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은 대답 못하면 쑥스러워하거나 창피해하거나 그래야 하잖아? 근데 얘는 그런 게 없어. 뭐랄까, 그냥 칠판이나 담장 같은 게 된 것 같아."
칠판이나 담장 같은 아이. 어쩌면 아이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일들은 외부의 두드림에도 응답을 내놓을 수 없는 심한 무기력을 만들어내니까.  - P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리사는 할머니에게 냉랭했고 확실히 적대적이었다. 나는 어쩌면 잃어본 적이 없어서 저러는지 모른다고 짐작했다. 부산에 부모님이 계신다고 했고 할머니도 있으니까, 가족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들은가족 아쉬운 줄을 모르게 마련이었다. 명절이면 섬 밭두렁에 도시 차들이 열 지어 주차되어 있고 거기서 내린 껄렁한 아이들이 자기 사촌들을 따라 마을 구경 다니는 모습들까지, 그 모든 게 마음 서늘하도록 부러운 사람도 있다는 걸. - P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도 리사를 생각하면 한번도 본 적 없는 LA의 한 빙상장이 상상된다. 낙원하숙을 떠나 유학을 간 열여덟의리사가 비행기에서 내린 지 48시간 만에 스케이트 부츠를 신고 묵묵히 얼음을 지치는 장면이 무릎을 굽히고 주먹을 쥔 채 빙상장 얼음 끝을 쏘아보는 리사에게는 당연히 말도, 웃음도 없다. 그렇다고 음울함이 드리워지지도 않았는데 그런 건 리사의 영향권 밖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자주 침울해지기는 했지만 리사의 우울에는 뭐랄까, 위축된 서글픔 같은 게 없었다. 내면의 커튼을 열어젖히면 흐느껴 울고 있는 여린 영혼이 아니라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에서처럼 무법자가 달려들 듯한 공격적인 우울이랄까. - P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7세기 로마는 두 천재 건축가 베르니니와 보로미니가 있었다. 두 사람은 평생 서로를 경쟁자이자 영감의 대상으로 삼아 걸작을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눈부신 실력을 바탕으로 18세기에 등장한 천정화와 계단, 분수대는 로마 바로크의 장관이다. - P2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장
원서동

처음에 배운 건 수리의 종류에 관한 용어들이었다. 중수와 중창과 재건의 차이 같은 것. 면접을 끝내고 받아 온『고건축용어사전에서 가장 먼저 찾아본 말들이었다. 면접은 친구 은혜가 소개해준 자리였다. 건축사사무소인데문화재 공사 백서 기록담당자를 채용하고 싶어한다고. - P11

돌아보면 항상 어떤 장소를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어야겠다 싶은 장소들은 아예발길을 끊어서 최대한 망각할 수 있게 노력해왔지만 이일을 맡으면 그곳에 대해 생각하고 더 알게 될 것이었다. 거기에는 일년 남짓의 내 임시 일자리가 있었고 600년 전에 건축된 고궁이 있었고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구나싶어 망각을 결심한 낙원하숙이 있었다. - P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