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강연에서 "저는 글을 신뢰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기억이 나는군요. 사실입니다. 글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말도 마찬가지고요. 말과 글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군요. 앞에서여러 번 말씀드린 것처럼 말과 글 모두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니라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질서를 필요로 하는 시스템이라고 믿기 때문이죠. - P101
다시 말하지만 글을 쓰면서 우리가 전략적으로 몸에 익혀야 하는 시간 감각은 글을 쓰는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쓴 글을 읽게 될 독자의 마음속에 흐르는 시간과 관련된 감각입니다. 이 감각을 익혀 두어야 교과서적으로 글을 쓸 때뿐 아니라 나만의 방식으로 글을 쓸때도 참고할 수 있겠죠. 의외의 방식으로 글을 전개해나간다고 할 때 그 ‘의외‘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독자가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시간 감각에 반전이라는 충격을 준 것일 테니까요. - P113
우리가 앞에서 ‘나만의 슬픔, 나만의 기쁨, 나만의 분노‘, 이 모든 나만의 것‘을 ‘모두의 언어‘로 옮기는 게 글쓰기라고 규정하지 않았던가요. 그러니 우선 슬픔 자체가 그냥 슬픔이 아닌 거죠. ‘나만의 슬픔‘이니까요. ‘모두의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나부터 과연 그것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나만의 슬픔‘이면서, 더 나아가 내 몫의 문장을 통해 새롭게 변신하게될 ‘나만의 슬픔‘이기도 한 거죠. - P126
셋째, 주어를 반복적으로 쓰게 되면 의도하지 않았어도 해당 주어가 강조될 수 있으니 문장 안에 숨길 수 있다면 숨기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앞에 쓴 짧은 문장의글에서도 주어가 감춰져 있는 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첫 문장부터 그렇죠? 짧은 문장의 경우 주어를 지나치게 노출해 쓰면 독자가 글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자칫주어만 남길 수 있으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 P137
넷째, 문장의 끝에 붙는 ‘-이다‘ 혹은 그 준말인 ‘-다‘를 서술격 조사라고 부르는데,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을 쓸 때는 이 서술격 조사를 생략하거나 아니면 다른 종결어미 (가령 - ㄹ까‘나 ‘ - ㄴ가)로 바꿔 쓰거나 그도 아니면 아예 서술격 조사나 종결어미를 과감히 생략한 문장을 중간중간 섞어 주시는 게 좋습니다. 제가 쓴 글에도 ‘ㅡㄹ까‘ 같은 종결어미를 쓰거나("설령 그런 소원을 갖게 되었더라도 굳이 공공연하게 밝힐 필요가 있었을까") 과감히 생략한 문장 ("자신이 쓰는 책의 한 문장에, 그것도 한 꼭지의 첫 문장에?", "첫 문장의 효과를 톡톡히 봤구나 하는", "하지만 그것도 잠깐) 이 보이시죠. 리듬 때문입니다. 읽을 때마다 ‘다‘가 툭툭 튀어나오면 마치 ‘다다다다‘ 하고 오토바이가 달려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으니까요. 긴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에서도 거슬리는데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에서야 오죽하겠습니까. 실제로 한국 소설가들이 질색하는 것 중 하나가 죄다 ‘- 다‘로 끝나면서 이어지는 문장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나네요. - P138
앞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다시피 글쓰기는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니 ‘내 생각이나 기분을글로 간단히 표현하는 것도 못 하다니‘라고 자책하실필요 없습니다. 외려 그게 자연스러운 거니까요. 자책감은 떨어 버리시고 수영이나 스케이팅을 익힌다고 생각하시면서 글쓰기를 연습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제가할 수 있는 건 여러분에게 행운을 빌어드리는 것밖에 없겠네요. 행운을 빕니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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