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는 사랑에 관한 돌이킬 수 없는 비밀을 발견했다. 가장 완벽한 사랑에서조차 한쪽이 다른 한쪽을 덜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똑같이 착하고 똑같이 재능 있고 똑같이 아름다운 두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서로를 똑같이 사랑하는 두 사람은 세상에 없다.  - P86

카밀라는 마누엘의 손 위로 몸을 숙인 채 그에게 귓속말을 했다.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에스테반에게 그건 자신이 결코 알 수 없을 새로운 친밀감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완벽한 증거였다. 자신의 몸이 오므라들면서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끝없이 작아지고 끝없이 달갑지 않은 존재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는 사랑의 장면을 자신에게는 차단된 천국을 한 번 더 힐끔 보고는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 P94

"하지만 마누엘, 우리 마누엘. 네가 어렸을 때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줬는지 기억 안 나니? 시내 여기저기를 기꺼이 돌아다니면서 작은 심부름을 해줬었는데, 내가 아플 때는 식당에 가서 수프를 끓여 달래서 가져오기도 했잖아."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많은 것을 해줬는지 기억나니?"라고 말했을 것이다.
"네."
"나도 누군가를 잃었단다, 마누엘, 나도... 우리는 하느님이 사람들을 당신 품으로 데려간다는 것을 알고 있잖니." 하지만 이 말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에스테반은 살짝 몸을 돌려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그렇게 스무 걸음쯤가다가 멈춰 서서는 다시 골목길을 내려다보았다. 멀리떠나고 싶지만 돌아오라고 부르는 주인의 기분을 상하게할까 망설이는 개처럼.
그것이 사람들이 그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전부였다. - P108

 그 아이가 주위에 사는수천 명의 다른 소녀들보다 예뻤는지 똑똑했는지는알 도리가 없지만, 어쨌거나 그 아이는 선장 자신의 딸이었어. 커다란 참나무 같은 남자가 계집아이 하나사라졌다는 이유로 마치 장님이 빈집을 헤매는 마냥세상을 떠돈다는 것이 너에게는 하찮게 보일 수도 있겠지. 그래, 넌 이해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사랑하는내 딸아, 난 이해한다. 사실 그 생각을 하면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야. 간밤에 선장은 나와 함께 앉아서 딸에 대해 이야기했지. 그가 손으로 턱을 괴고 화롯불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했어. ‘가끔은 딸아이가 멀리 여행 중이고 그 아이를 다시 보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딸아이가 영국에 있을 것만 같아요.‘ 이런말 하면 넌 나를 비웃겠지만, 선장은 자신이 늙을 때까지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세상을 떠도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드는구나. - P113

"절 그냥 놔둬요. 상관 마시라고요."
에스테반이 얼굴을 바닥에 묻고 울부짖었다.
"저는 혼자예요. 혼자, 혼자라고요."
그 옆에 서 있는 선장의 크고 넓은 얼굴이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지며 잿빛으로 변했다. 지난날의 아픈 기억이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선장은 바다에 관한 이야기를 할때를 제외하면, 세상에서 가장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용기를 내어 진부한 말이라도 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바닥에 쓰러진 형체가 듣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말했다.
"에스테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네.
최대한 밀고 나갈 수밖에 없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아. 알잖아. 시간은 계속 흘러가니까.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알면 자네도 놀랄 거야."
그들은 리마로 출발했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에 도착했을 때, 선장은 물건의 운반을 감독하기 위해 다리 아래 강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에스테반은 다리를 건넜고,
다리와 함께 추락했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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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년 7월 20일 금요일 정오, 페루에서 가장 멋진 다리가 무너지며 다섯 명의 여행자가 그 아래의 골짜기로 추락했다. 이 다리는 리마와 쿠스코를 잇는 큰길에 놓여있었고, 매일 수백 명의 사람들이 건넜다. 사람들은 리마에 방문한 지인을 이끌고 와서, 백 년도 더 전에 잉카인들이 고리버들을 엮어 만든 이 다리를 구경시키곤 했다. 사실 다리라고 해 봐야 사다리처럼 엮은 얇은 판자 위에 마른 포도덩굴 난간을 달아 놓은 것에 불과했다. 걸을 때마다 다리는 협곡 위에서 출렁거렸다. - P11

그때 그의 시선이 다리에 내려앉았다. 그 순간, 마치 사용하지 않는 빈방에서 악기의 현이 툭 하고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대기를 채우더니, 갑자기 다리가 끊어지며 허우적대는 개미처럼 보이는 다섯 형체가 그 아래의 골짜기로 내던져졌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심 안도하며 "십 분만 늦었다면나도..."라고 혼잣말을 했겠지만, 주니퍼 수사에게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왜 하필 저 다섯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우주에 어떤 계획이 있다면, 인간의 삶에 어떤 패턴이 있다면, 갑자기 중단된 저들의 삶 속에 숨겨진 불가사의한 무언가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우연히 살고 우연히 죽는 것일까, 아니면 계획에 의해 살고 계획에 의해 죽는 것일까. 주니퍼 수사는 그 순간대기를 가르고 떨어진 그 다섯 명의 숨겨진 삶을 조사하겠다고,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떠난 이유를 밝혀내겠다고 마음먹었다. - P14

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온갖 색깔의 사랑을 포함할 만큼 광대했지만, 그 안에 폭압적인 그림자도 없진.않았으며, 결국 자신이 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딸을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비열한 굴레에서 벗어나길 갈망했지만, 딸에 대한 열정이 너무나 강렬해서 감당할 수 없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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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케이지를 둘러봤다. 녹슨 철창을 사이에두고 놀아주는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개들 대부분이 나를 무척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어떤 식으로든 그에 걸맞은 노력을 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곳의 개들은 마주보고 있는 케이지의 개들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이런 환경에선 철창 틈으로 손을 집어넣기만 해도 개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부전승으로 얻은 우정인 셈이다. - P325

 내게도 손님 대접을해야 한다면서 급하게 커피를 끓이고 달걀을 삶고 참외를 깎았다. 나는 그들 모두가 개 농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 걸 보고 조금 놀랐다. 짬밥의 꼬락서니가 어떻고 농장이 얼마나 더럽고 냄새나는지, 개들이 어느 정도 크기의 케이지에서 살고 있다는것뿐 아니라 비가 내리면 짬밥이 저수지로 흘러드는 것까지 다 알고있었다. 그런 일들이 괜찮은지 물어보자 상대는 내가 왜 그런 걸 물어보는지 즉시 이해했다.
"개키우는게 다 그런 거지 뭐."
그 대답은 아무런 노력도 들이지 않고 흘러나왔기 때문에 더욱더 확신에 차 있는 듯이 들렸다. 내 자신이 쓸데없는 참견쟁이처럼 느껴졌다. 이곳의 물을 마시고 이곳의 쌀을 먹는 사람들이 괜찮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내가 뭐라고 그게 더럽고 끔찍하다고 난리란 말인가? 나는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해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을 이론서 한 귀퉁이에서나 찾을 수 있을 법한 기준을 가지고 폄하하고 있는 걸까? ‘다 그런 거지‘라는 말속엔 내 비난보다 훨씬 더 거대한 존재에게 호소하는 울림이 있었다. 나는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 P355

지칠 때 화가 나게 만드는 개는 사나운 개가 아니다. 위협적인 개는예외 없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개고 이들은 누군가 다가가면 케이지 뒤로 물러나서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가까이 오면 짖고 물거야‘ 하는 신호를 보낸다. 이때는 밥만 붓고 지나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내 부아를 돋우는 개는 사람을 좋아하는 개, 호기심과 장난기가 넘치는 개다. 이런 개들은 엎어진 밥그릇을 돌려놓으려고 하면 그위에 올라서서 내 냄새를 맡으려고 코를 들이민다. 개를 밀어내려고 막대기로 쿡쿡 찌르면 더 신이 나서 달려든다. 그릇을 정리해도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통에 금세 다시 뒤집어놓는다.
한눈에 보인다. 개의 표정에서, 냄새를 맡고 머리를 흔드는 모습에서, 케이지 안에서 방방 뛰어다니는 모습에서 이 개의 정서가 보인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명랑함이. 하지만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물리적인 타격감을 지니고있는 컹컹대는 소리로부터, 털 먼지가 안개처럼 일어나는 케이지로부터, (게이머들이 이해할 만한 방식으로 말해보자면) 가만히 있어도 HP가뚝뚝 떨어지는 공간에서 멀어지는 것뿐이었다. - P375

 그런데도 죄책감은 개의 경우가 가장 컸다. (나만의 좀스러운 방식으로) 부끄러워할 줄도 알았다.
내게 닭은 언제나 고기였다. (돼지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개는 음식으로 대한적이 없었다. 개를 길러본 적은 없지만 주변에 항상 개를 기르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개와 함께 어울려 지낸 경험이있었기 때문에 개는 온전하게 ‘동물‘이라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병아리 떼를 폐기시킬 땐 느끼지 못했던 부끄러움을 개에게는 고함을 지르는 것만으로도 느꼈다는 점은 인간 사회 속에 자리 잡은 동물들이 온전한 삶을 누릴 ‘자격‘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할 단계를 암시하는듯 보인다.
먼저 그들은 상품이 되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아주 비싼 상품이 되어야 하며 궁극적으론 인간의 ‘친구‘(그러니까 감정의 교류가 가능한 상품)가 되어야 한다. 너무 맛있거나 아니면 너무 못생겨서 ‘친구‘가 될 가능성이 없는 동물들의 삶은 앞으로도 고달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P431

선량한 사람들은 언제나 스스로의 선량함을 의심하며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선량한 사람이 된다.
(폴 오스터, <폐허의 도시>>

개농장을 나아가 공장식 농장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만든 것 역시 ‘의심하지 않음‘이 아닌가 싶다. 누구도 동물들을 그토록 비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기르는 것이 괜찮은 것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동물의 부리나 이빨을 자르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동물을 굶기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갓 태어난 동물을 쓸모없다는 이유로 폐기 처리하는 것이 불가피한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20년을 살 수 있는 동물을 한 달 만에 죽이는 것이 지나친 일이 아닌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살이 빨리 찌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물을 죽이는 것이 온당한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맛을 위해 동물의 장기를 마취도 하지 않고 뜯어내는 것이 필요한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동물을 옴짝달싹 할 수 없게 가둬놓고 임신과 출산만을 반복하도록 만드는 것이 옳은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동물에게 음식 쓰레기를 먹이는 것이 정당한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목을 매달고 감전시켜서 동물을 죽이는 것이 용인될 수 있는 일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전통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효율성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이윤 추구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의심해보지 않는 존재는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시스템이든 언제든지 괴물로 변할 수 있다. - P445

닭이나 돼지는 얼마든지 먹어도 좋지만 개만큼은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뭔가 하나만 특별히 여기는 것은 위선 아니냐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모든 일에 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죠. 모든 비극에 참여하려 했다간 역으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가지만이라도 관여할 수 있으면 되는 겁니다." 당장 모두가 채식을 할수 있는 게 아니라면 식량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고 생물학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인간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동물부터 고기가되는 운명에서 구제하자는 주장이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이런저런 윤리나 논리에 대해 고민하는 이유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잔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야기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루에도 수십 톤의 음식 쓰레기를 쏟아내는 시대가 소비하는 고기의 양과 종류는 느는게 아니라 줄어야 한다. 그것이 동물과 환경뿐아니라 인간에게도 합리적인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 P455

개는 한참이 지나도 구석에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에 소시지를 조금 챙겨왔다. 하지만 통로 앞에 섰을 때는 쉽게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고기 냄새를 맡은 개들이 맹렬하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소시지를 한 주먹 쥐고 바라보니 이곳에 개들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났다. 마주 보고 있는 철창의 틈으로 개의 코와 앞발이 불쑥불쑥 삐져나와 있었다. 그런 케이지들이 산기슭까지, 내 눈에는 세상 끝까지라도 이어질 것처럼 늘어서 있었다.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 그 형태의 질서정연함 때문에 내가 시비를 걸고 있는 대상이 얼마나 견고한지가 피부에 와 닿았다. 그래서? 이 녀석한테 고기를 먹여서 기분이 나아지면 그다음엔 어떻게 하지? 또 그 옆에 있는 개는? 그 앞에 있는 개는? 사방에서 컹컹대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터져 나왔다. 그 혼돈의 오케스트라 한가운데서 나는 개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돌아서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P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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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경험이 사라져가는 시대

이 책은 경험의 멸종에 관한 책이다.
물론 모든 경험이 멸종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경험을 쌓아간다. 그 경험들은 자아감을 확인해주기도 하고 거기에도전하기도 하며,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바꾸기도 한다.
사람들은 대개 경험을 우리가 세상을 접하고 익히는 방법으로여긴다. 직접 경험은 우리의 첫 번째 선생님이다. 우리는 주변 세계를 탐색하는 법을 배우면서 마주하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 경험과 의미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라지지만 거기에는 공통된 맥락이 있다. 저마다 언어와 관습은 다르지만, 모두 언어와 관습을갖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공통된 인간성을 드러낸다. 
특정 유형의 경험들이 우리 삶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서로 얼굴을 맞대는 상호작용이나 쾌락을 추구하는 여러 활동과 같이 진화의 역사에 깊이 뿌리내린 경험들이 그렇다. 최근의 문화적 규범을 반영하는 경험, 즉 공유하는 환경이나 장소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이런 경험은 역사 내내 우리가 인간으로서 공유하는 현실을 만들고 유지하고 강화해주었다. - P11

디지털화, 매개, 초연결, 감시, 알고리즘에 의한 통제가 점점 심각해지는 세상에서 어떤 인간이 만들어질까? 인간의 조건이 아닌 사용자 경험에 집중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까?
인간은 몸을 갖고 있고, 자신의 취약성을 인식하며, 매개된 경험과 매개되지 않은 경험 사이를 자주 오가고, 성찰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하며, 결국 유한하다. 반면 사용자 경험은 실체가 없는 디지털이고, 추적 가능하며,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있고, 항상 매개자가 있다.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고 무한을 약속한다(몇몇 신기술이 장담하듯이 죽음 이후에도 남은 디지털 데이터를 모아 챗봇을 설계함으로써 비통해하는 가족을 위로할 수 있다). - P16

기술은 무엇이 가능한지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새로운 도구들은 점점 더 많은 것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게 한다. 줄서기, 손 글씨, 원격 학습, 길 찾기, 권태 등을 말이다.
현재 많은 기술은 사람조차 문제로 보는 것 같다. 장치, 플랫폼, 알고리즘을 통해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는 문제로 말이다. 과거의기술이 인간의 감각을 증폭시키는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기술은 자신의 감각을 불신하고 대신 기술에 의존하도록 우리를 훈련시킨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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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의 사장은 이런 식으로 야비하게밖에 표현할 도리가 없는데) 돈밖에 모르는 인간이었다. 그에게는 사람보다 상품이 더 중요했다. 그는우리가 절대 돼지를 때리지 못하게 했다. 상품에 흠집이 생기면 안 되니까. 그가 감시하는 동안뿐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농장의 원칙은 그랬다. 하지만 횡성의 사장은 사람을 물건처럼 대하지 않았다. 그가 물건처럼 다루는 것은 돼지뿐이었다. 그는 진심에서 우리가 너무 힘들게일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돼지를 때리는 것도 전기 충격기를 쓰는 것도 막지 않았다. 전자는 법적 책임을 피할 수만 있다면 누구든지두들겨 팰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돼지에게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게했다. 후자는 뺨을 얻어맞으면 자기가 뭘 잘못했나부터 고민할 사람이었지만 돼지에게 전기 충격 주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고대 로마의 귀족들은 이성의 노예들이 보는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성적으로 문란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횡성의 양돈장에서 보았던 일들도 같은 논리로 이해한다. 그건 그들이 폭력적이어서가 아니라 동물은 물건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어느 과학자의 말을바꿔서 표현해보자면 생명관에 상관없이 좋은 사람은 동물을 아끼고 악한 사람은 동물을 학대한다. 그런데 좋은 사람이 동물을 학대하는경우, 그것은 대부분 동물은 물건이라는 믿음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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