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학이 형에게

"우리는 취약한 생물이고
인간들은 바로 이 취약함을 공유한다.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희망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취약함을 부정하기보다는
받아안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의 취약함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을 때
또렷하게 분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 P4

언제나 현명하던 존 버거는 사진에 관한 중요한 에세이에서 "클로즈업은 통계의 대척점"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 책이 통계 대신 여러분에게 제공하려는 것도 클로즈업이다(사진을 말하는 건 아니다. 내가 찍은 사진은 기껏해야 용건만 말하고 끊은 전화 수준이다). 나는 클로즈업이 통계에 표정과 피부를 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클로즈업은 통계가 허용하는 사람과 대상 사이의 거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클로즈업은 우리의 멱살을 그러쥐고 현장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퍼센티지로만 표현되던 일들이 (비록 순간일지라도) 우리 경험의 일부가 된다.
나는 이해하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거나 통계 수치 따위는 지적인 밑장 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는 당연히 정확한 숫자가 필요하다. 나는 다만 통계와 클로즈업이 (그리고 그렇게 이름 붙일 수 있는 모든 활동이) 건축으로치면 설계와 감리 같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일련의 숫자에 사회의 현실을 대변하는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숫자들의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 말하자면 ‘냄새를 맡아볼 의무‘가 있다. - P9

케이지가 워낙 좁았던 탓에 네 개의 머리를 가진 닭이 자신의 몸을 쪼아대는 것처럼 보였다. 철창이 가두고 있는 것은 닭이 아니라 가장 유해한 종류의 광기인 듯싶었다. 물론 철창 안에 있는 동물이 미친 건지 아니면 그들을 철창 속에 가둔 동물이 미친 건지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말이다. 당연히 닭들은 자신들이 왜 그런 고통을 당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그들이 이 상황을 이해했다면 동족을 공격하는 대신 내 팔을 물어뜯으려고 했을 것이다.
동정심도 그저 호감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닭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대신 이것들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짓밟은 다음 저 산 너머로 차버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만약 내가 이 닭들에 대해서 책으로 읽었다면,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었다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내 눈앞에 있었고 너무나도 역겨워 보였기 때문에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것 말고는 다른 태도를 취할 수가 없었다. 케이지란 도구는 갇힌 쪽이나 가둔 쪽 모두에게서 최악의 자질을 이끌어내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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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보트들은 핍을 보기 전에 별안간 고래 떼가 한쪽 옆에 가까이있는 것을 발견하고 방향을 바꾸어 고래들을 추적했다. 스티브의 보트는 이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스터브와 그의 선원들은 모두 고래에 열중해 있어서, 핍을 둘러싼 수평선은 무참하게도 점점 넓어져갈 뿐이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본선이 나타나 그를 구출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이 혹인 소년은 백치처럼 갑판 위를 거닐게 되었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바다는 조롱하듯 그의 유한한 육체만 물 위에 띄웠고, 영원한 영혼은 익사시키고 만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익사시키지는 않았다. 영혼을 산 채로 놀랄 만큼 깊은 곳까지 끌고 내려갔다. 거기서는 왜곡되지 않은 원초적 세계의 낯선 형상들이 그의 생기 없는 눈앞을 미끄러지듯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혜‘라는 이름의 인색한 인어왕자가 산더미처럼 쌓인 자신의 보물을 드러냈다. 즐겁고 무정하고 항상 젊은 영원의 세계에서 핍은 신처럼 어디에나 존재하는 수많은 산호충을 보았다. 그것들은물로 이루어진 창공에서 거대한 천체를 들어 올렸다. 핍은 신의 발이 베틀의 디딤판을 밟고 있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동료 선원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의 광기는 하늘의 분별이며, 인간의 모든 이성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인간은 이성으로 보면 불합리하고 황당무계한 천상의 사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 길흉화복을 초월하여 그가 믿는 신처럼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떳떳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 P501

하지만 보라. 저 세 개의 돛대 꼭대기에는 지금도 세 사람이 올라가서 더 많은 고래를 찾는 데 열중해 있다. 고래가 잡히면 낡은 떡갈나무 가구가 또 더러워질 것은 뻔하고, 적어도 어딘가에 기름 한 방울은 떨어질 것이다. 그렇다! 자주 있는 일이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96시간 동안이나 계속된 중노동이 끝났을 때, 온종일 적도에서 노를 저어 손목이 퉁퉁 부어오른 상태로보트에서 배로 올라와 잠시 쉴 새도 없이 거대한 체인을 운반하고, 무거운 양묘기를 들어 올리고, 고래를 자르고 난도질하고, 적도의 태양과 적도의 기름솥이 합세하여 내뿜는 열기 때문에 다시 그리고 태워지는 고역을당할 때, 그리고 이 작업이 끝나자마자 마지막으로 분발하여 배를 얼룩 한점 없이 깨끗한 낙농실처럼 청소하고, 깨끗한 작업복의 목단추를 막 채우고 있을 때, 갑자기 "고래가 물을 뿜는다!" 하는 외침소리가 들리면 가엾은 선원들은 깜짝 놀라 당장 또 다른 고래와 싸우러 달려가서, 진저리나는 그일을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할 때가 많다. 오! 친구들이여. 이것은 정말로 사람 죽이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 우리는 오랜 고생 끝에 이 세상에서 가장 덩치 큰 동물에게서 비록 적지만 귀중한 경뇌유를 빼낸뒤,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참을성 있게 몸에 묻은 오물을 씻어내고, 영혼의 임시 거처인 육신을 깨끗이 유지하면서 사는 법을 배우자마자, "고래가 물을 뿜는다!" 하는 외침소리에 영혼은 분출되고, 우리는 또 다른 세계와 싸우러 달려가, 젊은 인생의 판에 박힌 일을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한다.
오, 윤회여! 오, 피타고라스여! 2천 년 전에 빛나는 그리스에서 그렇게 착하고 슬기롭고 평화롭게 살다가 죽은 그대여. 나는 지난번 항해에서 그대와 함께 페루의 해안을 달렸고, 풋내기 소년으로 환생한 그대에게 나는 어리석게도 밧줄을 맞잇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 P516

"에이해브 선장!" 항해사는 얼굴을 붉히면서 선실 안으로 더 깊이 들어왔다. 그 대담성은 기묘하게 공손하고 조심스러웠기 때문에, 항해사는 대담성이 조금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애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대담성을 거의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자기보다 젊고 행복한 사람에게 걸핏하면 골을 내는당신을 너그럽게 봐줄지도 모르지만."
"이 나쁜 놈! 네놈이 감히 나를 비난할 생각이란 말이냐? 어서 나가!"
"아닙니다. 선장님. 아직 나가지 않겠습니다. 저는 부탁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감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참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보다 좀 더 서로를 이해하면 안 됩니까?"
에이해브는 그물선반(남양을 항해하는 배의 선실에 대부분 갖추어져 있는 가구)에서 총알이 장전된 머스킷을 낚아채어 스타벅을 겨누면서 외쳤다.
"지상에 군림하는 신은 하나뿐이고, ‘피쿼드호에 군림하는 선장도 하나뿐이야! 갑판으로 나가!"
순간 항해사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고 뺨은 불같이 뜨거워져서, 누군가가 보았다면 그에게 겨누어진 총구에서 나온 불길을 그가 정말로 받은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격정을 억누르고 비교적 침착하게 돌아서서 선실을 나가려다가 잠깐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선장님은 저를 모욕한 게 아니라 화나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저를 경계할 필요는 없습니다. 선장님은 옷을지 모르지만, 에이해브는 에이해브를 경계해야 합니다. 영감님,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용감하게 불끈 화를 내지만, 그래도 내 말에 복종하는군. 그건 정말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용기였어!" 스타벅이 사라지자 에이해브는 혼자 중얼거렸다. "녀석이 뭐라고 했지? 에이해브는 에이해브를 경계해야 한다고? 그말에는 뭔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어!"
그는 무의식적으로 머스킷총을 지팡이 삼아, 굳은 표정으로 좁은 선실을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 후 이마의 깊은 주름살은 퍼졌고, 그는 총을 다시 그물선반에 올려놓은 다음 갑판으로 올라갔다.
"자네는 정말 훌륭한 사나이야, 스타벅." 그는 항해사한테 낮은 소리로말하고는 목청을 높여 선원들에게 외쳤다. "윗돛을 감아라. 앞뒤의 중간돛은 줄여라. 주돛대의 아래활대는 뒤로 밀어라. 고패를 감아라. 선창에서 기름통을 꺼내라." - P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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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력한 꼬리를 생각할수록 내가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더욱 한탄스러울 뿐이다. 고래는 이따금 꼬리로 인간의 손짓과도 비슷한 몸짓을 하지만, 그 의미는 설명할 수가 없다. 이 신비로운 몸짓은 큰 무리에서 특히 두드러질 때가 있는데, 나는 고래잡이들이 그것을 프리메이슨의신호나 암호와 비슷하다고 단언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 고래는 그런 방법으로 세상과 지적인 대화를 나눈다는 말도 들었다. 꼬리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이용한 다른 몸짓 중에도 가장 경험 많은 고래잡이조차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몸짓이 없지 않다. 내가 아무리 고래를 해부해보아도 피상적인 것밖에는 알 수 없다. 나는 고래를 모른다.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 것이다. 고래의 꼬리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머리를 알 수 있겠는가? 게다가 고래는 얼굴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고래의 얼굴을 알겠는가? 고래는 나한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대는 내 뒷부분인 꼬리는 보겠지만,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할 거라고. 그런데 나는 고래의 뒷부분인 꼬리조차 완전히 이해할수 없으니, 그가 제 얼굴에 대해 어떤 암시를 주더라도 나는 다시 말할 수밖에 없다. 고래에겐 얼굴이 없다고. - P460

소유가 법의 절반‘이라는 말은 누구나 알고 있는 속담이 아닌가? 그 물건을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는지는 상관없다는 뜻이지만, 소유가 법의 전부가 되는 경우도 많다. 소유가 법의 전부라면, 러시아 농노나 공화국 노예들의 근육과 영혼은 ‘잡힌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과부에게 마지막남은 동전 한 닢이 탐욕스러운 지주에게는 ‘잡힌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기 푯대 대신 문패가 달려 있는 대리석 저택, 아직 죄가 발각되지않은 악당의 집도 잡힌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비참한 파산자가가족을 굶주림에서 구하려고 중개인 모르드개 한테 돈을 빌릴 때, 모르드개가 그 가엾은 파산자에게 뜯어내는 턱없이 비싼 선불 이자는 ‘잡힌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영혼을 구제하는 대주교가 뼛골 빠지게 일하는 수십만 명의 노동자(대주교가 도와주지 않아도 모두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가 먹는 부족한 빵과 치즈에서 10만 파운드를 뜯어낼 때, 그 10만 파운드의 수입은 ‘잡힌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던더 공작이 세습하는마을과 촌락은 ‘잡힌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 가공할 작살잡이인 존 불에게 가엾은 아일랜드는 ‘잡힌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사도 같은 전사인 브라더 조너선에게 텍사스는 ‘잡힌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모든 것에서 ‘소유는 곧 법의 전부‘가 아닌가?
그러나 ‘잡힌 고래‘의 원칙이 이렇게 널리 적용될 수 있다면, 그 상대적개념인 ‘놓친 고래‘는 적용 범위가 더 넓다. 그것은 국제적으로, 그리고 우주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1492년에 콜럼버스가 왕과 왕비를 위해 소유권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에스파냐 국기를 아메리카에 꽂았을 때, 아메리카는 ‘놓친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폴란드는 러시아 황제에게 무엇이었던가? 그리스는 터키에게 무엇이었던가? 인도는 영국에게 무엇이었던가? 결국 멕시코는 미국에게 무엇이 될까? 모두 ‘놓친 고래‘다.
인간의 권리와 세계의 자유는 ‘놓친 고래‘가 아니고 무엇인가? 모든 인간의 마음과 의견은 ‘놓친 고래‘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이 가진 종교적 믿음의 원칙은 ‘놓친 고래‘가 아니고 무엇인가. 표절을 일삼는 사이비 미문가에게 철인의 사상은 ‘놓친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커다란 지구자체는 놓친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독자들이여, 그대도 역시 놓친 고래‘이자 ‘잡힌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P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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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 세 척이 잔잔하게 굽이치는 그 바다에 정지한 채 영원히 푸른 바다 속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바다 속에서는 신음소리나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고 잔물결이나 물거품 하나도 올라오지 않는데, 그렇게 조용하고 평온한 바다속에서 바다의 괴물이 단말마의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을 육지 사람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수직으로 내려간 밧줄은 뱃머리에서는 한 뼘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들 가느다란 세 개의 밧줄에 큰 고래가 8일에 한 번씩 태엽을 감아주는 대형 시계의 커다란 추처럼 매달려 있다. 매달려있다고? 무엇에? 겨우 석 장의 널빤지에. 이것이 한때 "네가 창으로 그 가죽을 꿰뚫을 수 있으며, 작살로 그 머리를 찌를 수 있겠느냐? ・・・・・・칼로 찔러도 소용이 없고, 창이나 화살이나 작살도 맥을 쓰지 못하는구나. 쇠도 지푸라기처럼 여기고, 놋은 썩은 나무 정도로 여기니, 그것을 쏘아서 도망치게 할 화살도 없고, 팔맷돌도 아예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다. 몽둥이는 검불같이 보고, 창을 휘둘러도 코웃음만 치는구나!"라고 자랑스럽게 묘사된바로 그 생물인가? 이것이 그 짐승인가? 오오, 예언자들의 말은 으레 실현되지 않는 법이다. 꼬리에 천 사람의 힘을 지닌 거대한 바다짐승은 ‘피쿼드‘ 호의 창을 피해 몸을 숨기려고 산더미 같은 바다 속에 머리를 처박고 말았기 때문이다. - P436

그 순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바닥 너비만큼도 당길 수 없었던 밧줄이 이제는 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빠르게 보트 안으로 말려 올라오더니, 곧이어 고래가 그들로부터 두 보트 길이만큼 떨어진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래의 동작은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육상동물은 많은 혈관에 판막이나 수문 같은 것이 있어서, 상처를 입으면 적어도 당장은 피가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차단된다. 하지만 고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혈관에 판막이 없는 것이 고래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작살처럼 작고 뾰족한 것에 찔려도 모든 동맥계에 걸쳐 치명적인 출혈이 시작되고, 깊은 바다 속에서 강한 수압을 받게 되면 출혈이 더욱 심해진다. 고래의 생명은 끊임없이 흘러 나가는 피와 함께 쏟아져 나간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고래 몸속에 있는 피의 양이 워낙 많고 몸속의 샘 또한 깊은 곳에 무수히 존재하기 때문에, 상당히 오랫동안 출혈이 계속되는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분간하기도 어려운 산 속의 샘에서 발원한 강물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계속 흐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도 보트들이 이 고래에게 다가가 내흔드는 꼬리의 위험을 무릅쓰고 창을 꽂았고, 그러자 새로 생긴 상처에서는 피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한편 머리에 있는 본래의 분수공은 빠르긴 하지만 이따금씩 겁에 질린 물줄기를 하늘로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이 구멍에서 피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아직 급소를 찔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래잡이들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의 생명에는 아직 손이 닿지 않은 것이다. - P437

고래는 여전히 자신의 핏물 속에서 뒹굴다가 마침내 옆구리 아래쪽에 달려 있는 통만 한 크기의 괴상하게 변색된 혹이랄까. 하나의 돌출한 살덩어리를 얼핏 드러냈다.
"절호의 표적이군." 플래스크가 외쳤다. "저길 한번 찔러봐야지"
"그만둬!" 스타벅이 외쳤다. "그럴 필요는 전혀 없어!"
인정 많은 스타벅이 말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창을 던진 순간, 그 잔인한 상처에서는 궤양성 고름이 뿜어 나왔고, 고래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못이겨 걸쭉한 피를 내뿜으면서 보트를 향해 마구잡이로 돌진해 왔다. 그리고 보트와 우쭐한 선원들에게 핏덩어리를 소나기처럼 퍼붓고 플래스크의 보트를 뒤집고 뱃머리를 부수었다. 이것은 죽기 직전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하지만 출혈 때문에 이미 힘이 빠져 있었던 고래는 자기가 부순 보트에서 떨어져 나가 힘없이 옆구리를 드러낸 채 헐떡거리고 그루터기처럼 잘린지느러미를 기운 없이 퍼덕이다가, 종말이 가까워진 지구처럼 천천히 몇번 회전하더니, 그 비밀스러운 하얀 배를 드러내고는 통나무처럼 드러누워서 숨을 거두었다. 가장 애처로운 것은 죽기 직전의 마지막 물 뿜기였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큰 샘의 물은 차츰 빠져나가고, 반쯤 질식한 목구멍에서 나는 꼬르륵거리는 우울한 소리와 함께 물기둥은 점점 낮아졌다. 그것이 죽어가는 고래가 마지막으로 길게 내뿜은 물줄기였다. - P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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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에 고래 특유의 강한 생명력, 두꺼운 벽과 널찍한 내부 공간의 보기 드문 효력이 나타나 있는 듯하다. 오오, 인간들이여! 고래를 찬미하고, 그들을 본받아라! 그대들도 얼음 속에서 따뜻한 체온을 유지해라. 그대들도 이 세상의 일부가 되지 말고 이 세상 속에서 살아라. 적도에서는 시원하게 지내고, 극지에서도 피가 계속 흐르게 하라. 오오, 인간들이여! 성베드로 대성당의 거대한 돔처럼, 그리고 고래처럼, 어떤 계절에도 그대 자신의 체온을 유지하라.
하지만 이런 미덕을 가르치는 것은 얼마나 쉽고, 그러면서도 얼마나 가망없는 일인가. 성베드로 대성당 같은 돔을 가진 건축물은 얼마나 드물고, 고래만큼 거대한 생물은 또 얼마나 드문가! - P383

고래처럼 거대한 생물이 그렇게 작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토끼보다 작은귀로 우렛소리를 듣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하지만 고래의 눈이 허셜의 망원경 렌즈만큼 크고 귀가 성당 입구만큼 넓다면 고래는 더 멀리까지 볼수 있고 고래의 청각은 더 예민해질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을 넓히려고 애쓰는가? 그보다는 마음을 예민하고 섬세하게 하는 데 노력하라. - P409

만약에 타슈테고가 고래 머릿속에서 죽었다면 그것은 매우 귀중한 죽음이었을 것이다. 가장 하얗고 가장 향기로운 경뇌유 속에서 질식하여, 고래의 몸에서 가장 신성하고 은밀한 내실에 입관되고 영구차로 운반되어 매장되는 격이니, 얼마나 고귀한 죽음이었을 것인가. 이보다 더 감미로운 죽음이 있다면,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오하이오 주의 어느 벌꿀 채취자가 속이 빈 나무의 아귀 속에서 꿀을 찾다가 구멍 속에 꿀이 가득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너무 깊이 몸을 들이미는 바람에 꿀이 오히려 그를 빨아들였고, 그래서 그는 꿀로 방부 처리된 채 죽고 말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꿀이 가득 든 플라톤의 머리에 빠져 거기서 감미롭게 죽어간 사람은또 얼마나 많았던가? - 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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