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불청객들의 이름은 동양하루살이, 깔따구, 그리고 최근 언론에서집중 조명을 받은 러브버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곤충들이 모기처럼 피를 빨지도 않고, 파리처럼 세균을 옮기지도 않으며, 농작물을 직접 해치지도않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만 마리가 동시에 나타나는 장면은 시민들에게 압도적인 공포와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작은 곤충의 집단적 움직임에서 위협을 느낀다. 그래서 등장한 용어가바로 ‘생활불쾌곤충‘이다. 이 표현은 학술적인 개념이 아니라 행정적 필요에서 비롯된 말로, 서울시가 처음 사용했다. 병을 옮기지 않아도 대량 발생 자체로 시민의 생활을 크게 불편하게 만드는 곤충들을 묶어 지칭한 것이다. - P89

사실 생활불쾌곤충이라 불리는 곤충들은 자연 속에서는 결코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다. 하루살이 유충은 강바닥 모래와 자갈 틈에 숨어들어 미세한 유기물을 섭취하며, 이 과정에서 물을 정화한다. 하루살이가 많이 발견되는 강은 수질이 양호하다는 생태학적 증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러브버그 유충은토양 속에서 낙엽과 부패물을 분해해 흙을 비옥하게 만든다. 깔따구 유충 또한 하천과 습지에서 유기물을 분해하며 물질 순환을 돕는다. 즉, 이들은 환경의 청소부로서 생태계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성충이되어 인간 생활권과 마주치는 순간, 그 기능은 잊히고 오직 불쾌한 존재로만 인식된다. - P90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 이 세 지역의 러브버그 역사를 비교하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드러난다. 모두 도시화와 기후변화, 그리고 빛 공해 (lightpollution)라는 세 요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미국 플로리다에서는 고속도로의 가로등과 습한 기후가, 일본 오키나와에서는 도시 녹지와 온난한 해풍이, 한국에서는 도심 공원 및 산림과 인공 불빛이 러브버그를 불러 - P94

들였다. 결국 러브버그는 인간이 만든 도시 환경의 ‘생태적 부산물‘이자 뛰어난 ‘적응자‘이다.
반면, 각 지역의 현재 상황은 많은 차이를 나타낸다. 플로리다는 이미대규모 발생이 한 세대를 지나면서 자연 조정단계에 들어섰고, 오키나와는지속적 확산 초기 단계, 한국은 급격한 확장기에 있다. 이처럼 세 나라는 서로 다른 시간대에 놓인 러브버그의 발생 양상을 통해 도시 생태계의 성숙 단계를 단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내에 유입된 러브버그의 유전자 분석 결과, 한국의러브버그는 일본에서 온 것이 아니고, 중국의 산둥반도에 서식하는 러브버그와 그 유전자형이 일치했다. 다시 말해 최근 중국 산둥반도에서 서식하는러브버그가 우연한 기회에 인천 송도지역으로 들어와 적응하면서 국내에서급격하게 개체 수를 늘려 나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산둥반도 지역에서도 러브버그가 대발생할까1980년~2000년 사이에 출판된 중국곤충학회지에 실린 문헌에 따르면, 러브버그는 중국에 분포하고 있는 종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량 발생으로 기술된 사례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 중국 산둥반도에서는 러브버그가 대발생하지 않는 걸까? 이에 대한 답변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는 토양 건조도와 도시 불빛 구조가 한국이나 일본처럼 집중되지 않아 도시형 생태 조건이 덜 맞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중국 남부지역에는 러브버그와 유사한 종들이 다수 분포하며, 이것들과 비슷한 생태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어, 단일종이 개체군 폭증을 일으키는 대발생 현상을 생태적으로 제약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다시 말해, 동일한 기후권이라도 지역 생태망 내의 종 다양성 차이와 도시 구조 및 교란 요인의 차이로 인해 대발생이 억제되는 구조로 판단된다는 의미다. - P95

먼저 기후변화를 보자. 전 지구적 기온 상승은 곤충의 생활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평균기온이 높아지면 곤충의 발육 속도가 빨라지고, 번식 속도가 빨라진다. 여름철이 길어지고 겨울이 짧아지면 곤충의 번식 기회가 늘어난다. 특히 러브버그나 깔따구처럼 특정 온도와 습도 조건에서 폭발적으로 번식하는 곤충은 기후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에서 러브버그대발생이 두드러지게 늘어난 것도 여름철 고온 다습한 환경이 반복되면서 생육 조건이 최적화된 결과다.
도시화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도시의 확장은 곤충들에게 새로운 서식지를 제공한다. 강변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와 상가, 인공습지와 빗물받이는곤충들이 산란하고 번식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된다. 예를 들어 깔따구는 원래 습지나 하천 주변에서만 대량 발생했지만, 이제는 도시의 정수장에서 쉽게 발견된다. 도시는 곤충에게 새로운 서식지를 끊임없이 공급하는 거대한 생태계다. 문제는 그 공간이 사람의 생활권과 겹친다는 점이다. 인간이만든 편리한 시설물이 곤충에게는 최적의 서식지가 된다.
도시 불빛 문제도 심각하다. 곤충학에서는 이를 ‘생태적 덫 (ecologicaltrap)‘이라고 부른다. 곤충들은 본래 달빛이나 별빛을 기준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도시의 가로등, 네온사인, 대형 전광판은 곤충에게 강력한 인공 신호를보낸다. 곤충들은 방향 감각을 잃고 빛에 집단적으로 몰려든다. 한강 다리에설치된 조명이 하루살이를 유인하고, 계양산 일대의 인공 불빛이 러브버그를 모이게 하는 것도 같은 원리다. 도시의 밝은 불빛은 인간에게 안전과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곤충에게는 거대한 함정이 된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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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을 갖춘 정치인이기를. 이것은 좋은 일이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내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좀 외로울 따름이다. 참으로 점잖고 순수한 사람들도 곁에 두기가 버거울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모든 블루밍턴 사람이 톰프슨 아주머니 같다고 말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가령 아주머니의 아들 F는 물론 훌륭한 인간이지만, 이렇지 않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보다도이것이다. 참사의 공포 중 일부분은, 비행기의 남자들이 그토록 미워했던 미국이 정확히 어떤 미국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이 숙녀들의 미국보다는 나의 미국에, F의 미국에, 딱하고 혐오스러운 두에인의 미국에 훨씬 더 가깝다는 사실을 내가 마음 깊은 곳에서 아는데 있었다는 것이다.
(2001년) - P302

랍스터는 그 자체로도 먹기 좋다. 적어도 요즘 우리는 그렇게생각한다. 그러나 1880년대까지만 해도 랍스터는 말 그대로 하층계급의 음식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만 먹었다. 초기 미국의 감옥 환경이 가혹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식민지는 수감자들에게 랍스터를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먹이는 것을 법으로 금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꼭 사람에게 쥐를 먹이는 것처럼잔인하고 지나친 고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랍스터의 비천한 지위는 옛 뉴잉글랜드에 랍스터가 엄청나게 많았던 것이 한 가지 이유였다. 어떤 자료에서는 바다에 랍스터가 "믿기지 않을 만큼 풍부하다"라고 말했고, 플리머스 식민지의 청교도들이 물을 어정어정헤치면서 손으로 원하는 만큼 잔뜩 잡았다는 이야기, 초기 보스턴에서는 거센 폭풍이 지나가면 해변에 랍스터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들은 이렇게 널브러진 랍스터를 악취 나는 골칫거리로 여겼고, 갈아서 비료로 썼다. 예전에는 보통 죽은 랍스터를 요리한 뒤 보존했다가 먹었다는 점도 문제였다. 보통은 소금에 절이거나 엉성한 밀폐 용기에 보관했다. 메인 주 최초의랍스터 산업도 1840년대에 바닷가를 끼고 생겨난 십여 곳의 통조림 공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랍스터는 그곳에서 멀게는 캘리포니아까지 배로 운반되었는데, 수요가 있었던 것은 옳지 싸고 단백질이 풍부하다는점 때문이었다. 랍스터는씹을 수 있는 연료나 다름없었다. - P309

내가 생각하기에, 아주 드물게라도 가끔 관광객이 되어보는 것은 정말로 영혼에 유익할 수 있다. 하지만 영혼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방식으로 유익한 것이 아니라, 좀 울적하고 착잡한 눈길로 ‘그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어떻게든 그것을 다룰 길을 찾자‘ 하는 방식으로 유익하다. 내 경험상, 국내 여행은 시야를 넓혀주거나 긴장을풀어주는 경험이 아니었다. 장소와 환경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정신에 이로운 효과를발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여행은 나를 극단적으로 위축시키는 경험이었고, 가장 가혹한 방식으로 겸손함을 일깨우는 경험이었다. 내가 어엿한 개인이라는 환상을, 내가어떻게든 이 현실을 벗어나거나 초월해서 살고 있다는 환상을 위협하는 경험이었다.
(경고하는데, 앞으로 이어질 말은 내 동행들이 특히나 불행하고 불쾌하게 느낀 대목으로, 휴가 여행의 재미를 확실히 망쳐버리는 이야기다.) 내게 단체 관광객이 된다는 것은 곧 어엿한 현대 미국인이 된다는 뜻이다. 그 장소에 어울리지 않고, 무지하고, 결코가질 수 없는 것에 늘 욕심을 내고, 결코 인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늘 실망하고 마는미국인이. 그것은 내가 애초에 경험하겠다고 찾아갔던 훼손되지 않은 무언가를 얄궂게도 그런 내 존재로 훼손하는 일이다. 내가 없다면 경제적 측면 이외의 모든 면에서오히려 더 좋고 더 진실된 장소가 될 곳에 나를 억지로 끼워 넣는 일이다. 기나긴 줄,답답한 정체, 반복되는 흥정을 겪으면서, 너무나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내버릴 수도 없는 나 자신의 어떤 부분을 직시하는 일이다. 관광객으로서 나는 경제적으로는 유의미하지만 실존적으로는 혐오스러운 존재가 된다. 시체에 들러붙은 벌레 같은 존재가 된다. - P313

미국 문화에서 ‘랍스터‘ ‘물고기fish‘ ‘닭chicken‘ 같은 단어들은 동물과 그 고기를 동시에 지칭하는 데 비해 포유류는 대부분 ‘소cow‘ 대신 ‘비프bee‘ ‘돼지pig‘ 대신 ‘포크Pork‘처럼 식재료로서 고기를 한때 그 고기였던 산 생물과 분리해서 생각하도록 만드는 완곡어법이 적용된다는 사실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것은 우리에게 고등 동물을먹는 데 대한 불편한 감정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처럼 어법에도 드러날 정도라는것, 하지만 그 불편함은 포유류를 벗어나면 줄어든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일까?  - P324

랍스터들의 그런 감정이 설령 감정의 원시적인 형태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런데 이 대목에서, 원시적인 형태라는 점이 애당초 왜 문제일까? 원시적이고 말로 표현되지 않는 고통이라고 해서, 그 생물체로 만들 요리에 대한 돈을 지불함으로써 그 생물체에게 고통을 끼치는 데 일조한 사람이 그 고통을 덜 절박하거나덜 불편한 것으로 느껴도 좋단 말인가?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는PETA식의 비난은 아니다.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다만 메인 랍스터 축제의 그 많은 웃음, 생기, 공동체의 자긍심 속에서 떠올린 몇몇 심란한 의문을 표현하고 해결하려는 것이다. 더솔직하게 말하자면, 메인 랍스터 축제에 참가했다가 문득 랍스터도고통을 겪을 수 있으며 따라서 가급적 겪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랍스터 축제는 고대 로마의 서커스나 중세의고문 축제와 비슷한 자리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이 비교가 지나친 것 같은가? 지나치다면, 정확히 왜 지나친가? 아니면 이 질문은 어떤가. 혹시 미래 세대는 우리 세대의 산업적 농업과 음식 문화를 우리가 네로 황제의 오락이나 멩겔레의 인체 실험을 보듯이 보게 될까? 내가 처음 떠올린 생각은 이런 비교가 지나치게 신경질적이고 극단적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비교가 극단적이라고 느껴진 까닭을 찬찬히 짚어보면, 내가 동물은 인간보다 도덕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인 것 같다. - P333

이런 생각을 그냥 제쳐놓아도 좋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당신 내면의 근거는 무엇인지? 달리 말해, 당신이 이런 생각을 거부하는 것은 한번 생각해보고서 내린 결론인지, 아니면 생각하기조차 싫은 것인지? 만일후자라면, 왜 생각하기 싫은지? 대충이라도 좋으니, 당신이 생각하기를 꺼리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본 적은 있는지? 나는 지금 누구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진심으로 궁금하다. 누가 뭐래도 진정한 미식가의 특징은 음식뿐 아니라 음식의 전체 맥락까지도 남들보다 더 많이 느끼고, 관심을 더 기울이고, 생각을 더 해본다는 것 아닌가? 아니면 미식가가 남들보다 더 많이 들이는 그 관심과 감수성은 오직 감각적 측면에만 적용되는가? 모든것이 정말로 취향과 표현의 문제일 뿐인가?
그러나 비록 진심이기는 해도, 맨 마지막 몇 가지 질문은 미학과 도덕의 관계에 관한(그런 관계가 있다면 말이다) 더 크고 더 추상적인 질문과 분명 이어져 있다. 이를테면 ‘좋은 생활을 위한 잡지‘
라는 <고메>의 모토에서 ‘좋은good‘이라는 형용사가 뜻하는 바가정말로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그리고 이런 질문은 워낙 깊고 위험한 바다로 곧장 이어지기 때문에, 공개적인 토론은 여기서 그만 접는 것이 최선이리라. 이해와 관심이 있는 사람들끼리라도 서로 물을 수 있는 질문에는 한계란 것이 있는 법이니까.
(2004년)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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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서 바로 노엄 촘스키의 생성 언어학 기본 명제가 나온다. 모든 언어의 기저에는 공통된 ‘보편문법‘이 있다는 이론, 새의 뇌에 ‘남쪽으로 날아가라‘라는 명제나 개의 뇌에 ‘생식기를 냄새 맡으라‘라는 명제가 새겨져 있는 것처럼 인간의 뇌에는 보편 문법이 각인된 부위가 있을 것이라 - P225

는 이론이다.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설득력 있는 증거가 많고, 그중에는 특히 언어학자들과 인지과학자들과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스스로 이뤄낸 발전도 있으며, 전체적으로 신뢰성이 있는 이론이다.
철학적 기술주의자들은 이 이론을 끌어들여, 언어에서 가장 중요한규칙들은 이미 뇌의 신피질에 새겨져 있으므로 가령 현수 분사 금지나 비유 혼합 금지 같은 표준 문어체 영어의 규범들은 궁극적으로 언어의 고래뼈 코르셋이나 샐러드용 짧은 포크에 해당하는 일시적 유행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스티븐 핑커는 이렇게 말한다. "단어를 정렬하여 일상적인 문장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정신적 도구들이 무엇인지를 과학자가 하나하나 따져볼 때, 규범적 규칙은 잘봐줘도 중요하지 않은 장식일 뿐이다." - P226

「이 이야기의 요지는 분명하다. 이것은 스누트들이 무심결에 강화하고, 기술주의자들이 몹시 과소평가하고, 기죽이는 어휘 테이프광고가 이용해먹는 현상과 관계된 이야기다. 그 현상이란, 사람들은정말로 상대가 쓰는 언어에 따라 상대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그야 물론 사람들은 온갖 기준에 따라 서로를 평가하기 마련인데다가-키, 몸무게, 체취, 관상, 억양, 직업, 자동차 메이커"-모두가 엄청나게 복잡한 현상이므로, 제대로 살펴보려면 사회언어학자가 한 트럭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 모든 인간 대인간 사이의 의미론적 판단에는 적어도 한 가지 공통된 요소가 있고, 그 요소란 수용이다. 이때 수용이란 무슨 동정적이고 감정적인공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상대의 무리나 공동체나 집단에 자신도 끼워달라고, 동료가 되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을 받아들일까 아니면 거절할까 하는 진짜 수용을 뜻한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 또 다른 방식은, 어법 전쟁에서는 추상적인 말로만 언급되는 사실을 눈여겨보는 것이다. 무엇인가 하면, 현실에 - P233

서 ‘정확한‘ 어법이란 우리가 누구에게 말하는가, 그리고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기를 바라는가-우리의 발화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하는 데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모든 소통 행위는 많은 부분 수사적이다. 즉, 수사학자들이 ‘청중‘ 혹은 ‘담론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에 달린 문제다. 그리고 현재 미국에는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담론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 또 우리의언어 사용과 타인의 언어 사용에 대한 해석은 둘 다 수사적 가정들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왜 어법 전쟁이 정치적으로 격앙되어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들이다.  - P234

현실적인 문제로는, 어린 자식이 넷 있고 일 년에 1만2,000달러를 버는 사람이 과연 자신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고 사려 깊게도 ‘경제적으로 불리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회에서 더 힘이 날지, 착취를 덜 당하는 느낌일지 나는 의문이다. 내가 그라면,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가 오히려 모욕으로 느껴질 것 같다. 그것이 생색내는 표현이어서가 아니다(물론 그런 표현이기도 하다).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표현이라서다. 그리고 자주 생색의 대상이 되어본 사람들에게는 그런 태도를 감지하는 무의식적 안테나가 있는법이다. ‘경제적으로 불리한‘ 사람이나 ‘신체 능력이 다른‘ 사람 같은 완곡어법의 기본적 위선이 무엇인가 하면, 정치적으로 올바른영어 옹호자들은 이런 용어에 깃든 연민과 너그러움으로 혜택을받는 대상이 가난한 사람들과 휠체어에 탄 사람들이라고 믿지만950 - P258

사실 그 믿음에는 누구나 알고 있되 무서운 어휘 테이프 광고 외에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한 가지 현실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현실이란, 우리가 특정 어휘를 사용하는 동기에는 자신에 관한 정보를 소통하려는 욕망이 어느 정도 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많64은 유행어가 그렇듯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어도 사실은 주로 화자의 미덕을 양심적인 평등주의, 모든 사람의 존엄에 대한 관심,언어의 정치적 함의를 아는 세련됨 등을 알리고 칭송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새롭게 명명된 개인이나 집단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 자신의 개인적이익에 더 도움이 된다. - P259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어의 위선과 마찬가지로, 학술 영어의 이런 모호함과 가식은 의미를 전달하는수단으로서의 언어와 글쓴이의 이력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의 언어 사이에 섬세한 수사적 균형이 붕괴된 탓이다. 달리말해, 학자가 허영/불안 때문에 주로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소통하고 강화할 목적으로 글을 쓸 때, 바로 그때 그의언어가 췌언과 허식적 용어 선택(글쓴이의 박식함을 알리는기능이다)과 모호한 추상성(확고하게 단언했다가는 누군가 반박하거나 한심한 소리라고 반론할 수 있으니 아무도 그러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으로 일그러진다. 맨 마지막 특징, 즉 문장이 말하려는 바를 알아내기가 불가능할 지경으로 심각한모호함은 정치계와 기업계의 얼버무리는 말과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수입강화""다운사이징""선제적 자원 할당 재구조화"), 혹 학술 영어의 진짜 목적은 은폐이고 진짜 동기는 두려움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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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염증에는 장내 미생물도 영향을 미친다. 장내 미생물 균형이 깨지면 염증성 물질이 혈액으로 흘러 들어가 뇌혈관장벽을 통과하면서 뇌의 면역계를 자극한다. 실제로 알츠하이머 환자들의 장내 미생물 조성이 일반인들과 다르다는 연구들이 잇따르고 있다. - P51

알츠하이머 치료제는 왜 이렇게 계속 실패했을까? 세 가지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진짜 물리적인 장벽이다. 뇌는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인 만큼, 철저하게 보호된다. 이 보호막이 바로 ‘뇌혈관장벽‘이다. 뇌혈관을 이루는 내피세포들이 서로 빈틈없이 밀착되어, 혈액 속 대부분의 물질이 뇌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이 덕분에 독성 물질이나 세균, 바이러스가 뇌로 침입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훌 - P54

륭한 방어 체계가 치매 치료에는 최대 걸림돌이다. 개발된 약물의 대부분이뇌혈관장벽을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성분이라고 해도,
분자가 작고 전하를 띠지 않으며 기름에 잘 녹는 성질이 뛰어나야 뇌혈관장벽을 통과할 수 있다. 수많은 약물이 이 장벽을 넘지 못해 실패했다. 최근에는 나노입자, 특수 운반체 등을 이용해 뇌혈관장벽을 우회하려는 시도들이연구되고 있지만, 여전히 완벽한 해결책은 없는 상태다.
두 번째 장벽은 ‘타이밍‘이다. 알츠하이머병의 가장 잔인한 점이기도한데, 증상이 나타났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이다. 초기 증상이 정상적인노화나 단순한 건망증과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환자가 기억력 저하로 병원을 찾을 무렵에는 이미 늦었다. 그의 뇌에서는 이미 수년, 어쩌면 수십 년전부터 아밀로이드 축적과 타우 단백질 변화가 진행 중이었다. 이때쯤이면이미 수많은 신경세포가 죽은 뒤다. 약을 써서 진행을 늦출 수는 있어도, 죽은 신경세포를 되살릴 방법은 없다. 마치 불이 다 번지고 나서야 소화기를드는 셈이다.
마지막 장벽은 다양성과 복잡성이다. 알츠하이머병은 한 가지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어떤 환자는 아밀로이드 축적이 두드러지고, 어떤 환자는 타우 단백질의 엉킴이 심하다. - P55

첫째 그동안은 너무 늦었다. 증상이 나타났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뇌가 손상돼있다. 둘째, 한 가지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밀로이드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는복잡한 메커니즘을 모두 막을 수 없었다. 마치 여러 곳에서 동시에 새는 댐을 한 곳만 막으려는 것과 같았다.
이 두 가지 깨달음이 알츠하이머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현재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이뤄지고 있다. 하나는 ‘조기진단‘, 다른하나는 ‘다중표적 치료‘다. 증상이 나타나기 훨씬 전에 병을 찾아내고, 여러메커니즘을 동시에 공략하자는 전략이다.
모든 질병이 그렇듯, 초기에 진단해서 치료를 시작하면 악화를 막을수 있다. 10년 전만 해도 알츠하이머를 확진하려면 뇌척수액 검사나 수백만원이 드는 PET 스캔을 받는 방법밖에 없었다. 일반 병원에서는 접근이 쉽지않았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혈액 한 방울로 알츠하이머를 진단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혈액 기반 바이오마커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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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생들과 카프카를 강독할 때 극심한 좌절을 느끼는것은, 카프카가 웃기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이해시키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 웃김이 이야기의 힘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사실을 이해시키기도 어렵습니다. 왜 관련되는가 하면, 물론,위대한 단편과 위대한 농담은 공통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둘 다 소통 이론가들이 종종 엑스포메이션exformation 이라고 부르는 효과에의존하는데, 이것은 소통에서 표면적으로는 지워져 있지만 그 소통을 통해 수신자의 마음속에서 환기됨으로써 특정한 연상 관계가폭발적으로 맺어지도록 만드는 핵심 정보를 뜻합니다. 단편소설과농담이 둘 다 느닷없고 격발적인 효과를 낼 때가 많은 것, 흡사 오래 막혔던 밸브가 뻥 뚫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은 건 이 때문일 것입니다. 카프카가 문학을 가리켜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깨뜨리는 도끼"라고 말했던 것은 괜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비평가들이 위대한 단편의 기술적 성취를 종종 압축compression 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압력과 그 배출은 둘 다 이미독자 안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카프카가 거의 모든 다른 작가들보다 더 뛰어났던 것 같은 지점은, 그 압력이 커져가는 과정을 교묘하게 조절함으로써 이윽고 압력이 배출되는 순간에는 독자가 거의 견딜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어놓는 것입니다. - P174

농담의 심리학은 우리가 카프카를 가르칠 때 겪는 문제를 일부 설명해줍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농담을 설명하는 것만큼 농담에 담긴 마법을 더 잘 빼앗는 방법은 없지요. 예를 들어 "루 코스텔로는 고유명사 후who를 의문대명사 누구who로 착각한 거야" 하는식으로 풀어주는 것 말입니다.(미국 배우 코스텔로는 짝꿍 버드 애벗과 함께하는 말장난 코미디로 유명했는데, 특히 한쪽이 ‘Who‘s onFirst? [일루에 누가 있지?"라고 물으면 상대가 "Who [후]"라고 대답하고 그러면 질문자가 다시 "Who? [누구라고?]"라고 물어서 무한 반복되는 말장난이 유명하다. 일루에 있는 사람의 이름이 ‘후‘라서 빚어지는 착각인 것이다.옮긴이) 또한 누구나 알다시피, 이런 설명을 들으면 우리는 이상한 반감을 느낍니다. 따분하다기보다는 기분 나쁜느낌, 꼭 무언가 신성한 것이 모욕을 당한 것 같은 기분입니다. 카프카의 작품을 대학의 표준적인 문학비평 분석에 욱여넣으려고 하는 선생의 기분이 꼭 그렇습니다. 플롯을 표로 정리하고, 상징을 해독하고, 주제를 끌어내고, 뭐 그런 작업 말입니다. 이런 형식의 효율적인 비평 기계는 장미가 왜 향기로운지 알기 위해서 꽃잎을 낱낱이 떼어 으깬 뒤 그 곤죽을 분광계로 분석하는 것과 비슷하지요. - P175

학생들에게 너희가 카프카를 ‘이해하지get‘ 못하는 것은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말해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차라리 학생들에게 카프카의 모든 이야기를 일종의 문으로 상상해보라고 요구할수는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문에 다가가서 두드리는 모습을 상상해보라고, 우리는 점점 더 세게 두드리고 또 두드리는데, 그냥 들어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꼭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정확히 그 절박함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하여간 그 문으로 꼭들어가야 한다는 필사적인 절박함을 느끼고 있고 그래서 문을 두드리고 들이받고 찬다고. 그러다 이윽고 문이 열리는데... 문이 바깥쪽으로 열린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내내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곳에 그동안 내내 들어 있었던 거라고. 다스 이스트 코미시.(이것이웃긴 것이다‘라는 뜻의 독일어 - 옮긴이) - P181

 미국 문화가 도피를, 즉 환상이나 아드레날린이나 스펙터클이나 로맨스 등을 주된 기능으로 삼는 예술과 오락에 쉽게 넘어가는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농담은 일종의 예술이고,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예•술이란 사실상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므로-즉, 잠시나마 우리는 쥐가 아니고 벽은 좁혀들지 않고 고양이를 충분히 따돌릴 수 있는 척하는 것이므로-<작은우화>가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별로 안 웃기게 느껴지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작은 우화>는 심지어 죽음 - 세금 유의 울적한 현실을 대표하는 지긋지긋한 사례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에 대한 도피처로서 오히려 ‘진짜‘ 유머가 필요한 이야기라고 말이다. - P180

이것은 로널드 W. 레이건 대통령이 TV 중계되었던 그 유명한 ‘의회의 수장을 넘어서대중에게로‘ 연설에서 완벽하게 구사했던 바로 그 수사, 이후 똑똑한 정치인들이 줄곧모방하는 수사와 같은 종류의 전술이다. 요컨대, 당신이 앞에 둔 청중을 당신의 주장에 대한 지지자로 슬쩍 언급하는 전술이다. "여러분이 그 시행을 당부하며 저를 대통령으로 뽑아주셨던 바로 그 정책들을 이행함에 있어서 우리가 첫발을 내딛었다는 사실을, 오늘 밤 기쁜 심정으로 여러분에게 선언합니다." 이런 식이다. 이 전술이 교묘한것은 (1) 청중에게 아부하는 말이고, (2) 이 자리에서 연설자의 진짜 목적은 청중에게정보를 주거나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을 설득하고 지지를 규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슬쩍 숨기고, (3) 연설자가 제안하는 정책이 사실은 청중의 이익에 반한다고 지적하는 반대 측의 공격을 미연에 차단하기 때문이다.  - P200

 이때 ‘윤리적‘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에토스ethos‘
에서 유래한 것으로,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의미와 꼭 같지는 않다.
하지만 비슷하기는 하다. 윤리적 호소는 ‘나를 믿으시오‘라는 말을복잡하고 세련되게 하는 것이다. 이 호소는 여러 종류의 수사적 호소들 중에서도 가장 대담하고 야심만만하고 민주적인 호소인데, 왜냐하면 연사가 청중에게 자신의 지적 명민함이나 전문적 유능함뿐아니라 기본적 품위, 공정함, 청중이 품은 희망과 두려움에 대한 감수성까지" 믿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 P202

 오늘날 어디서나 자행되는 교묘한 단어의미 조작, 혹은 그저 무언가의 이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끝없는 논쟁을 떠올려보라. ‘약자 우대 정책‘ 대 ‘역차별‘, ‘생명 존중‘ 대 ‘선택존중‘" ‘미등록 노동자‘ 대 ‘불법 체류자‘, ‘위증죄‘ 대 ‘가벼운 말실수‘ 기타 등등. - P209

 ‘언어 행위‘에 대해서는 여전히그런 실재론적 가정을 적용할 수 없다는 문제다. 왜냐하면 언어 행위란 인간적인 행위인 동시에 근본적으로 규범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점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려면, 언어란 속성상 공적이라는명제를 사적인 언어란 없다는 사실을"이해하면 된다. - P217

 비트겐슈타인의 논증은 대단히 전문적이지만 대충 이렇게 진행된다.
(1) 단어는 그것이 실제 사용되는 방식과 떨어져서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설령
(2) "내 용법이 남들의 용법과 일치하는가 아닌가 하는 의문은 해결 가망이 없는 문제라서 포기한다"고 해도, 여전히
(3) 단어가 나 자신에게만이라도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고, 이때
(4) ‘올바르게‘는 ‘나 자신의 정의와 일관되게‘라는 뜻이다(즉, 내가 한번은 나무를 나무를 뜻하는 단어로 쓰고 다음번에는 마음을 바꿔서 나무를 골프공을 뜻하는 단어로쓰고 또 다음번에는 나무를 특정 브랜드의 고칼로리 완제품 과자를 뜻하는 단어로 쓴다면, 내 작은 유아론적 세상에서조차 나무는 어떤 ‘뜻‘도 갖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5) ‘나 자신의 정의에 맞게 일관되게 사용한다"는 이 기준이 충족되려면, 어느 한 언어 사용자와는 무관하게 (이 경우에는 나와 무관하게) 그 외부에 특정 규칙이 존재해야만 한다. 외부 규칙이 없다면, "나는 나무라는 단어를 나 자신의 정의에 맞게 일관되게 쓰고 있다"라는 진술과 "나는 내가 나무라는 단어를 나 자신의 정의에 맞게 일관되게 쓰고 있다는 인상을 품고 있다"라는 진술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렇다면 내가 [사적으로 정의한] 단어를 일관되게 쓰고 있는지 아닌지는 어떻218 - P218

게 확인할까? 내가 그것을 실제로 일관되게 쓰는 것과 내가 그러는 것처럼 내눈에 보이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을까? 아니면 그 구별마저 사라지는 것일까?
..만약 ‘올바르다‘와 ‘올바른 것처럼 보인다‘를 구별할 수 없다면, ‘올바름‘이라는 개념도 사라진다. 따라서 내 사적 언어의 ‘규칙들‘은 그저 규칙들이 있다는‘인상‘에 불과한 것이 된다. 하지만 내가 규칙을 따른다는 인상이 내게 있다고 해서 내가 실제 규칙을 따른다는 사실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내 인상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무언가가 따로 있지 않는 한. "그리고 그 무언가가 또 다른인상일 수는 없다. 그것은 누군가 신문에 실린 기사가 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기 위해서 신문을 여러 부 구입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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