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은 스스로가 단단한 부품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하중을, 타인의 생명이라는 무게를, 온갖 고됨과 끝없는 요구를 견딜 수 있는 부품이란 걸 어떤 자기애도 없이건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손바닥 위의 티타늄 볼트를 내려다보듯이 아무렇지 않게 말이다. 어려운 구석에 놓여도 기능할 수 있는 조각이니까, 제 역할을 하겠다고 마음먹었고 실제로 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태도는 언어가아닌 형태로 채원의 머릿속 어딘가를 흐르고 있었다. 운동선수가 결심을 매번 언어로 하지 않듯이.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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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인 ‘철판‘형의 대표선수로는 뭐니뭐니해도 역시 김근태씨 고문경관들을 꼽아야 할 것 같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김근태씨는 물론이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당한 사람은 박종철군 외에는 아무도 없는데 그 딱 한번 있었던 고문에 재수없게도 박군이 죽어나가서 ‘남영동‘이 마치 고문의 대명사처럼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문을 안 당해본 사람이라면 도저히 알 수 없을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상황묘사로 가득 찬 김근태씨의 고문피해 증언을 들으면서도 "어떻게 저렇게 거짓말을 잘할 수 있는가" 하고 감탄했다는 것이 그들의 변이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야말로 언어도단 —— 더 말할 것이없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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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침팬지의 가장 최근의 공통 조상은 어쩌면 500만 년 전이라는 가까운 시대에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침팬지와 오랑우탄의 공통조상이 살고 있었던 때보다 분명 가깝다. 그리고 침팬지와 원숭이의 공통조상이 살고 있던 때보다도 아마 300만 년이나 가까울 것이다. 침팬지와 우리 인간은 유전자의 99퍼센트 이상을 공유하고 있다. 만일 이 세계의 어딘가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섬에서 침팬지와 사람의 공통조상에이르는 모든 중간형이 발견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래서 그 스펙트럼(추이 계열)을 따라 약간의 교잡이 일어났다고 하자. 그 경우 우리의 법이나도덕상의 관습이 엄청난 충격을 입게 되리라는 사실을 누가 의심할 수있겠는가? 이러한 스펙트럼 계열 전체에 완전한 인권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게 되거나, (침팬지에게도 선거권을!) 아니면 아파르트헤이트(과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분리 정책 옮긴이) 식의 차별법 체계를 갖추고 특정 개인이 법적으로 ‘침팬지‘ 인지 아니면 법적으로 ‘인간‘ 인지 판결을내리는 재판을 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 중의 한 명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딸 때문에 고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세계는 구석구석까지 파헤쳐졌기 때문에, 이런 공상적인 상황이 현실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권리‘를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렇듯 위험한 중간형이 살아남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 순전히 행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만약 침팬지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지 않았다면 침팬지 대신 놀랄 만큼 인간과 흡사한 중간형이 살아남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P428

단속론자, 특히 엘드리지가 ‘종‘을 진정한 ‘실체‘로 취급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단속론자에게는 ‘종‘이 정의될 수 있는 것은 괴이한 중간형이 모두 죽고 없기 때문이다. 반면 진화의 역사 전체를 긴 안목에서 바라보는 극단적인 반(反)단속론자에게는 ‘종‘을 불연속적인 실체로 보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그로서는 하나의 끊어지지 않는 연속체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그의 관점에 선다면 종이란 결코 확실히 결정된 출발점을 갖지 않으며, 때때로 분명히 정해진 끝(멸종)을 가질 뿐이다. 그 이유는 흔히 좋은 결정적으로 종말을 맞이하지 않으며 점진적으로 새로운 종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단속평형론자는 종이 어느 특정 시점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수만 년 정도의 이행 기간이 필요하지만 이 기간은지질학적 기준에서 본다면 무척 짧은 것이다. 더욱이 단속평형론자는 종이명확한 종말을 가지거나, 최소한 급속하게 종말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았고 완만하게 새로운 종으로 변화하면서 소멸하는 식으로는 생각하지않았다. 단속평형론자의 견해에 따르면, 좋은 종이 지속되는 기간의 대부분을 변화 없는 정체기로 보내고 불연속적인 출발과 끝을 가지기 때문에 명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수명‘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비(非)단속론자의 경우에는 종이 생물 개체와 같은 ‘수명‘을 가진다고는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극단적인 단속평형론자가 생각하는 ‘종‘이란 실제 그 명칭에서도 나타나듯이 불연속적인 실체이다. 극단적인 반단속론자가 생각하는 ‘종‘은 끊임없이 흐르는 강을 임의적으로 한 토막씩 자르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시작과 끝의 경계를 정하는 선을 그릴 이유는 전혀 없다. - P430

단속평형론자가 생각하는 어떤 동물군의 역사, 가령 과거 3000만 년에 걸친 말의 역사를 다룬 책이 있다면 그 드라마의 등장 인물은 모든생물 개체가 아닌 종일 것이다. 단속평형론자인 저자는 종을 실재하는 ‘무엇‘으로 간주하고 그 자체가 명확한 정체성을 가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좋은 갑작스럽게 무대에 등장한 다음 홀연히 사라진다. 그리고후속 종이 그 뒤를 잇는다. 어떤 종이 다른 종에게 길을 비켜 주는 식의 천이 (遷移)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나 반단속론자가 같은 역사를 쓴다면 아마 종의 이름은 편의성을 위해서만 사용할 것이다. 시간축을 따라 살펴본다면, 반단속론자는 더 이상 종이 불연속적인 실체라고 생각하지는않을 것이다. 그의 드라마의 사실상의 주인공은 변천하는 개체군에 속한 생물 개체이다. 그 책에서는 자손에게 길을 내 주는 것은 생물 개체이고 어떤 종이 다른 종에게 길을 비켜 주는 경우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단속평형론자가 일반적인 개체 수준에서 나타나는 다윈의 자연선택에 비유되는 종 수준의 자연선택을 믿는 경향이 있다 하더라도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반면 비단속론자는 자연선택이 생물 개체보다 높은 수준에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종선택‘이라는 개념이 비단속론자에게 그다지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종을 지질학적 시간을 통해 불연속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 P431

복잡한 적응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종의 성질이 아니라 개체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종이 눈이나 심장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종에 속한 개체가 그런 기관을 갖는다. 어떤 종이 형편없는 시력 때문에 멸종했다면 그것은 필경 형편없는 시력 때문에 그 종의 모든 개체가 죽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시력의 질은 각 개체의 성질인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어떤 종류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 답은,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대한 효과의 총합으로 환원될 수 없는 방식으로 종의 생존과 번식에 영향을 주는 특성이어야 할 것이다. 앞에서 들었던 말의 가상적인 예에서는 대형 개체를 선호하는 종 내 소수파가 소형 개체를 선호하는 종 내 다수파보다 생존에 유리하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종의 생존 능력이 그 종을 구성하는 개체의 생존능력의 합과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433

분자시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한, 그리고 모든 종류의 분자가 100만년이라는 시간 단위에서 대체로 각기 고유한 속도로 변화하고 있음이 거의 확실한 한, 우리는 분자시계를 사용해서 진화라는 나무에서 뻗어나온 가지의 어느 한 지점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거의 모든진화적 변화가 분자 수준에서 중립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분류학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다. 그것은 수렴이라는 문제가 통계학이라는 무기를 통해 일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동물은 그 세포 안에 써넣어진 대량의 유전적 텍스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중립설에 따르면 그 텍스트의 대부분은 동물을 그 특유한 생활양식에 적응시키는 것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즉 그러한 텍스트는 자연선택과는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완전히 우연한 결과를 제외한다면 수렴 진화에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택에 대해 중립적인 두 텍스트의 큰 단락이 우연히 서로 닮을 가능성을 계산할 수는 있으나 그런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더욱 바람직한 일은 분자 진화의 속도가 일정하기 때문에 진화의 역사에서 어떤 분지점의 연대를 구체적으로 결정할수 있다는 사실이다. -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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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라는 길을 걷다가 유난히 불행을 모르는 듯한, 웃음기를 띤 깨끗한 얼굴들을 발견하면 갑자기 화가 났다. 불행을 모르는 얼굴들을 공격하고 싶은 기분이 되곤 했다. 왜 당신들은 불행을 모르느냐고 묻고 싶었다. 어리고 젊고 아직 나쁜 일을 겪지 않은 얼굴들이 생각보다 흔하지 않다는 건 비틀린 위로였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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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하면 다음부터는 한번 권력을 잡은 사람은 절대로 권력을 내놓지 않으려고 들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새 시대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런 소심한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도리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철저히 파헤쳐놓아야만 다음부터는 권력을 잡은 사람들도 절대로 이런 비리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될 것 아닌가."
그렇다. 권력자들에게 국민을 깔보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것, 이것이 바로 민주화이다. 지금 이 시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구시대의 비리 그중에서도 특히 권력 핵심부에서 저질러진 온갖 엄청난 비리에 대하여 철저히 진상을 밝혀내고 법의 제재를 가하는 일이다.
전경환씨가 불법적인 수단으로 모은 재산의 규모가 79억원뿐이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더욱이 전두환씨의 친인척들 중에서 부정한 수단으로 거액의 치부를 한 사람이 전경환씨 한 사람뿐이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을 밝혀야 한다. 모든 국민들이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그대로덮어두려고만 한다면 새 정부 또한 구시대를 올바로 반성하지 못하고 있다는사실을 스스로 입증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는다.
이것은 ‘전직대통령에 대한 예우‘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예우‘ 때문에 법을 굽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전두환씨의 사퇴성명의 의미는 어디까지나 그 자체로써 평가되어야 할 일이다. 나는 새 정부가 행여라도 전두환씨의 사퇴성명을 받아내는 대가로 그의 일족의 비리를 더이상 추궁하지 않고 눈감아주기로 하는 식의 부도덕한 암거래를 한 일이 없었기를 희망한다. - P187

‘인권‘이라는 일반개념 아래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권리가 유형화되어 제시되고 그 중 특히 어느 것이 강조되는가 하는 것은 당대의 억압의 역사적·사회적 특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권에 관한 각종 선언은 각기 당대의 민중적 고통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컨대 봉건적 신분질서의 질곡에 대응하여 거주. 이전의 자유와 직업선택의 권리가 선포되고 중세교회의 독단이나 전체주의적 교조의 획일적 지배가 인간성의 다양한 요구를 억압하고 사람들의 인격적 통일성을 해체시키는 파괴적 폭력으로 작용하는 곳에서는 종교의 자유와 사상 . 양심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싹튼다. 근로대중이급격한 산업화과정의 진전을 위한 한낱 소모품으로 희생되고 그들이 흘리는 땀방울이 그들 자신과 그 후손들의 인간적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아니라 타인의 자본축적을 위한 밑거름으로 되고, 말뿐인 곳에서는 그같은 ‘소외된 노동‘의 아픔을 씻어내기 위한 노동운동의 자유와 노동자들의 제반 권리의 확보가 인권문•제의 초점으로 부각되게 마련이고, 소수민족· 소수인종· 소수종교에 대한 차별이 현저한 곳에서는 동등권의 요구가 최대의 인권문제로 등장하게 되기도 한다. - P191

이처럼 외세에 의해 강요된 분단의 현실은 구조적으로 우리의 인권에 대한 적대적·파괴적인 현실이었고, 그것을 인위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모든 노력은 온갖 참혹한 인권탄압의 원천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북괴위협‘이라는 한마디는 정치적 반대의 자유를 일시에 얼어붙게 하는 마술의 주문(呪文)이었고 ‘고무·찬양‘ 또는 ‘이적행위‘의 서슬 푸른 위협은 학문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언제라도 권력이 허용하는 한계 안에 묶어둘 수 있는 족쇄가 되기에 충분하였으며, ‘좌경·용공‘이라는 딱지는 노동자들을 비롯한 기층민중들의 자주적 단결과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철통같이 봉쇄하는 봉인이되기에 충분하였다. 그 속에서 죽음과 같은 침묵은 계속되었고 이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전태일의 분신, 박종철과 권인숙의 희생, 4.19와 광주시민항쟁의 유혈 등이 상징하는 바와 같은 숱한 비극적 영웅들의 극한적인 헌신과 희생을 앞장세운 우리 국민의 장구하고 끈질긴 노력이 필요했다.
긴급조치와 광주학살의 역사적 반동기에 그 정점에 이르렀던 반인권의 물결은 1987년의 6월혁명을 분수령으로 하여 결정적으로 퇴조했다.
이제 우리는 인권을 위한 ‘전략적 공세‘의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우리들의 시민적·정치적 자유와 사회적·경제적 권리의 모든 영역에 걸쳐 인간다운 존엄에 어울리는 삶의 수준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실하고도 신속하게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최우선적인 비중을 갖는 전략적 고지는 무엇일까?
‘언론의 자유‘, 그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유롭고 책임 있는 언론의 존재야말로 인권의 승리를 약속하는 가장 확실한 담보다.
(한겨레신문, 1988. 5. 15) - P192

다음 ‘평화적 정부이양을 위한 공로‘를 참작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나는 이것을 전적으로 그르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역사에 가정을 달 수 없다고는하지만, 만약 전씨가 작년 6월에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거부하고 끝내 버티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를 한번쯤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버틸 수 있었는데도 자발적으로 내놓았건, 버틸 수 없어 부득이 내놓았건 간에 6·29선언으로 직선제 개헌과 전씨의 퇴임이 기정사실화되었을 때 많은 국민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것은 사실이다. 남의 물건을 강제로 탈취해가서 실컷 써먹을 대로 써먹다가 제자리에 갖다놓은 것이 무엇이 그리 칭찬받을 일이냐고 말할 수도있겠으나, 어쨌건 끝까지 안 돌려주려고 버티다가 쌍방간에 불필요한 희생을•초래하는 것보다 나은 것은 사실이다. 이것을 전혀 참작하지 않을 수는 없을지모른다. 그러나 이것을 두고 ‘공로‘라고까지 말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지 않은가. - P196

광주사태 문제의 경우에는 특히 사정이 나쁘다. 이 문제는 성질상 군 내부의일부 인사들이 불가피하게 연루될 수밖에 없는 문제이고, 집권세력은 이 문제를 파헤치는 것이 군을 ‘모욕‘하고 ‘자극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 양대 선거를 거치면서 ‘지역감정의 악화‘라는 현상이 초래되는 과정에서 실로 통분스럽게도 광주사태 문제마저도 마치 하나의 ‘지역문제인 것처럼 비쳐지게 되어버린 감이 없지 않고, 집권세력이 이러한 취약점을십분 활용하여 국론을 양분시키려고 할 가능성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평민당과 민주당이 서로 광주사태특위의 위원장을 맡기를 회피하는 지경에 이른 것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광주문제도 그렇긴 하지만, 제5공화국 비리문제는 구정권의 최고책임자였던 전두환 전대통령의 책임문제로 곧바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일촉즉발의 긴박감과같은 것을 자아내고 있다. 전두환씨 개인의 비리는 자연인인 그 한 사람의 문제로 그칠 수 있을지 모르나, 구체제의 권위의 상징인 그를 역사의 심판대 위에 올려세운다는 것은 구체제 가담세력 전체에게 마치 이제껏 그들을 감싸고 있던 보호방벽이 일시에 무너지는 듯한 충격적인 사태로 받아들여지게 될 수 있다. - P207

우리는 이러한 기록을 용납할 수가 없다. 민주화니 새 시대니 하는 거창한구호를 말하기 이전에,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정의감을 짓밟고 최소한의 양식과 이성마저도 여지없이 조롱하는 그같은 범죄적인 역사책에 우리 후손들의 순결한 심성이 더럽혀지는 사태를 결단코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광주사태와 제5공화국 비리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것이다.
‘정치보복‘을 원하는가? 그렇지 않다. 거듭 밝히거니와 우리가 원하는 것은무엇보다도 ‘참회‘이다. 정치보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법과 정의를 굽힌다는것과 같은 뜻이 될 수는 없고, 더욱이 ‘참회‘마저도 면제한다는 뜻이 될 수는결코 없다. 만약 모든 진실이 숨김없이 밝혀져 책임소재가 분명히 되고 거기에서 우리가 충분한 역사적 교훈을 얻게 된다면, 누가 되었든 자신의 잘못을 허심탄회하게 드러내고 통렬히 뉘우치는 사람에 대하여는 법과 정의의 질서가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얼마든지 관대한 처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진상조사는 뒷전으로 미뤄둔 채 그저 누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누가 누구에 대하여 유감스럽다는 것인지조차 분명하지 아니한, 어정쩡한 ‘유감의 표시‘만으로 사태가 마무리될 수는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철저한 진상조사‘는 우리의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요구이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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