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의 발화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1991년 12월 전까지 50년 동안 침묵했다는 사실이다. 과거의트라우마로 보이던 것이 한국의 국가적 의식에서 존재감을갖게 되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여성들은 한국사에서 은폐되었던 잔혹 행위를 폭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일본 정부는 공식적인 사과를 거부하거나 그런 터무니없는 행위가 일어났음을 노골적으로 부정했다. 이는 옛 위안부여성의 침묵에 더욱 부채질을 했고, 이와 함께 이런 트라우마가 수면 위로 떠오른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왜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 P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공주, 양키 갈보. 서양 공주. 미군 색시. 양갈보. 양색시. 미군 노리개. UN 숙녀. 술집 여자. 유흥업소 여자, 위안부, 신세망친 여자. 위안부였던 여자. 한때 위안부라고 불렸던 여자. 위안부의 딸. 기지촌 매춘부. 군인 신부.
니콜라 아브라함과 마리아 토록에 따르면 "이런 것들은 종종 한 가족 전체의 역사를 지배하는 단어들" "유령에 자양분을 제공하는" 언급 불가능한 단어들이다.‘ 문자 그대로
‘서양공주‘를 의미하는 양공주는 미국인과 성적인 관계를맺는 한국 여성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대개의 경우 이는미군을 상대하는 매춘 여성을 일컫는 멸칭으로 사용된다.
다양한 방식으로 번역되는 이 용어는 특정한 역사적·정치적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해왔다. 너무 많은 의미로 가득한이 단어는 그와 동시에 한인 디아스포라에게는 발화할 수 없는 ‘유령 같은phantomogenic 단어다." 수치심과 비밀을 통해 유령을 길러내는 그 과정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 안에서 양공주를 중심적이면서도 동시에 예속적인 상태로 만들었다.
미군에게 성노동을 제공하는 여성은 반도의 한국인들에게 혐오와 욕망을 자아내는 과잉 가시적인 대상인 동시에 한인 디아스포라의 집단 정서 안에 감춰진 그늘진 인물이다. 미군기지 근처의 술집에서 일하는 이 서구화된 여성은 공식적으로는 한국과 미국 정부 모두에게 멸시당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미군에게 휴식과 오락거리를 제공하고 한국 경제에는 달러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격려받는다. 그들은 미국의 이해관계를 묶어둠으로써 자국을 위해 봉사하는 애국자인 동시에 반미정치의 화염에 기름을 끼얹는 미 제국주의의 비극적인 피해자다. 이 여성들은 한국의 예속 상태에 공모한다는 이유로 동포들의 증오를 자아내는 동시에 아메리칸 드림의 손길이 닿는곳에 있다는 이유로 동포들의 질투를 유발한다. 그들은 자신을 피하는 바로 그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노동하는 착실한 딸이자, 가족의 희망찬 미래를 짊어진 군인의 아내이며, 자신의 과거를 자식들에게 숨기며 자식을 보호하려는 어머니이다.
그들은 미군을 상대로 매춘 일을 했던 100만여 한인 여성의, 그리고 미군과 결혼한 10만여 한인 여성의 상징이다. 그들은 이처럼 실재하는 한인 여성의 상징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집단트라우마와 판타지에 겹겹이 둘러싸여 탄생한 인물이다. 결혼을 통해서든 매춘을 통해서든, 미국인에게 성노동을 제공하는 한인 여성은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이 삭제된 유령 같은 인물로 출현한다. - P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년 대법원은 한국 정부가 미군의 포주 역할을하며 여성들을 성병 ‘치료 시설‘에 가두고 강제로 고용량의페니실린을 주사하여 때로는 쇼크, 심지어는 사망에 이르게함으로써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고 주장한 전직 기지촌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여성들은 짐승처럼 수용되었고소위 치료를 받고 나면 두 팔이 원숭이처럼 옆으로 늘어졌기때문에 이 장소는 사람들 사이에서 ‘몽키 하우스‘라는 이름으로통했다. 2024년 여름, 활동가들은 한국에 마지막으로 남은 ‘몽키하우스‘를 한미 동맹이라는 미명하에 학대당한 여성들을 기리는기념물로 보존하기 위해 동두천에서 천막 농성에 들어갔다. 나는 천막농성이 78일째 되던 날과 313일째 되던 날 그곳을방문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을 기준으로 활동가들은 343일째 최전선에서 몸을 던지고 있다. 이는 한국전쟁과 그후과가 20~30년 전만큼이나 오늘날에도 건재함을 상기시킨다.
트라우마로 얼룩진 자신들의 역사를 용기 있게 이야기한 옛기지촌 여성들에게, 동두천의 활동가들에게, 그리고 배회당하는 우리의 과거를 기리기 위해 연대하는 모든 공동체에 이 책을 바친다. - P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어판 서문

2023년 말 도서출판 동녘이 이 책을 한국어로 출간하는데 관심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 이 책이 출간된 건 15년 전이었고, 내가 사회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이 책의 모태가 된 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한건 25년 전인 시점이었다. 25년이 흐르는 동안 많은 변화가있었을 텐데 한국에서 이 책이 여전히 유의미할까 싶었다. - P9

나는 새로운 서사 쓰기라는 목적을 달성했지만 그건 절대적인 진실이라기보다는 불확실하지만 진실에 가까운역사다. 고통스럽고 추잡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감추기보다는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불확실성 속에는 모든 버전의 과거가 현재 속에 살아 있게 하는, 그리하여 다른 종류의 진실에 가까운역사-침묵당한 자들이 목소리를 찾고 지워진 자들이 가시성을획득하게 되는 역사로 이어지는 급진적인 개방성이 있다. 우리가 인정하는 인정하지 않든, 사회 세계 social world는 유령에의해 세대를 가로질러 대물림되는 말해지지 않은 강력한 기억을통해 움직임을 얻는다.
내가 대학원생이던 시절 주류 사회학자들은 "경험적 근거가 전무하다"며 내 프로젝트를 일축했지만, 그로부터수십 년이 흘러 과학자들은 후성유전학 연구를 통해 트라우마는 우리의 DNA 안에 부호화되어 있다는 말로 내 주장을 뒷받침했다. 우리의 몸은 부모와 조부모들이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물려받는다. 과거는 물질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빚어낸다. 대학원생 시절 나는 가족의 트라우마가 정확히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트라우마가 내 몸의 모든 세포속에 살아 있다는 것은 확신했다.  - P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작고 예쁜 풍경 속으로 걸어가 그의 아내와 아기의 곁에 앉았다. 아기가 무언가를 붙잡으려 허공에 팔을 뻗어 휘두르다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뭐가 재밌니. 응?" 하고 덩달아 웃었다. 그는 어떤 것들은 예고될 수 없으며 호명될 뿐이라고 생각하며 담대해졌다. 당장 해야 할 일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그는 촛불을끄고 어둠 속에서 손뼉을 쳤다. - P107

그리고 서울 동북부의 한 중학교로부터 서로를 기억하는 두사람이 있다.
교문에 들어서서 걷는 길에는 흰 꽃이 피는 나무들이 있었다. 나무의 이름은 몰랐으나 때가 되면 바람에 흩날리는 희고 풍성한 꽃잎들은 기억에 남았다. 그런 따뜻한 봄날의 오후였다. 두 사람은 교무실에 나란히 섰다. 3학년이 되어 처음 같은 반에 배정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담임교사는 두 사람에게 각자의 이름이 적힌 흰 봉투를 줬다. 그 교사는 세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행정실에서 준 건데 뭔지는 나도 몰라. 부모님께 그대로 전해드려."
대개의 애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런 봉투를 받을 일이 없었다. 두 사람은 매년 한두 번은 받았다. 보통은 담임으로부터 은밀하게 일대일로, "요즘 학교생활 어떠니" 같은 부담스러운 친절과 함께 전해지는 봉투였다. 늘 밀봉되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어떤 것이 들어 있을지 잘 알았다. 대개는 내야 할 어떤 돈을 내지 않았다는 안내문이었다.
그날 봉투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그 교무실에서 한 번은 눈이 마주쳤다는 기억.
‘너도 봉투 받는 애구나.‘
여자애라거나 남자애라거나, 귀엽다거나 못생겼다거나, 공부를 잘한다거나 못한다거나 이전에 권진주와 김니콜라이는서로를 그렇게 알아봤다. 그리고 교무실 창밖의 햇살. 창문 너머에서 빗자루로 꽃잎을 쓸던 애들이 저희끼리 장난을 치며웃는 소리. 담임이 회전의자를 빙글 돌리며 덧붙인 말.
"둘이 친하게 지내."
가나다순에 따라 앞뒤로 앉을 때가 많았지만 두 사람은 전혀 친해지지 않았다. - P113

진주는 여전히 마트를 걸으며 다른 사람이 주문한 물건들을담았다.
라면 다섯 봉지와 계란 여섯 알, 조미김 한 팩과 인스턴트건조 미역국을 주문하는 사람. 그것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비싼 캐나다산 개 사료를 한 번에 다섯 봉지씩 주문하는 사람. 오만이천원짜리 스페인산 올리브유 아홉 병을 한 번에 사는사람은 무엇을 요리해서 먹는지, 십삼만구천원짜리 이탈리아산 소가죽 벨트를 쏜살배송으로 주문하는 사람의 생활은 어떤지 궁금했다. 진주 자신도 즉석밥이나 생수 따위를 종종 주문했는데, 그 점에 비춰보면 그들도 단지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일 거라고, 그래서 자기가 시급을 받고 시간을 팔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들은 아낀 시간으로 무엇을 할까. 마트에와서 물건을 담는 귀찮은 과정을 생략하고 오직 그 물건들이주는 행복의 알맹이만을 누리고 있을까. 아니면 그 물건들을 사기 위해 자기처럼 또다른 누군가에게 시간을 팔고 있을까. - P127

침대에 누워서가 아니라 일어서서 안은 건 처음이었다. 낯설고 새롭고 따뜻했다. 두 사람은 오래 미뤄둔 질문을 떠올렸다.
때로는 시시하고 때로는 끔찍했으며 결국에는 죄다 망해버린 연애들이 있었다. 초라하게 사라진 나라들조차 폐허 어딘가에는 영광을 남기는 것처럼 그 연애들에도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은 있었다. 연애가 망하더라도 사랑은 망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저렴한 각본으로 사랑하느니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어차피 첫 단추부터 이상했으니까.
차라리 이것은...... 딩동. 음식 도착을 알리는 초인종이 울렸다. 두 사람이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우리는 친한 사이야."
그 말은 두 사람만의 농담이 되었다. 즉석밥과 계란, 반창고와 감기약, 섬유유연제와 블루투스 스피커 등을 ‘친한 사이‘ 해버렸고, ‘도망가면 안 친한 사이‘라며 대청소 날을 정해 손가락을 걸었다. 니콜라이는 누구도 근황을 모르는 앙맨에게 ‘맥주 가즈아아앙‘으로 끝나는 메시지를 남겼고, 진주는 일년 넘게 업데이트가 없는 힝구의 채널에 ‘힝구야 안녕‘으로 시작하는 댓글을 달았다. 둘 다 답장은 받지 못했지만 ‘좋은 친한사이 시도였다며 서로 칭찬했다. 공장과 마트 입구에서 붉은 조끼를 입은 아주머니 아저씨가 나누어주는 전단지를 받아와 함께 읽다가 사전을 검색했다. 정전을 계기로 앞집 부부와 배드민턴을 쳤다. 부부가 대접한 더운 나라의 음식이 입에 맞진 않았지만 접시를 비웠고, 그 집 꼬마가 리코더 연주를 뽐냈을 때 박수를 쳤다. 집에 돌아와 ‘우리 오늘 이웃이랑 친한 사이 해버림‘이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미래는 여전히 닫힌 봉투 안에 있었고 몇몇 퇴근길에는 사는 게 형벌 같았다.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 보일러를 아껴 트는 겨울.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는 서로의 등을 보면 봄날의 교무실이 떠올랐다.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 P1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