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침팬지의 가장 최근의 공통 조상은 어쩌면 500만 년 전이라는 가까운 시대에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침팬지와 오랑우탄의 공통조상이 살고 있었던 때보다 분명 가깝다. 그리고 침팬지와 원숭이의 공통조상이 살고 있던 때보다도 아마 300만 년이나 가까울 것이다. 침팬지와 우리 인간은 유전자의 99퍼센트 이상을 공유하고 있다. 만일 이 세계의 어딘가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섬에서 침팬지와 사람의 공통조상에이르는 모든 중간형이 발견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래서 그 스펙트럼(추이 계열)을 따라 약간의 교잡이 일어났다고 하자. 그 경우 우리의 법이나도덕상의 관습이 엄청난 충격을 입게 되리라는 사실을 누가 의심할 수있겠는가? 이러한 스펙트럼 계열 전체에 완전한 인권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게 되거나, (침팬지에게도 선거권을!) 아니면 아파르트헤이트(과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분리 정책 옮긴이) 식의 차별법 체계를 갖추고 특정 개인이 법적으로 ‘침팬지‘ 인지 아니면 법적으로 ‘인간‘ 인지 판결을내리는 재판을 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 중의 한 명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딸 때문에 고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세계는 구석구석까지 파헤쳐졌기 때문에, 이런 공상적인 상황이 현실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권리‘를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렇듯 위험한 중간형이 살아남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 순전히 행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만약 침팬지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지 않았다면 침팬지 대신 놀랄 만큼 인간과 흡사한 중간형이 살아남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P428
단속론자, 특히 엘드리지가 ‘종‘을 진정한 ‘실체‘로 취급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단속론자에게는 ‘종‘이 정의될 수 있는 것은 괴이한 중간형이 모두 죽고 없기 때문이다. 반면 진화의 역사 전체를 긴 안목에서 바라보는 극단적인 반(反)단속론자에게는 ‘종‘을 불연속적인 실체로 보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그로서는 하나의 끊어지지 않는 연속체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그의 관점에 선다면 종이란 결코 확실히 결정된 출발점을 갖지 않으며, 때때로 분명히 정해진 끝(멸종)을 가질 뿐이다. 그 이유는 흔히 좋은 결정적으로 종말을 맞이하지 않으며 점진적으로 새로운 종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단속평형론자는 종이 어느 특정 시점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수만 년 정도의 이행 기간이 필요하지만 이 기간은지질학적 기준에서 본다면 무척 짧은 것이다. 더욱이 단속평형론자는 종이명확한 종말을 가지거나, 최소한 급속하게 종말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았고 완만하게 새로운 종으로 변화하면서 소멸하는 식으로는 생각하지않았다. 단속평형론자의 견해에 따르면, 좋은 종이 지속되는 기간의 대부분을 변화 없는 정체기로 보내고 불연속적인 출발과 끝을 가지기 때문에 명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수명‘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비(非)단속론자의 경우에는 종이 생물 개체와 같은 ‘수명‘을 가진다고는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극단적인 단속평형론자가 생각하는 ‘종‘이란 실제 그 명칭에서도 나타나듯이 불연속적인 실체이다. 극단적인 반단속론자가 생각하는 ‘종‘은 끊임없이 흐르는 강을 임의적으로 한 토막씩 자르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시작과 끝의 경계를 정하는 선을 그릴 이유는 전혀 없다. - P430
단속평형론자가 생각하는 어떤 동물군의 역사, 가령 과거 3000만 년에 걸친 말의 역사를 다룬 책이 있다면 그 드라마의 등장 인물은 모든생물 개체가 아닌 종일 것이다. 단속평형론자인 저자는 종을 실재하는 ‘무엇‘으로 간주하고 그 자체가 명확한 정체성을 가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좋은 갑작스럽게 무대에 등장한 다음 홀연히 사라진다. 그리고후속 종이 그 뒤를 잇는다. 어떤 종이 다른 종에게 길을 비켜 주는 식의 천이 (遷移)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나 반단속론자가 같은 역사를 쓴다면 아마 종의 이름은 편의성을 위해서만 사용할 것이다. 시간축을 따라 살펴본다면, 반단속론자는 더 이상 종이 불연속적인 실체라고 생각하지는않을 것이다. 그의 드라마의 사실상의 주인공은 변천하는 개체군에 속한 생물 개체이다. 그 책에서는 자손에게 길을 내 주는 것은 생물 개체이고 어떤 종이 다른 종에게 길을 비켜 주는 경우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단속평형론자가 일반적인 개체 수준에서 나타나는 다윈의 자연선택에 비유되는 종 수준의 자연선택을 믿는 경향이 있다 하더라도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반면 비단속론자는 자연선택이 생물 개체보다 높은 수준에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종선택‘이라는 개념이 비단속론자에게 그다지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종을 지질학적 시간을 통해 불연속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 P431
복잡한 적응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종의 성질이 아니라 개체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종이 눈이나 심장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종에 속한 개체가 그런 기관을 갖는다. 어떤 종이 형편없는 시력 때문에 멸종했다면 그것은 필경 형편없는 시력 때문에 그 종의 모든 개체가 죽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시력의 질은 각 개체의 성질인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어떤 종류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 답은,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대한 효과의 총합으로 환원될 수 없는 방식으로 종의 생존과 번식에 영향을 주는 특성이어야 할 것이다. 앞에서 들었던 말의 가상적인 예에서는 대형 개체를 선호하는 종 내 소수파가 소형 개체를 선호하는 종 내 다수파보다 생존에 유리하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종의 생존 능력이 그 종을 구성하는 개체의 생존능력의 합과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433
분자시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한, 그리고 모든 종류의 분자가 100만년이라는 시간 단위에서 대체로 각기 고유한 속도로 변화하고 있음이 거의 확실한 한, 우리는 분자시계를 사용해서 진화라는 나무에서 뻗어나온 가지의 어느 한 지점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거의 모든진화적 변화가 분자 수준에서 중립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분류학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다. 그것은 수렴이라는 문제가 통계학이라는 무기를 통해 일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동물은 그 세포 안에 써넣어진 대량의 유전적 텍스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중립설에 따르면 그 텍스트의 대부분은 동물을 그 특유한 생활양식에 적응시키는 것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즉 그러한 텍스트는 자연선택과는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완전히 우연한 결과를 제외한다면 수렴 진화에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택에 대해 중립적인 두 텍스트의 큰 단락이 우연히 서로 닮을 가능성을 계산할 수는 있으나 그런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더욱 바람직한 일은 분자 진화의 속도가 일정하기 때문에 진화의 역사에서 어떤 분지점의 연대를 구체적으로 결정할수 있다는 사실이다. -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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