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이 모든 조각을 모아서 완벽하게 맞추는 손길도 있어야 합니다. 목표로 인도하고 전쟁의 불가피한 요소 앞에서 움츠리지 않는 지성 말이지요."
"그리고 그게 너의 역할이었고." 내가 말했다. "그래서 결국 네가다이달로스와 비슷한 거다. 너는 나무가 아니라 사람을 다루는 것만다를 뿐."
그때 나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란. 아무것도 섞지 않은 순수한포도주 같았다. "아킬레우스가 죽자 아가멤논이 저를 아카이오이 최고의 전사로 임명했습니다. 다른 전사들도 용감하게 싸웠지만 전쟁의 본질 앞에서는 움찔했거든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파악할 수있을 만큼 배짱 좋은 사람이 저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맨 가슴에서는 흉터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나는 그 안에뭐가 들었는지 들어보려는 듯 흉터를 살짝 두드렸다. "예를 들면 어떤 것 말이냐?"
"첩자가 잡히면 살려주겠다고 약속하고 비밀을 캐낸 뒤에 처형해야 합니다. 폭도는 두들겨패야 하고요. 삐친 영웅이 있으면 달래주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기를 떨어뜨리지 말아야 하고요. 필록테테스라는 위대한 영웅이 상처가 곪아서 불구가 됐을 때 병사들은 그 일로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어느 섬에 버려두고 그가 자청해서 남은 거라고 말했죠. 아이아스와 아가멤논은 죽을때까지 트로이아의 잠긴 성문을 두드릴 기세였지만 목마라는 묘책 - P275

을 생각하고 트로이아 병사들이 그걸 끌고 들어갈 수 있도록 이야기를 만들어낸 건 저였습니다. 정예부대와 함께 목마의 뱃속에 웅크리고 숨어서 공포와 중압감으로 떠는 병사가 있으면 그의 목에 칼을 갖다댔고요. 트로이아 병사들이 마침내 잠이 들자 우리는 보드라운 깃털의 병아리떼 속에 섞인 여우처럼 목마를 가르고 나왔습니다."
재판정에서 부를 노래도, 위대한 황금시대를 기리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입을 거치면 졸렬하지 않고, 타당하고 감동적이며 현명하도록 실용적으로 들렸다.
"애초에 참전한 이유가 무엇이었느냐? 다른 왕들이 어떤 인간들인지 알았으면서."
그는 뺨을 문질렀다. "아, 제가 한 어리석은 맹세 때문이었죠. 발을빼려고 노력은 했습니다. 아들이 한 살이었고 아직 신혼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이름을 떨칠 다른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아가멤논이 보낸 남자들이 저를 데리러 왔을 때 미친 척을 했습니다. 알몸으로 나가서 겨울 들판을 쟁기질하면서요. 그런데 그중 하나가 쟁기날이 지나가는 길에 제 갓난 아들을 두었지 뭡니까. 당연히 쟁기질을멈추었고 나머지와 함께 불려갔죠." - P276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그게 다는 아니라는 걸알았다. 그가 전장에서 보낸 모든 시간을 떠올려보았다. 성정이 얇은 유리와도 같은 왕들과 골이 난 왕자들을 다독이고,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전사들 간의 균형을 도모해갔던 세월들. 불을 뿜는 아이에테스의 황소를 오로지 술책의 도움으로 길들인 것에 비견할 만한 위업이었다. 하지만 이타케로 돌아가면 그렇게 성미가 까다로운 영웅도, 각료회의도, 한밤중의 습격도 없었고, 그가 필사적으로 전략을 강구하지 않으면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일도 없었다. 그런 남자가 집으로 돌아가면, 벽난로와 올리브 숲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가 나와 부부처럼 오순도순 지낸 것은 일종의 예행연습이었다. 벽난로 옆에 앉았을 때, 내 꽃밭에서 일을 했을 때 그는 그 요령을 기억하려고 애를 썼다. 도끼로 살이 아니라 나무를 쪼개면 어떤 느낌인지. 어떻게 하면 다이달로스가 만든 이음새처럼 부드럽게 다시 페넬로페에게 맞출 수 있을지.
그는 내 옆에서 잠을 잤다. 가끔 숨이 그의 목젖에 걸릴 때가 있었다. 컥.
파시파에라면 사랑의 묘약을 만들어 붙잡으라고 했을 것이다. 아이에테스라면 그에게서 기지를 없애라고 했을 것이다. 내가 주입한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줄 모르는 그의 멍한 얼굴을 그려보았다.
그가 내 무릎 가에 앉아서 흠모하는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나를 올려다볼 것이다.

 그는 내게 자기 흉터를 보여주었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아무 흉터도 없는 척하는 나를 모르는 척 해주었다.
그가 배에 올라탔고 나를 찾으러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가고 없었다.

노래에서는 어떤 식으로 이 장면을 묘사할까? 외로운 곳 위에 서있는 여신,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연인. 촉촉하지만 뜻을 헤아릴 수없고, 자기 안을 들여다보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두 눈, 동물들이그녀의 치맛자락으로 모인다. 참피나무가 꽃을 피운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기 직전에 그녀가 한손을 들어 자기배를 만진다. - P306

MENU"그림자는 필요 없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그리고너 같은 것은 내 의도를 물을 자격이 없고."
우뚝하고 꼿꼿한 그녀가 번쩍하고 하얗게 등장하자 번개의 발톱이 밤하늘을 갈랐다. 말갈기가 달린 투구가 천장에 닿았다. 거울 갑옷이 번뜩거렸다. 손에 쥔 창은 길고 가늘었고, 예리한 날이 장작불빛을 받고 어른거렸다. 그녀는 확신으로 이글거렸고 혼잡스럽고 얼룩진 이 세상의 모든 부스러기들이 그 앞에서 오그라들었다. 제우스의 총애를 받는 눈부신 딸, 아테나였다.
"내 바람은 이루어질 것이다. 한 치의 에누리도 없이." 다시 그 금속을 베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전에도 높은 신 앞에 선 적이 있었다. 내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헤르메스, 아폴론.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그들과 다르게 나를 관통했다. 오디세우스가 예전에 얘기하길그녀는 머리카락 두께로 벼려진 칼날과 같다고, 워낙 정교하기 때문에 맥박이 뛸 때마다 내 몸속의 피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동안 그 칼에 베인 줄도 모를거라고 했다.
그녀가 티끌 하나 없는 손을 내밀었다. "아이를 내놓아라."
방안에서 모든 온기가 사라졌다. 심지어 내 옆에서 탁탁거리는 장작불마저 벽에 걸린 그림처럼 느껴졌다.
"싫습니다."
그녀의 눈은 은색과 바위 같은 회색이 서로 엮여 있었다. "나한테맞서겠다는 거냐?"
공기가 답답해졌다.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가슴에서 그 유명한 아이기스가 반짝였다. 금실로 테두리를 꿰맨 가죽 - P318

갑옷이었다. 그녀가 직접 벗겨서 무두질한 티탄 신족의 거죽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녀의 번뜩이는 눈빛은 이렇게 단언하고 있었다. 항복하고 자비를 빌지 않으면 네 거죽을 입고 다녀주마. 혀가 말랐고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온 세상을 통틀어 아는 게 한가지 있다면 신들에게 자비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내살갗을 잡고 비틀었다. 날카로운 통증에 마음이 진정됐다. - P319

트리곤의 꼬리. 내가 아이의 손에 쥐어준 죽음의 도구"그분의 얼굴이 그냥...... 멈추었어요. 그대로 쓰러졌어요. 독을닦아내려고 했지만 상처조차 남아 있지 않았어요. 제 어머니에게로모시고 갈게요, 제가 말했어요. 어머니가 도와주실 거라고요. 그분의입술이 하얘졌어요. 저는 그분을 안았어요. 저는 키르케 여신에게서태어난 당신의 아들 텔레고노스입니다. 그분은 제 얘기를 들었어요.제가 생각하기에는 들으셨던 것 같아요. 그런 다음 저를 쳐다보고....... 숨을 거두셨어요."
내 입안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침내 모든 게 분명해졌다. 꽁꽁 감추고 있었던 아테나의 절박함, 텔레고노스를 살려두면 우리 둘다 후회하게 될 거라며 지었던 굳은 표정. 그녀는 이 아이가 자신이사랑하는 사람을 해칠까봐 두려워했다. 그리고 아테나가 가장 사랑한 사람이 누구였던가?
나는 손으로 입을 눌렀다. "오디세우스"
아이는 그 단어가 무슨 저주라도 되는 양 몸을 움츠렸다. "저는 경고하려고 했어요. 저는......" 아이는 목이 메어서 더이상 말을 잇지못했다.
나와 그렇게 많은 밤을 함께한 남자가 내가 들려 보낸 무기에 찔려 내 아들의 품에서 죽다니. 운명의 여신들이 나와 아테나와 우리모두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씁쓸한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예언에 반항하면 할수록 그 예언은 더욱 단단히 숨통을조인다는 것.  - P376

"그 오랜 세월 동안 고생하며 방랑한건. 왜였일까요? 한순간의 자 부심이죠. 아버지는 아무도 아닌 존재로 지내느니 신들에게 저주받는 쪽을 택했을 겁니다. 아버지가 전쟁이 끝난 뒤에 집으로 돌아오셨다면 구혼자들은 찾아올 일이 없었겠죠. 제 어머니의 삶은 그렇게 망가지지 않았을 테고요. 제 삶도. 아버지는 저희와 집이 그리웠다고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만 거짓말이었어요. 이타케에 돌아온 뒤로는만족을 모르고 항상 수평선만 바라보셨으니 말이죠. 일단 우리를 손에 넣고 나니까 다른 걸 갖고 싶으셨던 거예요. 그게 끔찍한 인생이아니면 뭡니까? 사람들을 꼬드겨놓고 내팽개친 게 아닙니까."
나는 그게 아니라고 얘기하려고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의 곁에누워 있으면서도, 페넬로페를 생각하는 그 때문에 가슴이 시렸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건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텔레마코스는 그런 호사를 누리지 못했다. - P416

가만히 있지 못하고 쉴새없이 머리를 굴리고 또 굴리는아테나.그녀는 아끼는 영웅을 고향으로 데려가 백성들 사이에서 자신과 함께 찬양을 누리며 떠받들어지는 광경을 보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가전하는 승전담과, 함께 쓰러뜨린 트로이아군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오디세우스를 운운하며 지은 탐욕스러운 눈빛을 기억했다. 발톱으로 먹잇감을 거머쥔 올빼미의 눈빛이었다. 그녀의 총아가 재미없고 가정적인 인간이 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항상 고군분투하고 목표를 향해 달리고, 항상 허를 찌르는 새로운 지략과 불쑥 소환하는 번뜩임으로 그녀에게 재미를 선사하며, 눈부시고 탁월하게 현재진행형의 삶을 살아야 했다.
창밖에서는 나무들이 까만 하늘을 등지고 몸부림쳤다. 그 섬뜩한빛 속에서 페넬로페의 얼굴선이 다이달로스가 만든 조각상처럼 정교해 보였다. 나는 그녀가 나를 좀더 질투하지 않는 이유를 궁금해했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 남편을 빼앗아간 여신은 내가아니었다. - P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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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 다시 그 대장이었다. "부군께서는 언제 오십니까? 이렇게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니 부군을 위해 잔을 들어야 하겠는데요."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 남편은 없다."
그는 마주 미소를 지었다. "그러시겠죠." 그가 말했다. "결혼을 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니. 그럼 아버님께 감사를 드려야겠군요."
밖에는 완벽하게 어둠이 깔렸고 따뜻하고 환한 불빛이 방안을 밝혔다. "아버지는 멀리 사신다." 내가 말했고 그들이 내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어주길 기다렸다. 점등원이라고 답하면 훌륭한 농담이 되겠지. 나는 혼자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른 분이 계시겠죠? 삼촌이나 오빠나."
"집주인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거든 나한테 하면 된다." 내가말했다. "여긴 내 집이니까."
그 말에 방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나는 포도주 단지를 집었다. "비었구나." 내가 말했다. "내가 가서더 들고 오마." 몸을 돌리는데 내 숨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공간을 채우고 있는 스무 명의 몸집이 느껴졌다.
부엌에 가서 물약에 손을 얹었다. 주책을 떠는구만, 나는 생각했다. 여자 혼자 산다고 하니까 놀라서 그런 거야, 그뿐이야.  - P241

선장이 뒤로 물러나 바닥에 침을 뱉었다. 젤리 같은 덩어리가 돌위에서 흔들거렸다. 땀방울이 끈적끈적한 홈을 남기며 계속 흘러내렸다. 마당에서 암퇘지 한 마리가 꽥 소리를 질렀다. 나는 발작적으로 침을 삼켰다. 목에서 딸깍 소리가 났다. 안에서 공간이 생기는 게느껴졌다. 내가 외우려고 했던 잠재우는 주문은 말라서 날아가버렸기에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주문을 쓰고 싶지않았다. 내 시선이 우툴두툴한 그의 얼굴로 향했다. 그 약초에는 효능이 한 가지 더 있었고 나는 그게 뭔지 알았다. 나는 숨을 마시고 주문을 외웠다.
그의 눈은 흐리멍덩했고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다. "뭐하는 - P244

그는 말문을 맺지 못했다. 갈비뼈가 쩍 하고 갈라지며 불룩해지기시작했다. 살이 철퍼덕 하고 찢어지는 소리, 뼈가 딱 하고 부러지는소리가 들렸다. 그의 코가 풍선처럼 부풀어올랐고 다리가 거미에게삼켜진 파리처럼 오그라들었다. 그는 네 발로 기는 자세로 쓰러졌다.
비명을 질렀고 부하들도 덩달아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가 한참 동안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날 저녁에 돼지를 잡긴 잡은 셈이었다. - P245

나는 그들이 미간을 찌푸리며 어째서 내가 무서워하지 않는지 파악하려고 하는 이 순간이 제일 좋았다. 그들의 몸속에서 연주를 기다리는 현처럼 대기중인 내 약초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이 느끼는 혼란과 점점 고개를 드는 공포를 만끽했다. 그런 다음 그 현을 뜯었다.
그들은 등이 휘어서 네 발 자세로 엎드릴 수밖에 없었고 얼굴은익사체처럼 부풀어올랐다. 그들의 몸부림 때문에 의자가 뒤집히고포도주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비명소리가 꽥꽥거리는 소리로 바뀌어갔다. 아픈 모양이었다.
대장은 맨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다. 그 광경을 지켜볼 수 있도록.
그는 벽에 대고 몸을 움츠렸다. 제발. 저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럼 안 되지, 나는 말했다. 절대 안 되지.
남은 건 그들을 우리로 내쫓는 일이었다. 내가 물푸레나무 지팡이를 들면 그들은 달려갔다. 등뒤에서 문이 닫히면 기둥을 엉덩이로 밀쳤고, 돼지로 변한 눈은 마지막까지 남은 인간의 눈물로 촉촉했다.
님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끔 문 틈새로 구경하는 눈치였다.
"키르케 마님, 배가 또 오는데요. 저희는 방에 들어가 있을까요?"
‘그래, 가기 전에 포도주 좀 꺼내주고."
나는 옷감을 짜고 작업을 하고 돼지를 먹이고 섬을 가로질렀다가다시 가로지르며 하나씩 순서대로 해나갔다.  - P251

그들은 잘 먹었다. 술은 더 잘 마셨다. 여기저기 군살이 있었지만그 아래에 있는 근육은 나무처럼 단단했다. 흉터는 칼에 베였는지 길고 불룩했다. 한철 잘 지내다 여기서 그들의 도둑질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을 만났다. 그들이 해적인 것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내 보물을 세느라 눈을 쉴새없이 움직였고 계산이 나오자 씩 웃었다.
나는 이제 그들이 일어나서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지팡이를 들어 주문을 외웠다. 그들은 남들처럼 울며 우리로 달려갔다.
님프들이 나를 도와서 쓰러진 의자를 세우고 흘린 포도주를 닦고있었을 때 그중 한 명이 창밖을 흘끗 내다보고는 말했다. "마님, 한명이 더 오는데요."
안 그래도 정식 함선에 승선한 선원치고는 숫자가 너무 적다 싶었다. 몇 명이 바닷가에서 기다리다가 정찰 삼아 한 명을 보낸 모양이었다. 님프들이 포도주를 새로 꺼내놓고 슬그머니 사라졌다.
남자가 문을 두드리자 나는 문을 열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그를 비추자 깔끔하게 자른 수염에 섞인 빨간색과 머리칼에 섞인 희미한 은색이 도드라져 보였다. 허리춤에 청동검을 차고 있었다. 이전의몇몇 남자들처럼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뼈마디가 잘 단련된 듯 강건해 보였다.
"존귀하신 여인이여." 그가 말했다. "저희 선원들이 이 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도 신세를 좀 져도 되겠습니까?" - P255

"들어보자" 내가 말했다. "허리춤에 단단히 차고 있는 그 주머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제가 찾은 약초가 들어 있습니다."
"뿌리는 검은색이고, 나는 말했다. "꽃은 하얀색일 테지."
"그렇습니다."
"인간은 몰리를 캐지 못하는데."
"네."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못하죠."
"누구였느냐? 아니다. 됐다. 알겠으니." 헤르메스가 약초를 캐는나를 지켜보며 주문에 대해 캐물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몰리를 들고 있으면서 왜 술을 마시지 않았느냐? 내가 어떤 주문을 외워도 너에게는 효과가 없을 거라고 그에게서 들었을 텐데."
"듣기는 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저의 기벽이라서요. 사기꾼의 신이 베풀어주신모든 은혜에 감사하지만 그가 믿음직한 것으로 유명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저를 돼지로 변신시키도록 당신을 돕는 것이야말로 그가 딱좋아할 만한 장난이고요."
"늘 그렇게 의심이 많다고?"
"어쩌겠습니까?" 그는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세상은 추악한 곳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고요."
"너는 오디세우스로구나." 내가 말했다. "똑같이 사기꾼의 핏줄을타고난."
그는 나의 예리한 판단에 흠칫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신이라면이골이 난 자였다. 그리고 당신은 태양의 딸, 키르케 여신이고요" - P262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영광을 마다할 자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바보가 아닌 이상 좋다고 하지도 못할 테고요. 저는 인간입니다. 제가 몰리를 내려놓고 당신의 침소에 든 순간 당신이주문을 외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물론 망자의 강에 대고 저를 해치지 않겠노라고 맹세를 하시면 얘기가 달라지겠습니다만."
스틱스 강에 대고 한 맹세는 제우스라도 깰 수가 없었다. "신중한성격이로구나." 내가 말했다.
"피장파장인 것 같습니다만."
아니지,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신중하지 않았다. 무모하고성급했다. 그 역시 칼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종류는 달랐어도 칼은 칼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게 그 칼을달라. 피를 흘릴 만한 가치가 있는 일도 있으니.
"맹세하마" 내가 말했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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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이여." 다이달로스가 말했다. "오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죽을때까지 날마다 제물을 바치겠습니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덕분에 해협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다른 남자들도 그를 따라 말하고중얼중얼 기도를 하며 큼지막한 손을 접시처럼 위로 들었다. 몇 명은동방식으로 이마를 갑판에 댔다. 나의 일족은 은혜를 베풀면 대가로그런 식의 숭배를 요구했다.
목에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이 바보들아, 내가 말했다. "내가 저 괴물을 만든 자다. 자존심과허영심에 눈이 멀어 그런 짓을 저질렀다. 그런데 내게 감사한다고?너희 동료 열두 명이 죽었고 앞으로 몇천 명이 더 목숨을 잃겠느냐?아까 내가 그녀에게 먹인 약은 가장 강력한 약이었다. 알겠느냐, 인간들아?"
내가 내뱉은 말이 허공에 낙인처럼 찍혔다. 내 눈에서 뿜어져나온빛이 그들 위로 꽂혔다.
"나는 절대 그녀에게서 해방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지금 상태 그대로남을 것이다. 영원토록 너희를 잡아먹을 것이다. 그러니까 일어나라.
일어나서 노를 잡고 다시는 내 앞에서 어리석은 감사를 늘어놓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랬다가는 후회하게 만들어줄 테니."
그들은 몸을 움츠리고 깨지기 쉬운 그릇처럼 벌벌 떨며 주춤주춤일어나 슬그머니 사라졌다. 머리 위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고 열기가 갑판 위로 그대로 꽂혔다. 나는 망토를 벗어던졌다. 태양에 내몸을 태우고 싶었다. 뼈만남기고 모두 태워버리고 싶었다. - P152

새장 안에서 쩝쩝거리며 씹는 소리가 났다. 되새들이 잠잠해졌다.
"신들이 미노스 폐하의 왕국을 축복하는 뜻에서 새하얀 황소를 선물했습니다. 왕비님이 그 녀석에게 반하여 가까이서 보고 싶어하셨지만 녀석은 누가 다가가기만 하면 도망을 쳤지요. 그래서 제가 나무로 안이 빈 암소를 만들어드렸습니다. 들어가서 앉을 수 있고, 그녀석이 잠을 청하는 바닷가로 밀고 갈 수 있게 바퀴도 달았고요. 하지만 저는 오로지...... 저는 꿈에도"
"아, 제발." 내 동생이 내뱉었다. "그리 더듬더듬 얘기하는 걸 기다리다가는 세상이 저물겠다. 내가 그 신성한 황소랑 떡을 쳤어, 됐어?
이제실 가져와." - P163

 처음에는 일탈적인 변덕으로 황소와 교미했나보다 하고 일축했지만 생각해보면 그녀는 충동에 휩쓸리는 법이 없었다. 충동을 무기로 활용했다. 그녀가 진솔한 감정을표정으로 드러내는 걸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던가? 출산 당시 그녀가 다급함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괴물을 살려야 한다고 외쳤던게 생각났다. 왜 그랬을까? 애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 안에 애정은 한 톨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 녀석에게 용도가 있다는 뜻이었다.
온 세상의 소식을 가져다주는 헤르메스와 보낸 시간이 정답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파시파에가 미노스와 결혼했을 때 크레테는 가장 부유하고 유명한 왕국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날마다 미케네와 트로이아, 아나톨레와 바빌론에서 새로운 왕국이 부상했다. 그리고 남동생 한 명은 죽은 자를 살리고, 다른 한 명은 용을 길들이고,
언니는 스킬라를 변신시켰다. 이제 아무도 파시파에를 화제로 삼지않았다. 그런데 희미해져가던 그녀의 별이 단박에 다시 반짝거리기시작했다. 이제는 온 세상에서 인간을 잡아먹는 거대한 황소를 낳은크레테의 왕비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신들은 수수방관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기도가 그들에게바쳐질지 생각해보라. - P175

"아리아드네는 다르던데." 내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에게서는 희망이 느껴집니다. 사람들이 그 녀석을 뭐라고 부르기로 한지 아십니까? 미노타우로스요. 이소식을 알리기 위해 열 척의 배가 정오에 출항하고 내일 또 열 척의배가 뒤이어 출항한답니다."
"영리하군." 내가 말했다. "미노스가 그 괴물을 자기 자식으로 받아들여, 오쟁이 진 남편이 되기보다 내 여동생의 영광을 함께 누리려는 것 아니냐. 괴물을 낳고 자기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어준 위대한왕이 되겠구나."
다이달로스가 목구멍으로 소리를 냈다. "바로 그거죠."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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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왜 열심히 일하는사람들이
점점 가난해지는가

목숨을 건 여행의 시작-
몇 년 전 기차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창밖으로 지나가는 시골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커피잔에 새겨진 아프리카 농부의 사진과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당신이 마신 이 커피가 우간다 부사망가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 줍니다.‘
메시지 옆에는 공정 무역 인증 단체인 공정 무역 재단의 로고와 슬로건이 적혀 있었다.
‘제3세계 생산자와 공정한 거래를 약속합니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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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술수를 파르마케이아라고 부릅니다. 세상에 변화를 유발하는 능력이 있는 약초 파르마콘을 쓰기 때문인데, 신들이 피를 흘린 곳에서 피어나기도 하고 지상에서 지천으로 자라기도 하죠. 그 약초의능력을 끄집어내는 것이 재능이고 저 혼자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는것도 아닙니다. 크레테에서는 파시파에가 독약으로 왕국을 다스리고 바빌론에서는 페르세스가 육신에 영혼을 다시 불어넣습니다. 키르케가 마지막으로 능력을 입증한 셈이죠." - P89

그는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나는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생각과점점 부풀어오르는 숨가쁜 희망으로 따끔거리는 살갗을 달래며 그의 뒤를 따랐다. 미르라나무문이 등뒤에서 닫히고 우리는 복도에 섰다. 아이에테스는 기적을 일으켜 아버지의 말문을 막은 것치고는 표정이 침착했다. 내 입에서 천 개의 질문이 쏟아져나오려고 했지만 그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그동안 뭘 하고 있었어? 이렇게 한참이 걸릴 줄이야. 어쩌면 누나는 파르마키스가 아닌가보다는 생각이 들려던 참이었다고."
내가 모르는 단어였다. 그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모르던 단어였다.
"파르마키스." 내가 말했다.
마녀라는 뜻이었다. - P90

"게다가 모두들 이 능력을 갈구하거나 찾아 나선 적이 없다고도해두었소. 어떤 악의를 품거나 반란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고 다들약초의 마법을 우연히 발견한 것뿐이라고."
나는 놀라서 남동생을 흘끗 쳐다보았지만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키르케만 예외일 뿐. 그 아이가 그 능력을 공공연하게 찾아 헤맸다고 고백했을 때 그대들 모두 이 자리에 있었소. 그 아이는 손을 떼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말을 거역했소."
외할머니가 상아를 깎아 만든 의자에 앉아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아이는 내 명령을 거부하고 내 권위에 도전했소. 독약으로 동족을 변신시켰고 다른 반역 행위도 저질렀소." 새하얗게 이글거리는그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 아이는 우리 이름을 더럽혔소. 우리가 보여준 애정에 배은망덕한 태도를 보였소. 그렇기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제우스와 합의를 보았지. 키르케는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는 무인도로 추방될 거요. 바로 내일."
천 개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소리를 지르며 애원하고 싶었지만숨이 막혔다. 그 가느다란 목소리마저 나오지 않았다. 아이에테스가대변해줄 거야,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도 나머지 전부와 함께 나를 돌아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한 가지 더," 아버지가 말했다. "언급했다시피 이 새로운 능력은나와 페르세의 합궁이 그 원천인 게 분명하오."
의기양양한 어머니의 얼굴이 내 흐릿한 의식을 뚫고 환하게 빛났다.
"따라서 합의를 보았소. 그녀와는 더이상 자식을 낳지 않기로."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자매들의 무릎 위로 쓰러졌다. 흐느껴 우는 소리가 돌벽을 맞고 메아리쳤다.
외할아버지가 천천히 일어섰다. 턱을 문질렀다."자," 그가 말했다. "이제 연회를 벌일 차례구나." - P98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것, 아무도 올 일이 없다는 것. 그 자체가두려운 사실이었지만 공포로 얼룩진 긴 밤을 보내고 났더니 모든 게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가장 못난 겁쟁이의 면모가 진땀과 함께 날아갔다. 아찔한 번뜩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새장에서 사육당하는 새는 되지 않을 거야, 흐리멍덩해서 문이 활짝 열렸는데도 날아가지 못하는 새처럼은 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숲속으로 들어갔고 이렇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 P108

"당연하지. 제우스는 너희가 우리 모두에게 대항하는 독약을 만들고 있다고 확신해, 너하고 네 남동생 둘 다. 그가 얼마나 안달복달하는 성격인지 알잖아." 그는 무슨 공범인 양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었다. 제우스의 분노가 가벼운 농담이라도 된다는 식이었다.
"그럼 제우스의 염탐꾼으로 온 건가요?"
"나는 사자使者라는 단어를 더 선호하지. 하지만 아냐, 이 문제는 아버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 내가 찾아온 건 형이 나한테 화가 났기 때문이야."
"형이라고요." 내가 말했다.
"응." 그가 말했다. "너도 그에 대해 들어봤을 텐데."
그는 망토 안에서 리라를 꺼냈다. 황금과 상아로 무늬를 새겼고새벽처럼 환하게 빛났다.
"아무래도 내가 이걸 훔친 것 같거든." 그가 말했다. "그래서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숨을 곳이 필요해. 너라면 나를 가엾게 여겨주지않을까 싶었어. 여기라면 그가 들여다보지 않을 것 같거든."
내 뒷덜미가 곤두섰다. 제정신이 박힌 자라면 누구나 햇빛처럼 고요하고 역병처럼 치명적인 아폴론 신의 분노를 두려워했다. 그가 이미 하늘을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지는 않은지, 황금 화살로 내 심장을겨누고 있지는 않은지 어깨 너머로 확인하고픈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공포와 경외라면, 하늘을 쳐다보며 무슨 허락이 내려질지 궁금해하는 거라면 지긋지긋한 마음도 있었다.
"들어와요." 내가 말하고 앞장서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 P119

"이 섬의 이름을 알아요?" 내가 물었다.
"내가 명색이 여행자의 신인데 세상에 이름 모르는 곳이 있을 리없지.""알려줄 수 있어요?"
"아이아이에라고 해." 그가 말했다.
"아이아이에." 나는 그 발음을 음미해보았다. 어두워진 허공 속의날개처럼 부드럽고 조용하게 접히는 느낌이었다.
"어떤 섬인지 아는구나." 그가 말했다. 그는 나를 예의 주시하고있었다.
"당연하죠. 제 아버지가 제우스 앞에서 모든 능력을 내던지며 충성을 맹세한 곳이잖아요. 여기 하늘 위에서 티탄 신족 거인을 쓰러뜨려 땅을 피로 적셨고요."
"우연의 일치로군." 그가 말했다. "너희 아버지가 다른 데도 아닌이 섬으로 너를 보내다니."
그가 내 비밀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 느껴졌다. 예전 같았으면 해답으로 넘칠 듯이 채워진 잔을 얼른 내밀고 그가 원하는 걸 뭐든 내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신세를 진 일이 없었다. 그는 내가 내주는 만큼만 나를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일어나 그의 앞에 섰다. 강가의 돌처럼 노란 내 눈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 아버지가 내 독약을 두고 한 판단이 틀렸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내가 물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에게 약을 먹이지 않으리라는 걸 어떻게 알아요?"
"몰라."
"그런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 있겠다는 거예요?"
"나는 위험한 일이면 뭐든 좋아하거든."
이렇게 해서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 P123

"내 아이를 낳아줄래?" 그가 물었다.
나는 폭소를 터뜨렸다. "아뇨. 절대, 절대."
그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식의 날카로운 대응을 좋아했다.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 나오든 피 한 방울 흘릴 일이 없었으니까. 해답을 강구하고 상대방의 약점을 찾는 것이 그의 천성이기에 오로지 호기심 해소 차원에서 물은 거였다. 내가 그에게 얼마나 빠졌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 안의 뱅충이는 모두 사라졌다. 낮동안 드러누워서 그의 꿈을 꾸거나 베개에 대고 그의 이름을 속삭이는 일은 없었다. 그는 남편이 아니었고 심지어 친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는 독사였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런 조건으로 만나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 P124

"여기서 멀지 않아. 인간의 배를 타고 하루도 안 돼서 닿을 수 있어. 마음에 드는 해협을 찾았거든. 한쪽에는 소용돌이가 있어서 배가됐든 물고기가 됐든 지나가는 걸 뭐든 빨아들이지. 그 반대편 낭떠러지에는 그녀가 머리를 숨길 동굴이 있고, 소용돌이를 피한 선박은 그녀의 입속으로 직행해 먹잇감으로 전락하지."
"먹잇감이라고요." 내가 말했다.
"응. 그녀는 선원들을 잡아먹거든. 입 하나당 한 명씩 여섯 명을 한꺼번에 노 젓는 속도가 느리면 열두 명을 잡아먹지. 싸우려고 드는인간도 가끔 있지만 어떤 식으로 끝날지 너도 알잖아. 비명소리가 제법 멀리에서도 들리지."
나는 의자에 앉은 채로 얼어붙었다. 바닷속 깊은 곳에서 헤엄치며오징어의 차가운 살을 빨아먹는 그녀를 상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스킬라는 예전부터 밝은 빛을 좋아했다. 남을 울리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빨이 가득하고 불사로 무장한 게걸스러운 괴물이 되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어요?"
"제우스나 너희 아버지는 가능하지, 마음만 먹으면. 하지만 뭐 하러 그러겠어? 괴물은 신들에게 요긴하거든. 다들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드릴지 생각해봐."
목구멍이 조여왔다. 그녀가 잡아먹은 인간들은 예전의 글라우코스처럼 행색이 남루하고 절망적이며 공포로 너덜너덜해진 뱃사람이었다. 그들 모두가 죽었다. 내 이름이 찍힌 싸늘한 연기가 되었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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