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월, 시간의 물살에 깎이고 깨지며 둥글어진 마음이 있었다. 실제로 이십여 년간 이연이 여러 인물에게자신의 몸을 빌려주며 깨달은 사실은 단순했다. 그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는 거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해와 갈등이, 드라마가 생겼다. 최근 들어 배역 스펙트럼이 점점 좁아짐에도 불구하고 이연은 배우로서 지금 제 나이와 경험이 싫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연은 인간을 더 연민하게 됐으니까. 이연은 그리스신화 속 영웅이나 현대의 범인 못지않게 ‘그 나머지‘ 사람들을 애정하게되었다.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이들을 실수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는 자들을, 변명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약한 이들을 깊이 응시하게 되었다. 우선 이연부터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연은 착한 사람보다 성숙한 사람에게 더 끌렸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 P24

-그게 꼭 그 아이들이 철없거나 허영심이 세거나 금융 문맹이어서가 아니라요. 제 생각에는...... 밥은 남이 안 보는 데서 혼자 먹거나 거를 수 있지만 옷은 그럴 수 없으니까. 그나마 그게 가장 잘 가릴 수 있는 가난이라 그런 것 같아요. 가방으로. - P40

그런 뒤 오대표는 이연에게 갑자기 이상한 걸 물었다.
-오늘 어땠어요?
정말 궁금한 듯도 하고 마땅한 작별인사가 떠오르지 않아불쑥 튀어나온 말 같기도 했다. 오대표의 목소리를 듣자 이연의 머릿속에 문득 학교에서 배운 서사 이론 하나가 떠올랐다.
‘작가로서 당신이 누군가에게서 뭔가 뺏고 싶다면 그에게 먼저 그걸 주어라‘라는 법칙이었다. 그래서 이연은 지금도 소설이나 연극,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너무 행복한 표정을 지을때면, 사랑이나 어떤 성취 혹은 명예 앞에서 너무 벅찬 감정을 표할 때면 어김없이 ‘저 사람 곧 저걸 잃어버리겠구나‘ 예감하곤 했다. 이연은 오대표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 어떤 주문을 외듯, 마치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과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그 사랑을 어서 잃고 싶어하는 연인처럼 달뜬 목소리로말했다.
-좋았어요.
-너무너무 좋았어요. 정말.
김과 박, 서를 등진 오대표의 얼굴 위로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다. 이연이 코트 호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 얼굴에 썼다. 집에 갈 시간이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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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파티

며칠 전 이연은 성민으로부터 ‘다음 주말에 혹 시간 있느냐‘
는 연락을 받았다. 자기가 아는 대표님 댁에서 홈 파티가 열리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요즘 방역 상황이 안 좋아 인원이 많지는 않고 대여섯 명 정도 모일 거‘라면서. ‘누나도 알고 지내기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해달라‘고 평소보다 말을 길게 했다. ‘그래도 내가 아는 사람 중 누나가 가장 유명하다‘면서.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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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진실로 한 사람의 지기만 만나도 아쉬움이 없으리라" 아아, 사람들은 늘 스스로를 보고자 하나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런즉 때로 바보나 미치광이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을 돌아볼 때야 비로소 자신이 다른 존재와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워진다. 성인은 이 도를 운용하셨기에 세상을 버리고도 번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움이 없었다. 공자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않더라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느냐‘ 하였고, 노자도 역시
‘나를 알아주는 이가 드물다면 나는 참으로 고귀한 존재로다‘ 하였다. 이렇듯이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원치 않아서 자신의 옷을 바꾸기도 하고, 자신의 외모를 바꾸거나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곧 성인과 부처, 현자와 호걸 등 세상을 하나의 노리개 정도로 간주하여, 천하를 다스리는것과도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 까닭이다. 이럴 때,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알아보는 이가 있다면,
그 자취는 드러나게 된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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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은 수염을 훑으며 성난 표정으로 말한다.
"‘의醫‘란 것은 ‘의疑‘와도 같으니, 의심스런 바를 가지고 다른사람들에게 시험을 해대는 통에 해마다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다.
‘무巫‘란 ‘무誣‘에 불과해. 귀신을 속이고 백성들을 기만하여 해마다 앗아가는 목숨이 수만은 된다. 사람들의 분노가 그놈들의 뼛속까지스며들어 있다. 그것이 변하여 금잠 누에의 한 종류으로 금빛이 나는데 그 똥을 받아 음식에 두면 사람이 죽을 수 있다니, 독이 있어 먹을 수없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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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몰이꾼이 문 밖으로 달아나자 아직 분이 덜 풀린 가게 주인이 비를 무릅쓰고 뒤를 쫓는다. 말몰이꾼이 갑자기 몸을 돌려 씩씩대며 주인 가슴팍을 밀치니, 주인은 진흙탕 속에 나뒹굴고 만다. 말몰이꾼은 다시 발을 들어 주인의 가슴을 밟고는 이내 달아나 버렸다. 주인은 옴짝달싹 못한 채 죽은 듯 엎어져 있다가 얼마 후에 일어서 아픔을 못 이기고 비틀거린다. 온몸은 진흙투성이인 데다가 분풀이 할 곳도 없었다. 씩씩거리며 다시 돌아와서는 노기 띤 얼굴로 나를 째려보는데,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다. 나는 눈을 더 내리깔고 강인한 인상을 풍기도록 자세를 고쳐 잡아 범접 못할 기세를 보여 준 후, 다시 낯빛을 부드럽게 해서 주인에게 말을 건넸다.
"하인놈이 몰상식해서 이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부디 마음에 담아두지는 마십시오."
그러자 주인이 노염을 거두고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제가 도리어 민망합니다. 어르신도 더이상 마음 쓰지 마십시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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