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의 그 상실들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이었을까? 그 허기는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 것이었을까? 그 상실과 허기에는 혼란이, 거부가, 혹은 상처가 얼마나 섞여 있었을까? 그리고 그 후 자아의 고갱이는 얼마나 결핍되고, 얼마나 권리를 박탈당하고, 얼마나 슬픔과 자기혐오로 가득한 상태가 되었을까? 본질적으로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정도에 관한 답이며, 또한 강박적으로 훔치는 이와 자기를 베는 이와 억지로 토하는 이. 그리고 그보다 덜 극단적인 방식이지만 역시나 자신에게 잔인한 행동을 하는 이들의 차이 역시 정도의 차이다. 수전은 특수한 허기의 감각을 갖고 성장했고 한 번도 충분한포만감을 느낀 적이 없고 한 번도 자신이 남들과 똑같이 먹여질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느끼지 못한 아이였다 그 허기를표현하는 유난히 뚜렷한 방식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번도 주어진 적 없는 것을, 평범한 소비주의의 명랑신에게하고 개방적인 교환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가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헛소리하지 마. 난 도둑질당했어, 그러니까 나도 도둑질로보복할거야라는 방식이다. 재닛과 캐슬린은 표현 수단은 다르지만 표현하는 감정은 동일하다. 그것은 감정들이 자신을 너무 가득 채우고 있다는 느낌, 너무 배가 고프고 너무 절실히필요하고 자신의 몸에 비해 그 감정이 너무 크다는 느낌, 그러므로 그 느낌들을 방출해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애초에 그런느낌을 가진 것에 대해 자신을 벌하려는 강박이다. 이 모든 행동에는 말할 것도 없이 분노가 있다. 당신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 너무나많은 필요를 느끼게 했으면서 그 필요를 채워주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 그리고 무엇이었든 필요를 느꼈던 자신에 대한 분노. 그러나 그 분노 아래에는 가장 강력한 슬픔도 자리하고 있다. 사랑받지 못했다고, 자신은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느끼는 아이의 슬픔, 그 때문에 자신을 비난하고 상처 입히는 아이의 슬픔, 그 슬픔 앞에서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대신 적절한 렌즈를 장착하기만 하면 누구나 어디서나 알아볼 수 있는 슬픔의 무언극을, 그림자의 연기를 하는 아이의 슬픔. - P334
무언극이 시작되는 시점은 허기가 우리를 압도할 때, 허기가 언어의 체계화 역량을 초과할 때다. 언어가 제 역할을 하지못할 때 우리는 다시 몸에 의지하게 되고, 우리가 느끼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을 말하려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는 몸의 행동과 강박과 충동을 허락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여자는 손으로 초코바 하나를 감싸 쥔다. 자기 팔의 여린 피부에서 피를 뽑아낸다. 목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는다. 상징으로 재편성된 사물과 신체 부위와 음식의 세계들이 세계들이 우리 문화에서 여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할당된 세계들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속에는 여성의 슬픔의 언어 전체가 감춰져 있다. 이 언어가 평범한 언어를 대신하고, 평범한 언어에대한 절망을 드러낸다. 마치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묘사할 단어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 P339
철학자 헤겔은 욕망을 결여, 부재로 상정했다. 라캉 역시 이 관념을 한층 더 전개하여, 욕망을 이전에 유쾌한 것 혹은 만족스러운 것으로 경험했으나 이후 상실하고 만 무엇에 대한 갈망으로 묘사했다. 두 사람 다 불완전함, 빠져 있는 무엇, 초기에 발생하고 이후 결코 회복되지 않은 어떤 분리에 대한 근본적인 의식이 욕망의 본질적 부분이라 믿었다. 그 ‘무엇‘이 묻혀버린 기억이든, 아니면 한때 경험했으나 이제는 놓쳐버린 사랑이든 인정이든 안전함이든, 아니면 그런 경험에 대한 결코 충족된 적 없는 소망이든 간에 그것은 우리를 계속 쫓아다니며 괴롭히고, 우리 정신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고, 영원히 순환하는 허기의 회로를 만든다. 그 회로 속에서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모든 욕구의 구체적 외현들(저 남자, 저 아파트, 저렇게 깎아낸 몸)은 몸속에서 본능적으로 느낀 부재에 대한 또하나의 대체물일 뿐이다. 그리하여 결국 욕구의 이야기는 공허를 메우려는 모든 실패한 시도들이 다른 시도로, 다시 또 다른시도로 이어지는 대체의 이야기 혹은 연쇄적 대체의 이야기가된다. 영원히 물건에, 사람에, 행동에 집착하며 대체물을 찾으려는 갈망들은 결국 자체의 생명을 갖게 되고, 하나의 조직 원리가 되며, 매번 고통과 갈망에 대한 초월을 약속하지만 번번이 실망시키고 마는 희망의 파편들이 된다. - P340
우리가 원하는 것, 중요함이라고 표시된 선반에 들어 있는것은 물론 연결이고 사랑이다. 인간 허기의 가장 깊은 근원에이름이 있다면 바로 그것일 것이다. 너무나 많은 여자들이 들어가 살고 있는 억제의 상자들을 조각조각 박살 낼 수 있는도구는 공허함을 산산조각 내고 그 밑에 묻혀 있는 희망을 드러낼 수 있는 커다란 망치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사랑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안고 안기고자 하는 사랑받아야 하는입장에서 당신이 한 경험이 훼손되었거나 불완전했더라도 사랑을 주고자 하는 욕망은 모든 허기에 항상 붙어 있는 상수이며, 거식증 환자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다이어트하는 사람들을 잇는 연결고리이고, 음식을, 섹스를,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노력 뒤에 자리한 필요와 간절함의 끊임없는 박동이다. 우리는 이 광막한 느낌을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묻혀 있던 갈망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며, 일종의 영적 갈망의 한 형태로 볼수도 있고,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결국 이해는 이해에 그칠 뿐이다. 밤이면 몸을 동그랗게 말고 이해를 끌어안을 수도 없고, 이해를 먹을 수도, 이해의 손을 잡을수도, 이해에게 당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도 없다. 허기를 이해하는 것과 허기를 만족시키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우리 다수에게 허기는 끈질기게 지속된다. 허기는 열망의 어떤 내적인 회로로 들어가거나 이 길 혹은 저 길로 노선을 정해 수많은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다이어트의 형태, 로맨스의 형태, 중독의 형태, 모든 걸 밀어내고 제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이 구매품 혹은 저 직장, 이 관계 혹은 저 관계에 대한 갈망. 허기는 원래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깊이를 알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허기를 채우려는 우리의 의지, 허기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흔히 보이는 맹목적인 집요함은 엄청날 수 있다. 우리는 열망하면서, 저 안전한 뭍을 목표로 삼고, 오직 희망이라는 작디작은 튜브에 매달린 채 물에 계속 떠 있다. 때때로, 아주 운이 좋다면 (적어도 한동안은) 거의 세포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깊고 진정한 방식으로 허기를 채워줄 적합한 형태, 적합한 종류의 만족을 발견하기도 한다. 욕구에 도장을 받고 마침내 충족되는 것이다. 기도를 마무리하며 마거릿은 바로 이거야라고 느낀다. 내털리는 아이를 안고서 바로 이거야라고, ‘여기가 내 집이야‘라고 생각한다. - P357
그래서 이대로 충분한가? 상태가 비교적 괜찮은 날, 더없이 괜찮은 날 나에게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내게 주어진 축복을 하나하나 꼽아볼 것이고, 힘들게 얻어낸 친밀한 관계들에관해, 두려움을 상대로 한 작은 승리들에 관해, 친구들과 개와 숲과 일에 관해 말할 테지만, 그래도 완전한 확신을 갖고 대답하지는 못할 것이다. 완전히 확신하는 답, 최종적인 휴식의 장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내 모든 욕구를 이해하고충족하는 일, 가장 높은 봉우리에 도달하는 일이란 가능하지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흡족함의 순간들, 별안간 몸과 마음과정신이 나란히 연결되는 순간들이 있고, 마치 우주가 보낸 선물처럼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찾아오는, 내가 잘 먹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이런 순간들은 더없이 소박하게 포장되어 도착한다. 내 개가 보내는 사랑의 시선으로, 친구와 나누는 농담으로, 여기서 느끼는 애정의 불씨, 저기서 느끼는 이해로 그 순간들은 내가 막 노를 젓기 시작할 때 수면을 비추는 아침 햇빛 속에서, 완벽한 한 끼 식사, 완벽한 한 문장, 어떤 손길, 어떤 눈빛 속에서 온다. 마침내 이 삶에서 얻는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를 순간들이 있다. 섬광처럼 스치는 만촉감, 얼핏얼핏 최미하게 반짝이는 희망의 빛과 맛, 파이처럼깊이 음미하며 완전히 누려야 할 아주 잠깐의 순간들이. - P370
여성의 몸은 페미니즘이 가장 덜 건드린 미개척지 중 하나일 수도 있고 어쩌면 최후의 미개척지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여자의 욕구, 그리고 자유와 권리 의식과 기쁨을 품고 자기 욕구를 마음껏 채울 수 있는 여자의 능력은 진보의 표지인 동시에 진보에 대한 은유다. 우리는 얼마나 허기져 있는가? 얼마나 채워져 있는가? 얼마나 갈등하고 있는가? 집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이런 생각도 했다. 자신의 몸으로 방금 새로운 생명을 낳았고 이제 그 생명을 먹이고 어를 준비를 하고 있는 나의 쌍둥이 언니에 관해, 모든 여자들과 그들의 몸에 관해,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몸을 축복이나 선물이 아니라 적이자 수치의 장소로 여기고 있는지에 관해, 우리 중 너무나 많은 이들이 문득 자신의 엉덩이와 허벅지와 가슴을 느끼고 볼 때마다 느끼게 되는 절망과 질색하는 마음에 관해, 그 몸들이 과소평가되고 망각되고 무시되고 가장 잔인한 멸시의 원천이 되고마는 경악스러운 가능성의 강도에 관해. 새벽 두 시. 내 앞의 길은 텅 비어 있었고, 하늘은 검지만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작은 아기가 자신을 창조하고 안식처가 되어주었으며 이제부터는 자신을 더 넓은 세상으로 안내해줄 몸에서 고픈 배를 채우려 젖을 빠는 모습을 떠올렸고, 아기를 위한 기도를 읊조렸고, 변화를 위해 기도했다. 나는 우주에게 속삭였다. 이 아기가 가득 채워지게 해달라고. -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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