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술꾼들의 모국어

재작년에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내고 인터뷰나 낭독회 등에서 틈만 나면 술 얘기를 하고 다녔더니 주변지인들이 작가가 자꾸 그런 이미지로만 굳어지면 좋을게 없다고 충고했다. 나도 정신을 차리고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앞으로 당분간은 술이 한 방울도 안 나오는소설을 쓰겠다고 술김에 다짐했다. 그래서 그다음 소설을 쓰면서 고생을 바가지로 했다. - P7

다만 내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혼자 순댓국에 소주 한 병을 시켜 먹는 나이 든 여자를 향해쏟아지는 다종 다기한 시선들이다. 내가 혼자 와인 바에서 샐러드에 와인을 마신다면 받지 않아도 좋을 그 시선들은 주로 순댓국집 단골인 늙은 남자들의 것이다. 때로는 호기심에서, 때로는 괘씸함에서 그들은 나를 흘끔거린다. 자기들은 해도 되지만 여자들이 하면 뭔가 수상쩍다는 그 불평등의 시선은 어쩌면 ‘여자들이 이 맛과 이재미를 알면 큰일인데‘ 하는 귀여운 두려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두려움에 떠는 그들에게 메롱이라도 한 기분이다. 누가뭐래도 나는 요절도 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반세기 가깝게 입맛을 키우고 넓혀온 타고난 미각의 소유자니까. - P26

김밥은 너그러운 음식이다. 김과 밥만 있으면 나머지재료는 무엇이어도 상관없다. 김밥은 아름다운 음식이다. 재료의 색깔만 잘 맞추면 이보다 어여쁜 먹거리가없다. 그래서 김밥에는 꽃놀이와 나들이의 유혹이 배어있는지 모른다. 지참하기 간단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꽃밭을 닮아서.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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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살아가면서 독창적인 레시피를 아주 많이 만들고 싶다. 그중에서 괜찮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 좋아하는 상대든 거북한 상대든, 만난 적 없는 상대는 상관없다. 그 사람도 리카의 레시피를 응용해서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겠지. 자신이 느낀 마음의 흐름이나 기쁨을 누군가가 경험해준다면, 그것만으로 리카의 가슴은 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고안한 이름 없는 무언가가 색과 형태를 바꾸면서 세상에 파문처럼 번지면 좋겠다. 수프에 마지막으로 넣는 한 방울의 숨은 맛처럼, 그런 연쇄 작용을 마음 한편으로 희미하게 느끼면서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 가지이를 만나고 싶다. 만나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세상은 살아갈, 아니, 탐욕스럽게 맛볼 가치가 있어요, 라고.
구석구석 세심하게 신경써서, 음식으로 탈난 사람도 없이 끝까지 해냈다는, 지금까지 느낀 적 없는 성취감으로 몸이 기분좋게 가라앉았다. 이것으로 지난 나흘간의 수고를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리카는 자기 냄새가 밴 여름용 이불을 코 아래까지 끌어올렸다. 몇 개의 벽을 사이에 두고, 천천히 재생해가는 부녀의 기척을 느끼면서.
전부 다 먹어치워서 이제는 뼈만 남았다.
리카는 눈을 감고 냉장고 안의 그 멋진 적갈색 뼈, 그리고 내일 아침에 할 요리 순서를 떠올리면서, 오랜만에 속이 꽉 찬 잠에 빠져들었다. - P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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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말이야, 요리교실에 다니는 여자에 대한 편견과 콤플렉스 탓이 아닐까? 혜택받은 여자들이라는 이미지를 멋대로 떠올리면서 다들 질투한 거지."
"음.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런 편견이 있었을지 몰라. 뭔가 깨달은게 있어. 최근에 약간이지만 요리를 하게 된 뒤로 청소나 요리는 로큰롤이더라. 사랑이나 다정함이 아니라, 가장 필요한 건 힘이랄까..... 일상을 무디게 넘어가지 않겠다는 투지랄까......." - P469

"나는 ‘언젠가‘, 시간을 듬뿍 들여서 칠면조구이를 할 거예요. 나의 즐거움을 위해."
리카는 이제 공격을 멈추기로 했다.
"난 당신이 특별히 가엾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친구가 없는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생각해봤어요. 내가 만약 칠면조를 굽는다면 열 명이나 손님을 모을 수 있을까 하고. 교제 폭이 좁고, 무엇보다 지금 내가 사는 맨션에는 그렇게 큰 오븐이 없고, 열명씩 들어갈 만큼 넓지도 않아요. 의자도 그릇도 부족해요. 봐요. 나도 못 하잖아요. 간단히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예요. 그러나내가 넓은 집을 얻게 된다면, 사람을 모을 수 있다면, 해볼지도 모르겠어요. 그때, 만약 당신의 혐의가 벗겨져 석방된다면."
잠시 머뭇거렸지만, 리카는 과감하게 말하기로 했다. 야마무라씨가 소개해준 공원 앞의 집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의 칠면조구이를 먹으러 와주세요. 꼭."
가지이 마나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울음을 터트렸다. 그 일그러진 웃는 얼굴이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의 도움닫기였음을 리카는 안다.
거짓으로 우는 게 아니었다. 콧물을 훌쩍거리며, 연신 쏟아지는 눈물을 두 손으로 막으려 하고 있다. 손가락 사이로 붉게 충혈된 눈과 부은 눈두덩, 굵은 눈물이 뭉개지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언제까지고 멈추지 않을 듯이 오열했다.
만약 아크릴판이 없다면, 자신은 틀림없이 가방 속의 손수건을꺼내 주었을 것이다. 가지이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타월지 손수건이라 아주 조금 부끄럽지만, 다음 휴일에는 백화점에라도 가서 가지이가 아주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은 우아한 꽃무늬 손수건을 몇 장 사야겠다. - P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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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달리 조숙하고 어른스러웠던 소녀.
자신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의식은 누구보다 강했다. 그러나 풍요롭고 복잡한 내면은 슬플 정도로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너는 다른 아이와 달라"라고 다정하게 말해주는 아버지와 잘 따르는 여동생을 제외하고 아무도 자기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두뇌와 육체는 점점 농익어서 숙성된 치즈 같은 향을 뿌리는데,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려고 하지 않는다. 존재를 알아차려주지도 않는다. 이대로 넘쳐날 것 같은 내면을 누구와도 나누지 못한 채, 나,
남들보다 빨리 썩는 게 아닐까••••••. 그렇다. 초조함이다. 여학교시절, 학교의 왕자님 역할을 기쁘게 연기하면서도, 리카 역시 초조해했다. 여자로서 발견되지 못한 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시기를 동년배 소녀들에게 소비되고 있어 때때로 주저앉고 싶을정도로 초조했다.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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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살지 않는 건 폭력이라고 생각해요."
어느새 시노이 씨는 탁자로 돌아가서 관심없다는 듯이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리카는 계속했다.
"자신을 소홀히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분노를 퍼붓는 행위라고 생각해서 나 자신....."
말할 수 없다. 지금은 절대 말할 수 없다. 스펀지에서 나오는 무수한 거품에서 시선을 들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조그맣게 상처를 입혔을지도 모른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아서 엄마를, 미즈시마 씨를, 레이코를, 마코토를 아버지가 그 무렵 스스로에게 계속 그랬듯이 자신을 소홀히 함으로써 그는 주위 사람들을 몰아세웠다.
아버지가 미타카에서 살던 집과 이곳의 청결도는 전혀 다르지만, 분위기는 매우 비슷하다. 폐허화한 가정이다. 싫지는 않지만, 이곳에 그리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열다섯 살때의 자신이 떠오를 것 같다. 시노이 씨는 아까와는 다른 사람 같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에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남자여도 제대로 살아가야 하나. 꽤 냉철한 의견이군."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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