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기적이라 할만큼 강력하고
믿을수 없을만큼 허술한

1센트짜리 동전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살면서 수천 번, 못해도수백 번은 보았을 테니 어떻게 생겼는지 금방 떠오를 것이다. 이미 기억에 새겨져 있을 테니까.
그럼 확인해보자. 동전 앞면에 새겨진 대통령 이름은? 대통령의 얼굴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주조 연도, ‘자유LIBERTY‘라는 글자, ‘우리가 믿는 신 안에서IN GOD WE TRUST‘라는 문구는 각각 어디에 있는가? 동전 뒷면에는 어떤 그림이 있는가? 지금 당장 동전의 앞뒷면을 보지 않고 정확히 그릴 수 있는가? 동전이 어떻게 생겼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데 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까? 내기억에 무슨 문제가 있나?
그렇지 않다. 기억은 제 할 일을 빈틈없이 잘하고 있다. - P12

잊힌 기억이 일시적으로 떠오르지 않는 것이지, 다시 말해 적절한 자극으로 잠금이 해제되면 도 기억나지 않던 <보헤미안 랩소디>가 누군가 첫 소절을 흥얼거린 순간 봇물처럼 입에서 흘러나올 때처럼), 아니면 영구히 지워진 것인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뭔지 도통 기억나지 않고 옆에서 아무리 자세히 가르쳐주어도 소용없을 때처럼)도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일반적인 건망증(지프를 세워둔 곳을 기억 못 하는 것)과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한기억 손실(지프를 소유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의 차이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또 기억이 의미, 감정, 수면, 스트레스, 맥락에 얼마나 크게 영향받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바꿔 말하면 뇌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을지 선택하는 데 우리가 개입할 여지가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억은 결국 우리가 기억하고 망각하는 것들의 총합이고 기억과 망각 모두 어떤 면에서는 과학인 동시에 예술이다. 오늘 경험하고 배운 것을 내일이면 잊을 것인가, 세세한 추억과 지식을 수십 년이 지나도록 간직할 것인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우리의 기억은 기적이라 할 만큼 강력한 동시에 허점투성이인 채로 제할일을 하고 있다. - P21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 하나하나는 우리의 경험에 대응하여 뇌가 물리적으로 영구적인 변화를 겪음으로써 만들어진다. 모르던 것을 알게 되었고, 오늘을 경험하지 않은 어제의 내가 또 다른 하루를 경험한 내가 되었다. 이제 오늘 있었던 일을 내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뇌가 변했다는 뜻이다. - P27

아이들이 축구하는 모습은 레이디 가가나 해파리 또는 굴의 향과 아무 연관이 없지만, 이 찰나의 개별적인 경험들이 서로 연결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시간이 흐른 뒤 하나의 기억으로 떠올릴 수 있으려면, 즉 "그 초여름 밤 생각나? 굴이랑 스모어를 먹으면서 레이디 가가의 노래를 들었잖아. 애들이 해변에서 축구를했는데 막내 수지가 해파리에 쏘였었지"라는 기억이 만들어지기위해서는, 각각의 경험에 대응해 서로 무관하게 일어나던 신경활동이 하나의 패턴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후 신경세포들 간의연결 구조가 변화하면서 이 패턴은 지속성을 갖게 된다. 이제 새로 형성된 신경회로가 점화되면 영구적으로 달라진 신경 배선과 연결 구조를 재경험, 즉 다시 떠올릴 수 있다. 이것이 기억이다. - P28

기억은 기본적으로 4단계를 거쳐 형성된다. 첫 번째, 부호화encoding 단계에서는 뇌가 인식하고 집중한 대상으로부터 시각 신호, 소리, 정보, 감정, 의미를 포착하고 이 모두를 신경 신호로 변환한다. 두 번째, 강화 consolidation단계에서는 뇌가 이전까지 서로 무관하던 신경 활동들을 서로연관성을 갖는 하나의 패턴으로 연결한다. 이렇게 연결된 패턴은 세 번째 저장 storage 단계를 거치면서 신경세포들이 영구적인 구조 변화와 화학 변화를 겪으면서 지속성을 얻는다. 그런 다음 마지막 인출retrieval 단계에서 연결된 패턴을 활성화할 때마다 이전에 학습하고 경험한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회상하고, 알고, 인지할 수 있게 된다. - P28

이전에는 상관없던 신경 활동들이 어떻게 하나의 신경망으로연결되어, 하나의 기억으로 경험되는가? 완벽하게 규명된 것은아니지만, 어디에서 그런 과정이 일어나는지는 상당히 많이 밝혀졌다. 우리의 경험에 포함된 정보, 즉 감각 인식, 언어,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언제, 왜 등을 뇌가 수집하면 뇌에 있는 해마라는 부위가 이 정보들을 연결한다.
바다에 사는 해마를 닮은 이 기관은 뇌 한가운데 깊숙이 자리 잡고는 기억강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해마Hippocampus는 기억들을 하나로 묶는다. 기억을 직조하는 직공인 셈이다. 무슨 일이 언제 어디서 일어났고, 그 의미는 무엇이며, 나는그것을 어떻게 느꼈는가? 해마는 뇌의 여러 부분에 흩어져 있는이 모든 개별 정보들을 한데 모아 나중에 한꺼번에 다시 불러올수 있도록 하나의 연관된 데이터 단위로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보 단위, 즉 신경 네트워크는 적절한 자극을 받으면 기억이라는 형태로 경험될 수 있다. - P29

기억은 최초로 어떤 사건이나 정보를 경험했을 때 뇌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신경세포들이 자극에 활성화된 패턴으로 저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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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기억할 때마다 우리는 경험한 정보의 여러 요소들을활성화하는데, 이 요소들은 하나의 단위를 이루도록 서로 엮여있다.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unctional MRI으로 뇌를 관찰하면 기억이 어떤 방식으로 인출되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MRI 스캐너에들어간 사람에게 특정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 원하는 정보를 찾아 말 그대로 ‘뇌를 뒤지는‘ 모습이 관찰된다. 처음에는 여기 번쩍 저기 번쩍, 뇌 여기저기가 활성화된다. 하지만 처음 해당 정보를 학습했을 때 만들어진 활성 패턴과 일치하는 형태의 패턴이 나타나면 거기서 멈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피험자는 "기억났어요!"라고 말한다. - P35

뭔가를 기억하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인지(보고, 듣고, 냄새맡고, 느끼고)와 주의집중이다. 가령 지금 뉴욕 록펠러센터의 번쩍거리는 대형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서 있다고 해보자. 우선 모양크기, 전구의 색깔 같은 시각정보가 눈의 망막에 있는 수용체인 막대세포와 원뿔세포를 통해 들어온다. 이 정보는 신호로 전환되어 뇌 뒤쪽에 있는 시각피질에 도달하고 여기서 이 이미지 신호를 처리하면 비로소 우리는 트리를 본다. 그런 다음 신호들은 인식, 의미, 비교, 감정, 의견 등을 담당하는 뇌의 다른 구역에서 다음 단계의 처리를 거친다. 하지만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는 행위에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활성화된 신경세포들은 서로 연결되지않고, 따라서 기억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보고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기억은 동영상을 찍는 카메라처럼 우리 앞에 전개되는 모든광경과 소리를 끊김 없이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의를기울인 부분만 캡처해서 저장할 수 있다.  - P40

마찬가지로 밀레니얼세대(1980년대 초에서 1990년대 중반에 태어난세대 옮긴이)에게는 상대방과 대화하면서 모바일 채팅을 하고눈으로는 넷플릭스를 보는 일이 흔한 일상이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경험에 집중하려는 사람이라면 두 가지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뇌는 기억을 만들려고 애쓰는데 주의가 분산되어있다면 기억이 제대로 만들어지기 힘들다. 주의가 분산된 상태로기억이 간신히 만들어졌다 해도 나중에 완전한 형태로 불러낼 수있을 만큼 충실한 기억은 아닐 것이다. 강력하고 정확한 기억을 심기 위해서는 주의가 하나에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 P50

도대체 작업기억은 무엇을 위한 걸까? 작업기억은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기억의 최초 관문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세한 정보 가운데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고,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거나 감정을 자극하는 것들은시한부의 작업기억 중에서도 따로 선택되어 해마로 전송된다. 해마에서 강화된 정보들은 장기기억으로 전환되고, 장기기억은 작업기억과는 다르게 보관 기간과 용량에 제한이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바다. - P61

근육기억은 다르다. 근육기억은 운동 기능과 절차에 관한 기억이자 어떤 일을 하는 방법이 기록된 매뉴얼이다. 근육기억은무의식적으로, 의식의 경계 너머에서 소환되는 기억이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자전거를 타고,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고, 날아오는공을 치고, 이를 닦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행위 등은 모두 근육기억을 이용한다. 아주 오래전 우리는 이런 것들을 할 줄 몰랐다. 그러다가 여러 번의 반복과 개선을 통해 방법을 터득했다. 올바른 절차들을 기억에 저장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자전거를어떻게 타는지 기억하기 위해 잠시 멈추지 않고도 자전거를 탈수 있다.  - P66

정확하고 반복적이며 자동화된 동작들을 하나의 패턴으로 연달아 시행하기 위해서, 즉 골프 공을 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단계들이 순서대로 이어져야 한다. 연결된 하나의 기억단위로 소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의미기억과 일화기억은 해마를 통해 강화되는 반면, 근육기억은 뇌의 기저핵이라는 부위에서 연결된다.
하나하나의 물리적 동작들을 연속적으로 수행하면, 이것이 하나의 신경 활성 패턴으로 해석된다. 같은 기술을 계속 연습하면 소뇌라는 다른 부위에서 ‘왼쪽으로 발을 조금 옮겨라‘, ‘손목을 굽히지 마라‘ 등의 추가적인 피드백을 제공한다. 이렇게 동작이 수정되고 개선되면서 실력이 향상된다.
해마는 새로운 일화기억과 의미기억을 만드는 데는 꼭 필요하지만, 근육기억의 형성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도무지 치료되지 않는 발작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쪽 해마를 제거한 헨리 몰래슨은 새로운 기억을 의식적으로 저장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근육기억은 만들 수 있었다. 그는 5분 전에 일어난 일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새로운 동작은 배울 수 있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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