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더 여쭤보겠습니다. 선생님의 유년 시절이 퍽 멀게느껴지시나요? 선생님이 어머니 무릎에 앉아 있었던 때가 아득한 옛날처럼 여겨지세요?"
로리 씨는 뜻밖에도 유순한 카턴의 태도에 놀라며 대답했다.
"이십 년 전쯤만 해도 그랬다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마치 원을 그리듯 점차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 같소. 원만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의 하나라고 할까.
요즘은 오래전에 돌아가신 젊고 예뻤던 어머니(나는 이렇게 늙었는데 말이야!)에 대한 추억이 자주 떠오른다오. 세상이라는 것이 그리 실감 나지도 않고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모르고 천방지축 날뛰던 시절의 기억도."
"그 느낌 알 것 같습니다!" 카턴이 밝게 홍조를 띤 얼굴로 소리쳤다. "그래서 지금 더 나아졌다고 느끼시는 거죠?"
- P445

"아아, 카턴 아저씨다, 카턴 아저씨!" 어린 루시가 달려와 그의 팔에 열렬히 매달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저씨가 오셨으니, 이제 우리 엄마 도와주실 거지요? 우리 아빠 구해 주실 거지요! 엄마를 보세요, 아저씨! 엄마를 가장 사랑하는 아저씨잖아요. 우리 엄마를 좀 보세요. 네?"
그는 허리를 굽혀 아이의 활짝 핀 꽃 같은 뺨에 자신의 뺨을 지그시 댔다. 이윽고 어린 루시를 살짝 떼어놓고 의식 없는 아이의 어머니를 들여다보았다.
"가기 전에. 그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머뭇거렸다. "아저씨가 엄마한테 키스해도 되지?"
사람들은 나중에 이 장면을 회상했는데, 카턴이 허리를 굽혀 루시의 얼굴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대면서 몇 마디 중얼거렸다고 했다. 그때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어린 루시는 나중에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훗날 그녀가 고운 할머니가 되었을 때 손자들을 앉혀 놓고 카턴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 P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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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박사가 다네이를 석방시키려고, 아니, 최소한 재판은 받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에게 당시 여론은 너무 강경했고, 급격하게 변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국왕은 재판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라는 공화국은 세상을 상대로 승리, 아니면 죽음이라는 전쟁을 선포했다. 노트르담의 높은탑에는 밤낮으로 검은 깃발이 나부꼈고 삼십만 명에 달하는 시민이 프랑스 곳곳에서 지상의 압제자에 대항해 총궐기를 했다.
마치 용의 이빨을 널리 뿌려놓은 듯 언덕과 평원, 바위와 자갈,
충적토에서, 남쪽의 환한 하늘 아래, 북부의 구름 아래, 가을과겨울 할 것 없이, 포도밭과 올리브 과수원에서, 짧게 깎은 풀과 옥수수 그루터기에서, 넓은 강의 비옥한 강둑, 해안의 모래밭에서도 똑같이 열매를 맺은 듯했다. 그런데 어찌 사사로운 근심으로 인민 공화국 원년의 범람하는 물결을 거스르려 하겠는가. 그것도 하늘의 창문도 닫힌 상태에서,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홍수가 아닌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대홍수를 말이다.
- P390

그들은 갑자기 다시 멈추더니 잠시 후 이번에는 새로운 춤을 추었다. 먼저 도로 너비만큼 줄지어 선 다음 고개를 숙이고 두팔을 머리 위로 올린 채 비명을 지르며 덮칠 듯 달렸다. 어떤 싸움도 이 춤의 절반만큼도 오싹하지 않으리라. 이것은 단연코 한때는 순진무구했으나 이제는 완전히 악마적으로 되어버린, 타락한 놀이였다. 원래 건전한 오락거리였지만 피를 끓게 하고 감각을 혼란스럽게 하며 강심장을 만들어주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원래 선했던 것이 어떻게 뒤틀리고 추해졌는지 보여 주었을뿐 아니라 고상해 보였던 것일수록 더욱 추해 보일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젊은 하녀는 가슴을 풀어 헤쳤고, 예쁜 처녀의 머리는 헝클어졌으며, 피와 진흙탕 속에서 움직이는 섬세한 발동작은 박자가 맞지 않았다.
카르마놀이라는 춤이었다.  -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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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육 과학자 R. A. 로리(R. A. Lawrie)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소비자들이 고기의 질을 판정할때 으뜸으로 꼽는 기준은 질감과 연한 정도이다. 사람들은 빛깔과 향을 포기하고서라도 연한 고기를 선택하는 것 같다. 식육 과학의 핵심 목표는 연한 고기를 생산하는 방법을 찾는 것인데, 사육 방법, 도살방법, 저장 방법, 조리 방법 모두가 고기를 연하게 하는 데 나름의 역할을 한다. 불에 익히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요리 역사가 마이클 시먼스에따르면, 역사상 요리사의 주된 목표는 한결같이 음식을 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핵심은 요리사가 인간이라는 기계의 작용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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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돌은 손잡이가 두 개인데, 남자 두 명이 각각 나눠 잡고 미친 듯이 돌렸다. 그럴 때면 얼굴이 하늘을 향하고 머리칼이 뒤로넘어가 세상에서 가장 사납게 변장한 최악의 야만스러운 얼굴보다도 더 섬뜩하고 잔인해 보였다. 거짓 눈썹과 거짓 수염이 연신휘날렸고 오싹한 얼굴은 온통 피와 땀투성이였으며 소리를 지를때면 흉측하게 뒤틀렸고, 짐승 같은 광기와 수면 부족으로 충혈된 눈은 이글이글 불타는 것 같았다. 이 악한들이 빙글 빙글 돌면 젖어서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눈을 가렸다가 목 뒤로 넘어가곤 했다. 여자들은 그들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포도주를 들고있었고, 그들은 칼을 가는 동안 술을 마셨다. 피가 뚝뚝, 포도주가 뚝뚝 떨어지고, 숫돌에서 불똥이 튀어 주변 대기는 온통 핏방울과 불빛으로 가득 찼다. 그 무리 중에서 피로 얼룩지지 않은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앞 사람이 일을 끝내면 자신의 칼을 갈기위해 숫돌을 향해 서로 어깨를 밀치는 남자들도 허리까지 옷을벗어젖힌 몸뚱이와 사지에 피 얼룩이 묻어 있었다. 남자들은 은갖 종류의 마를 걸쳤는데, 그 넝마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사악하게도 여자들에게서 훔친 레이스와 실크, 장식 띠 따위도 걸쳤는데, 속속들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날을 세우려고 가져온 손도끼와 칼, 총검, 겸 따위도 모두 피로 붉게 물이 들었다. 난도질을 했던 검을 리넨으로 만든 끈이나 찢어발긴 옷자락으로 손목에 묶어 차고 다니기도 했다. 끈의 종류는 여러 가지였지만 모두한 가지 색으로 짙게 물이 들어 있었다. 무기의 주인이 쏟아져내리는 불똥 사이로 미친 듯이 무기를 잡아채어 거리로 뛰쳐나갈 때, 그 광포한 눈동자도-문명화된 구경꾼이 아무리 조준이 정확한 총으로 겁을 주려고 해도 조준하는 데만 이십 년쯤 걸릴 그런 눈이었다-똑같이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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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파르주 부인은 거만하게 손님을 바라보며 남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란 사람은 아무것에나 환호하고 울부짖어 볼거리를 연출하고 시끌벅적하게 만드는군요.
그렇지 않아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부인,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잠깐이지만"
"만약 당신에게 산더미처럼 쌓인 인형을 주고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서 원하는 부분을 훔쳐 가라고 하면 당신은 가장 비싸고 화려한 부분을 갖겠죠, 그렇죠?"
"그렇습니다. 부인"
"좋아요. 만약 당신한테 날지 못하는 새를 떼로 주고 원하는대로 날개를 뽑으라고 하면 당신은 가장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새의 날개를 뽑겠죠. 그렇죠?"
"그럼요, 부인"
"당신은 오늘 새와 인형, 둘 다 본 거예요." 드파르주 부인은 자신들이 마지막으로 또렷이 보았던 곳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자, 집으로 가요!"
- P251

"하지만 여보!" 부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똑같이 말했다. "하지만 여보! 당신 오늘 밤 풀이 죽어 보인단 말이에요 !"
"음, 그래." 드파르주는 부인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속마음을털어놓았다. "정말 오래 걸리는군."
"오래 걸리지요." 아내가 되풀이했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않는 일이 있나요? 특히 복수와 응징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해요. 그건 자연법칙이에요.."
"번개가 사람을 내려칠 때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지." 드파르주가 말했다.
"그 번개가 만들어져 저장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죠.말해 봐요." 부인이 침착하게 말했다.
드파르주는 아내의 말에 담긴 깊은 뜻을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지진이 도시를 집어삼키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요." 부인이 말했다. "바로 그거예요! 하지만 지진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죠?"
"아마도 오래 걸리겠지." 드파르주가 말했다.
"하지만 준비가 끝나고 실행에 옮겨지면,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어버리죠. 그전까지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더라도 언제나 준비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도 마음을 편히 가져요, 흔들리지 말고"
- P255

그날 아침, 생탕투안에서는 초라한 몰골과 우울한 표정을 한거대한 무리가 앞뒤로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강철 칼날과 총검이 태양빛에 반사되어 굽이치는 수많은 머리 위로 번쩍거렸다.
생탕투안의 목구멍에서는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고, 숲을 이룬 헐벗은 팔들이 허공을 향해 내지를 때의 모습은 찬바람에 흔들리는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같았다. 손가락들은 온갖 무기와저 마음 깊은 곳에서 복받쳐 오르는 무기 비슷한 것들을 부들부들 떨릴 만큼 꽉 움켜잡았다.
누가 발사했는지, 방금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무엇이 그것들을 뒤틀듯 흔들며 번개처럼 한 번에 수십 발씩 군중의 머리 위로 날아가게 했는지, 군중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소총과 함께 탄약통, 화약, 총탄 따위를 배분받았고, 강철과 나무 막대, 칼과 도끼, 창, 재주껏 고안한 온갖무기를 들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은 피가 철철 흐르는 손으로 벽에서 벽돌이나 돌을 빼서 무장했다. 생탕투안 시민들의 맥박과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들썩이고, 질주하듯 뛰었다.
그곳의 살아 있는 생명체는 모두 목숨을 내걸고 기꺼이 희생할 열정으로 미쳐가고 있었다.
- P307

나리(흔히 가장 덕망이 높은 신사로 여겨졌다)는 국가의 축복을 받아 모든 면에서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으며, 호사스럽고 빛나는 삶의 좋은 표본이었고, 그런 목적을 위해 많은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나리‘ 라는 계급은 온갖 악행으로 나라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다. 명백하게 자기들을 위해 설계된 줄로만 알았던 세상이 이렇게나 빨리, 비틀이 짠 듯 메말라가고 자신들을 압박해오다니 놀랍기만 했다! 세상사의 변치 않는 법칙을 뭔가 근시안적으로 보았음이 틀림없었다. 그렇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이렇게 된 것이다. 부싯돌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짜내고, 고문대의 나사못을 너무 자주 돌려 헐거워질 때까지 나리는 그 비천하고 까닭 모를 현상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다.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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