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을 갖춘 정치인이기를. 이것은 좋은 일이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내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좀 외로울 따름이다. 참으로 점잖고 순수한 사람들도 곁에 두기가 버거울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모든 블루밍턴 사람이 톰프슨 아주머니 같다고 말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가령 아주머니의 아들 F는 물론 훌륭한 인간이지만, 이렇지 않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보다도이것이다. 참사의 공포 중 일부분은, 비행기의 남자들이 그토록 미워했던 미국이 정확히 어떤 미국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이 숙녀들의 미국보다는 나의 미국에, F의 미국에, 딱하고 혐오스러운 두에인의 미국에 훨씬 더 가깝다는 사실을 내가 마음 깊은 곳에서 아는데 있었다는 것이다. (2001년) - P302
랍스터는 그 자체로도 먹기 좋다. 적어도 요즘 우리는 그렇게생각한다. 그러나 1880년대까지만 해도 랍스터는 말 그대로 하층계급의 음식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만 먹었다. 초기 미국의 감옥 환경이 가혹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식민지는 수감자들에게 랍스터를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먹이는 것을 법으로 금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꼭 사람에게 쥐를 먹이는 것처럼잔인하고 지나친 고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랍스터의 비천한 지위는 옛 뉴잉글랜드에 랍스터가 엄청나게 많았던 것이 한 가지 이유였다. 어떤 자료에서는 바다에 랍스터가 "믿기지 않을 만큼 풍부하다"라고 말했고, 플리머스 식민지의 청교도들이 물을 어정어정헤치면서 손으로 원하는 만큼 잔뜩 잡았다는 이야기, 초기 보스턴에서는 거센 폭풍이 지나가면 해변에 랍스터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들은 이렇게 널브러진 랍스터를 악취 나는 골칫거리로 여겼고, 갈아서 비료로 썼다. 예전에는 보통 죽은 랍스터를 요리한 뒤 보존했다가 먹었다는 점도 문제였다. 보통은 소금에 절이거나 엉성한 밀폐 용기에 보관했다. 메인 주 최초의랍스터 산업도 1840년대에 바닷가를 끼고 생겨난 십여 곳의 통조림 공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랍스터는 그곳에서 멀게는 캘리포니아까지 배로 운반되었는데, 수요가 있었던 것은 옳지 싸고 단백질이 풍부하다는점 때문이었다. 랍스터는씹을 수 있는 연료나 다름없었다. - P309
내가 생각하기에, 아주 드물게라도 가끔 관광객이 되어보는 것은 정말로 영혼에 유익할 수 있다. 하지만 영혼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방식으로 유익한 것이 아니라, 좀 울적하고 착잡한 눈길로 ‘그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어떻게든 그것을 다룰 길을 찾자‘ 하는 방식으로 유익하다. 내 경험상, 국내 여행은 시야를 넓혀주거나 긴장을풀어주는 경험이 아니었다. 장소와 환경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정신에 이로운 효과를발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여행은 나를 극단적으로 위축시키는 경험이었고, 가장 가혹한 방식으로 겸손함을 일깨우는 경험이었다. 내가 어엿한 개인이라는 환상을, 내가어떻게든 이 현실을 벗어나거나 초월해서 살고 있다는 환상을 위협하는 경험이었다. (경고하는데, 앞으로 이어질 말은 내 동행들이 특히나 불행하고 불쾌하게 느낀 대목으로, 휴가 여행의 재미를 확실히 망쳐버리는 이야기다.) 내게 단체 관광객이 된다는 것은 곧 어엿한 현대 미국인이 된다는 뜻이다. 그 장소에 어울리지 않고, 무지하고, 결코가질 수 없는 것에 늘 욕심을 내고, 결코 인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늘 실망하고 마는미국인이. 그것은 내가 애초에 경험하겠다고 찾아갔던 훼손되지 않은 무언가를 얄궂게도 그런 내 존재로 훼손하는 일이다. 내가 없다면 경제적 측면 이외의 모든 면에서오히려 더 좋고 더 진실된 장소가 될 곳에 나를 억지로 끼워 넣는 일이다. 기나긴 줄,답답한 정체, 반복되는 흥정을 겪으면서, 너무나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내버릴 수도 없는 나 자신의 어떤 부분을 직시하는 일이다. 관광객으로서 나는 경제적으로는 유의미하지만 실존적으로는 혐오스러운 존재가 된다. 시체에 들러붙은 벌레 같은 존재가 된다. - P313
미국 문화에서 ‘랍스터‘ ‘물고기fish‘ ‘닭chicken‘ 같은 단어들은 동물과 그 고기를 동시에 지칭하는 데 비해 포유류는 대부분 ‘소cow‘ 대신 ‘비프bee‘ ‘돼지pig‘ 대신 ‘포크Pork‘처럼 식재료로서 고기를 한때 그 고기였던 산 생물과 분리해서 생각하도록 만드는 완곡어법이 적용된다는 사실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것은 우리에게 고등 동물을먹는 데 대한 불편한 감정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처럼 어법에도 드러날 정도라는것, 하지만 그 불편함은 포유류를 벗어나면 줄어든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일까? - P324
랍스터들의 그런 감정이 설령 감정의 원시적인 형태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런데 이 대목에서, 원시적인 형태라는 점이 애당초 왜 문제일까? 원시적이고 말로 표현되지 않는 고통이라고 해서, 그 생물체로 만들 요리에 대한 돈을 지불함으로써 그 생물체에게 고통을 끼치는 데 일조한 사람이 그 고통을 덜 절박하거나덜 불편한 것으로 느껴도 좋단 말인가?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는PETA식의 비난은 아니다.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다만 메인 랍스터 축제의 그 많은 웃음, 생기, 공동체의 자긍심 속에서 떠올린 몇몇 심란한 의문을 표현하고 해결하려는 것이다. 더솔직하게 말하자면, 메인 랍스터 축제에 참가했다가 문득 랍스터도고통을 겪을 수 있으며 따라서 가급적 겪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랍스터 축제는 고대 로마의 서커스나 중세의고문 축제와 비슷한 자리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이 비교가 지나친 것 같은가? 지나치다면, 정확히 왜 지나친가? 아니면 이 질문은 어떤가. 혹시 미래 세대는 우리 세대의 산업적 농업과 음식 문화를 우리가 네로 황제의 오락이나 멩겔레의 인체 실험을 보듯이 보게 될까? 내가 처음 떠올린 생각은 이런 비교가 지나치게 신경질적이고 극단적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비교가 극단적이라고 느껴진 까닭을 찬찬히 짚어보면, 내가 동물은 인간보다 도덕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인 것 같다. - P333
이런 생각을 그냥 제쳐놓아도 좋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당신 내면의 근거는 무엇인지? 달리 말해, 당신이 이런 생각을 거부하는 것은 한번 생각해보고서 내린 결론인지, 아니면 생각하기조차 싫은 것인지? 만일후자라면, 왜 생각하기 싫은지? 대충이라도 좋으니, 당신이 생각하기를 꺼리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본 적은 있는지? 나는 지금 누구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진심으로 궁금하다. 누가 뭐래도 진정한 미식가의 특징은 음식뿐 아니라 음식의 전체 맥락까지도 남들보다 더 많이 느끼고, 관심을 더 기울이고, 생각을 더 해본다는 것 아닌가? 아니면 미식가가 남들보다 더 많이 들이는 그 관심과 감수성은 오직 감각적 측면에만 적용되는가? 모든것이 정말로 취향과 표현의 문제일 뿐인가? 그러나 비록 진심이기는 해도, 맨 마지막 몇 가지 질문은 미학과 도덕의 관계에 관한(그런 관계가 있다면 말이다) 더 크고 더 추상적인 질문과 분명 이어져 있다. 이를테면 ‘좋은 생활을 위한 잡지‘ 라는 <고메>의 모토에서 ‘좋은good‘이라는 형용사가 뜻하는 바가정말로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그리고 이런 질문은 워낙 깊고 위험한 바다로 곧장 이어지기 때문에, 공개적인 토론은 여기서 그만 접는 것이 최선이리라. 이해와 관심이 있는 사람들끼리라도 서로 물을 수 있는 질문에는 한계란 것이 있는 법이니까. (2004년)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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