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맑은 정신으로 헛것을 볼 만큼 심신미약자도 아니고 오컬트 신봉자도 아니며 술에 취하지도 않았어요. 예, 물론 생맥, 마시긴 했어요, 오백 딱 한 잔. 과일 안주랑 소시지볶음이 나왔지만, 나는 이름이 좋아 팀장일 뿐 갑과 을의 관계를 성사시키거나 최소한 부드럽게 조율하기 위한 접대 자리란걸 망각하지 않기 위해 접시에는 젓가락 한 번 가져가지 않았어요. 그래도 우리 기획안이 채택될지 모르는, 아니 꼭 간택받아야만 하는 중요한 자리에서 상대방 기분 맞춰가며 오백으로 끝났으면 양호하지 않은가요. 알코올 분해 효소가 아주 없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그 정도로는 문제없어요. 끝까지 내 허벅지 한번 만져보겠다고 온갖 수작을 다 걸던 거래처 전무의 손을 어떻게든 기분 상하지 않게 떼어내려 애썼고, 아니 완전히 팩 소리 나게 떨쳐내지는 못하죠, 그랬다간 기획이고 뭐고 다 날아갈 판국인데. 귀싸대기야 맘속으로나 수십 번 왕복으로 날려줬지, 아무튼 그 작자를 콜택시에 태우고 90도로 허리를 꺾을 만큼의 분별력도 남아있었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요. 평소 고객이나 거래처를 접대할 때 삼천은 기본이고 양주 회오리도 불사하는내가 오늘은 딱 오백에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는 게 핵심이에요. - P7
남자가 등을 돌릴 때, 나는 틀림없이 보았어요. 뇌수까지얼어버릴 것 같았지만 그 순간 정신은 갓 세공된 거울만큼맑고 감각은 사포로 버린 송곳처럼 예리했어요. 그만큼 충격이었거든요. 어깨를 살짝 덮는 길이의 젖은 머리카락이목에 들러붙어서 그의 귀 뒤에 호모양의 홈이 팬 것이 보였어요.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호가 덜 닫힌 마가린 통 덮개처럼 살짝 벌어지며 물이 조금 흘러내렸지요. 착각이 아니냐고요. 계속 물속에 있던 사람인데, 그냥 목이 젖었던 건지 갈라진 틈에서 새어 나온 물인지를 어떻게 아느냐고요, 그것도 어둠 속에서. 저도 처음에는 보통의 상처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거라면 그만한 크기와 깊이에 당연히 피가 흐르고 더구나 물과 섞인 피가 아래로 번졌겠지요. 생긴 지 오래되어 피부에 완전히 자리 잡은 상처라면 그렇게 뚜껑을 열었다 닫듯이, 입술처럼 벌어지거나 움직이지 않는다고요. 아시겠어요? 거기에 달빛을 받은 그의 목은 사람의 살결이라기보다는 섬세한 그물무늬를 가진 비늘처럼 빛나 보였다는 사실도 보탤게요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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