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주자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버렸네
-자크 프레베르, 「새의 선물」 전문 - P5

프롤로그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쥐를 보고 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이 카페는 정원에 조명이 밝혀져 유럽풍의 화려한 실내장식과 함께 더욱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냈다. 무심코 창밖을 향해 있던 시선 속으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쥐가 들어왔다.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막 입술 사이로 포크를 빼내려는 참이었다.
처음에는 잘 손질된 정원수 사이로 뭉클뭉클 움직이는 저 더러운 잿빛 털뭉치가 무엇인가 싶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연한 수피에 쉴새없이 이빨을 갉작거리고 있던 쥐와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머리를 꺼덕일 때마다 그 반동으로 가지 꼭대기가 둔하게 휘청일 만큼 살찐 놈이었다. - P9

환부와 동통을 분리하는 법

내가 왜 일찍부터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내 삶이 시작부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삶이란 것을 의식할 만큼 성장하자 나는 당황했다. 내가 딛고 선 출발선은 아주 불리한 위치였다. 더구나 그 삶은 내가 빨리 존재의 불리함을 깨닫고 거기에 대비해주기를 흥미롭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차피 호의적이지 않은 내 삶에 집착하면할수록 상처의 내압을 견디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다. 아마 그때부터 내 삶을 거리 밖에 두고 미심쩍은 눈으로 그 이면을 엿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나는 삶의 비밀에 빨리 다가가게 되었다.
엄마가 죽은 것은 내가 여섯 살 때라고 한다. 내게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단 한 가지도 없다. 그래서인지 그리움도 없다. 엄마를 떠올리게 하고, 내게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는 것은 오히려 엄마의 존재를 한사코 감추려 하는 할머니이다. - P15

우리집 어른들은 모두 나를 귀여워한다. 장군이 엄마는 내가 부모 없이 외할머니 밑에서 자라는 것이 불쌍해서라고 하고 광진테라 아줌마는 공부를 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화사진관 아저씨는 인사성이 밝아서 그렇다고 하는가 하면 또 뉴스타일양장점의 시다 미스 리 언니는 내가 속이 깊어서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어른들이 나를 귀여워하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자기들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밀을 저당잡혀 있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귀여워할 수밖에없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런 비굴함이 있다는 것을 진작에 알았다.
내가 어른들의 비밀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어린애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서 ‘어린애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자기들이 다루기 쉽도록 어린애를 그저 어린애로만 보려는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어린애로 보이기 위해서는 귀엽다거나 영리하다거나 하는 단순한 특기만으로 충분하다.
나처럼 일찍 세상을 깨친 아이들은 어른들이 바라는 어린이 행세를 진짜 어린이 수준밖에 못 되는 아이들보다 훨씬 더 그럴듯하게 해낸다. 그래서 어른들 비밀의 겉모습은 조금 엿봤을망정 그 비밀의 본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행동한다. 그것이 어른들을 얼마나 안심시키면서 또한 귀여움을 촉발시키는지 모른다. 비밀이란 심술궂어서 자기를 절대 보이기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누군가와 공유되어지기를 간청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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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쯤 지난 어느날 밤, 내가 유난히 늦게까지 그곳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방충망의 그 벌어진 틈으로 고양이가 들어왔다. 그러나 문제는 내 옆에 이미 고양이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다시 그 쪽을 쳐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스컹크였다. 게다가 그 스핑크는 포치의 유일한 출입구를 가로막고 있어서 내가 도망칠 수가 없었다. 곧장 테이블로 다가오는 스컹크를 보며 나는 녀석이 매일 밤 이맘때쯤 테이블 주변의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으려고 이곳을 어슬렁거렸음을 알았다. (아내가 전화를 받으러 가거나 그레이비소스를 더 가져오려고 자리를 뜬 사이에 아이들과 내가 벌이는 ‘야채 올림픽‘ 놀이 때문에 음식이 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가 많았다.)
스컹크가 분사하는 액에 맞는 것은 피를 흘리거나 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제외하고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다. 스컹크 냄새는 멀리서 맡으면 그다지 고약하지 않다. 오히려 묘하게 정이 가는, 매력적이라고까지는 할 수는 없지만 역하지도 않은 냄새다. 멀리서 스컹크 냄새를 처음 맡은 사람은 누구나 ‘그리 나쁘지 않은걸. 별것도 아닌 것 갖고왜들 그렇게 야단법석이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맡으면, 혹은 스컹크가 내뿜는 액을 맞으면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 다른 누군가로부터 춤 신청을 받을 수 있다. 스컹크 냄새는 독하고 불쾌할 뿐만 아니라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냄새를 없애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토마토 주스로 온몸을 씻어내는 것이지만, 토마토 주스 수십 리터를 들이부어도 냄새가 조금 가실까말까 한 정도다. - P140

2미터 반쯤 떨어진 곳의 스컹크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동안 이 모든 것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스컹크는 한 30초쯤 코를 킁킁거리며 테이블 밑을 돌아다니더니 들어온 곳을 통해 조용히 다시 나갔다. 포치를 떠나면서 스컹크는 ‘나는 줄곧 당신이 거기 있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내게 액을 분사하지는 않았다. 그점, 나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다음날 나는 방충망의 벌어진 곳을 압정으로 붙여놓았지만 고마움의 표시로 계단에 고양이 먹이를 한 줌 놓아두었고, 한밤중에 스컹크가 나타나서 그것을 먹어치웠다. 그 후로 2년 동안 나는 여름이면 스컹크가 와서 먹을 수 있게끔 정기적으로 고양이 먹이를 계단에 놓아주었다. 올해에는 스컹크가 다녀가지 않았다. 작은 포유동물들 사이에 전염병이 돌아서 스컹크와 너구리, 심지어 다람쥐까지도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는데, 이는 15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자연계의 순환 현상이다.
우리 집에 찾아오던 스컹크도 죽은 것 같다. 1, 2년 뒤에 다시 스컹크의 수가 늘어나면 또 다른 스컹크가 찾아오리라. 그러기를 바란다. 스컹크로 살아간다는 것은 친구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 사이에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죽은 스컹크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또 부분적으로는 아내한테 들키는 바람에 야채 올림픽 놀이를 그만두었다. 비록 금메달은 내 차지가 될 게 확실했지만.
1/2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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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영웅주의와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송 지점에 정시에 도착하고, 제 발로 처형장까지 걸어가며, 자신의 무덤을 파고, 옷을 벗어 가지런히 쌓아놓고, 총살당하기 위해 나란히 눕게 한) 복종적순응성을 대비시키는 것은 좋은 지적처럼 보였다. 이것이 가치 있다고생각한 검사는 중인들마다 "왜 당신은 저항하지 않았습니까?" "왜 당신은 기차에 탔습니까?" "1만 5000명의 사람이 거기에 서 있었고 수백 명의 간수들만 당신과 마주하고 있는데 왜 당신은 폭동을 일으키거나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았습니까?"라고 질문하면서 이 점을 정교하게 다듬어 갔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슬픈 진실은 초점이 잘못 잡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비유대인 집단이나 민족들도 이와 다르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헨발트 수용소에 수용된 다비드 루세는, 아직 그 사건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다고 할 수 있는, 16년 전에 모든 집단수용소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려진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비밀경찰의 승리를 위해서 고문당한 희생자들이 저항 없이 스스로 교수대에 목을 매고, 그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더 이상 긍정하지못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포기하도록 요구되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그저 일어난 것은 아니다. 아무런 까닭 없이, 단순한 가학성 때문에 비밀경찰 요원들이 유대인의 패배를 요구한 것은 아니다. 교수대로 올라가기 전에 희생자를 이미 파괴하는 데 성공한 체제가•••••• 한 민족을 노예 상태로 만드는, 다른 것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최상의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안다. 복종하는 가운데, 바보처럼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이 인간의 행진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없다. - P60

아데나워 수상은 당황스러운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견했다. 재판이 ‘모든 공포를 또다시 불러일으킬‘ 것이며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반독일감정의 물결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염려를 피력했는데, 이는 실제로 그랬다. 이스라엘이 재판을 준비하는 10개월 동안 독일은 자국 내에 있는나치 전범들을 색출하고 기소하는 데 전례 없는 열정을 보임으로써 재판이 가져다 줄 예견 가능한 결과에 대해 바쁘게 대비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독일 당국이나 중요한 여론의 목소리는 아이히만의 양도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는 모든 주권 국가가 자국의 범죄자에 대해 한재판에 참여할 권리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명백한 수순처럼 보인다(이스라엘과 독일 사이에는 범죄인 양도 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아데나워 정부의 공식입장은 타당하지 않다. 그 의미는 단지 이스라엘이 범인 양도를 강요받을 수 없다는 것뿐이다. 헤센 주의 대법원장인 프리츠 바우어는 이 점을 지적하고 본에 있는 연방정부에 대해 범죄인 양도 절차를 시작하도록 신청했다. 이 문제에 대한 바우어의 정서는 한 사람의 독일계 유대인의 정서에 불과했을 뿐, 독일의 여론은 여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의 신청은 본에서 거부되었고,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지지를 전혀 받지도 못했다. 예루살렘에 보내진 서독 정부의 참관인이 표명한 범인 양도 포기의 또 다른 이유는 독일이 사형제도를 폐지했으며, 따라서 아이히만이 응당받아야 할 형량을 받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독일 법정이 나치스의 대량학살자들에게 보여준 관대함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주장을 불성실한 것이라고 의심하기는 어렵다. 물론 독일에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할 때 초래될 가장 큰 정치적 위험은 얀센이 지적한것처럼 범죄 의도(mens rea)가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을 수있다는 점일 것이다). - P67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과 마리아 셰펄링 (처녀 시절의 성)의 아들 오토아돌프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저녁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에서체포되어 9일 후에 이스라엘로 압송, 1961년 4월 11일에 예루살렘 지방법원으로 재판받기 위해 이송된 뒤 15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다른사람과 함께‘ 그는 유대인에 대한 범죄, 인류(humanity)에 대한 범죄및 나치스 통치 기간,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그에 대한 재판의 근거가 되는 1950년에 입안된 나치스 및 나치 협력자 (처벌법은 "이러한•••••• 범죄 가운데 하나라도 범한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각각의 죄목에 대해 아이히만은
‘기소장이 의미하는 바대로는 무죄‘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는 자신이 유죄라고 생각했는가? 그에 따르면 장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피고자 대질신문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중 가장 긴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피고도 검찰 측도, 또는 심지어는 세 사람의 판사 중 그 어느 누구도, 이 당연한 질문을 그에게 물어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이히만이 고용하고 (피고인을 위한 모든 변호사 비용이 전승국 법원에 의해 지불된 뉘른베르크 재판의 전례를 따라서) 이스라엘 정부가 비용을 지불한 변호사 쾰른의 로베르트 세르바티우스(Robert Servatius of Cologne)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아이히만은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고 이 질문에 대답했다. 이 대답은 피고인 자신에 의해서는 확인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피고 측이 피고로 하여금 무죄 주장을 하게 한 이유는 피고가당시 존재하던 나치 법률 체계 하에서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그가 기소당한 내용은 범죄가 아니라 ‘국가적 공식 행위이므로 여기에대해서는 어떤 다른 나라도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한 주권국가는 다른 주권국가에 대해 재판권을 갖지 않는다[par in parem non habetjurisdictionem)), 복종을 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고, 세르바티우스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는 "이기면 훈장을 받고 패배하면 교수대에 처해질" 행위들을 했을 뿐이라는 것 등이었을 것이다(그래서 1943년에 괴벨스는 "우리는 역사책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서 기록되든지 또는 가장 흉악한 범죄자로 기록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스라엘 밖에서는 (라이니셔 메르쿠어에서 ‘형법 재판을 통해 역사적 범죄와 정치적 범죄를 대처할 가능성과 그 한계‘에 대한 까다로운 문제‘라고 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바바리아에서 열렸던 가톨릭 아카데미 회의에서) 세르바티우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이히만 재판에 유일한 합법적인 형사문제는 그를 체포한 이스라엘인에 대한 재판을 선포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이 주장은 그가 이스라엘에서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반복적인 발언과는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 재판 과정을 뉘른베르크재판과 호의적으로 비교하면서 ‘위대한 정신적 업적‘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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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유형의 모텔은 조야한 가구들을 들여놓은 형편없는 모텔로, 우리 가족은 늘 이런 호텔에 묵곤 했다. 역사상 위대한 구두쇠 중의 하나인 우리 아버지는 잠만 자러 들어가는 방에 돈을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우리는 대체로 말이 뛰다 나왔나 싶을 정도로 푹 꺼진 침대에 냉방장치라곤 열린 창문이 전부고, 한밤중에 가구 부서지는 소리와 ‘총내려놔, 비니,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할게‘라고 말하는 여자의 째지는 듯한 목소리를 듣고 잠이 깰 것만 같은 모텔 방에서 야영을 해야 했다. 이런 경험들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거나 불합리하게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영화 <싸이코>에서 재닛 리가 모텔 욕실에서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고 ‘그래도 저기엔 샤워 커튼이라도 있네‘ 하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 모든 것이 고속도로 여행을 예측 불가능한 흥미로운 것으로 만들어준다. 하루의 끝에 얼마만큼 편안한 잠자리를 얻게 될지, 어떤 소소한 즐거움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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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얼굴에서 나는 보았다. 얼굴이 늘 진실을 말하진 않는다. 안 그런가? 적어도 나에겐 아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는말을 귀 기울여 듣고, 그들이 쓰는 것을 읽는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증거이자 우리의 확신을 뒷받침해줄 증거이다. 그러나 말과 표정이 정반대일 때, 우리는 그의 얼굴을 낱낱이 살핀다. 눈빛에 감도는 교활함, 번지는 홍조, 안면근육의 불가항력적 경련. 그러면 우리는 알게 된다. 위선이나 거짓 주장이 밝혀지고, 진실이 우리 앞에 명백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건 달랐다. 더 단순했다. 모순은 전무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알았다. 두 눈, 그 눈에 담긴 빛깔과 표정, 그리고 두 뺨, 병색이 깃든 두 뺨과 그 아래 광대뼈를보고 알았다. 확증은 그의 키에서 얻었다. 그 키에 맞게 자리잡은 골격과 근육이 확실한 증거였다. 그는 에이드리언의 아들이었다. 출생증명서나 DNA 검사 결과 같은 건 필요치 않았다. 나는 보았고, 직감했다. 물론 생일은 딱 맞아떨어졌다. 얼추 그 나이쯤 될 것이다. - P234

하지만 그건 사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들에게 상처를 주려는 심사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사실 마음 한켠으론너희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길 바라고 있어. 이유인즉 내가 시간이 대대손손 이어지며 복수를 가한다는 걸 굳건히 믿는 인간이라 그래. 그러나 복수의 과녁은 그 조준이 정확해야 하는 법. 너희 둘이 딱 그에 해당된단 말이지.‘ 또 이렇게도 썼다. ‘그러니 너희에게 그런 걸 바랄 수는 없는 노릇. 너희의 양해를구하며 시어를 동원해보자면, 순진무구한 새 생명으로 하여금 자신이 너희의 운우지정으로 인한 결실임을 깨닫는 짐을지운다는 건 불공정한 처사일 테니 말이야.‘ 회한remorse 이란말은 어원적으로 한 번 더 깨무는 행위를 뜻한다. 회한의 감정은 그와 같다. 내가 썼던 말을 다시 읽을 때 나를 깨무는 이가얼마나 그악스러웠을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내가 내뱉었는지조차 잊고 있었던 그 말은 가히 고대의 저주처럼 여겨졌다. 물론, 나는 저주 같은 건 믿지 않는다. 그랬었다. 말이 씨가 된다느니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도 나중에 일어날 일을 명명하는행위 자체 - 콕 집어 나쁜 일이 일어나길 바라자 실제로 똑같이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에는 여전히 몸이 오싹해질 만큼 초자연적인 데가 있다. 저주를 퍼부었던 젊은 시절의 나와 그저주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목도한 노년의 내가 느끼는 감정은 사뭇 다르다는 사실. 이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서로 무관하다. - P236

인생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은 무엇인가, 신중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 이긴 적도, 패배한 적도 없이, 다만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았던가. 흔한 야심을 품었지만, 야심의 실체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것을 위해 섣불리 정착해버리지 않았던가. 상처받는 게 두려웠으면서도 생존력이라는 말로 둘러대지 않았던가. 고지서 납부를 하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았을 뿐, 환희와 절망이라는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설에서나 구경한 게 전부인 인간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자책을 해도 마음속 깊이 아파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던가. 이 모든 일이 따져봐야 할 일이었고 그러는 동안 나는 흔치 않은 회한에 시달렸다. 그것은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된 고통, 그리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느끼게 된 고통이었다.
"나가!" 시속 삼십 킬로미터로 연석 위에 차를 세운 후 베로니카는 일갈했다. 이제야 나는 그 말이 품고 있는 더 폭넓은 울림을 이해했다. 내 인생에서 꺼져버려. 너는 내 인생에서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은 첫 번째 인간이야. 네가 만나자고 했을 때 승낙하는 게 아니었어. 점심 약속도 마찬가지고, 널 데리고 내 아들을 보러 간 것은 더더욱. 나가, 나가라고! - P242

"에이드리언 아버님의 친구 분이시라면—"
"그리고 어머니의 친구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이해를 못 하고 계시는 것 같네요." 그래도 그는내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다는 말을 그나마 달리 표현해준 셈이었다.
"그런가요?"
"메리는 에이드리언의 어머니가 아니에요. 누나예요. 에이드리언의 어머니는 반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에이드리언은감당을 못 할 정도로 슬퍼했어요. 그래서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극복을 못하고 있어요."
무심히, 나는 감자칩 하나를 먹었다. 또 하나를 먹었다. 소금간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래서 통통한 감자칩은 별로다. 감자를 덩이째 씹는 것 같다. 얇게 썬 감자칩은 겉이 더 파삭파삭하면서 소금간도 알맞게 밴다. - P252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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