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영웅주의와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송 지점에 정시에 도착하고, 제 발로 처형장까지 걸어가며, 자신의 무덤을 파고, 옷을 벗어 가지런히 쌓아놓고, 총살당하기 위해 나란히 눕게 한) 복종적순응성을 대비시키는 것은 좋은 지적처럼 보였다. 이것이 가치 있다고생각한 검사는 중인들마다 "왜 당신은 저항하지 않았습니까?" "왜 당신은 기차에 탔습니까?" "1만 5000명의 사람이 거기에 서 있었고 수백 명의 간수들만 당신과 마주하고 있는데 왜 당신은 폭동을 일으키거나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았습니까?"라고 질문하면서 이 점을 정교하게 다듬어 갔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슬픈 진실은 초점이 잘못 잡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비유대인 집단이나 민족들도 이와 다르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헨발트 수용소에 수용된 다비드 루세는, 아직 그 사건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다고 할 수 있는, 16년 전에 모든 집단수용소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려진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비밀경찰의 승리를 위해서 고문당한 희생자들이 저항 없이 스스로 교수대에 목을 매고, 그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더 이상 긍정하지못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포기하도록 요구되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그저 일어난 것은 아니다. 아무런 까닭 없이, 단순한 가학성 때문에 비밀경찰 요원들이 유대인의 패배를 요구한 것은 아니다. 교수대로 올라가기 전에 희생자를 이미 파괴하는 데 성공한 체제가•••••• 한 민족을 노예 상태로 만드는, 다른 것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최상의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안다. 복종하는 가운데, 바보처럼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이 인간의 행진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없다. - P60
아데나워 수상은 당황스러운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견했다. 재판이 ‘모든 공포를 또다시 불러일으킬‘ 것이며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반독일감정의 물결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염려를 피력했는데, 이는 실제로 그랬다. 이스라엘이 재판을 준비하는 10개월 동안 독일은 자국 내에 있는나치 전범들을 색출하고 기소하는 데 전례 없는 열정을 보임으로써 재판이 가져다 줄 예견 가능한 결과에 대해 바쁘게 대비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독일 당국이나 중요한 여론의 목소리는 아이히만의 양도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는 모든 주권 국가가 자국의 범죄자에 대해 한재판에 참여할 권리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명백한 수순처럼 보인다(이스라엘과 독일 사이에는 범죄인 양도 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아데나워 정부의 공식입장은 타당하지 않다. 그 의미는 단지 이스라엘이 범인 양도를 강요받을 수 없다는 것뿐이다. 헤센 주의 대법원장인 프리츠 바우어는 이 점을 지적하고 본에 있는 연방정부에 대해 범죄인 양도 절차를 시작하도록 신청했다. 이 문제에 대한 바우어의 정서는 한 사람의 독일계 유대인의 정서에 불과했을 뿐, 독일의 여론은 여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의 신청은 본에서 거부되었고,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지지를 전혀 받지도 못했다. 예루살렘에 보내진 서독 정부의 참관인이 표명한 범인 양도 포기의 또 다른 이유는 독일이 사형제도를 폐지했으며, 따라서 아이히만이 응당받아야 할 형량을 받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독일 법정이 나치스의 대량학살자들에게 보여준 관대함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주장을 불성실한 것이라고 의심하기는 어렵다. 물론 독일에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할 때 초래될 가장 큰 정치적 위험은 얀센이 지적한것처럼 범죄 의도(mens rea)가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을 수있다는 점일 것이다). - P67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과 마리아 셰펄링 (처녀 시절의 성)의 아들 오토아돌프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저녁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에서체포되어 9일 후에 이스라엘로 압송, 1961년 4월 11일에 예루살렘 지방법원으로 재판받기 위해 이송된 뒤 15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다른사람과 함께‘ 그는 유대인에 대한 범죄, 인류(humanity)에 대한 범죄및 나치스 통치 기간,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그에 대한 재판의 근거가 되는 1950년에 입안된 나치스 및 나치 협력자 (처벌법은 "이러한•••••• 범죄 가운데 하나라도 범한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각각의 죄목에 대해 아이히만은 ‘기소장이 의미하는 바대로는 무죄‘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는 자신이 유죄라고 생각했는가? 그에 따르면 장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피고자 대질신문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중 가장 긴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피고도 검찰 측도, 또는 심지어는 세 사람의 판사 중 그 어느 누구도, 이 당연한 질문을 그에게 물어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이히만이 고용하고 (피고인을 위한 모든 변호사 비용이 전승국 법원에 의해 지불된 뉘른베르크 재판의 전례를 따라서) 이스라엘 정부가 비용을 지불한 변호사 쾰른의 로베르트 세르바티우스(Robert Servatius of Cologne)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아이히만은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고 이 질문에 대답했다. 이 대답은 피고인 자신에 의해서는 확인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피고 측이 피고로 하여금 무죄 주장을 하게 한 이유는 피고가당시 존재하던 나치 법률 체계 하에서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그가 기소당한 내용은 범죄가 아니라 ‘국가적 공식 행위이므로 여기에대해서는 어떤 다른 나라도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한 주권국가는 다른 주권국가에 대해 재판권을 갖지 않는다[par in parem non habetjurisdictionem)), 복종을 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고, 세르바티우스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는 "이기면 훈장을 받고 패배하면 교수대에 처해질" 행위들을 했을 뿐이라는 것 등이었을 것이다(그래서 1943년에 괴벨스는 "우리는 역사책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서 기록되든지 또는 가장 흉악한 범죄자로 기록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스라엘 밖에서는 (라이니셔 메르쿠어에서 ‘형법 재판을 통해 역사적 범죄와 정치적 범죄를 대처할 가능성과 그 한계‘에 대한 까다로운 문제‘라고 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바바리아에서 열렸던 가톨릭 아카데미 회의에서) 세르바티우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이히만 재판에 유일한 합법적인 형사문제는 그를 체포한 이스라엘인에 대한 재판을 선포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이 주장은 그가 이스라엘에서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반복적인 발언과는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 재판 과정을 뉘른베르크재판과 호의적으로 비교하면서 ‘위대한 정신적 업적‘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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