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7월 19일 바르샤바 게토 폐허 속에 문을 연 바르샤바 강제수용소야말로 나치의 가장 끔찍한 창조물이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과정이었다. 맨 먼저 독일이 이른바 게토라 이름 붙인 바르샤바의 특정 지역에 유대인들을 밀어넣는다. 그러고는 주변 지역에서 이미 수용 인원을 한참 초과한 이곳으로 또 다른 유대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수만 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목숨을 잃게 만든다. 그 뒤 25만 명이 넘는 게토 유대인들을 트레블린카 가스실로 보내고, 이 추방 과정에서 약 1만7000명이 총에 맞아 죽는다. 이 작업이 끝나면 독일은 자신들이 만들었던 게토를 해체한다. 그것이 불러온 저항을 억누르고자 다시 약 1만4000명의 유대인을 사살한다. 그러고는 바르샤바 게토의 건물들을 모조리 불태운다. 마지막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곳에 또다시 새로운 수용소를 만드는것이다. 바로 이것이 바르샤바 강제수용소의 실체였다. - P533
이 같은 상황은 봉기를 부추기되 도움은 주지 않는 완벽한 스탈린주의적 감각을 만들어냈다. 마지막 순간까지, 소련은 선전을 통해 도움을 약속하며 바르샤바에 봉기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봉기가 일어나자 약속했던 도움은 온데간데 없었다. 비록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바르샤바 군사 작전을 멈춘 것이라 여길 까닭은 없지만, 비스와의 교착 상태는 그의 정치적 목적에 잘 들어맞았다. 소련의 관점에서 보면 바르샤바 봉기는 독일인들, 그리고 독립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폴란드인들을 줄인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것이었다. 독일은 상당수가 겹치는 폴란드 지식인 및 폴란드 국내군 병사 제거라는 소련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을 대신 해줄 것이었다. 실제로 폴란드 국내군 병사들이 독일에 맞서 싸울 준비를 끝내자마자, 스탈린은 이들을 협잡꾼 및 범죄자 집단이라 불렀다. 훗날 소련이 폴란드를 손에 넣게 되면, 히틀러에 맞서 저항했던 이들에게는 범죄 혐의가 적용될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통제를 벗어난 무장 행동은 공산주의자들의 기반을 약화시킨다는 논리에서였으며, 오직 공산주의 정권만이 폴란드 유일의 합법적인 정권이었다. - P550
영국과 미국은 바르샤바 폴란드인들에게 의미 있는 도움을 줄 수없을 뿐이었다. 그 개인의 집요한 끈기가 전쟁의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던 윈스턴 처칠의 경우를 보자. 그는 영국의 동맹인 폴란드에게 도움은 커녕 소련과 타협할 것을 주문하고 있었다. 이미 1944년 여름처칠은 폴란드 수상 스타니스와프 미코와이치크에게 모스크바를 찾아가 그동안의 소련-폴란드 간 단교를 회복시킬 합의를 청해보라고 조언했다. 미코와이치크가 모스크바에 도착한 1944년 7월 말, 영국대사는 그에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는 말을 건넸다. 즉 폴란드 영토의 절반인 동쪽 땅을 포기하고, ‘학살의 책임은 소비에트가 아닌 독일에 있다는) 소련 버전의 카틴 대학살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미코와이치크가 알고 있던 것처럼, 루스벨트 역시 카틴에 대한 소비에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쪽을 선호했다. 바르샤바 봉기가 시작된 그 순간 미코와이치크는 모스크바에 있었다. 이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놓인 미코와이치크는 스탈린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지만, 스탈린은 이마저 거절했다. 이에 이번에는 처칠이 스탈린에게 폴란드인들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보냈다. 스탈린은 8월 16일, 자신은 그런 "멍청하고 위험한 행동"을 도와줄 의사가 눈곱만큼도 없다는 말로 이를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 P551
미국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만일 미국의 비행기가 소련 영토에서 연료를 공급받을 수 있게 되면,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폴란드로 날아가 독일 거점을 폭격하고 폴란드인들을 돕는 등의 공중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탈린이 처칠의 요청에 퇴짜를 놓은 1944년 8월 16일 바로 그날, 미국 외교관들은 유럽 동부 및 동남부 일대를 공중에서 폭격하는 ‘프랜틱 작전‘에 폴란드 지역 목표물들을 추가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러한 임무 수행을 위해 동맹 미국이보낸 연료 보충 요청을 거절했다. 당시 미국의 차관급 외교관이던 조지 케넌의 눈에 비친 이 거절은 "악의에 찬 희열과 함께 장갑을 내팽개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미국에 사실상 자신이 폴란드를 차지할것이며, 폴란드 전사들이 그곳에서 죽어 없어지길, 그리고 봉기는 실패하길 바란다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한 달 뒤, 봉기가 사실상 실패로돌아간 시점에 이르자 스탈린은 자신의 힘과 지략을 드러내 보이며역사의 한 장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바야흐로 9월 중순, 폭격이 바르샤바의 그 어떤 결과물도 전혀 바꾸지 못하게 된 그때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그는 자신의 영역 극히 일부에 미국이 폭격을 감행하도록 허가해주었다. - P552
1944년 10월 초, 힐러는 당시 바르샤바 나치 친위대 및 경찰 수장인 파울 가이벨에게 히틀러가 가장 바라는 것은 바르샤바의 완전한 파괴라고 이야기했다. 그곳에는 돌무더기 하나도 남아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힘러 본인의 소망이기도 했다. 전쟁은 패색이 짙었다. 앤트워프는 영국군의 손에 떨어졌고, 미군은 라인강을 향해다가오고 있었으며, 붉은 군대는 곧 부다페스트를 에워쌀 것이었다. 하지만 힘러의 눈에는 그만의 전쟁 목표이자 동유럽 종합 계획의 필수 요소, 즉 슬라브족 그리고 유대인의 도시 말살을 실현할 기회밖에 보이지 않았다. 분명 힘러는 10월 9일에서 12일 사이에 도시 구역별로 남은 건물하나하나까지, 바르샤바 전체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럽의 다른 어떤 수도도 바르샤바처럼 참담한 운명을 맞은 곳은없었다. 그곳은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파괴되었으며, 전체 인구의 절반을 잃었다. 바르샤바 봉기 기간 중 1944년 8월에서 9월에만 폴란드인 비전투원 약 15만 명이 독일인들 손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비슷한 숫자의 바르샤바 비유대 폴란드인들이 강제수용소에서, 게토 내부 처형지에서, 혹은 전투 과정에서 독일인들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목숨을 빼앗긴 유대인들의 숫자는 절대 수에서 이보다 높았고, 사망률은 훨씬 더 높았다. 바르샤바 유대인의 사망률은 90퍼센트 이상으로, 약 30퍼센트인 비유대인의 사망률을 한참 넘어서는 수치였다. 민스크나 레닌그라드 같은 동부 도시들만이 바르샤바와 비견될 수준이었다. 대체로 보면, 전쟁 전 약 13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도시의 주민 절반가량이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 P555
폴란드 병사들은 자신들과 조국의 자유를 위해 독일에 맞서 싸우던 이들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불행한 운명이었다. 스탈린은 봉기 당시 훨씬 작은 규모로 싸우던 공산주의 계열의 폴란드 인민군은 기쁜 마음으로 지원했다. 폴란드 국내군이 아닌 폴란드 인민군이 봉기를 주도했다면, 그의태도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찬가지로 사실과 완전히 다른 폴란드였으리라. 폴란드 인민군이 대중적 지지를 제법 받은 것은 분명 사실이었지만, 폴란드 국내군이 얻은 것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전쟁 기간에 폴란드의 정치 지형은 여타 유럽의 점령 지역들이 그랬듯 분명 좌익 쪽으로기울었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전쟁 기간내내 폴란드는 이미영토 절반에 해당되는 동쪽 지역에서 소비에트공산주의를 몸소 겪었다. 폴란드 권력자 그 누구도 공산주의자가 되진 않을 것이었다. 바르샤바 봉기는 한 세대의 가장 영리하고 용감한 사람들 다수를 사라지게 만들었고, 이에 더 이상의 저항을 너무나 어렵게 만들어버렸다. - P557
강간의 규모는 붉은 군대가 독일 땅에 들어서면서 더 커져갔다. 그이유는 따지기 어려웠다. 원칙적으로는 평등주의적인 소련이 가장 원초적인 차원에서는 여성의 신체를 존중하지 않았다. 독일인들에 대한 실제 경험과는 별개로, 붉은 군대 병사들은 소련 체제의 산물이었다. 그것도 대개 그중 가장 악랄한 체제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약 100만명의 강제수용소 수형자가 전선에서 싸우게끔 풀려났다. 모든 소련병사는 그들의 나라처럼 가난한 나라를 짓밟은 독일의 어리석음에 치를 떠는 듯 보였다. 독일 노동자들의 집조차 그들의 집보다 더 좋았던 것이다. 병사들은 때때로 그들이 "자본가들"만 공격했다고 말했으나 그들의 시각에서는 보통 독일 농부도 말할 수 없을 만큼 부유했다. 그러나 그처럼 명백히 나은 삶을 살고 있음에도 독일인들은 소련에 쳐들어와 강도질과 살육을 자행했던 것이다. 소련 병사들은 독일남성들을 모욕하고 경멸하는 의미로 독일 여성들을 강간하는 것이기도 했다. - P571
전쟁 중(또는 심지어 그 전부터) 스스로 독일인이라 했던 많은 사람이 이제는 폴란드인을 자처했으며, 따라서 수송을 피했다(그때쯤에는 폴란드 정부가 인종적 순수성보다 노동력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누군가를 폴란드인으로 볼지 독일인으로 볼지 모호한 상황에서 전자의 주장에 호의적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앞서 스스로를 폴란드인으로 주장하던 사람들 다수도 독일인이라며 주장을 바꿨는데, 독일의 경제적 미래가 폴란드보다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 P582
폴란드 정권은 오직 동맹국 소련만이 새로 얻은 서부 변경지대를독일로부터 지켜줄 수 있으며, 미국은 거기에 기껏 지지해줄 뿐이라고 강력히 주장할 수 있었다. 1947년에 보면 폴란드인들 스스로가, 공산당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없이, "수복 영토"를 잃을 생각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고무우카가 정확하게 예기했다시피, 독일계의 추방은 "민족을 체제에 결속시켜줄 것"이었다. 명석한 공산주의 이론가였던 야쿠프 베르만은 공산당이 인종 청소의 대부분을 맡아야만한다고 여겼다. "수복 영토"는 전쟁 중 고난을 겪은 많은 폴란드인에게 더 나은 집과 더 큰 농장을 줄 것이었다. 그것은 공산주의로 가는 첫걸음인 토지개혁을 가능케 해줄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 무엇보다 그것은 동부 폴란드(소련에 병합된)에서 넘어온 100만 명의 폴란드 이주민에게 살 곳을 마련해줄 것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폴란드가 동쪽에서 많은 땅을 잃었으므로, 서쪽은 그만큼 소중해진 셈이었다. - P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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