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모든 것이 바뀌었을 뿐이다. 한때 독실한 신자들을(그리고 믿음이 부족한 자들도 떨게 했던 교황은 1417년 겨울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이델베르크 감옥에 갇혀 있었다. 교황은 이제 지위, 이름, 권력, 그리고 품-지가문 번석금지까지 잃은 채 공식석상에서 굴욕을 당했으며, 자신의 교회에 속한 군
"주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다. ‘신성하며 무오류(無誤謬)의 콘스탄츠 공의회(公會)는 교황이 자신의 ‘혐오스럽고 부적절한 삶‘으로 인해서 교회와 기독교 전체에 스캔들을 일으켰으므로 더 이상 그는 교황이라는고귀한 자리에 맞지 않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서 공의회는 교황에 대한 모든 충성과 복종의 의무에서 신자들을 해방시켰다. 실제로 이제는 그를 교황이라고 부르거나 그의 명에 따르는 것이 금지되었다. 교회의 기나긴 역사 속에는 이미 상당한 추문이 있었지만, 이런 일은 일찍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이는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폐위된 교황은 그 자리에 없었지만, 폐위 시까지 교황의 비서였던 포조는 리가의 대주교가 금세공인에게 교황의 인장을 넘겨주며 교황의 문장과 함께 그것을 파괴하도록 엄숙히 지시하는 현장에 있었을 것이다. 교황청에서 일하던 교황의 수하들은 공식적으로 모두 해고되었고 포가 그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교황의 연락 업무도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요한네스 23세라고 불린 교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한때 그 칭호를 사용했던 남자는 다시 자신의 세례명, 발다사레 코사로돌아갔다. 포조는 이제 섬기는 주인을 잃어버린 것이다. - P30

어쨌거나 수도사는 회칙에 따라 실제로 독서를 했으며 강제된 독서는 결과적으로 이례적인 연쇄작용의 시발점이 되었다. 독서는 자의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특별히 가치 있게 여겨지거나 권장된 것도아니었다. 수도원 사회에서 독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엄숙한 의무였을 뿐이다. 그래도 독서를 하려면 일단 책이 필요했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다루어도 책은 펼칠 때마다 조금씩 낡게 되었고 결국에는 너덜너덜해졌다. 수도사들은 어쩔 수 없이 책을 새로 사거나 얻거나 해서 계속 책을 구해야만 했다. 그러나 6세기 중엽에 일어난 격렬한 고트 전쟁(Gothic Wars)과 그보다 더 비참했던 전쟁의 후폭풍을 거치면서 책 생산을 담당했던 최후의 공방들도 장사를 접었다. 책 시장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수도원은 거의 어쩔 수 없이 이미 소장하고 있는 책을 더욱 주의 깊게 보관하고 책의 소실에 대비하여 수도사들에게 책을 필사하도록 지시하는 회칙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업적인 책 시장로이 사라진 상황에서는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이집트의 파피루스 제조업자들과의 무역은 정치적 혼란 속에 이미 오래 전에 중단되었고 양피지제조업도 고사상태에 빠져 있었다. 결국 다시 한번 어쩔 수 없이 수도원은 새 회칙을 정해 수도사들에게 양피지를 만드는 힘든 기술을 익히게했고 상태가 좋은 양피지는 복원하여 재사용하도록 가르쳤다. 책의 구비나 저술을 사회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이교도 엘리트들을 모범으로 삼아 따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고, 수사학이나 문법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배움이나 토론을 높이 사지도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수도사들은 독자이자 사서, 책을 보존하는 사람들이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서방의 책 생산자가 되었다. - P40

 일반적으로 외부인은 수도원 도서관에 출입할 수 없었다. 페트라르카는 성직자였으므로 최소한 교회라는 거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도서관 출입을 호소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은 세속인이었으며 그들이 도서관 장서에 대해서 보이는 관심은 즉각적인 의심을 사기 십상이었다.
기를 꺾는 이런 장애물 목록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책 사냥꾼이 일단수도원에 도착하여 굳게 닫힌 문을 어렵게 통과하여 도서관에 들어가는데에 성공하고 실제로 뭔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해도 난관은 아직남아 있었다. 그가 발견한 책 자체에 대해서도 셈을 치러야 했다.
책은 희소하고 귀한 것이었다. 책을 소장하는 것은 수도원의 명성을 높여주는 일이었으므로 수도사들은 이 귀중품이 자신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특히 손버릇 나쁜 이탈리아 출신의 인문주의자를 이미 겪어본 경우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때때로 수도원은 그들의 소중한 책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저주의 글을 책에 담기도 했다.
한 필사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소유자로부터 이 책을 도둑질하거나 빌려서 반환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에게 고하노니, 그자의 수중에서 책이 독사로 변하여 그를 갈가리 찢게하라. 그의 몸을 마비시키고 그와 함께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파탄을 안겨라. 그가 자비를 크게 부르짖으며 헤어날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게 하라. 그리고 그가 스스로 파멸을 노래할 때까지 그의 고통에 멈춤이 없게하라. 가책의 증거로서 책벌레가 그의 내장을 파먹게 하리니, 마침내 때가 되어 그가 최후의 형벌을 받을 때가 오면 지옥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집어산키게 하라.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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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터무니없는 설명 너머에 있는 시의 핵심에는 만물을 바라보는 근대적 관점의 기본 원칙이 존재한다.
루크레티우스는 우주는 우주 공간을 무작위하게 움직이는 무수한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원자들은 햇빛 아래에서 떠다니는 먼지처럼 충돌하고, 서로 들러붙고, 복잡한 구조를 이루기도 하며 다시 부분으로 깨지기도 하면서 생성과 파괴의 부단한 과정을 끊임없이되풀이한다. 이 과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는 없다. 당신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무수한 별들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낄 때, 당신은 신들의 작품을 보고 있거나 잠시 머무는 이 덧없는세계와는 동떨어진 다른 반짝이는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당신 자신도 그 일부이며 당신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꼭 같은 원소들로 만들어진 물질계(material world)이다. 여기에는 종합적인 계획도, 신성한 조물주도, 지적인 설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속한 종을 포함한 사물은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화해온 것이다. 살아 있는 유기체의 경우에는 자연선택의 법칙을 따르지만, 기본적으로 진화는 무작위적이다. 다시 말해서, 일정 기간만이라도 우연히 살아남아번식하는 데에 성공한 종은 버티고 그렇지 못한 좋은 금세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종(種)으로서의 우리 인간, 우리가 살고 있는이 행성, 그 위로 매일 타오르는 태양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 영원불멸한 것은 오직 원자뿐이다. - P12

루크레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우주에서 지구와 그 거주민이 우주의 중심을 점하고 있다고 믿을 아무런이유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별할 이유가 전혀없다. 인간이 신에게 뇌물을 바치거나 신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불가능하고 종교적 광신이 들어설 여지도 없다. 금욕적인 자기 부인은 불필요하고, 전지전능한 힘이나 완벽한 구원에 대한 환상은 근거가 없다. 정복욕이나 자기 과시욕도 불합리하다. 그 어떤 것도 자연에 맞서 이길 수없으며 생성과 파괴, 그리고 재생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순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안전에 대한 거짓 환상을 팔거나 죽음에 대한 비논리적인 공포를 선동하는 자들에게 분노하는 한편, 루크레티우스는 일종의 해방감과 함께 이전에는 너무나 위협적으로 보였던 것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을 사람들에게 제공했다. 루크레티우스는 인류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일은 죽음을 극복하고 우리 자신도 살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도 덧없는것임을 인정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라고 썼다. - P13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유래한 철학적 전통은 신이나 국가에 대한 숭배와는 병립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니 고대 지중해 세계의 관용적인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도 일부 사람들은 이 철학을 불미스러운 사상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다. 이 전통의 신봉자들은 때때로 미치광이취급을 받았고, 불경하다거나 심지어 그저 아둔하다는 이유로 배척되었다. 기독교의 성장과 함께 이들 문헌은 가차 없는 공격을 받고 희화화되었으며 끝내는 불살라졌다. 그러나 이들에게 가장 파괴적으로 작용했던것은 무시되는 것,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망각되는 것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사라져가던 철학 사상을 명료하게 표현한 위대한 작품 하나가 끝내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의 부활이 바로 이 책의주제이다. 약간의 자투리 글모음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간접적인 인용문을 제외하면, 풍성했던 한 철학 전통에서 살아남은 모든 것이 이한권의 저작에 담겨 있다. 이 저작이 우연한 화재와 약탈, 이단이라고 판단된 사상들의 마지막 흔적까지 모조리 말살시키려는 결정 속에 결국 파괴되고 말았다면, 근대화는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었을 수도 있다. - P14

1
책 사냥꾼

1417년 겨울, 포조 브라촐리니는 독일 남부의 나무가 울창한 언덕과 계곡을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그의 목적지는 오래된 필사본의 보고(寶庫)로 유명한 수도원이었다. 오두막 문 사이로 그를 본 마을 사람들은 그가 낯선 외지인임을 단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마른 체구에 말끔하게 면도를 한 그는 만듦새는 훌륭하지만 간소한 차림새로 단순한 튜닉과 망토만을 걸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남자가 흔한 촌뜨기가 아님은 분명했다.‘ 그러나 이런 시골에서도 때때로 볼 수 있는 여느 도시 사람이나 궁정 사람 같지도 않았고 쩔렁이는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분명히 게르만족 기사도 아니었다. 사실 어느 비쩍 마른 촌놈이라도 곤봉으로 힘껏 후려치면 그를 손쉽게 제압했을 것이다. 가난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나 높은 지위를 드러내는 익숙한 징표도없었다. 그는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고 향수를 뿌린 긴 가발을 쓴 궁정의 고관대작도 아니었고, 종종 매 따위를 데리고 시골로 사냥을 나오는 귀족도 아니었다. 그리고 옷이나 머리 모양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그는 분명히 사제나 수도사도 아니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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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목적지 중 다수가 노동자들의 영역이었다. 이런 곳에서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흔한 폐지론자의 이미지처럼 머리가 하얗게 센 특권층 지식인이나 퀘이커 교도가 아니었다. 이들은 농장노동자나 장인 등 나이가 젊고 손으로 일해 먹고사는 남녀였다.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이 회상했듯, 폐지론은 강단이나 대학교보다는 공장이나 신발 가게에서 더 강력했던 민중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자기 나름대로 정의를 요구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강한 지지를 얻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급진주의는 신발 가죽 냄새와 함께 갔다". 운동의 핵심에는 흑인 운동가나 유색인 운동가들이 있었다. 세일럼의 레먼즈처럼 유명한 사람도 그중 하나였다. 크래프트 부부가 방문한 곳에서 흑인 아닌 "유색인"은 수도 적고 현존하는 기록에서도 덜 드러나지만, 이들 역시 쉬지 않고 여행하는 이 부부를 응원했다. -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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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학창 시절, 나는 학년 말이면 여름 한 철 읽을 만한 것을 찾으러 예일대학교 협동조합 상점에 가곤 했다. 주머니 사정은 썩 좋지 않았지만, 조합에서 운영하는 서점은 잘 안 팔리는 책들을 말도 안 되는 싼 값에내놓았다. 나는 상자 속에 무더기로 뒤섞여 쌓여 있는 이런 책들을 별생각 없이 훑어보면서 내 흥미를 끌 만한 뭔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곤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로 기묘한 페이퍼백 표지가 내 시선을 끌었다. 그것은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의 작품 일부로, 지면 위로 아득히 떠 있는 초승달 아래 몸통은 없이 다리 두 쌍만이 천상의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붙어 있는 그림이었다. 그 책은 루크레티우스가2,000여 년 전에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를 산문으로 바꿔 번역한 영어판(On the Nature of Things)이었다. 책값은 10센트에 불과했고, 나는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고백하건대, 물질계에 대한 고대의 설명에 대한 호기심 못지않게 표지에 끌렸던 것이 사실이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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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사이 몇 년 가운데 어느 무렵, 나는 유철인이 말한 "맺힌 원한, 좌절의 슬픔 또는 억울함을 풀어내는(...)신세 한탄" 비슷한 것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마음에서,
몸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 되풀이되는 엉킴"에 대처하기위해 수행되는 의식이지만, 여기서 자아는 마치 무당처럼 다른목소리나 매개체를 통해 말한다. "환자는 자신의 언어로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당이 환자의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 매개체는 주로 "환자를 치유하거나사회적 탈구까지" 치유한다고 여겨진다. 나는 다른 이의 목소리로 혹은 탈구된 나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기라는 매개를통해 ‘신세 한탄‘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자기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기"는 우리에게 주체성의 경험을 안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젝을 인용하자면

하지만 그 목소리가 동시에 주체의 자기 존재감과 자기 투명성을 대단히 근본적으로 해치는 건 아닐까? 나는 나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지만 내가 듣는 것은 전적으로 나 자신은 아니며 내 심장 안에 있는 이질적인 몸, 기생충이다. 그리하여 그 목소리는 산 것도 죽은것도 아니다. 그보다 그 원초적인 현상학적 상태는 자신의 죽음에서, 그러니까 의미의 퇴색에서 살아남은 유령 같은 허깨비의 상태,
살아있는 죽음의 상태이다. 

리 타지리처럼 나는 일부분이 삭제된, 진실이 아닌 이야기를 들으며 지냈고, 종국에는 새로운 이야기들, 과거 사건 혹은 만개한 환각을 아주 조금 변형한 반복들, 진실도 전부도 아닌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썼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야기는 주체에게 묶이지는 않았지만 디아스포라의 무의식 속에 살아 있는 기억의 정동적인 표현이다. - P329

이 책의 핵심적인 동기는 어머니였지만 여러분이 상상하듯 가족의 비밀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내게 많은 대가를 요구한다. 내가 말들을 무대 위에 올리자 가족 내에서 이견과 분란이 일어났지만 이 드라마가 이어졌을 때 내 글쓰기를 유일하게 지지해준 분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반대하셨더라면 이 책은 결코 세상에 나오지 못했으리라. 결국 어머니는 내가수년 동안 입밖에 내고 싶었던 그 말들을 발화할 수 있도록 허락함으로써 내 무의식을 다독이는 선물을 내게 주셨다.
어머니에게 "엄마, 난 어머니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수치스럽지않아요. 엄마는 인정받아 마땅해요"라고 말할 수 있어서 대단히 행복했다. 이 책은 책으로 남기지 않았더라면 망각되었을것들의 기억을 살아 있게 만들려는 의도에서 저술되었다. 이모든 말들이 종국에는 어머니를 그늘에서 끌어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책을 어머니에게 바친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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