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이 식었나 봐?"
다짜고짜 질렀더니 A는 어리둥절했다. 자신이 구례를찾는 횟수가 줄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다. A와 나는 사람과 관계 맺는 방법이 다르다. 나는 참으로 더디다. 처음에는 높은 벽을 치고 문 열어줄 사람을 꼼꼼히따져 고른다. 그 문이 나에게로 향하는 마지막 문이 아니라 첫문이다. 10년쯤은 만나야 아, 친구가 될 수 있겠구나싶다. A는 처음에 훅 들어온다. 서로 살가워질 때까지 시간과 공력을 쏟아붓는다. 친구가 되었다 싶으면 긴장이 풀리고 그래서 처음보다 느슨해진다. 누구의 방식이 옳고 그른건 아니다. 그저 서로의 방식과 속도가 다를 뿐이다. 알면서도 이 다름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관계를 처음 맺을 때는 A가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 나에게 서운했고, 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이번에는 내가 예전처럼 자주 오지 않는 A에게 서운했다. 뭐, 그러면서 조금씩 더 알아가고더 친해지는 것일 테니 큰 상관은 없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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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동, 이주를 통해 새로운 사람이 유입되도록 하는 방법이다. 단일민족 이데올로기가 매우 강한 우리나라에 외국인이 들어와서 함께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내수시장이 쪼그라들고 세수가 줄어서 사회복지체계를 유지할 공적 자금이 없어지는 것보다 단일민족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편이 더 쉽다. 이미 우리 사회는 그런 변화를 감내하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된다. 언론을 보면 몇 년 전만 해도 이민에 대해 회의적이던 시각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이민이 필수 불가결한 사항인것처럼 보도하는 기사와 시론이 꾸준히 늘고 있다. 실제로 정부도이민청 신설 논의를 먼저 들고나왔고, 그에 대한 사회 인식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 물론 이민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우리야 우리가 원하면 한국에 와서 일하고 소비해줄 외국인이 줄을 서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외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국제 이주 노동 시장의 아주 작은 한 선택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여러 면에서 치밀하게 잘 준비하고 있어야 많은 외국 근로자들이 우리나라를 이주지 및 거주지로 선택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양성이 살아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 P88

좀 더 논리를 전개해보자. 우리 사회의 한편에서 ‘일할 사람이없어요. 그러니 외국인 노동자를 더 많이 받아들여야 합니다‘라고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의 주장을 냉철히 분석해보면 이는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이 끌고 온 산업 구조를 유지하겠다‘는 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 이는 현재 상황을 바꾸지 않고 유지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가 현상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인재를 육성하지 않았다는 데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사람을 교육하고 훈련하지 않을 거라는 데 있다. 지금까지 수십 년간 우리 사회는 부족하나마 점점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인재를 육성하고 인적 자원을 개발해왔지 않은가.
‘인구절벽‘ 이야기로 돌아가자. 앞으로 인구 절벽 문제로 인해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닥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구 절벽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외국인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식으로 방향을잡아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만만치 않은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 필자는 외국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산업 구조 자체를 전면 개편함으로써 해결해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 P92

그런데 이것보다 더 주목할 만한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전 세계 잘파세대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신통방통한 소통 도구 ‘스마트폰‘이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이 기적의 소통 도구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인터넷 콘텐츠 서비스를 통해 같은 영화. 드라마를 시청하고, SNS · 유튜브를 통해 재미있게 소통하며 문화적 동질감을 키워간다. - P96

"인류가 만든 집단은 왜 점점 더 규모가 커졌을까?"
"인류 집단은 과연 다른 영장류 집단과는 모든 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를까?"
뇌과학자와 영장류 학자는 이 두 가지 화두를 붙잡고 오랫동안연구해왔다.
이 두 분야의 과학자들이 뇌를 연구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부위로 ‘신피질(新皮質, 대뇌겉질에서 가장 최근에 진화하여 형성된 부분. 여섯층의 구조를 이루며 사람 뇌의 대부분을 이룸)‘이 있다. 그들은 전체 뇌중에서 신피질이 차지하는 비율에 특히 주목한다. 왜 그럴까? 오랜 연구를 통해 그 비율과 집단의 크기가 비례한다는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즉, 전체 뇌에서 신피질이 차지하는 비율이 큰 종일수록 그 집단의 크기도 크다는 의미다. 이 비율의 관점에서 볼 때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등 영장류 동물의 집단 크기와 인간 집단의 크기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침팬지의 경우 보통 50개체 정도가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고 생활하는 데 반해 인간은 150개체 정도가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살아간다. 옥스퍼드대 교수이자 심리학자인 로빈 던바(Robin Dunbar)는이것을 ‘던바의 수(Dunbar‘s Number)‘라고 명명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경우 친구의 최대 수는 150명 정도다. 말하자면, 이것이 하나의 인간이 이루는 집단의 표준 크기이자 단위라는 것이다. 그런데 수렵 채집기 인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평소 알고 지내는친구들을 매일 만나게 된다. 어제 만난 친구를 오늘 만나고 내일도 만나게 되는 식이다. 그런 까닭에 ‘150명‘이라는 숫자가 꾸준히 유지된다. - P112

 인지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생각에 관한 생각(Thinking, Fast and Slow)』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사고(thinking)가 두 가지 시스템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시스템 1은 ‘직관‘과 ‘감정‘인데, 이는 자동으로 돌아가고 무의식적으로 작동한다. 즉, 위에서 감정적 공감을 설명할 때 말한 드라마의 슬픈 장면에 감정 이입하는 사례처럼 의도적으로 노력하지않아도 포유류 동물이라면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 수있다. 사실 인간 사회에서도 대다수 사람은 시스템 1로 일상생활을 꾸려나가는 데 별문제가 없다.
반면 시스템 2는 시스템 1에 비해 훨씬 고난도 과정이 요구된다. 즉, 시스템 2는 애써서 추론하며 합리적으로 생각해야 하고 이성을 작동해야 한다. 이는 매우 정교한 과정이기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노력이 요구된다. 우리 인간 내면에는 시스템 2도 장착돼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지적 공감은 시스템 2의 작동이라고할 수 있다. 공감의 첫 번째 형태인 정서적 공감은 무의식적이고자동적으로 감정 이입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좀 더 익숙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 예를 들어 생김새가 비슷하고 생각이 비슷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굳이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쉽게 공감이 간다. 이는 시스템 1이 작동한 결과다. - P118

이에 반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에게서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뭔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들었다고 가정해보자. 처음에는 낯설게 느끼다가도 귀 기울여 듣는 동안 어느 순간 상대방이 말하는 내용이 명확히 이해되고 공감이 된다면 이는 시스템 2가 작동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당신이 무심코 길을 걷다가 뱀 같이 생긴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생각해보자. ‘저게 뭐지?‘라며 정교하고 느리게 추론하다가는 자칫 독사에 물려 죽을 수 있기 때문에인간 뇌의 시스템은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진화시켰다. 매우 신속하게 작동해서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지만 틀릴 가능성이있는 시스템 1. 반대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최대한 세밀하게 파악함으로써 자기 눈앞에 있는 것이 독사인지 아닌지를 정확히 판단하도록 돕는 시스템 2. 우리 사회가 다양성을 키우는 방향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역지사지의 힘이 발휘되는 시스템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드는 의문 한가지. ‘왜 우리는 시스템 2가 아닌 시스템 1을 주로 작동시키며 일상생활을 영위할까?‘ 이는 수렵 채집기에 인류가 순간순간 맞닥뜨리는 만만치 않은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에 그것이 본능으로 장착됐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P120

 다시 말해 다양성이란 학습하고, 교육받고, 또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겨 실제로 해보지 않으면 절대로얻을 수 없는 자질이자 역량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면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키우기 위해 정말 많이 애쓰고 노력해야겠구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위안이 되는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결국 어떤 방식으로 진화했는가?‘, ‘결과적으로 문명 발전에 어떤 거대한 흐름이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인류는 공감의 반경을 점점 확장하는 방향으로 꾸준히 진화해왔다는 점이다. 즉, 처음에는 자기 자신만 그러다가 차츰 우리 가족, 우리 부족, 우리 민족과 국가, 그리고 모든 인간으로 공감의 영역이 확장한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과 식물, 그리고 미생물 등 생명체 전체에 대한 공감으로 확장할 수 있다. 심지어 모든 생명체를 넘어 인류가 최근 한창 개발 중인 로봇· 인공지능에까지 공감이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공감의 반경이 비약적으로 확장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필자는 이것을 ‘공감의 원심력‘이라 부르고 싶다.
인지적 공감, 보편적 윤리, 교육을 통한 공감은 공감의 원심력을 키우는 중요한 요인들이다. 공감의 원심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사회의 가치는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 P122

즉, 공감의 원심력이 작용하면서 다양성을 키움과 동시에 구심력이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며 다양성이 증대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공감의 구심력을 이루는 중요한 요인으로 일종의 ‘부족 본능‘ 같은것을 비근한 예로 들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부족 본능‘은 같은 혈연, 지연 등에 대한 정서적 공감, 자기 집단에 대한 편애와 다른 집단에 대한 편견, 도덕적 직관, 가치의 획일성 등에 의해 형성된다. 이처럼 인류는 언제나 공감의 구심력과 원심력의 강력한 영향을 동시에 받게 되는데, 당연하게도 공감의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큰 사회가 다양성이 높은 사회다. - P123

우리가 자기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스스로 경쟁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좀 더 다양한 가치로 사회를 볼 것인지의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런데상대적으로 인구 밀도가 높을수록, 즉 자기 주위에 사람이 많을수록 자연스럽게 경쟁 자각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으로 공격성이 발동되고, 경쟁 욕구가 커지고, 목표가 고정되고,
가치가 일원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 구조다.
다양성의 관점에서 볼 때 ‘인구 밀도‘가 매우 중요한 지표일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그런 연유에서다. 즉 인구 밀도가 높을수록 주위에 경쟁자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의미이고, 그런 까닭에 출산을 미루고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는 일에만 매진하게 되며, 차츰 한가지 가치로만 생각하는 시야가 좁고 보수적인 사람이 되기 쉬운것이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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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여자 후배와 함께 놀러 왔기에 김치며 반찬을이것저것 싸주었다. 나 잘해 묵고 살아야 하면서도 A는 내가 싸주는 것들을 기꺼이 받아 갔다. 그리고 다음에 올 때는 새 통을 여러 개 들고 왔다.
"이 사람 저 사람 싸줄라먼 통 겁나 필요허제?"
장애인 연금 받아 산다는 A가 포장도 뜯지 않은 새통꾸러미를 내밀었다. A는 그렇게 똑떨어지게 깔끔한 아이였다. 깔끔한 A는 노상 오고 싶다면서 오지는 않는다. 언젠가 전화를 해서 보고 싶다기에 오라 했다.
"아따, 니는야, 멋을 참 모린다이. 남자 혼자서 워치케갈 것이냐?"
"왜? 나는 가시내 아니람서?"
"와따메. 참말로 암것도 모리네이. 그럼시로 소설은 워찌 쓰까?"
긍게. 그러니까 별 볼 일 없는 작가지.
나는 아직도 말하지 않은, 혹은 돌려 말한 A의 말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여자로 보일까 봐 젊은 저의 혈기를 가라앉히려는 말이었다는 건가, 어리석은 나는 그리 짐작할뿐이다. 그런들 저런들 무슨 상관이랴. 환갑 앞두고.
나는 아직도 A가 겪고 있는 불행의 긴 터널을 A처럼 담담하게 직시할 수가 없다. 그래서 A와 술 마시는 게 즐겁지 않다. 가슴이 먹먹하고, 알 수 없는 무엇엔가 화가 치민다. 그 여름밤, A가 직접 만든 밤나무 위 오두막에서의 그하룻밤이 사무치게 그립다. 그때의 싱그럽던, 똑똑하던, 깔끔하던, 능청스럽던 스물두엇의 A도 눈물겹게 그립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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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수염
La Moustache

1883년 7월 30일 월요일 솔 성城
나의 사랑하는 뤼시, 새로운 소식은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비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살롱에서 시간을 보내요. 요새는 날씨가 고약해서 거의 바깥에 나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실내에서 연극을 하고 있지요. 오뤼시, 요즘 살롱 연극들은 얼마나 바보 같은지. 모든 것이 억지이고 상스럽고 아둔해요. 농담들도 마치 대포알처럼 모든 것을 깨부수고요. 재치도 없고, 자연스럽지도 않고, 기분 좋게 해주는 점도 없고, 우아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답니다. 그 작가들은 정말이지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전혀모르고 있다니까요. 그들이 우리의 관례, 관습, 예의범절을 무시하는 건 괜찮아요. 하지만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답니다. 그들은 세련되어 보이려고 군인들을 즐겁게 해줄 만한 말장난을 하지요. 유쾌하게 보이려고 바깥의 큰길 꼭대기에서 소위 예술가들이 드나드는 선술집(50년 전부터 사람들이 대학생들의 역설을 반복해서 이야기한)에서 주워들은 농담을 우리에게 들려주기도 해요. - P402

쥘 삼촌
Mon oncle Jules

아실 베누빌 씨에게
하얀 수염을 기른 가난한 노인이 우리에게 동냥을 했다. 내 친구 조제프 다브랑슈가 그에게 100수를 주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자 그가 나에게 말했다.
"저 불쌍한 노인을 보니 일화 하나가 떠올랐어. 너에게 들려줄게. 그것이 내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거든. 바로 이런 일화야" - P409

쥘 삼촌은 행실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 같아. 다시 말해 꽤 많은 돈을 탕진했는데, 그건 가난한 가족들에게는 매우 큰 죄악이지. 삼촌은 부자들은 어리석은 짓을 하는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빙긋이 웃으며 방탕아라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었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부모 재산을 축내는 나쁜 아들, 망나니, 건달이었고!
실상이 똑같다 할지라도 이런 구분은 정확해. 오직 결과만이 행위의 심각성을 결정하지. - P411

복수자
Le Vengeur

앙투안 뢰예 씨는 과부 마틸드 수리 부인을 10년 동안이나 사랑하다가 결혼했다.
수리 씨는 그의 오랜 학창 시절 친구였다. 뢰예는 그를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그가 조금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주 이런 말을 했다.
"수리는 싸움 같은 것도 못 할 사람이야"
수리가 마틸드 뒤발 양과 결혼했을 때 뢰예는 놀라고 조금 화가 났다. 그도 그녀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가지고 은퇴한 이웃에 사는 수예점 여주인의 딸이었다. 그녀는 예쁘고 날씬하고 영리했다. 그녀가 수리와 결혼한 것은 돈 때문이었다.
뢰에는 친구 아내의 호감을 사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는 풍채가 좋고 어리석지도 않고 부자였기에, 자신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그녀를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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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녀는 그의 몸 밑에 있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그녀의 뺨을 때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런 이런 바로 여기에 화냥년이 있었군. 행실나쁜 창녀 같으니!"
이윽고 그는 힘이 빠져 숨을 헐떡이며 침대에서 일어나, 오렌지 꽃을넣은 설탕물을 한 잔 만들려고 서랍장 쪽으로 다가갔다. 몹시 피로해서 정신을 잃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실수 때문에 행복이 모두 끝장났다고 생각해 커다란 흐느낌을 토해 내며 침대 속에서 울고 있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더듬더듬 말했다. "내 말 좀 들어봐요, 앙투안이리 와요. 실은 내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들어 보면 당신도 이해가 될 거예요. 좀 들어 봐요."
그녀는 스스로를 변호할 준비를 하고 책략들로 무장한 채 두건을 쓴머리를, 머리카락이 온통 헝클어진 머리를 조금 들어 올렸다.
한편 뢰예는 아내에게 얻어맞은 것을 창피해하며, 수리라는 친구를속인 그 여자에 대한 한없는 증오가 마음 깊숙한 곳에 살아 숨 쉬는 것을 느끼며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 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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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의 정체를
알고 있다

오래전, 부모님 이야기를 빨치산의 딸이라는 실록으로쓰고 수배를 당했다. 책을 출판한 사장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적표현물 제작만이었으면 굳이 도망 다니지 않았을것이다. 그 전에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약칭)이라는 조직의 기관지 <노동해방문학> 기자로 2년 정도 일했는데, 그 조직이 반국가단체로 몰려 전 조직원에게 수배령이 내렸다. 함께 일하던 친구 대부분이 붙잡혀 7년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 P11

"웜마야!"
다들 앉은걸음으로 문을 향했다. 찬 공기에 몸서리를 치며 목만 길게 빼고 내다본 바깥은 온통 새하얀 눈밭이었다. 발자국 하나 나지 않은 백색의 순수였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우르르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매화나무에도 감나무에도 눈이 한 뼘씩 쌓여 있었다. 뒤란의 대나무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땅 끝까지 휘늘어진 채였다. 자연의 장관 앞에서 다들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전등을 하늘로 비췄다. 빛기둥 안에서 주먹만 한 눈송이들이 수직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순수에 압도당한 최초이자 마지막 경험이었다. 그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토록 순수하게, 이토록 압도적으로 살고 싶다고.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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