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는 알 수 없지만 리사는 할머니에게 냉랭했고 확실히 적대적이었다. 나는 어쩌면 잃어본 적이 없어서 저러는지 모른다고 짐작했다. 부산에 부모님이 계신다고 했고 할머니도 있으니까, 가족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들은가족 아쉬운 줄을 모르게 마련이었다. 명절이면 섬 밭두렁에 도시 차들이 열 지어 주차되어 있고 거기서 내린 껄렁한 아이들이 자기 사촌들을 따라 마을 구경 다니는 모습들까지, 그 모든 게 마음 서늘하도록 부러운 사람도 있다는 걸.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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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리사를 생각하면 한번도 본 적 없는 LA의 한 빙상장이 상상된다. 낙원하숙을 떠나 유학을 간 열여덟의리사가 비행기에서 내린 지 48시간 만에 스케이트 부츠를 신고 묵묵히 얼음을 지치는 장면이 무릎을 굽히고 주먹을 쥔 채 빙상장 얼음 끝을 쏘아보는 리사에게는 당연히 말도, 웃음도 없다. 그렇다고 음울함이 드리워지지도 않았는데 그런 건 리사의 영향권 밖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자주 침울해지기는 했지만 리사의 우울에는 뭐랄까, 위축된 서글픔 같은 게 없었다. 내면의 커튼을 열어젖히면 흐느껴 울고 있는 여린 영혼이 아니라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에서처럼 무법자가 달려들 듯한 공격적인 우울이랄까.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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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로마는 두 천재 건축가 베르니니와 보로미니가 있었다. 두 사람은 평생 서로를 경쟁자이자 영감의 대상으로 삼아 걸작을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눈부신 실력을 바탕으로 18세기에 등장한 천정화와 계단, 분수대는 로마 바로크의 장관이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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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원서동

처음에 배운 건 수리의 종류에 관한 용어들이었다. 중수와 중창과 재건의 차이 같은 것. 면접을 끝내고 받아 온『고건축용어사전에서 가장 먼저 찾아본 말들이었다. 면접은 친구 은혜가 소개해준 자리였다. 건축사사무소인데문화재 공사 백서 기록담당자를 채용하고 싶어한다고. - P11

돌아보면 항상 어떤 장소를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어야겠다 싶은 장소들은 아예발길을 끊어서 최대한 망각할 수 있게 노력해왔지만 이일을 맡으면 그곳에 대해 생각하고 더 알게 될 것이었다. 거기에는 일년 남짓의 내 임시 일자리가 있었고 600년 전에 건축된 고궁이 있었고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구나싶어 망각을 결심한 낙원하숙이 있었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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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 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있어.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쪼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서 태엽을 드르륵드르륵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쪼끄만 기계 중의 하나와 같은 거야. - P270

여러분, 이게 바로 앞으로 벌어질 일이야. 내 이야기의 막바지에 다가왔으니까. 여러분은 이 어린 동무 알렉스와 같이 고통을 느끼면서 여기저기를 다 다녔고,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놈들이 여러분의 동무 알렉스에게 한 모든 일을 보았어. 그게 다 내가 어리기 때문이었지. 그러나 이 이야기를 끝내는 지금, 난 더 이상 어리지 않아. 알렉스는 어른이 되었단 말이야, 그렇고말고.
그리고 내가 지금 가는 곳은, 여러분, 여러분은 갈 수 없는나 혼자만의 길이야. 내일도 향기로운 꽃이 피겠고, 구린내 나는 세상이 돌아가겠고, 별과 달이 저 하늘에 떠 있을 거고, 여러분의 오랜 동무 알렉스는 홀로 짝을 찾고 있을 거야. 엄청 구리고 더러운 세상이야, 여러분. 자, 이제 여러분의 동무로부터 작별 인사를. 그리고 이 이야기에 나오는 다른 놈들에게는 커다란 야유를 엿이나 먹으라 그래. 그러나 여러분은 가끔씩 과거의 알렉스를 기억하라고. 아멘, 염병할.

서섹스 에칭엄에서,
1961년 8월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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