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는 나란히 누운 채로 참 많은 기억 사이를 이리저리 걸었다. 불완전한 장면들이 많았다. 마치 둘이서 옛 사진이 담긴 상자를 열었는데, 사진마다 죄다 찢어지고 너덜너덜해진 상황이랄까. 하지만 둘의 삶을 통틀어 단 하나 완벽하게 간직하고 있는기억이 있었다. 참 즐겁고도 부적절했던 그 순간의 기억을 둘은 마치 성물처럼 그들만의 비밀로 간직했다. 그 순간이야말로 지금 그 둘에게 가장 필요했다.
"앵무새 기억나?" - P442

그는 속부터 회색으로 변해갔다. 마치 삶은 고기처럼 속에서아무런 힘도 나지 않아서 온종일 블랙커피를 마셨다. 걸으면 위장이 쓰라리고 배 속이 메스꺼워질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그는절대로 걷지 않았다. 그는 끝없는 리본처럼 이어진 캘리포니아고속도로의 차들 사이를 질주하며 욕설을 퍼붓고 줄담배를 피웠다. 그의 또 다른 악덕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팰맬 담배였다. 아버지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와는 달리 산업화된 속도에맞추어 피웠다. 빨리 연기를 뿜은 다음, 피우고 있던 담배의 끝에서 체리빛으로 타오르는 불씨를 다음 담배에 이어 붙였다. 그는미국인들이 하듯이 담배를 쥐려고도 해보았다. 엄지와 중지로 담배를 잡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스팁 매퀸이 그렇게 하는 걸 본적이 있었다. 그리고 욕설을 하듯 중지로 다 피운 꽁초를 휙 튕겨서 로켓처럼 발사했다. - P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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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몬스터 마르코가 리틀 엔젤에게 쭈뼛쭈뼛 다가왔다.
"삼촌은 진짜 음악을 아는 멋진 사람인가"
"고맙구나."
"아니, 내가 물어보는 거야. 진짜 록이 뭔지 아는 사람이냐고 록 좋아하냐고"
"아! 그럼, 물론이지."
"하드록? 아니면 계집애들 록?"
"계집애들 록이라니?"
"징그럽게 머리 짧게 하고 나오는 놈들이 부르는 거. 케케묵은록. 돈에 영혼을 판 놈들."
‘고놈 참 마음에 드는군‘이라고 리틀 엔젤은 생각했다.
"아, 알겠어. 난 하드록이 좋아. 모터헤드도 좋아하지."
그러자 젊은 아이는 점잔을 빼며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 다.
더없이 찬란한 대화였다. 리틀 엔젤은 행복했다. 헤비메탈을듣는 삼촌이 이 호르몬이 질풍노도로 분비되는 놈을 진지하게 받아주고 있군. 삼촌은 이러라고 있는 거지.
그는 조카의 내면에 있는 헤비메탈 파일에 접근하며 말했다.
"뭐, 신은 우리 모두를 미워하니까."
그는 이 나이대 애들에게 미끼를 던지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삼촌?"
"피로 다스리는 분이지."
"삼촌! 신은 개자식이야! 살인마야!"
몬스터 같은 조카가 울부짖었다.
그들은 태양을 향해 악마의 뿔 모양을 손으로 만들어 보였다. - P306

빅 엔젤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얼굴을 문질렀다. 얼굴 문지르는 이 동작도 얼마나 그리워하게 될까. 갑자기 모든 게 다소중해졌다. 한숨도 그렇다. 한숨 쉰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제라늄이 보인다. 왜 제라늄을 안 보고 놔두었지?
데이브는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쟤 이가 저렇게 하였나? 빅 엔젤은 본인 이도 하얗게 만들고 싶었다. 파티를 끝내자마자죽지 않는다면 말이다.
"나와 아내는 네 아이를 두었어."
"그래."
"하나는 죽었어. 다른 하나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고. 엘 인디오 말이야, 무슨 이름이 그렇지? 그 애들은 내 자식이 아니지만, 내 자식이야. 그리고 미니와 랄로는 여기 있지. 걔네들은 내 자식이야."
"그래."
"그 애들은 모두 자녀가 있어. 엘 인디오 빼고."
"맞아."
"그 자녀들도 또 애를 낳고 있지."
"그러게."
"내가 왜 걔들을 두고 가야 해?" - P366

•오후 3:56

하루 중에는 아주 특별한 1분이 있다. 사람들 대부분은 정신이딴 데 팔려서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그특별한 1분이 있다. 마치 생일 선물처럼 이 세상에 오는 1분이다. 매일 오는 그 1분은 모든 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황금 거품을 창조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빅 엔젤은 지금 자러 갈 수 없어서 속상하고 화났기 때문에 하마터면 그 1분을 놓칠 뻔했다. 짐보는그 1분을 놓쳤다. 기절해 있었으니까. 파티가 열리는 집까지 7킬로미터를 남겨두고 아직 고속도로에 있는 사람들도 그 1분을 놓쳤다. 교통체증과 싸워가며 멕시코인들을 미워하느라 바빴으니까. 라디오에서는 IS와 국경 장벽과, 샌디에이고의 기대를 저버린 차저스 팀과, 새로운 법이 이 땅을 소돔으로 만들어버릴 거라며 울부짖는 복음주의자들과, 제일 좋아하는 토크쇼 사회자들이더 이상 어떤 이야기도 진행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와 가뭄이 캘리포니아 전역을 싹 태우고 먼지로 사라지게 만들 때까지 계속될 거라는 이야기와, 서부의 강들이 누렇게 변하거나 엄청난 홍수가 나고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니는 그 1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 순간은 길고 외로운 밤중에 문득찾아왔다.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마음은 불편한 데다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에는 슬프게도 접속이 안 되는 상황이 실은 선물 같은 순간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런데 그게 선물이더라. 그녀는 불행 가운데에서 황금빛 거품을 찾아냈다.
"기다려요, 아빠."
그녀는 휠체어에 몸을 기댔다. 이러면 아부지가 투덜대는 기관차처럼 마구 김을 뿜어내지 않을 터였다.
"미니! 난 피곤해!"
"알아요. 참으세요."
그러자 빅 엔젤이 쏘아붙였다.
"네가 뭘 아냐? 아무도 내 기분을 몰라!"
"알아요, 아빠."
페를라는 초조해하며 말했다.
"얘, 그냥 아버지 들어가시게 해. 응?"
"엄마! 안 돼. 그냥 기다려봐요!"
미니가 말했다. 이걸 준비하느라 저금해둔 돈을 아주 많이 썼다. 그녀는 집 앞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조금씩 웃기시작했다.
"들어보라고"
뭔가 엄청나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팡파르였다.
"저게 뭐냐?"
빅 엔젤이 말했다.
리틀 엔젤은 일어서서 눈 위에 손 그늘을 만들었다.
"생일 축하해요, 아빠."
미니는 완벽한 타이밍에 말했다. 그녀는 지금 힘이 넘치는 상태였다. 그녀가 만지는 모든 것은 완벽하게 축복받으리라. 저절로 알 수 있었다. 미니가 말하는 동안 트럼펫이 울려댔다.
"뭐야?"
빅 엔젤이 소리쳤다.
마리아치들은 차고를 통해 행진하여 일렬로 불쑥 들어왔다.
무시무시하게 큰 소리로 신나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말이다. 모든 단원은 검은색과 은색으로 웅장하게 차려입고, 진홍색 허리띠와 커다란 솜브레로 모자도 갖춰 썼다. 프릴 달린 하얀 셔츠위로 빨간 넥타이가 우아하게 펄럭였다. 트럼펫과 바이올린, 기타론guitarrón, 기타까지. 그들은 빅 엔젤과 페를라 앞에서 반원형의 대열을 이루고 우주를 뒤흔들듯 연주했다.
빅 엔젤은 웃으며 손뼉을 치고, 또 웃으며 발을 구르고 소리쳤다. 그는 노래하고, 노래하고, 또 노래했다.
연주를 끝낸 마리아치 악단은 사람들이 바치는 경배가 별이라도 되는 듯 커다란 모자를 살짝 기울여 빅 엔젤에게 인사한다음 열을 지어 버스에 올라타서 오후의 풍경 속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 P371

・오후 4:30

미니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일족을 바라보았다. 계속 지켜보고 있자니 모두의 행동이 점점 느릿느릿해지는 것 같았다. 마리루고모 고모의 아이들은 모두 깨끗하고 똑똑하고 교육을 잘 받았다. 세사르 삼촌의 아들들은 다들 다정하다. 메탈에 미쳐 있는 괴물 같은 마르코도 다정하긴 마찬가지였다. 글로리오사 이모 저분은 엄마를 빼면 이제껏 본 여인 중 가장 강한 분이다. 자그마한 꼬마들은 엄청나게 빨리 컸고, 나이 든 신사들과 숙녀들은 갈색 정장을 입었다. 아, 하느님. 저들은 아름다웠다.
갑자기 이상한 침묵이 파티 분위기에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서 서로 이야기하거나 생각에 잠겼다. 웃고 떠드는 분위기가 음악 소리에 흡수되어 사그라져버린 듯하달까. 그날의 밀도가 모두에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탁자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저마다 개인적인 감상을 중얼댔다. 갑자기 이 남자, 빅 엔젤과 있었던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며, 언제가 되었든 앞으로 분명히 닥치게 될 그 순간을 애도하면서. 모두는 보았다. 모두는 알고 있었다. - P375

우키는 자물쇠를 잠그지 않고 두었다. 리틀 엔젤이 나중에 다시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리틀 엔젤은 서둘러 큰형에게 가서 비밀의 도시를 보았다고 말하려 했다. 그가 본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놀라웠다. 그는 처음으로 형의 본모습을 보았다. 그의 형, 자신의 생명이 다해가고 있다는 걸 안 형은 미친 아이와 차고 속에 틀어박혀서는, 아무도 보지 못할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이제껏 조금 의심한 적이 있긴 하지만, 이제 리틀 엔젤은 빅 엔젤을 믿고 떠받드는 열렬한 신도의 대열에 흔들림 없이 합류했다. 완전히 빠져들었다고나 할까. 빅 엔젤이야말로 보살님이다. - P403

빅 엔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넌 다 가졌잖아."
"우리 진짜 이런 말까지 해야 하는 거였어?"
이제는 리틀 엔젤이 웃을 차례였다.
"다 가졌다라. 내가 살던 곳에서는 모든 게 다 행복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빅 엔젤이 말했다.
"이제 한번 다 말해보자! 네가 감히!"
그는 막냇동생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난 먹을 것도 없었어, 이 개새끼야!"
그때 미니가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마리루 고모한테 큰일 났어요!"
"뭔데."
두 형제는 똑같이 말했다. 미니는 울부짖었다.
"밖에 난리가 났어요."
"왜?"
빅 엔젤이 물었다.
"파스 숙모가 고모 가발을 벗겨버렸어요! 파티가 전부 개판이되었다고요!"
"마리루 누나가 가발을 썼어?"
리틀엔젤이 말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두 형제는 웃어버렸다.
"뭐가 웃겨요! 내가 그 두 분을 떼어놓아야 했다고요! 파스 숙모가 탁자를 뒤엎었어요. 마리루 고모는 머리에 냅킨을 쓰고 도망쳤다고요."
미니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형제들은 웃다 흘린 눈물을 훔쳤다.
빅 엔젤이 말했다.
"네가 여기 없었기 때문에 행복했다는 건 알아. 너는 우리가한 온갖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 모든 흥겨움이라니, 끝이 없구나."
"형은 내 편 들어주지 않잖아."
"난 너희 모두의 편을 들어 나는 가장이니까." - P420

"내가 이런 말까지 해야 하겠냐."
"방금 뭐라고 했어?"
"그냥 잊어버려."
리틀엔젤은 일어서더니 빅 엔젤 곁에 가까이 다가앉았다.
"맙소사."
"네 어머니는 널 임신했어. 그래서 두 분이 결혼한 거라고."
"거짓말"
"아, 그게 진실이야. 나더러 또 거짓말한다고 그러면, 난 일어설거다."
"일어서서 어쩌려고?"
"너랑 아직 싸울 수 있거든."
"이야, 그거 무서워서 벌벌 떨겠는데."
빅 엔젤은 몸을 앞으로 왈칵 숙여 리틀 엔젤의 멱살을 잡았다.
"야!"
빅 엔젤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직 너한테 본때를 보여줄 수 있어!"
"나는 형 몸에 손대고 싶지 않아."
리틀엔젤은 손바닥으로 앙상한 닭 뼈 같은 형의 가슴을 밀어냈다.
"진정해. 어서."
"버르장머리 고쳐줄 거야!"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고."
그들은 침대에서 몸싸움을 했다. 빅 엔젤은 막냇동생의 얼굴에 몇 차례 큰 소리가 나도록 주먹을 날렸다.
"그만해, 이 바보야!"
리틀엔젤이 말했다.
페를라가 급히 안으로 들어와 슬리퍼로 리틀 엔젤을 때리며 소리쳤다.
"미쳤어?"
"여보"
빅 엔젤은 리틀 엔젤의 셔츠 앞주머니를 정신없이 뜯어내며 말했다.
"지금은 우리를 그냥 놔둬."
"당신들 두 사람 아주 지긋지긋해!"
페를라는 이렇게 말하고는 쿵쿵대며 밖으로 나갔다.
둘은 숨을 몰아쉬며 침대로 쓰러졌다.
"내가 널 혼냈어."
빅 엔젤이 말했다. 그는 똑바로 앉아서 주스를 꿀꺽꿀꺽 마시고는 침대 반대편에 있던 동생에게 건네주었다. - P423

"나는 떠났어. 나 자신을 뭔가 대단한 존재로 만들고 싶어서.내가 세상을 바꿀 거라 생각했지."
"그래서 어떻게 됐냐. 아우야?"
"아무것도 안 바뀌었어."
"아, 왜 이래."
리틀엔젤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내가 떠나서 미웠겠지. 알아. 내가 형을 비롯해서 모두를 깔보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도 알아. 뭐, 어쩌면 그랬을지도. 난 평생 살아남기 위해서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어쩌면 형에게서조차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이제 형이 날 떠나려 하고, 나는 형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가 없어. 난 언제나 생각했어. 내가 원했던 아버지를 가졌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그리고 이제껏 내가 원했던 아버지는 사실 형이었어."
"지금 여기서, 네가 이룬 것들을 보니까 내가 참 초라해지는구나.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지. 상관없어. 난 내가 세상을 구할 거라 생각했고, 여기 있는 너는 이제껏 매일, 매 분마다 세상을 바꿔왔어."
빅 엔젤은 뭔가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세상을 바꾸는 것
조금씩
좀 더 좋게
지금, 여기서 -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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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게 이를 예상한 사람은 마르크 에이브럼슨Mare Abramson이다. 그는 탈시설화 운동이 가속화되던 1970년대 초반에 캘리포니아주 샌마테오의 구치소를 방문했다가 그곳에 수많은 정신질환자가 감금되어 있는 것을 목격했다. "한 사회가 정신장애 행동을 인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는 1972년의 논문에 이렇게 썼다. "만약 정신장애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이 정신보건 체제라는 사회통제 안으로 진입하는 속도가 지체된다면, 지역사회의 압력은 그들을 형사처벌 체제라는 사회통제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이 논문이 발표되고 1년 후 캘리포니아주의회는 에이브럼슨이 제기한 우려를 논의하기 위해 청문회를 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교도소에 수감된 정신질환자수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대중의 관심은 사그라들었고, 많은 지역사회가 자체적으로 떠안을 뻔했던 문제를 구치소와 교도소를 통해 해결한 것에 만족하는 듯했다. 에이브럼슨의 우려가 현실이 된것이다. 치료권리옹호센터는 이렇게 주장한다. "현 상황에서 가장우려되는 측면은 이러한 수치가 더 이상 전문가나 대중의 반응을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세기 전이었다면 이러한 보고가 열띤 공적 논의와 개혁안을 끌어냈을 것이지만, 이제는 대중에게 하품만 나오게 할 뿐이다." - P65

해리엇은 총체적 기관이 학대자가 무제한의 권력을 휘두르도록 조장한다는 사실을 배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본인의 경험을통해 같은 기관에서 또 다른 역학이 펼쳐질 수도 있다는 사실, 즉 재소자와 동정적인 직원 간에 때때로 유대관계가 형성된다는 사실도 분명히 깨달았다. 어빙 고프먼도 《수용소》에서 이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총체적 기관에서 하는 일은 ‘인간 재료 human material‘와 매일같이 상호작용해야 하는 노동, 그의 용어로는 ‘사람노동people work‘에 속한다. 심지어 환자와 직원 간의 사회적 거리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고안된 시설에서도 사람 노동은 도덕적·정서적으로 그 틀을 무색하게 할 수 있다. 고프먼은 말한다. "직원들이 인간 재료로부터 아무리 먼 거리를 유지하려고 해도 인간 재료는 동료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나아가 애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재소자가 사람으로 보일 위험은 늘 존재한다. 그래서 재소자에게 고통이라 느껴질 만한 것이 가해지는 경우, 그에게 공감하는 직원은 고통을 느낀다. " - P73

 한편 이 시기에 양형 기준이 강화되면서 플로리다주 교정시설의 수감자 수가 수용 가능 인원을 초과하는 와중에 교도소 인력은 예산 부족으로 감축되었다. 그 결과 여러 교도소에서 교도관의 근무시간이 길어졌으며, 이로 인해 스트레스 수치와 함께 학대 가능성도 높아졌다. - P83

 많은 재소자가 어릴 때부터 폭력에 시달렸다. 해리엇은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것을, 즉 폭력의 피해자가 폭력의 가해자로 성장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사실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해리엇만이 아니었다. 2012년 사회학자 브루스 웨스턴 Heaterm의 연구팀은 매사추세츠주 교정시설 수감자 122명과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중 절반이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구타당했다고 답변했다. 성폭행을 당한 사람도 많았다. 또한 무질서하고 위험한 동네에 살면서 총기 사고를 목격한 사람도 많았다. "대다수의 폭력범은 처음 범죄를 저지르기 한참 전부터 피해자다." 웨스턴은 이렇게 요약한다. 과거에 피해자였던 수감자가 많다는 것은 그들이 그저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자비와 연민의 대상임을 뜻하지만, 교도소에는 그런 정서가 거의 없다"고 웨스턴은 말한다. 인터뷰에 참가한 수감자의 4분의 3이 교도관이나 다른 재소자의 폭력을 목격했다고 답변했던 것이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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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5월의 어느 저녁,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미국인 에버렛 휴스EverettHughes는 어느 독일인 건축가의 집을 방문했다. 때는 1948년, 독일의 다른 많은 지역과 마찬가지로 프랑크푸르트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연합군이 나치에 대항해 공중전을 벌이며 집중 폭격한 대로를 따라 허물어져가는 저택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야말로) 동네 전체가 통째로 파괴되어 있었다. 폭격이 일어나기 몇 주 전 휴스는 일행과 함께 차를 몰고 분화구처럼 땅이 숭숭 팬 도심을 돌아다니며 전쟁의 참화를 비켜간 상점가나 주택가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얼마 안 가 그들은 탐색을 포기했다. "어딜 가든 지붕이 날아가거나 아예 무너진 집이 최소 한 채는 있었고, 흔히 절반이나 그 이상이 무너진 상태였다." 휴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 P14

"그래도 부끄러움은 그대로입니다만." 건축가가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식민지를 잃고 국가적 명예를 실추한 참이었어요. 그때 나치 놈들이 나타나서 그 감정을 이용했죠. 게다가 유대인들, 그들이 문제였습니다. (...)이 최하층 인간들은 이가끓고, 더럽고, 가난하고, 지저분한 카프탄(튀르키예, 아랍 등 지중해동부 지방 나라들에서 착용하던 긴 상의 옮긴이) 차림으로 게토를 뛰어다녔거든요. 첫 전쟁 후에 여기로 와서 믿을 수 없는 방법으로 큰돈을 벌었죠. 좋은 자리란 자리는 전부 유대인들이 차지했어요. 의사, 변호사, 공무원 열 명 중 한 명이 유대인이었다니까요."
건축가는 여기서 이야기의 흐름을 놓쳤다. "제가 어디까지말했죠?" 휴스는 그에게 유대인이 "전부 차지했다"는 이야기까지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요, 그 얘기." 건축가가 말했다. "물론 유대인 문제를 그렇게 해결해선 안 되었죠. 하지만 문제는 문제였으니까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어요." - P16

그러나 휴스는 다른 요인에 주목했다. 그 일에 관련된 자들은 광신자도 아니었고 딱히 독일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히틀러 시대의 범죄자들은 그저 총통의 명령에 따라 잔악한 짓을 저지른 게 아니었다.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
의 ‘대리인‘이었다. 프랑크푸르트의 건축가 같은 선량한 사람들은나치의 유대인 박해에 대해 깊이 따져 묻지 않았다. 그들에겐 유대인 박해가 어떤 면에서는 만족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Holocaust‘ ‘유대인 말살Judeocide‘ 등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표현하는 용어가 여럿 나와 있었으나 휴스는 보다 평범한 표현을 선택했다. 그는 유대인 학살을 ‘더티 워크dirty work‘라 표현했다. ‘불결하고 불쾌하지만 점잖은 사회 구성원들이 아주 모를 수는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독일에서 ‘열등한 족속‘을 제거하는 것은 나치에 찬동하지 않던 지식인마저 동조했다. 휴스는 ‘유대인문제‘에 관한 건축가의 생각에 대해 프랑크푸르트에서 다른 대화들을 나누며 결론을 내렸다. 휴스는 그 건축가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자신을 그들(유대인)과 명확히 분리하고 그들을 문제라고 호명했다. 그런 그가 제 손으로는 하지 않을 더러운 일을 다른사람에게 시키고는 또 그 일이 부끄럽다고 표현했다. 이것이 더티 워크의 본질이다. 선량한 사람들은 비윤리적인 행위를 대리인에게 위임한 뒤 책임을 편리하게 회피한다. 더러운 일을 떠맡은 사람들은 무슨 불량배가 아니라 사회로부터 ‘무의식적 위임‘을 받은 이들이다. - P17

이 시급 노동자들은 글로벌 경제의그늘에서열심히 일하고도 그 이윤을 나눠 갖지 못한 지 오래다. 코로나 대유행 중에 이들의 노동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필수노동‘. 물론‘
필수노동자는 그 이름으로 불리기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건강보험을 보장받지 못했고, 유급병가를 쓸 수 없었으며, 치명적일 수있는 바이러스에 노출될 상황에서도 개인용 보호 장비를 지급받지 못했다. 그렇긴 해도 필수노동이라는 새 이름은 어떤 근본적인 진실을 드러내 강조했다. 이들 없이는 사회가 돌아갈 수 없다는진실을.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필수노동 가운데는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여겨져 더욱 은밀한 곳으로 숨어든 노동이 있다. 나는 이를 ‘더티 워크‘라고 부른다. 그중 하나는 구치소나 교도소 내 정신병동에서 노동이 이루어진다. 미국의 주들에는가장 큰 정신과 치료 시설이 공공 병원이 아니라 구치소와 교도소인 곳이 많다. 그 안에서는 엄청난 잔혹 행위가 자행되고, 의료진은 교도관의 수감자 학대 행위를 묵인하는 등 일상적으로 의료윤리가 위반된다. 또 하나의 더티 워크는 미국의 끝나지 않는 전쟁에서 드론(무인기)으로 ‘표적살인‘을 수행하는 일이다. 전쟁이 뉴스헤드라인에서 점점 사라지는 동안 드론을 이용한 공습 살인 건수는 꾸준히 증가하는 반면 그에 대한 감시는 소홀하다. - P22

그저 돈을 벌겠다고 기꺼이 비윤리적인 일을 하는 사람은 망신당해도 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는 최근 몇 년간 이주민 인권운동가들이 미국 국경에서 비인도적인 이주민 정책을 집행하는 국경 순찰대를 보며 느끼는 것이다. 일부 평화운동가들은 표적살인을 수행하는 드론 조종사들이 손에 피를 묻혔다며 비난한다. 이 활동가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앞으로 이 책에 등장하는 더티 워커들은 이들이 서비스하는 시스템의 1차 피해자가 아니다. 이들의 행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다. 이들의 일은 이따금 심한 고통과 피해를 초래한다.
그러나 더티 워크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비난의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들의 행위를 지속시키는 권력의 움직임과 복잡한 공모 관계를 감추는 데 유용하다. 또한 누가 그 일을 맡을지 결정하는 구조적 차별이 은폐될 수 있다. 미국 사회에는 원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을 만큼 더티 워크 일자리가 많음에도 더티 워커 계층의 구성은 무작위적이지 않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더티 워크는선택지와 기회가 적은 사람들에게 과도하게 배정된다. 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궁핍한 시골 지역 주민, 미등록 이주노동자, 여성, 유색인이다. 임금 수준이 낮고 물리적 위험이 많은 일자리가대개 그렇듯, 더티 워크는 기술·자격· 교육 수준이 높고 부유한사람들이 지닌 사회적 유동성과 권력이 없는, 덜 특권적인 사람들에게 주로 돌아간다. - P25

일상의 대화에서 ‘더러운 일‘은 자랑스러워할 수 없는 일 또는 불쾌한 일을 뜻한다. 이 책에서 ‘더티 워크‘는 일상어보다 더 구체적인 뜻을 가진다. 첫째, 다른 인간에게 또는 인간이 아닌 동물과 환경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 노동으로, 이따금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둘째, ‘선량한 사람들‘, 즉 점잖은 사회 구성원이 보기에 더럽고 비윤리적인 노동이다. 셋째, 그 일을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낮게 평가되거나 낙인찍혔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아니면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스스로 위배했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상처를 주는 노동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선량한 사람들‘의 암묵적 동의에 기반한 노동으로, 그들은 사회질서 유지에 그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명시적으로는 그 일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만약의 경우에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그 더티 워크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해야 하는데, 이는 다른 누군가가 매일같이 고역을 치르리라는 것을그들이 알고 위임한다는 뜻이다. - P30

거의 모든 형태의 더티 워크에 나타나는 공통점 하나는 그것들이 숨겨져 있어서 ‘선량한 사람들‘이 더 쉽게 눈감을 수 있고 고민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저분하거나 끔찍한 것을 목격하지 않으려는 욕망 자체는 전혀 새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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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스는 썼다. "불쾌한 행위는 사회생활이라는 무대의 뒤편으로 옮겨졌다. (…) 우리가 문명화라 부르는 모든 과정의 특징이 바로 이 격리의 움직임, 혐오스러운 것을 ‘무대 뒤편‘에 숨기는 일임을 우리는 앞으로 거듭 확인하게 될 것이다." - P31

그뿐만 아니라 더티 워크가 눈에 띄거나 눈앞에 들이밀어질 때도 쉽게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도저히 바꿀수 없는 거대한 외부의 힘을 원인으로 들먹일 수 있다. 그러나 틀렸다. 도저히 바뀌지 않을 것처럼 보일지라도 더티 워크는 정해진 숙명이 아니다. 살아 있는 인간들이 내린 구체적인 결정, 원칙적으로 우리가 도로 물릴 수 있는 결정의 산물이다. 우리 정부가 채택한 정책과 우리 의회가 제정한 법률의 산물이다. 전쟁에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부터 가장 취약한 시민을 어디에 감금할 것인가까지 모든 문제에 대해 우리가 내린 결정의 산물이다. 우리가 더티워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우리 사회의 근간을 드러낸다. 우리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떤 사회질서를 무의식적으로 승인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타인에게 어떤 일을 시키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 P35

신체적 증상만 문제였던 것은 아니었다. 해리엇은 어떤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력감이었다. 이 감각은 어린 시절의 가장 암울한 순간들, 즉 아버지의 변덕스러운 행동을 보고도 힘이 없어나서지 못했던 장면들을 끄집어냈다. 해리엇의 언니는 술에 취한 아버지의 폭언에 가끔 맞섰지만 해리엇은 아버지의 마음에 들려고만 노력했다. 그게 안 되면, 당연히 안 되는 일이었지만,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러던 그가 이제 다시 한번 두려움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환경에 갇혔다. 전환치료병동에서는 위법 행위를 목격하는 것부터가 위험했다. 누가 그 일을 폭로할지 모르는 탓에 교도관들이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학대가 발생하는 경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전해지는 방법은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에 가는 것"이라고 해리엇은 말했다. "목격자가 되지 마라. 맡은 일이나 하다 가라."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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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에게 라파스란 대부분 빛과 냄새로 남아 있다.
햇빛은 바다와 고래 등에서 튕겨 나와, 청새치와 파도와 모래위에서 반짝였다. 헐벗은 뾰족한 바위와 은은한 사막을 스치고지난 그 햇빛은 홍수처럼 이 땅을 가득 채웠다. 노랗고, 파랗고, 투명하고, 하얗고, 사방이 진동하고, 솔직하고도 무뚝뚝하게, 있는 그대로를 드러냈다. 빨갛고 노랗고, 파란 꽃들이 꼭 플라스틱같았다. 빛, 억수처럼 내리쬐었지.
엔젤은 비 오는 날도 무척 좋아했다. 비가 오면 그림자가 모퉁이와 골목길을 따라 신비한 길을 내었다. 그리고 모두는 황혼을 사랑했다. 빛이 정신을 잃고 언덕을 지나 태평양으로 떨어지는 모습. 붉은 태양은 점점 더 빨개지고 주홍빛으로 변하다 마침내는 초록빛이 되어갔다. 하늘은 용암이 검은 바위를 먹어치워 불타오르는 거대한 잇자국을 내듯 녹아내렸다. 때로는 온 도시가 멈추어 서서 서쪽을 바라보았다. 가게 주인들은 안에서 나와거리에 섰다. 가족들은 집에 누워 있던 병자들을 침상이나 휠체어에 태워서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러면 그들은 하늘을 집어삼키고 있는 그 광기에 굽은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것이다. 갈매기떼와 펠리컨의 소용돌이가 하늘에 폭동을 일으키며 떠다니는 모습은 마치 하느님이 손수 뿌리는 꽃가루 눈송이 같았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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