로 떠올릴 수 있으려면, 즉 "그 초여름 밤 생각나? 굴이랑 스모어를 먹으면서 레이디 가가의 노래를 들었잖아. 애들이 해변에서 축구를했는데 막내 수지가 해파리에 쏘였었지"라는 기억이 만들어지기위해서는, 각각의 경험에 대응해 서로 무관하게 일어나던 신경활동이 하나의 패턴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후 신경세포들 간의연결 구조가 변화하면서 이 패턴은 지속성을 갖게 된다. 이제 새로 형성된 신경회로가 점화되면 영구적으로 달라진 신경 배선과 연결 구조를 재경험, 즉 다시 떠올릴 수 있다. 이것이 기억이다. - P28

기억은 기본적으로 4단계를 거쳐 형성된다. 첫 번째, 부호화encoding 단계에서는 뇌가 인식하고 집중한 대상으로부터 시각 신호, 소리, 정보, 감정, 의미를 포착하고 이 모두를 신경 신호로 변환한다. 두 번째, 강화 consolidation단계에서는 뇌가 이전까지 서로 무관하던 신경 활동들을 서로연관성을 갖는 하나의 패턴으로 연결한다. 이렇게 연결된 패턴은 세 번째 저장 storage 단계를 거치면서 신경세포들이 영구적인 구조 변화와 화학 변화를 겪으면서 지속성을 얻는다. 그런 다음 마지막 인출retrieval 단계에서 연결된 패턴을 활성화할 때마다 이전에 학습하고 경험한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회상하고, 알고, 인지할 수 있게 된다. - P28

이전에는 상관없던 신경 활동들이 어떻게 하나의 신경망으로연결되어, 하나의 기억으로 경험되는가? 완벽하게 규명된 것은아니지만, 어디에서 그런 과정이 일어나는지는 상당히 많이 밝혀졌다. 우리의 경험에 포함된 정보, 즉 감각 인식, 언어,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언제, 왜 등을 뇌가 수집하면 뇌에 있는 해마라는 부위가 이 정보들을 연결한다.
바다에 사는 해마를 닮은 이 기관은 뇌 한가운데 깊숙이 자리 잡고는 기억강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해마Hippocampus는 기억들을 하나로 묶는다. 기억을 직조하는 직공인 셈이다. 무슨 일이 언제 어디서 일어났고, 그 의미는 무엇이며, 나는그것을 어떻게 느꼈는가? 해마는 뇌의 여러 부분에 흩어져 있는이 모든 개별 정보들을 한데 모아 나중에 한꺼번에 다시 불러올수 있도록 하나의 연관된 데이터 단위로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보 단위, 즉 신경 네트워크는 적절한 자극을 받으면 기억이라는 형태로 경험될 수 있다. - P29

기억은 최초로 어떤 사건이나 정보를 경험했을 때 뇌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신경세포들이 자극에 활성화된 패턴으로 저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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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기억할 때마다 우리는 경험한 정보의 여러 요소들을활성화하는데, 이 요소들은 하나의 단위를 이루도록 서로 엮여있다.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unctional MRI으로 뇌를 관찰하면 기억이 어떤 방식으로 인출되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MRI 스캐너에들어간 사람에게 특정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 원하는 정보를 찾아 말 그대로 ‘뇌를 뒤지는‘ 모습이 관찰된다. 처음에는 여기 번쩍 저기 번쩍, 뇌 여기저기가 활성화된다. 하지만 처음 해당 정보를 학습했을 때 만들어진 활성 패턴과 일치하는 형태의 패턴이 나타나면 거기서 멈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피험자는 "기억났어요!"라고 말한다. - P35

뭔가를 기억하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인지(보고, 듣고, 냄새맡고, 느끼고)와 주의집중이다. 가령 지금 뉴욕 록펠러센터의 번쩍거리는 대형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서 있다고 해보자. 우선 모양크기, 전구의 색깔 같은 시각정보가 눈의 망막에 있는 수용체인 막대세포와 원뿔세포를 통해 들어온다. 이 정보는 신호로 전환되어 뇌 뒤쪽에 있는 시각피질에 도달하고 여기서 이 이미지 신호를 처리하면 비로소 우리는 트리를 본다. 그런 다음 신호들은 인식, 의미, 비교, 감정, 의견 등을 담당하는 뇌의 다른 구역에서 다음 단계의 처리를 거친다. 하지만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는 행위에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활성화된 신경세포들은 서로 연결되지않고, 따라서 기억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보고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기억은 동영상을 찍는 카메라처럼 우리 앞에 전개되는 모든광경과 소리를 끊김 없이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의를기울인 부분만 캡처해서 저장할 수 있다.  - P40

마찬가지로 밀레니얼세대(1980년대 초에서 1990년대 중반에 태어난세대 옮긴이)에게는 상대방과 대화하면서 모바일 채팅을 하고눈으로는 넷플릭스를 보는 일이 흔한 일상이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경험에 집중하려는 사람이라면 두 가지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뇌는 기억을 만들려고 애쓰는데 주의가 분산되어있다면 기억이 제대로 만들어지기 힘들다. 주의가 분산된 상태로기억이 간신히 만들어졌다 해도 나중에 완전한 형태로 불러낼 수있을 만큼 충실한 기억은 아닐 것이다. 강력하고 정확한 기억을 심기 위해서는 주의가 하나에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 P50

도대체 작업기억은 무엇을 위한 걸까? 작업기억은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기억의 최초 관문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세한 정보 가운데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고,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거나 감정을 자극하는 것들은시한부의 작업기억 중에서도 따로 선택되어 해마로 전송된다. 해마에서 강화된 정보들은 장기기억으로 전환되고, 장기기억은 작업기억과는 다르게 보관 기간과 용량에 제한이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바다. - P61

근육기억은 다르다. 근육기억은 운동 기능과 절차에 관한 기억이자 어떤 일을 하는 방법이 기록된 매뉴얼이다. 근육기억은무의식적으로, 의식의 경계 너머에서 소환되는 기억이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자전거를 타고,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고, 날아오는공을 치고, 이를 닦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행위 등은 모두 근육기억을 이용한다. 아주 오래전 우리는 이런 것들을 할 줄 몰랐다. 그러다가 여러 번의 반복과 개선을 통해 방법을 터득했다. 올바른 절차들을 기억에 저장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자전거를어떻게 타는지 기억하기 위해 잠시 멈추지 않고도 자전거를 탈수 있다.  - P66

정확하고 반복적이며 자동화된 동작들을 하나의 패턴으로 연달아 시행하기 위해서, 즉 골프 공을 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단계들이 순서대로 이어져야 한다. 연결된 하나의 기억단위로 소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의미기억과 일화기억은 해마를 통해 강화되는 반면, 근육기억은 뇌의 기저핵이라는 부위에서 연결된다.
하나하나의 물리적 동작들을 연속적으로 수행하면, 이것이 하나의 신경 활성 패턴으로 해석된다. 같은 기술을 계속 연습하면 소뇌라는 다른 부위에서 ‘왼쪽으로 발을 조금 옮겨라‘, ‘손목을 굽히지 마라‘ 등의 추가적인 피드백을 제공한다. 이렇게 동작이 수정되고 개선되면서 실력이 향상된다.
해마는 새로운 일화기억과 의미기억을 만드는 데는 꼭 필요하지만, 근육기억의 형성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도무지 치료되지 않는 발작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쪽 해마를 제거한 헨리 몰래슨은 새로운 기억을 의식적으로 저장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근육기억은 만들 수 있었다. 그는 5분 전에 일어난 일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새로운 동작은 배울 수 있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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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가 회부된 사건의 결론을 내리는 일을 피할 수는 없겠으나, 사법부의 결론조차 당파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사법부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판결이언제나 객관적이어서 뭐든지 판결해줄 수 있는 만능이 아니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분명히 제한받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그러한 사회적 인식을 통해서 정치가 사법화하고 사법이 정치화하는 것을최소화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법부에 최우선적으로 맡길 일은 당파성이 작용하는 영역의 일이 아니라 기본권이 제대로 보호되지 않아 헌법적 가치가 훼손될 염려가 있는 영역에서 법적 판단을 내려야 하는 일이다.
삼성엑스파일 사건 판결의 다수의견이 정당행위의 해석을 종래의 해석보다 훨씬 더 좁혀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 정치적 성향에 따른 선택인데도 그 결론에 대한 책임은 결국 고(故) 노회찬 의원만이 지게 되었다. 2013년 2월 14일 판결확정으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게 된 노회찬 의원은 2016년 경남 창원시 성산구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다시 국회로 돌아왔으나 국회를 떠나 있던기간 동안 받았던 정치자금이 문제되어 유명을 달리했고, 정치자금법 개정 문제를 다시 우리사회의 화두로 떠올렸다. 만일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달리 나왔더라면 노회찬 의원은 의원직을 상실하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사회에 그만이 지닌 새로운 시각을 더 활발하게 펼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노회찬 의원의 죽음으로 반짝 떠올랐던 정치자금 문제는 다시 수면으로 가라앉아 잊힌것처럼 보인다. 이 몹시도 정치적인 판결이 사회적 변화를 불러일으켜 긍정적인 결과를 낳도록 할 책임은 이제 우리 모두에게 남겨졌다. - P200

포스너의 말처럼 법규주의의 왕국은 무너져왔는데도 판사들은아직도 그 왕국을 굳건하게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또다른 그림을 제시해보려는 마음으로 쉬피오를 불러들였다. 쉬피오는 "법규범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세상에 대한 어떤 사회의 생각 또한 반영한 다." 어떤 사회에서 법을 만들어내는 힘으로서의 표상체계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형식적 표상들과 실재세계 사이의) 역동성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한다. 그리고 그 역동성 속에서만 지구화와 함께 대두한 "생태학적 위기의 고조, 갈수록 심각해지는 불평등, 가난과 이민의 증가, 종교전쟁의 재발과 정체성 회복 운동의 자폐적현상들, 정치 또는 금융의 신용 붕괴 등등의 위기 속에서 어디로나아가야 할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압축적 성장이라고 불리는 빠른 달음박질을 해온 끝에 전근대와 근대, 현대와 초현대가 공존하는 우리사회에서 입법과 법률해석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보도록 하는 대목이다. - P224

판사들이 큰 그림을 가지고 결론을 선택한다는 것은 원래 사법부가 의도하지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판결의 결과들을 분석하여보면 어떤 성향이 드러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포스너는 "정치적 성향이 비슷한 법관들은 사법철학이 다르더라도 보통 같은 방향으로 표결한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입법을 하는 경우뿐 아니라 만들어진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에도 세계의 미래와 법의 미래를 생각해보고 상상해보는 일들은 필요하다. 생각과 상상을 그치고 주어진 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인공지능이 계산된 알고리즘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판사들, 나아가 법률가들이 법규주의의 왕국에서 나와서 지금이 시대에 필요한, 그리고 더 나아가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법의 지배를 사유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포기해서도 안 될 일이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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