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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책은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한 언제나 유연한 근무를 보장하는 것이다. 서핑에 매진하는 사람은 다음 주 화요일 오후 2시에 서핑을 하러 가는 계획을 잡는 게 아니라 파도와 조수와 바람이 완벽할 때 서핑을 간다. 스키는 습기가 없는 가루눈이 올 때 타러 간다. 좋은 시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언제든 바로 나설 수 있는 근무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이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이라는 이름의 근무시간 자유 선택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 P278

관리직을 구할 때는 관리자와 진짜 리더의 차이를 아는지 확인하는일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은행의 지점장은 위험을 피하고(상부의 승인이 없는 대출을 하지 않고), 전략 계획을 실행하고, 평상시와 같이 일이 굴러가게 만들어야 한다. 조리사와 주방장의 차이와 비슷하다. 두 사람모두 음식을 만들지만 주방장은 요리법을 개발하고 주방을 관리하는반면 조리사는 요리법을 따라 할 뿐이다. 리더는 위험을 감수하고,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전략계획을 세우고, 변화를 만든다.
최고의 리더십은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다. 말린다와 나, CEO의 사무 공간은 모두에게 열려 있고 우리는 늘 사람들과 만날 여유를 갖기위해 노력한다. 우리나 고위 경영진 누구에게도 특별한 주차 공간을 주지 않는다. 가장 좋은 자리는 연료 효율이 높은 차들의 몫이다. 차주인이 누구든 말이다. 말린다와 나는 카페테리아에서 돈을 내고 밥을 먹는다. 그렇지 않으면 직원들에게 회사의 것을 가져가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꼴이 될 것이다. - P290

유목사회는 상황이 나빠지고 나서야 짐을 꾸리고 거처를 옮긴다고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명한 리더는 모든 일이 잘 돌아갈 때, 누구나 느긋하고, 게으르고, 행복한 때에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안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진짜 위기가 닥쳤을 때 움직이지 못할 수도 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렇게 말했다. "기분 좋은 평화와 안정 속에서 인간의 영혼은 얼마나 빨리 죽어 가는지."
밥 딜런이 노래하듯이, "사람은 느긋하게 태어나서 바쁘게 죽어 간다."
문화와 가치관이 뚜렷한 회사에 새로 들어온 직원이라면, 평지풍파를 일으키거나 현상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있다. 물론 가치관은 절대 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모든 조직, 기업, 정부, 종교는 적응력과 회복력을 가져야 하며 새로운 아이디어와 운영방법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 P296

경고
1992년 참여 과학자 모임(Union of Concerned Scientists)이라는 일단의 사람들이 세계의 상태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성명을 내놓았다.‘ 104명의 노벨 수상자를비롯한 전 세계 1700명 이상의 과학자들이 여기에 서명했다. 다음은 이 선언문의 일부이다.

인간과 자연계는 지금 충돌 과정에 있다. 인간의 활동은 환경과 주요 자원을 무차별 공격하여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있다. 제지하지 않으면 기존의 관행들이 우리 사회, 동식물계의 미래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으로는 삶을 지속할 수 없을 만큼 현 세계를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현재의 방향이 불러올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시급하다.
이 선언문에 서명한 세계 과학계의 원로 과학자들은 이 자리에서 전인류에게 우리 앞에 놓인 것들에 대해 경고한다. 인류의 엄청난 비극을 피하고 지구상의 우리 안식처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지구와 모든 생명체를 관리하는 방식에 큰 변화가 필요하다.
인류는 종으로서의 생존, 생존할 수 있는 조건, 인간적이라는 의미와관련해 진정한 세계적 위기를 처음으로 맞고 있다. 우리가 지성과 통찰력, 신속함으로 행동에 나설 의지와 기지를 가지기만 한다면 원칙적으로과학자들이 언급한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다.

이 경고들에 대한 흔한 반응은 그 진실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보다 정교한 형태의 부정은 전문 분야를 넘어서는 문제를 걱정할 시간이나 지식이 없다고 변명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형태의 부정 뒤에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하거나 기술이 때맞춰 인류를 구해 줄 것이란 근거 없는 희망이 있다.
- 이본쉬나드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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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7월 19일 바르샤바 게토 폐허 속에 문을 연 바르샤바 강제수용소야말로 나치의 가장 끔찍한 창조물이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과정이었다. 맨 먼저 독일이 이른바 게토라 이름 붙인 바르샤바의 특정 지역에 유대인들을 밀어넣는다. 그러고는 주변 지역에서 이미 수용 인원을 한참 초과한 이곳으로 또 다른 유대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수만 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목숨을 잃게 만든다. 그 뒤 25만 명이 넘는 게토 유대인들을 트레블린카 가스실로 보내고, 이 추방 과정에서 약 1만7000명이 총에 맞아 죽는다. 이 작업이 끝나면 독일은 자신들이 만들었던 게토를 해체한다. 그것이 불러온 저항을 억누르고자 다시 약 1만4000명의 유대인을 사살한다. 그러고는 바르샤바 게토의 건물들을 모조리 불태운다. 마지막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곳에 또다시 새로운 수용소를 만드는것이다.
바로 이것이 바르샤바 강제수용소의 실체였다.  - P533

이 같은 상황은 봉기를 부추기되 도움은 주지 않는 완벽한 스탈린주의적 감각을 만들어냈다. 마지막 순간까지, 소련은 선전을 통해 도움을 약속하며 바르샤바에 봉기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봉기가 일어나자 약속했던 도움은 온데간데 없었다. 비록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바르샤바 군사 작전을 멈춘 것이라 여길 까닭은 없지만, 비스와의 교착 상태는 그의 정치적 목적에 잘 들어맞았다. 소련의 관점에서 보면 바르샤바 봉기는 독일인들, 그리고 독립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폴란드인들을 줄인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것이었다. 독일은 상당수가 겹치는 폴란드 지식인 및 폴란드 국내군 병사 제거라는 소련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을 대신 해줄 것이었다. 실제로 폴란드 국내군 병사들이 독일에 맞서 싸울 준비를 끝내자마자, 스탈린은 이들을 협잡꾼 및 범죄자 집단이라 불렀다. 훗날 소련이 폴란드를 손에 넣게 되면, 히틀러에 맞서 저항했던 이들에게는 범죄 혐의가 적용될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통제를 벗어난 무장 행동은 공산주의자들의 기반을 약화시킨다는 논리에서였으며, 오직 공산주의 정권만이 폴란드 유일의 합법적인 정권이었다. - P550

영국과 미국은 바르샤바 폴란드인들에게 의미 있는 도움을 줄 수없을 뿐이었다. 그 개인의 집요한 끈기가 전쟁의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던 윈스턴 처칠의 경우를 보자. 그는 영국의 동맹인 폴란드에게 도움은 커녕 소련과 타협할 것을 주문하고 있었다. 이미 1944년 여름처칠은 폴란드 수상 스타니스와프 미코와이치크에게 모스크바를 찾아가 그동안의 소련-폴란드 간 단교를 회복시킬 합의를 청해보라고 조언했다. 미코와이치크가 모스크바에 도착한 1944년 7월 말, 영국대사는 그에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는 말을 건넸다. 즉 폴란드 영토의 절반인 동쪽 땅을 포기하고, ‘학살의 책임은 소비에트가 아닌 독일에 있다는) 소련 버전의 카틴 대학살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미코와이치크가 알고 있던 것처럼, 루스벨트 역시 카틴에 대한 소비에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쪽을 선호했다. 바르샤바 봉기가 시작된 그 순간 미코와이치크는 모스크바에 있었다. 이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놓인 미코와이치크는 스탈린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지만, 스탈린은 이마저 거절했다. 이에 이번에는 처칠이 스탈린에게 폴란드인들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보냈다. 스탈린은 8월 16일, 자신은 그런 "멍청하고 위험한 행동"을 도와줄 의사가 눈곱만큼도 없다는 말로 이를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 P551

미국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만일 미국의 비행기가 소련 영토에서 연료를 공급받을 수 있게 되면,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폴란드로 날아가 독일 거점을 폭격하고 폴란드인들을 돕는 등의 공중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탈린이 처칠의 요청에 퇴짜를 놓은 1944년 8월 16일 바로 그날, 미국 외교관들은 유럽 동부 및 동남부 일대를 공중에서 폭격하는 ‘프랜틱 작전‘에 폴란드 지역 목표물들을 추가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러한 임무 수행을 위해 동맹 미국이보낸 연료 보충 요청을 거절했다. 당시 미국의 차관급 외교관이던 조지 케넌의 눈에 비친 이 거절은 "악의에 찬 희열과 함께 장갑을 내팽개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미국에 사실상 자신이 폴란드를 차지할것이며, 폴란드 전사들이 그곳에서 죽어 없어지길, 그리고 봉기는 실패하길 바란다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한 달 뒤, 봉기가 사실상 실패로돌아간 시점에 이르자 스탈린은 자신의 힘과 지략을 드러내 보이며역사의 한 장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바야흐로 9월 중순, 폭격이 바르샤바의 그 어떤 결과물도 전혀 바꾸지 못하게 된 그때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그는 자신의 영역 극히 일부에 미국이 폭격을 감행하도록 허가해주었다. - P552

1944년 10월 초, 힐러는 당시 바르샤바 나치 친위대 및 경찰 수장인 파울 가이벨에게 히틀러가 가장 바라는 것은 바르샤바의 완전한 파괴라고 이야기했다. 그곳에는 돌무더기 하나도 남아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힘러 본인의 소망이기도 했다. 전쟁은 패색이 짙었다. 앤트워프는 영국군의 손에 떨어졌고, 미군은 라인강을 향해다가오고 있었으며, 붉은 군대는 곧 부다페스트를 에워쌀 것이었다. 하지만 힘러의 눈에는 그만의 전쟁 목표이자 동유럽 종합 계획의 필수 요소, 즉 슬라브족 그리고 유대인의 도시 말살을 실현할 기회밖에 보이지 않았다.
분명 힘러는 10월 9일에서 12일 사이에 도시 구역별로 남은 건물하나하나까지, 바르샤바 전체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럽의 다른 어떤 수도도 바르샤바처럼 참담한 운명을 맞은 곳은없었다. 그곳은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파괴되었으며, 전체 인구의 절반을 잃었다. 바르샤바 봉기 기간 중 1944년 8월에서 9월에만 폴란드인 비전투원 약 15만 명이 독일인들 손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비슷한 숫자의 바르샤바 비유대 폴란드인들이 강제수용소에서, 게토 내부 처형지에서, 혹은 전투 과정에서 독일인들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목숨을 빼앗긴 유대인들의 숫자는 절대 수에서 이보다 높았고, 사망률은 훨씬 더 높았다. 바르샤바 유대인의 사망률은 90퍼센트 이상으로, 약 30퍼센트인 비유대인의 사망률을 한참 넘어서는 수치였다. 민스크나 레닌그라드 같은 동부 도시들만이 바르샤바와 비견될 수준이었다. 대체로 보면, 전쟁 전 약 13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도시의 주민 절반가량이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 P555

 폴란드 병사들은 자신들과 조국의 자유를 위해 독일에 맞서 싸우던 이들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불행한 운명이었다. 스탈린은 봉기 당시 훨씬 작은 규모로 싸우던 공산주의 계열의 폴란드 인민군은 기쁜 마음으로 지원했다. 폴란드 국내군이 아닌 폴란드 인민군이 봉기를 주도했다면, 그의태도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찬가지로 사실과 완전히 다른 폴란드였으리라. 폴란드 인민군이 대중적 지지를 제법 받은 것은 분명 사실이었지만, 폴란드 국내군이 얻은 것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전쟁 기간에 폴란드의 정치 지형은 여타 유럽의 점령 지역들이 그랬듯 분명 좌익 쪽으로기울었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전쟁 기간내내 폴란드는 이미영토 절반에 해당되는 동쪽 지역에서 소비에트공산주의를 몸소 겪었다. 폴란드 권력자 그 누구도 공산주의자가 되진 않을 것이었다. 바르샤바 봉기는 한 세대의 가장 영리하고 용감한 사람들 다수를 사라지게 만들었고, 이에 더 이상의 저항을 너무나 어렵게 만들어버렸다. - P557

강간의 규모는 붉은 군대가 독일 땅에 들어서면서 더 커져갔다. 그이유는 따지기 어려웠다. 원칙적으로는 평등주의적인 소련이 가장 원초적인 차원에서는 여성의 신체를 존중하지 않았다. 독일인들에 대한 실제 경험과는 별개로, 붉은 군대 병사들은 소련 체제의 산물이었다. 그것도 대개 그중 가장 악랄한 체제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약 100만명의 강제수용소 수형자가 전선에서 싸우게끔 풀려났다. 모든 소련병사는 그들의 나라처럼 가난한 나라를 짓밟은 독일의 어리석음에 치를 떠는 듯 보였다. 독일 노동자들의 집조차 그들의 집보다 더 좋았던 것이다. 병사들은 때때로 그들이 "자본가들"만 공격했다고 말했으나 그들의 시각에서는 보통 독일 농부도 말할 수 없을 만큼 부유했다. 그러나 그처럼 명백히 나은 삶을 살고 있음에도 독일인들은 소련에 쳐들어와 강도질과 살육을 자행했던 것이다. 소련 병사들은 독일남성들을 모욕하고 경멸하는 의미로 독일 여성들을 강간하는 것이기도 했다. - P571

전쟁 중(또는 심지어 그 전부터) 스스로 독일인이라 했던 많은 사람이 이제는 폴란드인을 자처했으며, 따라서 수송을 피했다(그때쯤에는 폴란드 정부가 인종적 순수성보다 노동력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누군가를 폴란드인으로 볼지 독일인으로 볼지 모호한 상황에서 전자의 주장에 호의적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앞서 스스로를 폴란드인으로 주장하던 사람들 다수도 독일인이라며 주장을 바꿨는데, 독일의 경제적 미래가 폴란드보다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 P582

폴란드 정권은 오직 동맹국 소련만이 새로 얻은 서부 변경지대를독일로부터 지켜줄 수 있으며, 미국은 거기에 기껏 지지해줄 뿐이라고 강력히 주장할 수 있었다. 1947년에 보면 폴란드인들 스스로가, 공산당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없이, "수복 영토"를 잃을 생각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고무우카가 정확하게 예기했다시피, 독일계의 추방은 "민족을 체제에 결속시켜줄 것"이었다. 명석한 공산주의 이론가였던 야쿠프 베르만은 공산당이 인종 청소의 대부분을 맡아야만한다고 여겼다. "수복 영토"는 전쟁 중 고난을 겪은 많은 폴란드인에게 더 나은 집과 더 큰 농장을 줄 것이었다. 그것은 공산주의로 가는 첫걸음인 토지개혁을 가능케 해줄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 무엇보다 그것은 동부 폴란드(소련에 병합된)에서 넘어온 100만 명의 폴란드 이주민에게 살 곳을 마련해줄 것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폴란드가 동쪽에서 많은 땅을 잃었으므로, 서쪽은 그만큼 소중해진 셈이었다. - P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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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조 과정에서 에너지를 덜 사용할 방법을 끊임없이 찾고 있지만, 지금도 운송의 환경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누구든 바로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마련했다.
첫째, 가능한 현지에서 생산을 해야 한다.
둘째, 단지 편리하다는 이유로 항공기로 배송되는 물품을 주문하려는 고객들의 의욕을 꺾어야 한다. 그 물품이 메인에서 오는 바닷가재나 캘리포니아에서 오는 신선한 샐러드라면 특히 더 그렇다. 이 물품에 추가되는 금전적 비용은 상대적으로 적을지 모르지만 환경적 비용은 엄청나다.
세계 경제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세계 경제는 오로지 값싼 화석연료를 태우는 데만 의지하고 있다. 기차나 배를 통해 물건을 1킬로미터 운송하는 데는 톤당 250BTU가 소모된다. 트럭 운송에는 톤당 2000BTU 이상이, 항공 화물은 1톤의 화물을 1킬로미터 옮기는 데 1만3465BTU 의 에너지가 든다.
카탈로그나 웹을 통해 쇼핑을 할 때는 메인에서 살아 있는 바닷가재를 주문하는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당일 배송으로 하룻밤 사이에 도착하는 바지가 정말로 필요한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 P220

파타고니아의 이미지는 인간적인 목소리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 자신들의 신념에 대해 열정적인 사람들, 미래에 영향을 주고자하는 사람들의 즐거움을 표현한다. 그 과정에서 가공이 가해지거나 인류애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 우리의 이미지가 규범을 깨뜨리고 영감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미지를 관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취하는 행동, 판매하는 제품, 우리의 과거에 비추어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만이 아니라 제품을 마케팅하고 판매하는 일반적인 사업 경로를 통해서 인식되는 이미지도 마찬가지이다.  - P241

판도를 바꾸는 제품이라면 홍보가 쉽다. 경쟁이 없는 데다 이야깃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홍보가 어려운 제품이 있다면, 다른 회사의 제품과 다를바가 없고 우리가 만들 필요가 없는 제품이기 때문이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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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우리는 소수의 공급업자, 도급업자와 가능한 많은 일을 함께한다. 이 경우 다른 회사의 능력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될 위험이있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런 상황이다. 그 회사들 역시 우리에게 의존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래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친구, 가족이 된다. 서로 이기적인 사업 파트너가 된다. 그들에게 좋은 것은 우리에게도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관계는 주의 깊게 선택해야 한다. 공급업자나 도급업자에게서 우리가 찾는 첫 번째 덕목은 작업의 품질이다. 기존의 품질 기준이 높지 않다면 비용이 아무리 매력적이더라도 그 기준이 언젠가는 올라갈 것이라는 근거 없는 가정으로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 도급업자가 하루는 월마트에 납품할 반바지를 바느질하고 다음 날은 파타고니아에 납품할 반바지를 바느질한다는 것은 사업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한 낮은 비용을 지향하는 봉제 도급업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기술이 좋은 봉제 기술자를 고용하지 않을 것이고 작업 환경과 환경적 기준에 대한 우리의 감독을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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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었던 취약계층들이 우선적으로 끌려가 사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대부분의 고아원은 8월 5일이 되자 텅 빈상태가 되었다. 이름 높은 교육자였던 야누시 코르차크는 자신이 돌보던 아이들과 함께 움슐락플라츠로 나갔다. 고개를 높이 들고 당당히 걷던 그의 양팔에는 두 아이가 안겨 있었다. 이날 코르차크와 함께 강제이주 대상이 된 6623명의 유대인 중에는 그의 동료였던 스테파니아 빌친스키를 비롯해 게토 안의 고아들을 교육하거나 돌보던 이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 P476

여인들의 경우 모두 이발 과정을 거쳐야 했기에, 그들에게는 혹여 살아남아 자신들의 말을 전해줄지도 모를 동료 유대인들과 이야기할수 있는 잠깐의 시간이 주어졌다. 루트 도르프만의 경우 그녀의 머리를 깎던 이발사로부터 그녀는 고통 없이 빠른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위안을 받으며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한나레빈손은 자신에게 배정된 이발사에게 꼭 탈출해 온 세상에 트레블렌카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 P488

유대인들은 사전에 충분히 대비한 경우에만 그것도 한정적으로만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것들을 지켜낼 수 있었다. 대개 그들은 언젠가 그것을 물물교환 또는 뇌물로 쓸 수 있기를 바라면서 각자 비교적 휴대하기 편한 귀중품을 가지고 있다면 챙겨두고자 했다. 간혹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아차린 유대인들은 지니고 있던 돈과 귀중품을 열차 밖으로 집어던졌다. 박해자들의 배를 불려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것이 트레블린카 주변에서 흔히 볼 수있었던 광경이다. 이제 죽음의 시설물 안쪽으로 들어가보자. 유대인 노역자들이 맡은 일 중 하나는 귀중품을 수색하는 것이었고, 찾아낸 귀중품 중 일부는 물론 그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확보한 귀중품들을 시설물 안팎을 드나들 수 있었던 트라브니키 대원들에게 건넸고, 그 대가로 트라브니키 대원들은 인근 마을에서 먹거리를 가져다주었다. 트라브니키 대원들은 유대인 노동자들로부터 받은 귀중품을 현지 여성들 혹은 분명 바르샤바만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매춘부들에게 주었고, 이 과정에서 성병에 감염된 이들은 다시 의사 출신 유대 노역자들에게 진찰을 받으러 찾아오기도했다. 이렇게 그곳에는 아주 특별한 그리고 서로 밀접하게 이어진 순환의 현지 경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목격자는 이를 두고 귀중품을 휘감은 타락한 "유럽"의 모습이었다고 회상했다.  - P489

1944년에 들어서자, 이미 독일은 소련 땅에서 물러난 상태였고, 이에 소련 유대인들을 사살하는 것이 더는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아울러 붉은 군대의 진군으로 라인하르트 작전과 관련된 시설들은 모두 폐쇄되기에 이르렀고, 자연스레 아우슈비츠는 그해 마지막 해결책의 최대 시행처로 떠올랐다. 60만 명쯤 되는 유대인의 거의 전부가 1944년 아우슈비츠에서 독일인들의 손에 목숨을 잃는다. 이들 대다수는 헝가리 출신 유대인이었다. 헝가리 또한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주권을 잃기 전까지 그리고 독일의 동맹이던 시기까지는 자신의 땅에 있던 유대인들을 독일의 학살 공장들로 보내지 않았다(일반적으로, 독일의 동맹국에 머물던 유대인들은 독일이 점령한 곳에 있던 유대인들에비해서는 대우나 처지가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1944년 5월 헝가리 지도부가 전쟁 중 독일에 등을 돌리려 시도한 뒤, 독일은 헝가리를 점령하고 자신의 정부를 세웠다. 새로 들어선 헝가리 파시스트 정권은 5월 유대인들을 강제추방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중 약 11만 명은 강제노역대상자로 선정되어 상당수가 살아남았으나 적어도 32만7000명은 가스실에서 살해당했다. 전쟁 기간에 약 30만명의 폴란드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고, 이들 중 약 20만 명이 목숨을 빼앗겼다. 형가리와 폴란드 유대인들을 하나로 보면, 이들이 아우슈비츠 유대인 희생자의 대다수를 점했다. - P495

아우슈비츠는 홀로코스트의 정점이었고, 그것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는 이미 독일의 손안에 있던 소련 및 폴란드 유대인 대다수가 목숨을 잃고 난 뒤였다. 홀로코스트를 통해 100만명가량의 소련 유대인이 사망했고,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인원은 이들 전체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폴란드 유대인은 홀로코스트에서 약 300만 명이 숨졌으며, 이들 중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한 이들은 고작 7퍼센트밖에되지 않는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동쪽에서는 거의 130만 명의 유대인이 대부분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또 다른 약 130만 명의 폴란드 유대인은 동방 총독부에서 라인하르트 작전 당시 독가스로 살해당했으며(트레블린카에서 70만 명 이상, 배우세츠에서 약 40만 명,
소비부르에서 15만 명, 마이다네크에서 5만 명), 이들과 별개인 35만 명 역시 제국에 병합된 지역에서 독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20만 명 외에 헤움노에서 숨진 약 15만 명). 이 밖에 남아 있던폴란드 유대인 희생자 대부분은 게토 청소 작업(약 10만 명)과 추수감사제 작전(4만2000명) 혹은 기타 소규모 작전 및 개별 처형으로 목숨을 잃었다. 여기에 더해, 이보다 더 많은 수가 게토 안에서 질병과 굶주림으로, 아니면 강제수용소에서 노역에 시달리다 숨을 거두었다."
- P496

붉은 군대는 순식간에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을 넘어 동방 총독부 루블린 지구가 있던 지역에 들어섰다. 종군기자로서 붉은 군대와 동행했던 작가 바실리 그로스만은 독일인들이 남긴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군대가 마이다네크에 있던 수용소를 발견한 것은 1944년 7월 24일이었다. 8월 초, 그로스만은 그곳에 남아있던 자신의 부족한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거대한 공포를 봤다. 트레블린카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과거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바로 폴란드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목숨을 빼앗겼다는 것, 그들의 시신은 불태워졌다는 것, 타고 남은 재와 뼛조각들은 벌판에 파묻혔다는 것이다. "흡사 바다처럼, 걸을 때마다 출렁이는 땅"을 걷던 그는 바르샤바와 빈에서 찍은 아이들의 사진, 우크라이나 자수 조각, 금발과 흑발 머리 묶음 같은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 P503

 폴란드 국내군 안에도 유대인 출신이 상당수 있었고, 그런 사실은 비록 겉으로 논의된 적이 거의 없었지만 이미 폴란드 국내군지휘관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폴란드 국내군에 있던 유대 출신의 다수는 자신을 유대인이라기보다는 폴란드인이라 여기고있었다. 다른 이들은 전쟁 시기의 바르샤바에서는 누군가가 유대인이라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에서, 자신들의 유대인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록 폴란드 국내군 내부에 반유대주의자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만에 하나 이들이 배신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1943년 1월에 접어들어 바뀐 사정은 과거 독일에 맞서 무기를 들었던 유대인들이 이제 유대인으로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은 폴란드 국내군 및 폴란드 사회에 만연해있던 반유대주의적 고정관념, 즉 ‘유대인은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는 비겁자들‘이라는 이미지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제 폴란드 국내군 바르샤바 지휘부는 유대 전투단이 자신들의 각종 총기, 탄환, 폭약 등의 무기를 숨겨둔 장소 상당수를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 P517

독일의 정책이 그래도 누군가는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주던 시기만 하더라도, 유대인 개개인의 마음속에는 그 예외가 바로 자신이길 바라는 마음이 자리했고, 이에 유대인 사회 내부가 여러 갈래로 나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러나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들 사이에 이제 독일 정책의 결론은 예외 없는 죽음뿐이라는 확신이 서자, 유대인 사회는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1943년 1월에서 4월 사이, 그들은 스스로 지하 저장고에 수없이 많은 벙커를 만들었는데, 이들 사이에는 경우에 따라 비밀 연결 통로까지 존재했다. 유대전투단은 지휘 체계를 확립했다. 총 지휘는 모르데하이 아니엘레비치가 맡고, 마레크 에델만, 이즈라엘 카날, 이츠라크 쿠키에르만(마지막에 엘리에제르 겔레르로 대체됨)이 세 곳으로 나뉜 게토 지역을 각각 맡았다. 그를 더 많은 무기를 들여왔으며 이에 맞게 단원들을 훈련시켰다. 독일의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몇몇 유대인은 즉석 폭발물 제조에 필요한 부품들을 훔쳐오기도 했다. 유대 전투단은 독일인들의 게토 습격 계획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고, 독일인이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폴란드 국내군의 일부는 놀라움과 감탄의 감정을 담아 이를 "유대-독일 전쟁"이라 불렀다. - P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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