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족이나가자 찾아온 평화로움은 손에 잡힐 듯이 선명했다. 그래도 그 가족은100파운드짜리 책 세트를 사가긴 했다. 그만하면 용서받을 만하다.
찾는 책이 없다는 말을 들은 다음에도 왜 특별히 그 책을 찾아야 하는지 이유를 아주 길고 따분하게 설명하는 손님들이 종종 있다. 이런 행동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바로 지적 자위행위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본인이 습득한 정보가 있으면, 그게 뭐든지 일단 거들먹거리며 과시하기로 작정한 이상 내용이 틀리든 맞든 지겹게 웅얼거린다. 그것도 궁지에 몰린 책방 주인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다 들릴 만한 소리로 말이다 - P108
오늘은 차가운 동풍이 불어서 10시쯤 난로를 지폈다. 손님은 아주많았다. 새로 들어온 책들을 책장에 정리하느라 서점 안을 가로지르다가 페스티벌 침대에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 남자 아이 셋을 발견했다.
보통 손님들이 페스티벌 침대에 앉지 못하도록 하는데, 안 그러면 그곳을 놀이 공간으로 생각하는 아이들이 자꾸 엉망으로 어질러 놓아서나중에 치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에 밧줄로 저지선을 쳐 놓았는데, 이 녀석들이 아마 그 밑으로 기어 들어간 것 같다. 어쨌든 저렇게책에 조용히 몰두해 있는 아이들에게 딴 데로 가라고 말하려면 얼음처럼 차가운 심장이 필요할 것 같다. - P111
거기까지 간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눅눅한 싸구려 책들 중에서 뭐라도 찾아내려고 애쓰던 중에, 유언 집행자로부터 고인이 1920년대 이탈리아인 이민자의 무남독녀였다는 얘기를 듣게되었다. 고인의 아버지였던 이탈리아인은 스코틀랜드 여성과 만나 결혼을 하고 아파트 아래층의 비어 있던 가게에 카페를 차렸는데 순식간에 문전성시를 이뤘고 시내에서 가장 장사가 잘되는 가게로 번성했다.
유언 집행자가 먼지가 쌓인 서랍장을 발견하고 서랍 하나를 열어보니 카페가 전성기였을 때 찍은 수백 장의 흑백 사진이 들어 있는 누렇게 바랜 사진첩이 나왔다. 사진 속에는 웃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테이블은 만석이고,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부인이 1970년대에 사망한 뒤 몇 년 후 남편도 사망하자 유일한 자식인 딸이 사업을 물려받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카페 영업도 내리막에 들어서면서 결국 문을 닫게되었다. 아래층 카페의 커다란 창문은 전부 판자로 막아 놓았고, 한때번성했던 그곳은 새는 천장에 스며든 빗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외에는 무덤처럼 조용했다.
스코틀랜드인 부인과 번창하는 가게와 어린 딸, 다른 나라로 이주하고 외국어를 배우고 사업을 시작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진취력과 용기를 가졌던 그 젊은 이탈리아인의 낙천적 성격으로는 결코 운명이 그의 삶에 이런 슬픈 결말을 가져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이 2권짜리 [데카메론」은 그가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몇 안 되는 소지품 중 하나였음에 틀림없다. 그 책은 과연 선대로부터 얼마나 오랫동안 전해 내려와서 결국 그렇게 뉴컴녹에 있는 축축한 아파트의 상속자도 없는 유산이 되어버린 건지 궁금하다. 하지만 이 책은 오늘 젊은 여성 구매자의 손에서 다시금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고, 앞으로 또 어떤 수백 년 세월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 P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