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꽤 지난 일이 되었지만, 내가 구 주 가까이 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뉴욕의 병원이었는데, 내 침대에서는 밤이면 환한 불빛이 기하학적으로 밝혀지는 크라이슬러 빌딩의 풍경이 바로 보였다. 낮에는 그 빌딩도 아름다움을 잃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서히 여느 건물과 다름없는 그저 덩치 큰 건물이 되어갔고, 도시의 모든 건물들은 멀찍이 떨어져 침묵을 지키는 듯 보였다. 5월이 지나고 6월이 되었다. 창가에 서서 저 아래 보도를 내려다보며 봄옷을 입은 젊은 여자들- 내 또래-이 점심시간에 돌아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던 것이 기억난다.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머리가 움직이는 것이 그들의 블라우스가 산들바람에 잔물결을 이루는 것이 보였다. 나는 퇴원하면 보도를 걸을 때 나도 그렇게 걷는 사람 중 한 명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을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여러 해 동안 정말로잊지 않았다 - 병실 창문에서 내려다보았던 풍경을 떠올리며 내가 그 보도를 걷고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 P9

우리 둘 다 친구가 없었고, 우리 둘 다 멸시를 당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을 쳐다볼 때 그랬던 것처럼 의심의 눈초리로 서로를 보았다. 지금은 내 인생도완전히 달라졌기에,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될 때가 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어쩌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햇살이 내리쬐는 보도를 걷거나 바람에 휘는 나무 우듬지를 볼 때, 또는 이스트 강 위로 나지막이 걸린 11월의 하늘을 바라볼 때, 내 마음이 갑자기 어둠에 대한 앎으로 가득차는 순간들이 예기치 않게 찾아오기도 한다. 그앎이 너무 깊어 나도 모르게 소리가 터져나올 것 같고, 그러면나는 가장 가까운 옷가게로 들어가 낯선 사람과 새로 들어온 스웨터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아마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도 이렇듯 반쯤은 알게 반쯤은 모르게, 사실일 리 없는 기억의 방문을받으면서 세상을 이런 식으로 어찌어찌 통과해나갈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공포라는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듯 자신만만하게 보도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이 어떤 마음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삶은 아주 많은 부분이 추측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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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번지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 아래서의 일상도 비슷하다. 노인은 고기 배를 따며 하늘을 보고, 사내는아침마다 선착장에 나가 차표에 구멍을 뚫는다. 아이의 키는 무럭무럭 자라 예전의 팬티가 맞질 않고, 이제는 오줌도 지리지 않게 되었다. 섬 어귀에는 마을에서 제일 높은 등대가 있다. 등대 위에는 파랗게 이끼 낀 경비행기 하나가 유물처럼 박혀 있다. 깨진 유리창 안에는 이따금 새들이 날아와 알을까고 간다.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그들은 누군가 등대 아래 갖다 놓은 블랙박스를 들고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사라졌다. 추락 전, 30분간의 녹음내용은 블랙박스 부품의 손상과 잡음 때문에 대부분 해독되지 못했다. 조종자도 사라지고 국적도 불분명한 비행기의 추락 사고는 몇 가지 의문점만 남긴 채 사람들 기억에서 잊혔다. 다만 그들은 블랙박스안에서 들릴 듯 말 듯 녹음된 조종자의 마지막 메시지 하나를간신히 건질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단 한마디, ‘안녕‘ 이었다고한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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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따뜻해지는 행성에서 열 스트레스의 효과와 생물학자들이 상임계온도라고 부르는 것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상임계온도란 유기체가 그 지점 이상에서는 기능을 멈추는 온도를 말한다.(하임계온도도 있지만 기온이 상승하는 오늘날 여기에 신경 쓰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열을 견디는 능력은 종마다 천차만별이다. 어린 시절 내 방에 있었던 난방기의 온도를 끝까지 올려도우리 호모사피엔스는 조금 덥고 답답하다고 느낄 뿐 생명의 위협을받지는 않겠지만, 도롱뇽이나 청어 등 상임계온도가 32도보다 훨씬아래인 동물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차이는 어느 정도 타고난다. 가령 포유류를 비롯한 항온동물은 양서류와 어류처럼 주위의 온기에 의존하는 변온동물보다 체온을 조절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자연에서 종마다 쾌적 온도가 다양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종이 생활하는 서식지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지구의 생명체는 온천과 눈 덮인 툰드라, 열대 산호초와 남극의 빙상 밑얼음장 같은 소금물에서 살아가도록 적응했다. 그렇다면 기후가 따뜻해지는 세상에서는 본래 더위에 익숙한 생물이 훨씬 유리할 거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극한의 온도는 변경 지대의 생물에게 더 큰고난을 안긴다. 그리고 실제로 기후변화가 불러온 최초의 경고도 상징적인 사막 거주자에게서 왔다. - P78

몇 시간이 지나 밸브가 잠겼다는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수조의 수온이 불가사리의 쾌적온도 이상으로 치솟은 상태였다. 하지만 밸브를 열고 찬물을 공급하면서 상황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다들 별일 아닌 듯이 넘겼다. 그런데며칠 후 수조 속 불가사리들이 모두 비실대더니, 야생에서와 똑같은모습으로 죽고 말았다. 이 상황이 암시하는 바는 명확했다. 물이 따뜻해지면서 불가사리가 과열되자 본래 몸속에 있던 무언가가 활성화되면서 증상을 유발한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죠" 열 스트레스가 어떻게 숙주의 면역계는 약화하고 병원균의 번식은 부추겼는지를 설명하면서 하벨이 말했다. 하벨은 전에도 여러 차례 이런 상황을 목격했다고 했다. 지난 30년간 해양 생물 전염병을 연구한 하벨은 해수 온도가 상승하면 바닷가재에서 전복에 이르기까지 각종 해양 생물의 질병이 악화하는 것을 줄곧 보아왔다. 특정한 병 저항성에서 시작된 연구가 전 지구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주제를 확장한 것이다. 바다가 따뜻해지면 그곳에 사는 동물과 식물에 스트레스를 주고, 스트레스를 받은 생물은 병에 잘 걸린다. 그 강력한 상관관계 때문에 하벨의 연구는원래 추구하던 바와 달리 점점 기후변화와 연관성을 갖게 되었다. - P85

"기후변화의 영향은 육지보다 바다에서 더 심각합니다." 하벨이노트를 들고 물속으로 들어가 수없이 오랜 시간 머물며 어렵게 도달한 결론을 이야기했다. 많은 생물학자가 같은 의견을 공유한다. 해양의 상황은 무서운 속도로 달라지고 있으며 예측이 불가능하다. 여기에는 수온 상승과 질병의 시너지도 한몫하고 있다. 하벨은 설득력 있는 또 다른 예로 열대 산호초의 감소를 강조했다. 수온 상승은 산호 폴립과 그 안에서 공생하는 조류에게 스트레스를 주어 백화현상을 일으키고 산호를 약하게 만들어 병원균에 쉽게 굴복하게 한다. 산호들이 죽어서 사라지면 그 파급효과는 생태계 전체로 확산한다. 불가사리도 마찬가지다. 사실 "어떻게 한 유기체가 이웃에 과도한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생태학의 근본원리에 영감을 준 것도 바로저 불가사리 중 하나였다.
"돌고 돌아 결국엔 제자리로 돌아왔어요." 지금까지의 연구 행로를 묻자 하벨이 이렇게 답했다. "그래서 더 신경 쓰게 되기도 합니다." 대학원을 졸업한 하벨은 로버트 페인 밑에서 첫 번째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페인은 그 유명한 불가사리 실험으로 ‘핵심종‘이라는 개념과 용어를 주창한 생태학자다. - P86

 한때 꽁꽁 얼어붙었던 베링해의 물에서 얼음 장벽이 사라진 덕분에 이들 불가사리는 알류샨열도와 그 너머의새로운 해안선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불가사리 애호가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일지 모르나, 기후변화가 몰고 온 또 다른 명백한 역경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핵심 개념이 증명한바, 우리는 자연 군집에서 특정 종을 제거함으로써 생태계 전체에 엄청난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군집에 새로운 종이 추가되는 것은 어떨까. - P91

"한 번의 곤충 대발생으로도 자연선택은 진행됩니다." 린그렌은 산소나무좀이 어떻게 가장 취약하고 맛있는 나무들을 빠르게 솎아냈는지에 주목했다. 공격에 살아남은 소나무와 그 후손은 시간이 지나면서 나무좀의 공격을 늦출 수 있는 강력한 화학물질과 풍부한 나뭇진 등을 발달시켰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린그렌과 동료들은 산소나무좀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생산한 자손의 수를 세었다. 그 결과 순진무구한 나무가 자라는 곳에서는 나무좀이 두 배 이상번식했는데, 린그렌의 표현에 따르면 "폭주하기 시작해" 상상을 초월하는 밀도로 시스템 전체를 장악했다.
생물학에서 순진함의 개념은 최소한 다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윈은 갈라파고스제도에서 "극도로 온순한 새들을 보고 경탄했다. 육지에서와 달리 포식자(또는 호기심 많은 박물학자)가 없는 곳에서 살아온 이 새들은 이구아나와 땅거북을 비롯해 다윈이 그곳에서 발견한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육지동물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없었다. 경험이 없다는 것은 관찰하거나 끼니로 삼기 위해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동물들을 취약하게 했다. 같은 원리를 동물이나 식물이 처음 보는 새로운 종을 만날 때 언제나 적용할수 있다. 이들은 새로운 포식자, 경쟁자, 병원균, 기생체 앞에서 자신을 지킬 방법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이 사실은 산소나무좀 대발생의 이상 속도를 잘 설명한다. 기후변화에 따른 서식 범위이동 사례가 늘면서 자연 군집이 총체적으로 재배치될 가능성이 현실화한 것이다. - P105

"거의 전체가 정상을 향해 위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프리먼이 말했다. 카리무이산에 서식하는 평범한 새들의 서식 범위가 5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상한 고도와 하한 고도 모두 100미터 이상 올라갔다. "믿어지지 않았어요." 그가 혼자서 중얼거렸다. 곧 프리먼 부부는 다이아몬드가 다른 산에서 조사한 데이터로 실험을 반복했다. 그랬더니 그곳에서는 오히려 경향성이 더 두드러졌다. 모델이 예측한 것처럼 기온이 상승할 때는 산을 타고 위로 올라가는 것이 새들의 압도적인 반응이었다. 그 효과는 예상과 달리 매우 확실했고 열대지방 기후변화에 대한 오랜 궁금증을 해결했다. 한 학파에 따르면 열대지방 생물은 이미 더운 환경에 익숙하므로 온대지방 생물보다 기온 상승에 좀 더 탄력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프리먼의 연구 결과는 열대림의 다양하고 밀집한 군집이 주변 환경의 작은변화에도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전문종의 세상임을 보여주었다.
"한 번 크게 밀쳐내는 대신 조금씩 1000번을 밀어내는 것과 같아요." 새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신호에 반응하냐고 묻자 프리먼이 쉬운 비유로 답을 대신했다. 새들이 먹고 사는 곤충과 식물의 변화부터 경쟁자나 포식자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변화까지 여기에는 매우 다양한 연결 고리가 작용한다. 질병도 무시할 수 없다. 아닌 게 아니라 프리먼 자신도 산에서 작업하는 동안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뻔했다. 원래는 저지대에서만 활동하는 말라리아모기도 새처럼 산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 P116

발견되었다. 정상은 그 아래쪽의 울창한 우림이 키가 작고 이끼로뒤덮인 나무에 자리를 양보한 지역이었는데, 그곳에서 멸종의 에스컬레이터가 최고 속도로 운행되고 있었다. 1985년에는 흔했던 고지대 전문종의 절반이 사라졌고, 남아 있는 것들도 대부분 수가 크게줄어 정상 바로 밑의 마지막 조사지에만 분포했다. 일부 사라진 종들이 근처 더 높은 산에서 발견되긴 했지만, 이들의 행보가 암시하는 바를 달리 해석할 여지는 없었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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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가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손님이라는 것도 별 특징이 없었다. 어느날 한 사내가 들어와 국수 두 개를 시켰다. 손님이 방을 원해서 어머니는 안방에 상을 봐줬다. 국수와 고추다대기, 김치 한 종지가 전부였다. 사내는 빈 그릇을 하나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왜 그런가 싶어 사내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사내는 자기맞은편 국수 위에 빈 그릇을 엎어놓았다. 혹여 국수가 식을까봐 그러는 거였다. 곧이어 한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방긋 웃은 뒤 그릇을 걷고 젓가락을 들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댄 채 조용하고 친밀하게 국수를 먹었다. 어머니는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런 일상적인 배려랄까, 사소한 따뜻함을 받아보지 못한 ‘여자의 눈‘으로 손님을 대하던 순간이었다. 밥 잘하고 일 잘하고 상말 잘하던 어머니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살면서 중요한 고요가 머리 위를 지날 때가있는데, 어머니에게는 그때가 그 순간이었을 거다. - P158

 어느 날, 나는 내가 진정으로 배곯아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리둥절해진 적이 있다. 궁핍 흑은 넉넉함을 떠나, 말 그대로 누군가의 순수한 허기, 순수한 식욕을 다른 누군가가 수십 년간 감당해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놀라웠던 까닭이다. 오랜 세월, 어머니는 뭘 재우고, 절이고, 저장하고, 크게 웃고, 또 가끔은 팔뚝의 때를 밀다 혼자 울었다. 여자가 칼 갈아 쓰면 팔자가 드세다는데 아직까지별 큰일이 없는 걸 보면 괜찮은가 보다 능청도 떨면서, 생일이면 양지를 찢어 미역국을 끓이고, 구정에는 가래떡을 뽑고, 소풍날은 김밥을, 겨울에는 동치미를 만들어주었다. 그사이 내 심장과 내 간, 창자와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음식에 난 칼자국들 역시 내 몸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니며 나를 건드렸다. 나는 그 사실을 몰라 더 잘 자랐다. 한 해가 지나면 어머니는 가래떡을 썰고, 다시 한 계절이 지나면 푸른 콩을 삶아 녹색 두부를 만들었다. 나는 더운 음식을 먹고 자랐고 그안에선 늘 신선한 쇠 냄새가 났다.  - P169

 언니에겐 꽃 같은 이십대를 칸막이 안에서 보내는 것보다. 지인들의 환한 안부보다, 자신이 매일 맞닥뜨려야하는 소읍의 추상적인 ‘시선‘이 더 곤욕스러운 듯했다. 시골의 무책임하면서도 집요한 시선 말이다. 한아저씨는 합격자 발표가 날 때마다 우리 집에 들러 꼬박꼬박 결과를 물어왔다. 이미 소식을 들었으면서 부러 집까지 찾아와 "어떻게 됐냐?" 물었고, 한참 자식 자랑을 한 뒤 사라지곤 했다. 언니의 얼굴은 어른을 대하는 예의와 낭패감, 미소, 수치심이 섞여 형태를 갖추지 못한 반죽처럼 흔들렸다. 명절 때도 친구 결혼식 때도, 비슷한 얼굴을 본 적이 있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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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가을. 사람들 틈에 끼어 서울의 불빛을 바라봤다.
그리고 노량진의 이름을 생각했다. 다리량(梁) 자와 나루터진(津) 자가 동시에 들어간 곳. 1999년 내가 지나가는 곳이라 믿었던 곳.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곳. 하지만 그곳이 정말
‘지나가기만‘ 하는 곳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7년이 지난 2005년 지금도 나는 왜 여전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는 중‘인걸까. 짧은 정차 후, 사람들이 물밀듯 들어왔다. 한 여자가 내 발을 밟으며 소리쳤다. "밀지 마요!" 우주 먼 곳 아직 이름을 가셔본 적 없는 항성 하나가 반짝하고 빛났다. 그리고 어디선가 아득히 ‘아영아, 내 손 잡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정신을 차린 뒤, 열차가 어디까지 왔는지 따져보았다.
벌써 집 근처에 가까워져 있었다. 차고 깊은 가을 밤. 지하철은 여전히 그리고 묵묵히 서울의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 P148

나는 어머니가 잘 익은 배추 한 포기를 꺼내 막 썰었을 때, 순하게 숨죽은 배추 줄기 사이로 신선한 핏물처럼흘러나오던 김칫국과 자그마한 기포를 기억한다. 어머니가 국수를 삶으면 나는 그 옆에 서서 제비새끼처럼 입을 벌렸다. 어머니는 갓 익은 면발 한두 젓가락을 건져 주었다. 그런뒤 맨손으로 김치를 집어 입속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어줬다.
김치에선 알싸한 사이다 맛이 났다. 내 컴컴한 아가리 속으로김치와 함께 들어오는 어머니의 손가락 맛이랄까, 살〔肉〕맛은 미지근하니 담담했다. 식칼이 배추 몸뚱이를 베고 지나갈때 전해지는 그 서걱하는 질감과 싱그러운 소리가 나는 참 좋았다. 어둑한 부엌 안, 환풍기 사이로 들어오던 햇빛의 뼈와그 빛 가까이에 선 어머니의 옆모습, 그런 것도.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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