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가 회부된 사건의 결론을 내리는 일을 피할 수는 없겠으나, 사법부의 결론조차 당파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사법부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판결이언제나 객관적이어서 뭐든지 판결해줄 수 있는 만능이 아니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분명히 제한받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그러한 사회적 인식을 통해서 정치가 사법화하고 사법이 정치화하는 것을최소화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법부에 최우선적으로 맡길 일은 당파성이 작용하는 영역의 일이 아니라 기본권이 제대로 보호되지 않아 헌법적 가치가 훼손될 염려가 있는 영역에서 법적 판단을 내려야 하는 일이다.
삼성엑스파일 사건 판결의 다수의견이 정당행위의 해석을 종래의 해석보다 훨씬 더 좁혀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 정치적 성향에 따른 선택인데도 그 결론에 대한 책임은 결국 고(故) 노회찬 의원만이 지게 되었다. 2013년 2월 14일 판결확정으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게 된 노회찬 의원은 2016년 경남 창원시 성산구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다시 국회로 돌아왔으나 국회를 떠나 있던기간 동안 받았던 정치자금이 문제되어 유명을 달리했고, 정치자금법 개정 문제를 다시 우리사회의 화두로 떠올렸다. 만일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달리 나왔더라면 노회찬 의원은 의원직을 상실하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사회에 그만이 지닌 새로운 시각을 더 활발하게 펼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노회찬 의원의 죽음으로 반짝 떠올랐던 정치자금 문제는 다시 수면으로 가라앉아 잊힌것처럼 보인다. 이 몹시도 정치적인 판결이 사회적 변화를 불러일으켜 긍정적인 결과를 낳도록 할 책임은 이제 우리 모두에게 남겨졌다. - P200

포스너의 말처럼 법규주의의 왕국은 무너져왔는데도 판사들은아직도 그 왕국을 굳건하게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또다른 그림을 제시해보려는 마음으로 쉬피오를 불러들였다. 쉬피오는 "법규범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세상에 대한 어떤 사회의 생각 또한 반영한 다." 어떤 사회에서 법을 만들어내는 힘으로서의 표상체계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형식적 표상들과 실재세계 사이의) 역동성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한다. 그리고 그 역동성 속에서만 지구화와 함께 대두한 "생태학적 위기의 고조, 갈수록 심각해지는 불평등, 가난과 이민의 증가, 종교전쟁의 재발과 정체성 회복 운동의 자폐적현상들, 정치 또는 금융의 신용 붕괴 등등의 위기 속에서 어디로나아가야 할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압축적 성장이라고 불리는 빠른 달음박질을 해온 끝에 전근대와 근대, 현대와 초현대가 공존하는 우리사회에서 입법과 법률해석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보도록 하는 대목이다. - P224

판사들이 큰 그림을 가지고 결론을 선택한다는 것은 원래 사법부가 의도하지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판결의 결과들을 분석하여보면 어떤 성향이 드러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포스너는 "정치적 성향이 비슷한 법관들은 사법철학이 다르더라도 보통 같은 방향으로 표결한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입법을 하는 경우뿐 아니라 만들어진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에도 세계의 미래와 법의 미래를 생각해보고 상상해보는 일들은 필요하다. 생각과 상상을 그치고 주어진 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인공지능이 계산된 알고리즘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판사들, 나아가 법률가들이 법규주의의 왕국에서 나와서 지금이 시대에 필요한, 그리고 더 나아가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법의 지배를 사유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포기해서도 안 될 일이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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