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러미에 관한 사실 한 가지 더: AIDS 감염은 새로운 현상이었다. 비쩍 마르고 수척한 남자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게 눈에 띄면 그들이 이 갑작스럽고 성경에 나올 법한 질병에 걸렸다고 보면 되었다. 어느 날 건물 앞 계단에 제러미와 함께 앉아 있다가. 나는 내가 해놓고도 스스로 깜짝 놀란 말을 했다. 그런 남자둘이 천천히 지나가는 걸 본 뒤 이렇게 말해버린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정말 안 되는 줄은 알지만, 나는 저들이 거의 부러울 지경이에요. 저 두 사람은 서로를 가졌고, 진정한 공동체로 결속되어 있으니까요." 그러자 그가 나를 바라보았고, 그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다정함이 떠올라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내 겉은 풍족해 보여도 속은 외롭다는것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외로움은 내가 맛본 인생의 첫맛이었고, 늘 그 자리에, 내 입안의 틈 속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존재를일깨워주었다. 그날 그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친절했다. "그러네요." 그는 그렇게만 말했다. 쉽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정신이에요? 저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다고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를 에워싼 외로움을 이해했기 때눈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싶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P53

이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나는 지쳐서 우는 아이들을, 가끔은 그저 심술이 나서 우는 아이들을본다. 전자도 진짜고, 후자도 진짜다. 하지만 이따금은 절박하기 이를 데 없는 소리로 우는 아이들을 보기도 하는데, 나는 그것이 아이가 낼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소리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순간에는 내 안에서 심장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같다. 탁 트인 내 유년의 들판에서-조건이 정확히 맞아떨어질때- 옥수수가 자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중서부 출신들조차 옥수수 자라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고내게 말했지만, 그들이 잘못 안 것이다. 내 심장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고, 그게 사실인 것은 나도 알지만, 내게 옥수수가 자라는 소리와 내 심장이 부서지는 소리는 분리할 수 없는것이다. 나는 아이의 절박한 울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타고 있던 지하철 칸을 옮긴 적도 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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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라이프 온 코트

1979년 9월 1일. 사법연수원에서 연수를 받기 시작했다. 당시 연수원은 덕수궁 건너편의 서소문 법원청사 내에 있었다. 60명씩 A, B 두 반이었고 나는 A반에 속했다. 두 반을 통틀어 여자연수생은 혼자였다. 두 달이 미처 지나지 않은 10월 26일, 잊지 못할 사건이터졌다. 방송은 종일 장송곡이나 그에 가까운 음악을 틀었고, 광화문 일대에는 통곡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저녁 6시경 강의가 파하면  8시 통금에 걸리지 않기 위해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길은 없었다. 이듬해 광주민주화운동 때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호남 출신 연수생들조차도 광주에서 북한의 사주를 받은 세력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하더라는 유언비어를 전해 들었을 뿐이라고 했다. 입수할 수 있었던『뉴스위크』는 꺼멓게 지워져 있었으나 친구로부터 어렵게 구했다는 『뉴스위크』 원본을 받아보니 상황은 짐작한 대로 심각했다.
1980년 말, 4개월간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검찰실무수습을 할 때 공안부의 부장검사가 공안부에 관하여 간단한 안내를 했던 기억이난다. 김지하의 시 「오적」 운운하면서 시간이 나면 명동의 소극장같은 데서 반국가적인 성향의 공연이 열리는지 보러 간다고 말하기도 했다. 길은 달라졌으나 공연계에서 활동하는 친구를 떠올렸던 탓일까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검사로 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그때 굳힌 것 같다. - P5

법적 판단은 과학적 사고와 달라서 대법관의 추가보고 지시에따라 정반대의 논리를 전개하는 보고서가 얼마든지 만들어지기도한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10년의 판사생활 동안 ‘사건에는 정답이있고 판결은 선택이 아니다‘라고 생각해왔는데 대법원에 와보니 판결은 선택이 되기도 했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충격과 그에 따른 두려움은 더 컸던 것 같다. 그로부터 10여 년후 대법관으로 재직할 동안에도 그 두려움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판사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택을 하는가. 판사들의 선택은 시대적 현실과 분리된 상태에서 해야 하는 것인가. 순수한 법리만으로 선택하는 것이 가능한가. 2013년부터 로스쿨에서 대법원판결들을 읽어보는 강의를 하면서 주로 전원합의체 판결을 대상으로 ‘대법관들이 자신에게 허용된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분석해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 내려진 판결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 P9

위계질서는 이원론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요소에 토대를 두고 분류하는 것이다. "합리적/불합리적, 능동적/수동적, 사고/감정, 이성/감성, 문명/자연, 힘/섬세함, 객관적/주관적, 추상적/구체적, 원리원칙에 의하여 규율화됨/개별화·개인화됨이라는 이원론이다." 5 "불합리는 이성의 결여이고, 수동성은 행동성(능동성)의 결여를 의미한다. 사고는 감정보다 중요하고,
이성은 감정보다 우수한 것이다." "어떤 것을 ‘결여한 것‘ ‘덜 중요한 것‘ ‘열등한 것‘으로 여긴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이원론은계층화 질서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법은 원칙적으로는 것서원서의기존 질서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원론에 토대를 둔계층화를 긍정하는 한 법질서도 이원론에 의한 계층화 질서를 지키려는 이념과 같이 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원론을 통한 계층화가 법 체계에 반영될 때 어떤 일이발생하게 되는가? 마사 누스바움 Martha C. Nussbaun은 낙인을 찍는등 수치심을 주는 처벌을 형벌체계에 도입할 수 있는지를 논하면서,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문제인 것은 ‘사회 구성원을 서열화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지닌 부족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집단을 형성하며, 보다 힘이 약한 일부 집단과 비교하면서 자신들을 ‘정상인‘으로 정의한다."" "수치심은 정상에서 벗어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 또는 이런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을 대상화함으로써 지배적인 집단은 자신들을 정의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정상인‘들에게 자신이 지닌 나약함을 떠올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른바 희생양이 될 수 있고, 공동체에서 배척당할 수 있는 것이다. 누스바움은 이런 관점에서 "수치심 처벌이 진보적인 개혁효과를 보기보다는 사회적 동질성과 통제를 높이는 수단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 P20

프랜시스 올슨 Frances Olsen에 의하면 가족이라는 영역에서는 시장에서 찬양되는 개인주의와 달리 "가족들끼리의 애정과 나눔과상호배려와 애호""라는 일종의 애타주의가 지배한다. 그리고 가족 내 구성원에 대해 무엇이 최선인가를 정하는 것이 가장 이기때문에, 가족이 계층적 상하구조를 가지는 것은 당연시되었다. 자 - P22

유로운 시장이라는 생각에는 개인주의가, 그에 따른 시장거래에서는 형식적 평등이 깊게 관련되어 있으나, 가족이라는 사상에서는애타주의와 상하관계가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다.‘ 개인주의는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정당화한 것과 동시에,
가족의 영역에서 국가는 가족 간의 배려와 애호의 상호관계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전환되어 적용되었다. 가령 사회에만연하던 아내에 대한 남편의 폭력에 대해 국가가 제도적으로 개입하려고 해도, 그 개입이 많은 사람의 눈에는 국가가 가족문제에간섭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가정 내에서의 가부장 질서가 오랫동안 정면으로 문제시되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찬가지 이유로 ‘가족적인 분위기와 질서를 내세우는 많은 집단들에서도 드러나지 않는 다양한 모습의 폭력이 여전히 문제시되지 않고남아 있다. 농경사회 이후로 폭력에 대한 가치관이 변화하고 있고가부장 질서도 약화되고 있으나 ‘가족적‘인 질서는 가장 느린 속도로 변하여온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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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클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만약 생태계 전체가 다 같이 한꺼번에 움직인다면, 그것도 그리 나쁘진 않겠죠." 그러나 좋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반응한다. 서로 다른 속도로,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아예 이동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 바람에 상황이 뒤죽박죽되거나, 또는 페클의 표현대로라면 "생태학 규정집을 내다 버려야 할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는 이동이 가능한 종이 자신이 선호하는 기후를 애써 찾아가더라도 새로운 땅에서 자리 잡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라는 뜻이다. 낯선 음식과 질병, 새로운 포식자와 경쟁자에 적응해야 한다. 그것도 끊임없이 구성원이 들어오고 나가며 영향을 주고받는 군집 안에서 말이다. ‘뜻밖의 동거인‘이 불러온 피할수 없는 난제다. "현재 우리는 개별 종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까지는 상당히 잘 파악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의문이 남았다. "그것이생태계에는 어떤 의미일까요?" 페클이 물었다. "전체 생물다양성의 20퍼센트 내지 30퍼센트가 한꺼번에 움직인다는 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처음으로 풀죽은 말투인가 싶더니 이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그저 정리나 하고 있을 뿐이에요" - P139

앞으로 알아야 할 것은 아직 많지만 이미 이 책에서도 두 가지 경향을 일관되게 언급했다. 첫째, 기온 상승은 생물을 극지로 몰아간다. 그들은 적도를 중심으로 북반구에서는 북쪽으로(로비의 펠리컨과 린그렌의 나무좀), 남반구에서는 남쪽으로(페클의 퉁돔과 성게) 이동한다. 둘째, 생물은 산이나 능선 등 사면을 따라 점점 높은 고도로 올라간다(프리먼의 새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패턴에서 벗어난 놀라운 예외가 있다." 이런 사례는 생물의 이동 뒤에는 아주 다양한 원인이있으며 생물이 항상 온도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 P140

"다른 연구에서 보고된 것처럼 나무가 북쪽으로 이동할 걸로 예상했습니다." 실제로도 많은 나무의 지리적 중심지가 북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훨씬 더 많은 나무가 서쪽을 향했다. 결과를 확인한 연구팀은 당장 두 가지로 대응했다. 먼저 결과의 타당성을 확인하기•위해 분석 과정을 전체적으로 재검토했으며(검토 결과 분석은 타당했다), 다음으로 그런 이해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온 원인을 파헤쳤다. 답은 강우와 가뭄의 패턴에 있었다. 페이는 "습기가 결정적인 역할을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아이오와주나 여타 미국 중서부 지방처럼연간 강수량이 15밀리미터 이상 증가한 지역에서 나무 개체군이 가장 멀리 그리고 가장 빨리 이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결과는 캘리포니아주에서 보고된 경향과도 유사하다." 캘리포니아주에서 식물은 기온이 아닌 강수량의 변화를 따라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런 결과는 종이 다양한 변수에 반응하며, 기후변화는 단순히 어떤 날에 얼마나 날씨가 더울지 따위보다 더 많은 요소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더워진 공기는 습기를 더 많이 머금을 가능성과 함께 비와 눈, 가뭄과 폭풍, 바람 등 모든 기상 현상의타이밍과 강도를 바꾸어 평소와 다르게 나타나도록 한다. 그중 일부, 또는 전체가 한 종이 서식할 장소의 적합성을 결정하는 중요한요인이 될 수 있다.  - P146

디키 연구팀이 이처럼 뜻밖의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은 기후변화로경기장의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른 봄의 온기와 더 뜨거워진 여름이 엘더베리에 생물계절학적 변화를 강요해 개화와 결실기가 2주 이상 당겨졌다. 낚시 철이 한창일 때 열매가 익다 보니 곰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고 말았다. 원래 일정대로 연어를 잡아먹으며제일 좋아하는 열매를 포기할 것인가, 행동을 바꾸어 시대에 발맞출것인가.
"곰들에게는 오히려 바람직한 움직임입니다." 디키가 설명을 이어갔다. 동면 전까지 계속해서 먹이를 찾을 수만 있다면 연어를 엘더베리로 바꾼다고 해서 해가 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코디액섬의 회색곰은 이미 큰 몸집으로 유명하지만, 이 조정된 식단으로 크기가 더 커질 수도 있다는 게 디키의 견해였다. "문제는 이런 행동 변화가 다른 종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냐는 것이죠." 디키가 기후변화 생물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한 가지를 강조하면서 말했다. 한 관계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가 다른 관계에 미치는 연쇄효과 말이다. 곰이 연어를 덜 먹게 되자 계곡 주변에서 연어 사체가 줄어들고, 그것을먹고 살던 다양한 청소동물이 덩달아 줄어들면서 결과적으로 바다에서 육지로 이어지는 중요한 에너지 흐름이 제한되었다. (썩은 연어는 흙을 비옥하게 해 식물의 생장을 촉진하고 질소와 인을 비롯한 각종 영양이 먹이그물 전체를 따라 순환하는 데 이바지한다. 연어가 올라오는 계곡 근처의 새나 거미의 몸에서는 연어에게서 섭취한 영양소가 검출된다.) 디키는코디액섬의 개울 및 강 주변 식생과 생물다양성이 50년, 또는 100년이 지나면 크게 달라질 거로 예상했다. 모두 곰의 입맛과 적응력이주도한 변화다. - P158

가소성의 명백한 이점을 생각한다면, 왜 어떤 좋은 가소성이 낮아지는 쪽으로 진화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답은 현재와 상충하는 과거의 안정된 기후에 있다. 지역에 따라 수천 년 이상까지도 지속되는 이 비교적 평온한 시기에는 대개 진화의 압력이 종의 전문화로 이어진다. 즉 경쟁 결과 일부 종은 효율성을 추구하도록 진화한다. 특정한 자원과 생활양식을 우점, 활용해 남보다 우위에 설 수있는 작지만 중요한 이점을 얻는 것이다. 그러자면 보통 유연성을희생해야 하는데, 마치 한 악기의 명연주가가 되면 오케스트라의 모든 파트를 다 맡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 결과는 전문화(안정된 상황에서 유용하다)와 가소성(변화하는 상황에서 유용하다) 사이의 진화적줄타기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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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강조하자면, 해양 산성도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생물의 껍데기만이 아니다. 수중 환경에서 화학은 냄새, 길찾기, 시력, 청력까지 생물의 모든 것을 조절한다. 실제로 해양 산성화가 물고기와 기타 해양 생물이 주변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을 바꾸어 짝, 또는 먹이를 찾거나 포식자를 피하는 등의 기본적인 활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한다는 다수의 연구 결과가 있다. 시스템이 너무 많이 바뀌면 감각이 혼란스러워서라도 생물은 살만한 곳이 못 된다고 느낄 것이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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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내 말의 요점이다. 책이 내 외로움을 덜어주었다. 이것이 내 말의 요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도 사람들이 외로움에 사무치는 일이 없도록 글을 쓰겠다고! (하지만 그건 나만의 비밀이었다. 남편과 만나면서도 그 얘기를 바로 털어놓지는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진지하게 여길 수 없었다. 하지만 진지했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이고,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혼자 남몰래-아주 진지하게 생각했다! 나는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할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건 어느 누구도 모른다. 그러니 그건 중요하지 않다.)
따뜻한 교실에서 보낸 시간 덕에, 그 시절의 독서 덕에, 숙제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충실히 하는 게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달은덕에 이런 것들 덕에 내 성적은 점점 완벽해졌다.  - P34

"전쟁 경험을 한 남자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단다." 엄마가말했다. "한 부류는 그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른 부류는 입을 다물지 네 아빠는 입을 다무는 쪽에 속하고."
"왜 그러는 건데요?"
"말하면 품위가 없잖니." 엄마가 말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맙소사, 누가 너를 키웠니?"
그로부터 한참 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나는 오빠로부터아빠가 독일의 한 타운에서 두 젊은 남자와 맞닥뜨린 이야기를듣게 되었다. 아빠는 깜짝 놀라 그들의 등을 쏘았지만, 그들이 군복을 입지 않은 것을 보고 군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이미 총을 쏜 뒤였기 때문에 발로 차서 한 명의 몸을 뒤집어보니 아주 젊은 남자였다. 오빠는 윌리엄이 아빠의 눈에는 그 젊은 남자처럼 보였을 거라고, 그 남자가 아빠를 조롱하며 아빠의 딸을 데려가려고 되살아난 것처럼 보였을 거라고 말했다. 아빠는 독일 청년 둘을 죽였고, 임종을 앞두고 오빠에게 그 사실을 고백했다. 그 청년들을 생각하지 않고 넘어간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고, 대가를 치르기 위해 자신도 목숨을 끊었어야 했다고 느낀다고, 내가 모르는 그 전쟁에서 아빠에게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아빠는 벌지 전투에도, 휘르트겐 숲 전투에도 참전했는데, 두 곳은 그 전쟁에서 가장 참혹했던 전투가 벌어진 현장이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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