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어지는 회오리 속에서 돌고 돌고
매는 매잡이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산산이 해체된다. 중심이 버티지 못한다.
그저 무정부 상태가 세상에 풀려 퍼지고
피로 흐려진 조수가 풀리고 사방에서
무구함을 받드는 의식이 물에 잠겨 가라앉는다.
가장 훌륭한 이들은 모든 신념을 잃고, 가장 저열한 자들은치열한 열정으로 충만하다.

틀림없이 뭔가 계시가 임박해 있다.
틀림없이 재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재림! 그 단어를 내뱉자마자
‘세계정신‘에서 광막한 이미지가 나와
내 시야를 괴롭힌다. 어딘가 사막의 모래 속에서
사자의 몸에 인간의 머리가 붙은 형상이
태양처럼 무표정하고 무자비한 시선이
느릿한 허벅지를 움직이고, 그 주위로 온통
성난 사막 새들의 그림자가 비틀거린다.
어둠이 다시 툭 떨어진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이십 세기에 걸친 돌 같은 잠이
흔들리는 요람에 동요해 악몽으로 변했다는 걸
그리고 이제 어떤 거친 짐승들이, 마침내 도래한 그들의 시간을 맞아,
태어나 베들레헴을 덮치려 웅크리고 있는가?

- W. B. 예이츠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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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미터 떨어진 곳에 너비가 커다란 문만 한 미국참나무white ooak-쓰러져 있다. 사정없이 무너지면서 털썩 소리가 났다. 뿌리는 20미터밖까지 흙을 뿌리며 포탄 구덩이 같은 구멍을 남겼다. 또 다른 거목 설탕단풍나무도 같은 날 몰아친 봄 폭풍에 쓰러졌다. 온전한 뿌리에 불은 밑동만 남기고 줄기가 대부분 아래로 꺾였다. 똑바로 선 조각들은 연필만큼 가늘지만 내 팔이 닿지 않을 만큼 높다. 쪼개진 나무를 손으로 문지르면서 튀어나온 부분을 뽑을 때마다 낮게 웅 소리가 난다.
붉은물푸레나무와 마찬가지로 두 고목도 쓰러지면서 숲지붕에 구멍을 냈다. 둘 다 폭풍에 통나무가 갈라졌다. 이제 숲의 뭇 생명이 들어가 잔치를 벌일 것이다. 높이서 내려다보면 이런 도목倒木은 숲에 무작위로 뿌려진 점처럼 보인다. 하나하나가 숲 생명의 고갱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각 점의 생명이 점차 주변으로 퍼져 나간다.
숲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숲에는 도목 73 페타그램 (73억 톤)이 있다고 한다. 이는 숲의 5분의 1에 해당한다. 더는 생전의 모습을 알아볼수 없는 죽은 유기물이 되어 흙으로 돌아간 나무의 양은 살아있는 나무를 능가한다. - P128

기억, 대화, 연결로 가득한 존재-사람, 나무, 박새-가 죽으면 생명의 그물망이 지능과 생명의 중심축을 잃는다. 망자와 밀접하게 연결된 이들에게는 이 손실이 뼈아프다. 숲에서는 비탄의 생태학적 형상이 펼쳐진다. 나무가 죽으면 그에 의존하던 생물은 자신에게 생명을 준 관계를 잃는다. 나무의 동반자와 적 모두 살아있는 나무를 새로 찾아야한다. 그러지 못하면 죽는다. 이 관계에 간직된, 숲에 대한 이해도 대부분 사라진다. 나무가 숲의 한 자리에서 평생 습득한 지식 빛, 물,
바람, 살아있는 공동체의 성질 -도 없어진다.
하지만 죽은 나무는 자신의 몸 속과 주위에서 새로운 생명의 촉매가 됨으로써 새로운 연결과, (그럼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낸다. 이 창조 과정은 교훈적이거나 명령적이지 않다. 나무는 자신이 아는것을 전수하여 새로운 버전을 재창조하지 않는다. 죽음은 나무 안팎에서 수천의 상호작용을 만들어내는데, 그 하나하나에서 생태적 기회가 열린다. 관리되지 않고 통제되지 않는 이 다수성에서 새로운 관계에 담긴 새로운 지식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숲이 생겨난다. 죽은 나무는 피뢰침처럼 주변의 잠재력을 자신의 몸으로 끌어당기며 흩어진 것을 집중하고 강화한다. 하지만 이 벼락은 땅으로 흘러들어 사라지지않는다. 생명은 죽은 나무의 밀접한 연결들을 통해 살아가며 활력과 표현의 다양성을 증가시킨다.
우리의 언어는 나무의 이러한 내세를 깨닫는 일에 서툴다. ‘부패, 분해, 고목枯木, 죽은 나무‘ 같은 헐거운 단어로는 이 생생한 과정을 묘사할 수 없다. 부패는 가능성의 폭발이다. 분해는 살아있는 공동체의 재구성이다. 고목은 새 생명의 용광로다. 죽은 나무는 활기찬 창조성이며 ‘자아‘를 그물망에 내려놓음으로써 소생한다. - P130

삼지닥나무 속껍질을 짓이겨 물에 넣으면 식물 세포에서 섬유 가닥이 떨어져 나와 떠다닌다. 섬유소 분자 하나하나는 당의 가닥으로, 최대 15,000개가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이 가닥은 물과 히비스커스 점액에 뜬 채 서로 엮이고 짜인다. 찬물은 발효를 방지하여 점성이 있는현탁액을 만드는데, 여기서 최상의 종이가 나온다. 에치젠의 언덕들은농사에는 알맞지 않을지 모르나, 가와카미 고젠은 산지에 맞는 공예술을 전해주었다. 나무조차 따뜻한 골짜기에 비해 섬유가 길어서 질기고 윤기 나는 종이를 만들 수 있다. 에치젠은 일본 제지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다이묘, 쇼군, 정부에 종이를 독점 공급했다. 물과 섬유가담긴 이 통으로부터 일본은 문자 문화를 만들어냈다. 훗날 서양과 교역이 시작되자 종이는 유럽으로 전해졌다. 유럽의 제지술은 아시아보다 1000년 뒤처져 있었다. 렘브란트는 동판화를 찍을 때 일본 종이를 즐겨 썼다. 아마도 에치젠산이었을 것이다.
고운 체로 물을 뜨면 섬유소가 미로를 이루고 있는데, 이것을 펴면 엉킨 가닥들이 고정된다. 물에 담갔다 뺐다를 반복하여 종이 표면에 광택을 낸다. 살아있는 식물 세포 안에서 물을 붙잡아두는 모세관 작용이 식물 섬유를 빨아들이고 편다. 압착기로 누르면 물이 종이에서 빠져나온다. 젖은 종이는 수분을 잃으면서 질겨진다. 마지막으로, 물이 빠져나가면서 섬유소를 가까이 잡아당겨 식물의 원자가 다른 원자를만나 원자 대 원자로 결합된다. - P133

구조물에 개암이 얼마나 풍부하던지 발걸음을 디딜 때마다 껍데기쪼개지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개암에 들어 있는 영양소는 열매 한가운데 파묻혀 있는 작은 배아세포 덩어리에 공급하기 위해 최고만 뽑아낸 것으로, 갓 싹이 튼 개암에 필요한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비타민이 모두 들어 있다. 열매의 60퍼센트는 지방이며 나머지는 단백질과탄수화물, 약간의 섬유질이다. 사람은 견과를 두세 줌만 먹으면 오전일과에 필요한 에너지를 모두 충당할 수 있다. 개암은 보관이 쉬워서기근을 대비한 보험으로 저장해둘 수 있다. 구운 개암은 몇 개월을 보관해도 영양소가 거의 줄지 않는다. 구우면 열매의 향도 진해진다. 중석기 식단에서 개암이 다른 음식과 어떻게 어우러졌는지는 아쉽게도수수께끼다. 고고학 기록은 대부분 뒤죽박죽 쓰레기 더미에서 발굴한것이어서 개별 식단을 구체적으로 밝혀내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영국, 스칸디나비아, 북유럽 전역의 여러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이중석기 마을에서는 개암이 주식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인류사에서 이시기를 ‘견과 시대nut age‘라고 부르기도 한다. 훗날 기온이 올라가고 큰나무가 등장하자 개암나무가 줄어 식량 공급이 부족해졌다. 신석기인이 땅을 갈아 매년 곡식을 재배하는 중노동을 해야 했던 것은 즐겨 이용하던 나무와 견과 수확이 감소한 탓일 수도 있다.
중석기 화덕의 역할은 요리와 난방에 국한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화덕 주위에서 교류하고 친목을 다졌다. 현존 수렵·채집인의 문화를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모닥불가에서는 대화의 성격도 달라진다. 낮 동안의 대화 주제는 먹고사는 문제, 불만, 농담이지만, 불가에서는 상상력이 꽃피고 이야기가 탄생한다. 사람들은 사귀고 헤어지는 일에 대해, 영적 세계에 대해, 결혼과 친족에 대해 이야기한다. 불은 공동체를 담금질하고 가닥들을 합치는 듯하다. 우리의 마음은 불 소리에 특별히 적응한 것처럼 보인다. 심리학 실험에서 피험자에게 나무가 타서 갈라지는 소리를 들려주었더니 혈압이 낮아지고 사회성이 증가했다. 불 소리를 듣지 않고 보기만 하는 것은 효과가 거의 없었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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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그저 진심어린 사과만을 바랄 뿐이야,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랄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연기라도 좋으니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애처롭게 바라는 사람과, 그런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상처도 주지 않았으리라고 체념하는 사람과, 다시는예전처럼 잠들 수 없는 사람과, 왜 저렇게까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못하고 드러내라는 말을 듣는 사람과,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없다는 벽을 마주한 사람과, 여럿이 모여 즐겁게 떠드는 술자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음을 쏟아내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 그 나라에 살고 있을 것이다. - P252

새비 아주머니는 희미하게나마 의식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불위에 누워서 증조모가 말을 하면 눈짓으로 반응했다.
새비 아주머니의 시선은 증조모의 몸을 지나서, 마음을 지나서, 어쩌면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에까지 다다랐다. 그곳에서, 아직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증조모는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돌멩이를 안고서 내 동무야, 내 동무야, 말을 걸고 있다. 그런 작은 따뜻함이라도 간절해서, 하지만 사람은 너무 무서워서 증조모는 마당 구석에 쪼그려앉아서 자기 그림자를 보고 있다. - P288

한 사람의 삶을 한계 없이 담을 수 있는 레코드를 만들면 어떨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릴 때의 옹알이 소리, 유치의 감촉, 처음 느낀 분노,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과 꿈과 악몽, 사랑, 나이듦과 죽기 직전의 순간까지 모든 것을 담은 레코드가 있다면 어떨까.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삶의 모든 순간을 오감을 다 동원해 기록할 수 있고 무수한 생각과 감정을 모두 담을 수 있는 레코드가 있다면 그건 그사람의 삶의 크기와 같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가시권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안에도 측량할 수없는 부분이 존재할 테니까. 나는 할머니를 만나 할머니의 이야기를들으며 그 사실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그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종종 눈을 감고 어린 언니와 나를 만난다. 그애들의 손을 잡아보기도 하고 해가 지는 놀이터 벤치에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학교에 갈 채비를 하던 열 살의 나에게도, 철봉에 매달려 울음을 참던 중학생의 나에게도, 내 몸을 해치고 싶은 충동과 싸우던 스무 살의 나에게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배우자를 용인했던 나와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어 스스로를 공격하기 바빴던 나에게도 다가가서 귀를 기울인다. 나야. 듣고 있어. 오랫동안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 - P336

나는 오랜만에 할머니 집 소파에 앉아서 집을 둘러봤다. 텔레비전장식장 위에 처음 보는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가까이로 가서 액자를 들여다봤다. 액자 속에는 거북이 해변에서 나와 언니, 할머니와 증조할머니가 손을 잡고 서 있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할머니."
나는 싱크대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에게 액자를 들어 보였다.
할머니는 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잘 안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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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닥쳤을 때는 사방을 돌아봐도 막막할 뿐이다. 땅이라도뚫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만 들어서 한 치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행히 나는 두 눈을 지니고 있어 조금이나마글자를 알고 있으므로, 손에 한 권의 책을 든 채 마음을 달래고있노라면 무너진 마음이 약간이라도 안정이 된다. 만약 나의 눈이 비록 오색을 볼 수 있다고 해도, 책을 마주하고서 마치 깜깜한 밤처럼 까막눈이었다면 장차 어떻게 마음을 다스렸을까.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잊으려고만 한다. 그러나 슬픔이란 잊으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자기 내면 깊숙이자리 잡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슬픔을 위로하는 방법은 슬픔 속에서 찾아야 한다. 만약 기쁨이나 즐거움과 같은 다른 감정으로 슬픔을 극복하려고 한다면 거짓 감정으로 참된 감정을 덮어 버리는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내면 깊숙이 숨어 있던 그 슬픔은 언제 어디서든 다시 자신을 덮치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슬픔 속에서 슬픔을 위안할 방법을 찾으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슬픔이 닥쳤을 때 거짓 감정으로 자신을 속이지 말고 슬퍼할 수 있는 한 실컷 슬퍼하라는 말이다. 슬픔이 지극해진 후에야 비로소 슬픔을 넘어설 수 있다. 어디 슬픔만 그렇겠는가? 모든 감정이 마찬가지다. 기쁘면 실컷 기뻐하고, 즐거우면 실컷 즐거워하고, 화가 나면 실컷 화를 내고, 두려우면 실컷 두려워하고, 좋아하면 실컷 좋아하고, 미워하면 실컷 미워해야 한다. 거짓으로 자신의 감정을 속이는 것보다 차라리 어린아이처럼 진솔하게 자신의 감정을 분출하는 것이 더 낫다. 자신에게도 정직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정직한 감정이란 바로 그와 같아야 한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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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섬은 대서양에서 오는 조수와 파도의 증폭된 힘을 받아내야 한다. 밀물에다 겨울철 노리스터norenster (시속 121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를 가진 북아메리카 동해안에 영향을 주는 사이클론_옮긴이)나 늦여름 열대폭풍tropical storm의 해일이 겹치면 훨씬 넓은 땅덩어리가 물에 잠긴다. 파도 하나가 절벽이나 사구를 통째로 집어삼킬 수도 있다.
오늘 밤의 밀물에 살해당한 생물은 사발야자나무만이 아니다. 바닷물은 해초와 사구를 지나 가장 먼 사구열ridge 너머로 퍼져 나간다. 나무에게 돌아가려고 톱야자saw palmetto 덤불을 헤치고 나아가면서 이 뾰족뾰족한 식물의 이름이 왜 ‘톱야자‘인지 새삼 깨달았다. 평소에는 해변에서 20미터 떨어진 곳이었는데도 파도가 신발을 밀고 잡아당겼다. 수위가 낮아지면 민물 석호, 참나무 · 작은야자palmetto 숲, 무궁화속Hibiscus 초원이던 곳이 모래로 덮이고 흙은 소금기에 푹 젖는다. 바닷물이 한 번만 침범해도 물길이 열려 수 헥타르의 습지가 사멸하거나 넓은 잡목림이 질식당한다. 밀물의 99퍼센트는 이렇게 높이 올라오지 않지만, 나머지 1퍼센트가 물의 가장자리를 할퀴고 소금을 뱉으면 모든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밀물이 여기까지 올라오면 물 공동체는 금세해변으로, 다시 바닷물로 바뀔 것이다. 지난 150년간 이곳에서는 물이(장소에 따라 다르지만) 해마다 2~8미터씩 후퇴했다. - P87

수중청음기 hydrophone -일종의 마이크인데,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달걀 모양의 고무로 감싼다-를 대면 모래 알갱이와 야자나무 뿌리를 색다르게 경험할 수 있다. 내 발에서 은은한 콧노래 같던 소리는 물속에서 들으니 떠들썩한 아우성이었다. 그저 철벅거릴 거라고만 예상했는데, 수중청음기를 물속에 넣고서 귀청이 터지는 줄 알았다. 들통으로 벽에 물을 들이붓듯 바닷물이 밀려왔다. 당장 녹음기 음량을 줄였다. 바닷물은 대패로 나무를 깎듯 모래를 가로질렀다. 모래 알갱이의속도가 빨라지면서 음량이 비명 소리 수준으로 올라갔다.
물이 물러나면서 모래 알갱이를 끌고 가느라 와글와글 소리가 났다. 바다의 어루만짐, 가장 부드러운 물의 움직임을 이길 수 있는 모래는없다. 알갱이는 구르고 뜬다. 진흙이나 낙엽 조각 같은 가벼운 입자는 쓸려 내려간다. 흙을 붙잡고 있던 뿌리는 말끔하게 씻겼다. 물의 우월한 힘이 해변을 평평하게 고른다.
나의 맨감각이 한사리 폭풍 때 느끼던 것을 모래 알갱이는 가장 잔잔한 날씨에서도 느낀다. 딱정벌레 발과 중력이 사구 표면을 긁듯 잔파도는 모래를 갉아 해안선의 모양을 바꾼다. 폭풍의 아가리와 달리 물의 입질은 1년 내내 밤낮으로 계속된다. - P90

수천 년의 척도로 보면 모래는 물처럼 행동한다. 사구는 잔물결이고섬은 물마루가 생기는 파도다. 모래물은 바다와 바람의 힘을 받아 구르고 휘돌고 흐른다. 사발야자나무는 이 파도를 타는 서퍼다. 권파가 솟구쳤다가 무너지면 다음 너울로 이동하여 몸을 일으키고 파도의 표면을 탄다. 인간 서퍼와 달리 스스로 파도를 만들기도 하는데, 사구가생기는 원인은 물과 공기의 물리적 힘을 가진 식물 수십 종이 벌이는생물학적 행동들의 관계다. 매끈한 해변에서는 물에 씻긴 부챗잎, 뿌리, 줄기가 바람에 날리던 모래를 붙들어 떨어뜨린다. 이렇게 쌓인 모래가 바람을 교란시켜 더 많은 모래를 떨어뜨림으로써 초기 사구가 형성된다. 풀이 모래와 해초 무더기에 자리 잡으면 뿌리가 덩어리를 단단히 붙들어 사구를 만드는데, 수십 년, 수백 년을 가기도 한다.
죽은 풀과 야자나무에서 생긴 해변의 부스러기는 사구의 핵이 된다. 살아있는 야자나무가 이곳에 당도하는 것은 씨앗이 해안에 떠내려•오거나 새가 씨앗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발야자나무 서식•지가 띄엄띄엄 분포하고 부모 나무와도 멀리 떨어져 있기에 야자열매가 무척 많이 열린다. 열매 하나하나는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엄청난 개수로 희박한 가능성을 이겨낸다. 열매의 크기와 색깔은 블루베리와 비슷하다. 몇 달 동안 바다 위를 출렁거리다 해안에 밀려 올라오면 씨앗이 발아하는데, 소금물에 잠겨 있어도 멀쩡하다. 사발야자나무의 최북단 서식지인 캐롤라이나에서는 씨앗이 유난히 소금기에 강한데, 이는 이 나무들의 조상이 바다에서 왔음을 시사한다. 미국 남해안과 카리브해 너머까지 씨앗을 퍼뜨리는 것은 새와 포유류 몫이다. 울새는 해안을 따라 북아메리카를 1년에 두 번씩 오르내리는데, 녀석의부리와 위장은 야자열매를 실어 나르는 날개 달린 화물차다. 섬의 텃새들도 사발야자나무 숲을 정기적으로 찾아가 씨앗을 나른다. - P94

해변을 따라 생겨난 사구와 숲이 늘 소금기 있는 사막은 아니다. 비가 내리면 잎에서 염분이 쏠려 나가고 흙에서 씻겨 나간다. 하지만 모래는 물을 오래 붙들어두지 못하기에 사발야자나무 스스로 민물을 붙잡아야 한다. 줄기 밑동의 팽창한 엉덩이에서는 벌레 굵기의 뿌리수천 가닥이 사방으로 뻗어 있다. 이 뿌리들은 목질소 섬유와 뿌리집덕에 부챗잎처럼 튼튼하다. 굵기는 가늘지만, 해변에 쓰러진 사발야자나무의 드러난 뿌리는 아무리 세게 잡아당겨도 끊어지지 않는다. 굴을 파는 뱀 무리처럼 무성한 뿌리는 나무를 지탱하는 동시에 물을 사로잡는 역할을 한다. 민물은 뿌리를 타고 올라가 가지로 흘러든다. 여느 나무의 줄기는 죽은 조직의 기둥이 살아있는 표피로 둘러싸여 있지만, 사발야자나무 줄기는 전부 살아있는 세포다. 비가 오면 세포들이 물로 부풀어 줄기는 원통형 물탱크가 된다. 줄기는 너비가 약 0.5미터로, 길이 1미터마다 물 25리터를 저장할 수 있다. 건기에는 부잎 잎대의 좁은 통로로 물을 찔끔찔끔 내보내어 잎이 간신히 기능을 유지할 정도로만 수분을 공급한다. 덩치가 큰 사발야자나무는 줄기에 저장된 물로 몇 달을 버틸 수 있으며, 심지어 아예 뽑아버려도 살 수있다. 숲에 불이 나면 사발야자나무 우듬지가 터지고 불타 없어지는데, 대신 그 물 덕에 줄기는 살아남는다. 화재 현장을 본 사람들은 불타는 사발야자나무 숲에서 폭발의 폴리리듬을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머지 나무 좋은 모두 죽었는데도 사발야자나무만 며칠이 지나지않아 새까만 우듬지에서 새 부찻잎을 틔웠으며 줄기 안에 묻힌 살아있는 조직으로 부활했다. 늙은 사발야자나무는 물에 잠긴 소금밭에서 파도를 타며 수십 년을 살아간다. 그동안 계속해서 꽃 피우고 열매 맺고 동물을 먹이고 소금기 어린 바다의 잔해를 향해 씨앗을 퍼뜨린다. - P96

바다의 각 미생물은 햇빛을 모으거나 유기물 분자를 재생하는 등의 특수 임무를 띠고 있으며 그 밖의 임무는 대부분 공동체에 위임한다. 진화는 이 종들의 DNA를 솎아내어 각 종에서 특수 임무에 필요한 유전자만을 남겼다. 다른 임무는 심지어 세포의 생존에 중요하더라도 다른 미생물이 대신한다. 낱낱의 종이 필수 임무에 필요한 유전자를 잃고 공동체에 의존하는 이 ‘간소화‘가 가능한 것은 미생물이 서로가까이 떠다니면서 이 세포에서 저 세포로 화학물질을 손쉽게 주고받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세포는 먹이뿐 아니라 정보까지 교환한다. 분자들이 필요 사항과 자신의 정체를 신호로 보내기 때문에, 바다의 아수라장에서도 세포 간의 교환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 많은 세포는 공동체에서 분리되면 죽는다. 자신의 DNA만으로는 기본적 필요를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다 미생물의 가장 작은 유전적 생존 단위는 그물망을 이룬 공동체다. 이 방식은 효율적이어서 그물망의 각 부분이 자신의 장기에 집중할 수 있지만, 소통이 두절되면 피해를 입기 쉽다. 원유가 누출되거나 합성 화학물질이 배출되거나 바닷물의 산도가 달라져 세포들의 관계가 깨지면 미생물 공동체가 변화하는데, 이로 인한 영향은 미생물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기와 대양의 화학 조성은 이 그물망에 의존한다. 전 세계 광합성의 절반을 바다 미생물과 플랑크톤이 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다 생물에게서 들려오는 수십억의 속삭임은 전 세계 물과 공기의 화학적 상태를 좌우한다.
바다의 변화가 세포 간의 정보 교환을 어떻게 망치는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바다가 그물망을 통해 유전적 간소화를 이룬다는 사실이 발견된 것도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를 장기간 조사했더니 지난 100년간 플랑크톤 개체 수가 해마다 평균 1퍼센트씩 감소했다. 어류 개체 수도 여러 곳에서 급감하고 있다. 바다의 화학적 성질도 요동치고 있다. 이산화탄소가 물에 녹으면서 산도가 높아지고 있으며, 인간이 만든 새로운 화학물질이 하류로 떠내려와 바닷물 한 방울 한 방울속에 떠다닌다. 어떤 화학물질은 인체 세포 간의 소통을 방해하거나 단절시키는데, 바다의 세포 그물망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 P103

소로가 바닷가를 거닐다 떠내려온 시신을 발견한 사건은 지금의 미국 해안에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소로가 코드곳에 도착하기 이틀 전인 1849년 10월 7일에 아일랜드 골웨이를 출항한 브리그 범선이 폭풍우에 닻을 내리다 난파하여 많은 이주민이 익사했다. 소로는 서글픈장면을 앞에 두고 희희낙락했다. "차라리 바람과 파도에 공감했으며아일랜드인이 "더 새로운 신대륙에 이주했다고 믿었다. 그들이 육신을 출렁거리는 파도에 버려둔 채 환희에 차 내세의 해안에 입맞춤했으리라 생각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소로는 냉혈한으로 보인다. 그는 아일랜드인의 가치에 대해 이중적 견해를 가졌기에 그들의 운명에 무심했을 것이다.
당시의 이민 규모와 난파 횟수도 한몫했다. 아일랜드 대기근이 일어났을 때 100만 명 이상이 미국으로 피신했는데, 1850년에 미국 인구는 2000만 명을 갓 넘은 상태였다. 소로의 시대에는 폭풍이 몰아치는겨울 코드곳에서 두 주일에 한 척꼴로 난파 사고가 일어났다. 소로는이렇게 묻는다. "경외심이나 동정심에 왜 시간을 낭비하는가"
플라스틱 때문에 죽은 거북이나 새가 이따금 해안으로 떠내려오기는 했지만, 사발야자나무 아래서 사람의 시신을 찾지는 못했다. 우리해안은 소로의 해안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현재의 난민 수를 급증시키는 요인은 심술궂은 감자 병과 19세기 영국 정치인이 아니라 해수면 상승 등의 새로운 이유로 인한 거주지 상실이다. 숫자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기후 변화로 인한 이주민수를 정확히 조사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추정에따르면 지금까지 수천만 명이 해안선 이동, 척박해진 토양, 민물 부족등으로 거주지를 잃었으며 앞으로 이주민 수가 수억 명에 달할 것이다. 조지아에서는 이런 현상을 거의 실감할 수 없지만, 지중해, 아덴만, 안다만해, 카나리아 제도의 해안에서는 관광객들이 이주민의 시신을 발견하고 있으며 난파 생존자들이 해변의 일광욕 의자 사이로 기어간다. 21세기 영국 정치인들은 조상의 태도를 되풀이한다. "우리는 지중해에서의 조직적 수색과 구조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이는 의도하지않은 유인을 발생시켜 더 많은 이민을 부추긴다고 믿습니다." 소로가 목격한 대량 이주와 난파의 세계가 돌아왔다. - P110

붉은물푸레나무

테네시 컴벌랜드 고원 세이커래그 분지
35°12‘52.1" N, 85°54‘29.3" W

죽음 뒤에도 삶이 있지만, 이 삶은 영생이 아니다. 나무의 그물망적속성은 죽음으로 인해 끝나지 않는다. 나무가 썩으면서, 죽은 줄기와가지, 뿌리는 수천 가지 관계의 초점이 된다. 숲에 서식하는 생물 종의 절반 이상이 쓰러진 나무에서 먹이와 보금자리를 찾는다.
열대지방의 무른 나무는 세균, 균류, 곤충이 일으키는 빠르고 연기없는 불길에 자신의 몸을 화장한다. 쓰러진 나무는 10년을 넘기는 일이 드물다. 잎이 무성하고 줄기가 무거워도 기껏해야 반세기를 버틸 뿐이다. 반면에 북극 근처 습지의 산성 토양과 추운 기후에서는 부패 과정이 훨씬 오래 걸린다. 그곳에 서식하는 나무는 자신의 몸을 미생물에 내어주면서 수천 년에 걸쳐 내세의 강을 건넌다. 열대지방과 극지방의 두 극단 사이에 위치한 중간 위도로 가면, 온대림에서 쓰러진 나무는 살았던 기간만큼 죽음 과정을 겪는다.
쓰러지기 전의 나무는 자신의 몸 속과 주위에서 대화를 중개하고 조절한다. 나무가 죽으면 이와 같은 적극적 중개 행위는 중단된다. 뿌리 세포는 더는 세균의 DNA에 신호를 보내지 않고, 잎은 곤충과 화학적 수다를 떨지 않으며, 균류는 숙주로부터 아무 전갈도 받지 못한다. 하지만 나무는 이 연결을 온전히 통제한 적이 없었다. 살아있을 때의 나무는 그물망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죽음은 나무의 삶을 중심에서 밀어내지만 끝장내지는 않는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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