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으로 튀어! 1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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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관둬. 지금 동지들 간에 싸울 때야?"
"나는 동지가 아니라잖아!"
아버지는 오른손으로 염소수염의 허리 벨트를 붙잡더니 프로레슬링처럼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구경꾼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
"혁명은 운동으로는 안 일어나.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솔으로 일으키는 것이라고!"
아버지가 부르짖었다. 점점 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집단은 어차피 집단이라고. 부르주아도 프롤레타리아도 집단이 되면 모두 다 똑같아. 권력을 탐하고 그것을 못 지켜서 안달이지!"
"이봐 , 우에하라 진정해!" 형사가 외쳤다.
"개인 단위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만이 참된 행복과 자유를 손에 넣는거얏!"
아버지가 세 번째 사람을 들어올렸다. 아버지의 키가 평소보다 곱절은 커 보였다. 어머니는 말리기를 포기하고 몰려든 사람들 뒤에 멀거니 서있었다.
"더 이상 소란을 피오면 체포할 거야!"
"더 이상 민중에 의한 혁명은 없어. 마르크스 주의는 패배했다고!"
세번째 사람은 전봇대에 내동댕이쳐졌다.
"폭행 상해 및 공무집행 방해! 우에하라 이치로, 현행범으로 체포한다!"
형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좁은 골목길에 울려 퍼졌다.
지로는 현관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건만 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일개 인간으로서 바라보았다. 타인으로서 과연 저이들을 좋아할 수 있을까...그런 생각을 했다.-326쪽

"아무튼요, 우에하라 씨도 언젠가는 노인이 되실 겁니다. 개미와 베짱이에 빗대자는 건 아니지만, 변변한 저축도 없이 노후를 맞이한다면 그건 정말 불안한 일이죠. 그러니까요, 노후를 위한 저축이라고 생각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쓸데없는 참견이야. 그런 건 각각 자기 책임으로 해두면 돼"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굶어 죽는 사람을 나라에서 그냥 손 놓고 보고만 있겠습니까? 결국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밖에 없다고요"
"오만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군 대체 어느 누가 도와달래?"
"인도주의는 국가의 구심력인 겁니다"
"시건방진 소리. 미국의 패권주의와 똑같은 발상이로군. 인도주의라는 미명아래 지배층의 가치관을 온 세계에 이식하려고 하지"
"이야기를 비약시키지 마시고요"
"노상에서 죽을 자유를 빼앗겠다는 건가, 국가에서?"
아버지의 입에서 침이 튀었다.
"우에하라 씨는 노상에서 죽고 싶다는 말씀이세요?"
"응 노상에서 죽고 싶고말고, 신주쿠 중앙공원에서 새벽녘에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음, 아주 멋진 최후야"
.....
"그러니까요, 임의가 아니라 의무라니까요 국민의 의무!"
"그럼 나는 국민을 관두겠어"아버지가 가슴을 쭉 젖히며 말했다.
"예?" 아주머니의 목이 앞으로 쑥 내밀어졌다.
"일본 국민이기를 관두겠다고. 애초부터 원했던 일도 아니었으니까"
"..........어디, 해외로 이주하시려구요?" 갑자기 목소리 톤이 낮아진다.
"내가 왜 해외에 나가? 여기 거주한 채로 국민이기를 관둘 거야"
아주머니는 할 마링 얼른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
"그게 대체 무슨 농담이세요?" 아주머니가 당황하고 있었다.
"농담이 아냐. 오래 전부터 일본 국민을 관둘 생각이었어. 오늘이 바로 그날이야."
...
"우에하라 씨 일본사람 맞으시죠?"
"그래. 하지만 일본사람이 반드시 일본 국민이어야 할 이유는 없어"-21쪽

이 나라에 태어나면 무조건 선택의 여지도 없이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가 생기다니, 그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뭔가를 억지로 해야 한다는 건 지배를 받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야. 사람은 지배당하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오?-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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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 미디어 디스토피아에서 미디어 유토피아를 상상하다
정여울 지음 / 강 / 2006년 6월
품절


초등학생 때 위인전에 매혹된 이유는 논픽션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생생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 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정말 이렇게 살았단 말이야?' 라는 호기심은 닥치는 대로 위인전을 펼쳐 읽게 만들었고, 계백이나 베토벤이나 성삼문처럼 비장미로 점철된 삶에 대해서는 공포만큼이나 커다란 매혹을 느꼈다. 무엇보다 위인전은 이렇게 실수투성이인 나도 언젠가는 주위의 사랑과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와 기대를 심어주었다. 자신의 장애나 갖가지 악조건을 초인적 의지로 극복하고 마침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의 평범과 무지를 깜빡 잊게 만들곤 했다. 20 세기 초반에는 주로 비운의 혁명가들의 삶에 넋을 잃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손에 넣었나'에 촉각을 곤두세웠다면 20대 초반의 나는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견뎠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 같다.....
울며 겨자 먹기로 20대를 마감하는 지금은 '그들은 어떻게 무엇을 소유했는가' 보다는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버렸는가' 에 시선이 간다. -145쪽

호치민은 전쟁에 계속되는 와중에서도 젊은이들을 세계 각국으로 유학 보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베트남 정부가 길 떠나는 유학생들에게 옷 한 벌, 구두 한 켤레, 가방 하나를 달랑 쥐어주며 전해준 것은 장학금보다 무거운 '호 아저씨의 덕담'이었다.
"우리 정부가 어려워서 너희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지만, 너희들은 지금 전쟁으로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인민들에게 크나큰 빚을 지는 것이다. 반드시 그 빚을 갚아야만 한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할 것은 분명하지만 시간이 좀 많이 걸릴 것이며 그 과정에서 조국의 많은 인재들이 희생 될 것이고 너희들의 부모형제들도 죽어갈 것이다. 조국을 대신해서 이 아저씨가 너희들에게 받아두어야 할 약속이 꼭 하나 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희들은 학업을 마치기 전에는 돌아와선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승리한 다음, 너희들이 전쟁으로 파괴된 조국의 강산을 과거보다, 세계의 어느나라보다 아름답게 재건해야 한다. 너희들은 공부하는 것이 전투다"-239쪽

조선 후기, 반역도 역모도 아닌 '괴이한 문체'로 인해 사대부 신분까지 박탈 당한 이옥이라는 문인이 있다. 문체는 액세서리가 아니라 '정신의 뇌관'임을 예민하게 감지한 국왕 정조에게, 이옥의 날티나는 문장은 가혹한 징계감이었다. 지고지순한 모범적 글쓰기에는 당최 소질이 없었던 그에게 과거시험 7전 7패보다 고통스러운 건 '권태'였다.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3류 인생들의 이야기의 힘이었다. 그의 글에는 지엄한 가문의 앳된 청년이 늙은 기녀를 짝사랑하며 애태우고 지아비를 아홉 번 바꾼 행복한 과부가 아홉 명의 죽은 남편을 거느린 채 함께 묻혀 있으며 의협심으로 똘똘뭉친 프롤레타리아 기생이 자신에게 밤을 구걸하는 선비들에게 퍼붓는 통쾌한 구토가 있다. 그는 붓끝에 달린 날카로운 혀로 저잣거리의 팍팍함과 익살을 담아냄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스스로를 구원한다.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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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 미디어 디스토피아에서 미디어 유토피아를 상상하다
정여울 지음 / 강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일단 책을 읽는 내내 짜증난 부분이 있었다.

나는 루쉰의 글을 통해 글이란 자고로 무조건 아름답고 봐야 한다는 미학적 허영과 결별할 수 있었다.-343쪽

이런 작가의 고백과는 달리 내가 읽기에는 무척이나 거추장스러운.힘든 문장이었다고 해야 하나.

이 영화 속 아이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미디어가 현실을 번역할 때 흔히 쓰는 완곡어법의 거름종이로도 그 참혹함이 여과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더욱 소중한 성장영화다. 날것의 현실이 보여주는 참혹함은 미디어의 기름진 수사학에 절여진 우리의 얄량한 휴머니즘을 가차없이 베어버리기 때문이다.

한 두 문장쯤이야 캬. 좋쿠나 하고 넘어갈수 있지만 이런 수식어 주렁주렁한 문장에 처음부터 끝까지..

그 수식어들이 참으로 기름졌다. 는게 나의 느낌이고 이것이 나의 취향이 아니었기에 읽는 동안 참 괴로웠다. 그리고 한번 맘에 안드니 이것저것 다 맘에 들지 않았다.

아니 왜 이렇게 줄 간격이 넓은겐가. 이거 줄여서 얄쌍하게 내면 안돼? (넓은 줄 간격 싫어한다. 이 책의 줄간격은 귀여니 책 줄 간격과 맞먹는 듯. 물론 귀여니와 이 책의 작가 수준은 천지차이다만)

삽화도 맘에 안들었다. 별로 책 내용과 연관성도 없어보이는데다가 심지어 한번썼던 그림을 재배열 한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재활용해서 집어넣기도 한다. 성의없어보이고 무엇보다 안이쁘다. 차라리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대중문화, 책 표지 사진이나 영화 드라마 사진이나 집어넣지! (실제로 책을 보면서 사진이 이쯤에서 한장쯤 나와주면 좋겠는데. 싶은 답답한 순간이 있었다. 허공에의 질주 같은 영화 이야기를 할 때 라던지...)

또 저자가 무척 사랑해하는 듯한 수식어 '투명한'. 투명한이 얼마나 많은 단어의 수식어로 쓰일 수 있는지 볼 수 있다. 이것도 싫었다.

그리고 때때로 누군가의 싸이월드 다이어리를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쪼금 있었다.

나는 그런 종류의 민망함을 참지 못했고 그래서 최대한 빨리 때로는 슬쩍 그 부분을 담타넘듯이 넘어가버렸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끝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다는 것 (사실 이건 어느정도의 오기가 발동해서 였기도 하다만) 그리고 어느 부분에선 정말 빠져들어 흥미진진하게 정신없이 읽어나간 부분이 있다는건 부인할 수가 없다.

크게 본다면야 위의 단점쯤이야 사소한 것일 테고 거기다 다분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이기 까지 한 한 독자의 투정. 음 투정이라고 하기엔 너무 격하군. 하여튼 무시해도 좋을 한 독자의 뻘소리라고 치부해도 될 만큼 괜찮은 책인거 '같다.'

'같다.' 라고 표현하는 건 역시 내가 이 책의 장점을 크게 쭉쭉 흡수하며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점+단점해도 단점을 용서할 수 없고 단점과 장점과 끝까지 떼어놓고 생각하는걸 보면 말이다. 나는 감정적인 인간이라 좋으면 단점이고 뭐고 신경안쓰고 무조건 좋다고 외치는 그런 사람인데 이책은 절대 그런 책은 아니었다.

그래도. 분명 와. 많이 느끼기도 했고 저자의 드라마와 영화와 고전과 음악을 넘나들며 그야말로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저자의 드넓은 대중문화의 폭. 저자만의 그 '숲'의 크기에 감탄을 하기도 했다.

나 말고 다른 리뷰는 모두 좋은 말, 감탄이 담겨있는 걸 보니 과연 좋은 책인거 '같다'

아마 나의 이런 평은 무식한 일반 독자의 평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추측을 해본다)

책을 보는 독자들의 지적수준은 참으로 다양하니까..^^

하여튼 중요한 건 어떤 지적수준의 위치에 있던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이라 생각하고 나의 솔직한 생각을 별점 3개와 함께 남겨본다. 

덧붙여 책 뒷표지에 있는 추천사가 참 좋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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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11-28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은 다릅니다. 여자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는 책 말이죠 제가 읽은 책 중 가장 허접한 그 책의 리뷰는 찬사 일색이어요. 몇번 읽었다는 말도 있구... 그니까 남과 다르다고 님이 무식한 건 절대 아닙니다. 글구 저두 줄간격 넓은 책 싫어해요
 
세계의 모든 스타일 - 전문 컬렉터 김민석이 30년 수집품으로 말하는
김민석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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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여쪽에 이르는데, 두꺼운 종이를 사용하여 두툼한 두께를 자랑한다. 당연히 올 컬러.

글보다는 사진이 더 많은 책이다.

책은 각 대륙별로 그리고 세부적으로 각 국가별로 순서를 정하여 저자가 수집한 수집품들을 보여주고 그 나라에서 저자가 겪은 특이한 사건이나 수집과 관련된 추억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처음에 쫘라락 펼쳐봤을때, '어머나' 소리가 튀어나오게 이쁘고 아름다운 장식품에 반해버려 읽기시작했는데 사실 그렇게 아름다운 장식품으로 채워진 페이지(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앤티크 종류)는 그리 많지 않고 내가 접해보지 못했던 문화권의 오브제에 관한 부분이 훨씬 더 많았다.

전문적으로 자세히 여러 문화에 대해 일러주는 책은 아니었지만 그 나라의 대표적인 오브제들을 보면서 내가 몰랐던 곳에도 이다지도 다양한 문화가 있다는 것을 알수 있게 되어서 좋았다.

루마니아나 터키. 이란 등의 대충 이름은 알고 있지만 문화적으론 아는 바가 거의 없는 국가들, 특히 아프리카쪽의 경우가 그 대표적 예이다. (아프리카의 경우 내가 들어보지도 못한 여러국가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작가는 아프리카에 대해 큰 애정을 가진 듯 보였다. 프랑스를 소개하면서도 사진페이지로 2-3페이지가 고작인데 아프리카의 경우 한 나라에 사진페이지를 6페이지 이상씩 팍팍 할애하고 있다.

나는 아프리카의 수집품에 대해서는 아는게 거의 없는지라 ,그래서 뒤로 갈수록 지루하기도 하였지만 (뒷부분에 아프리카가 나온다) 한편으로는 미에 대한 나의 시각이 이다지도 유럽중심으로 길들여져 있구나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책 한권을 다 읽고 나서의 감상은 - 정말 전세계의 모든 스타일을 한번 훑어본거 같다는 느낌이었다 ^^  영국 프랑스 뭐 이런 유명한 나라 말고 우리가 잘 모르는 부분들까지 고루고루.

요즘에 와서 이런 종류의 책을 볼 때면 먼저 저자를 따지게 되는 습관이 생겼다.

겉보기에 그럴싸 해보이고 도판도 근사하지만 정작 읽기 시작하면 실망감을 주는 책이 얼마나 많은지^^

문제는 무엇(책의 주제 혹은 중심 소재)에 대해 정확히 알고 오랜시간을 공부하지 않고 그저 겉핥기식으로 화려하게 만든 책을 찍어내는 사람.그리고 출판사 때문이 아닐까.

하여튼 이 책은 그런 걱정을 할 만한 책은 아니란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30여년간, 정확히는 27년간 수집에 열정을 쏟아온 저자의 안목을 책을 보는 내내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뿐만 아니라 글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는데 각 나라에서 저자가 수집을 하면서 겪은 수많은 에피소드들이라던지 (코뿔소 뿔 수입하려다 밀렵꾼으로 오인되어 끌려갔던 일이라던지 ^^) 짤막하게 나오는 인생여정들 그 자체로 참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책을 읽는동안 즐거웠던 건 평생을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바친 누군가를 책을 통해 만난다는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저자는 큰 돈도 못 벌면서 외국이나 돌아다닌다는 이유르 주위의 비난과 멸시를 받았던 지난 세월을 고백하듯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에는 자신의 지난 삶과 그간 수집한 오브제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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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훔친 여름 김승옥 소설전집 3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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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쿵 울렸다. 분명히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만일 내 가슴이 북이었더라면 여간 큰 소리가 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북 소리도 비. 애. 장. 중. 희.열...식으로 분류한다면 그때의 내 북소리는 희나 열이었다. -11쪽

더러워진 손을 깨끗이 씻고 내가 사기그릇에 햇빛이 아롱거리는 맑은 물을 떠가지고 돌아오자 -11쪽

나는 저 서울대학교 학생들 대부분이 앓고 있는 정신분열증에 대하여 논문이라도 한 편 쓰고 싶다는 것이다. 얘기는 간단하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자라나면서 어른들의 사랑ㅇ르 충분히 받아온 동물들이다. 여기서 동물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동물은 사랑만 받고 자라면 자기가 제일 잘난 줄로 착각하게 되고 한편 작은 꾸지람에도 샐쭉해지며 작은 비난에도 깊고 험악한 절망의 회오리바람 소리를 들어버리는 법이니까.
서울대학생들 쳐놓고 전국 방방곡곡 어느 작은 귀퉁이에서라도 어렸을 적부터 반장 한 번 안 해보거나 일등 한 번 안 해본 양반은 없다. 따라서 어른들의 사랑과 기대를 받아보지 않은 녀석이 없다는 말씀이다. 그런 결과로 자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사람에게는 멍청할 정도로 고개를 숙이면서 머리를 내밀고, 자기의 뺨을 갈기는 사람에게는 곡괭이로 그사람 그림자의 대가리라도 짓부숴야 속이 시원해하는 성미를 가진, 어린애로서의 상태를 유지하는 어르신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17쪽

영일이가 가리키는 대로 빈 좌석 하나에 앉고 보니 내 맞은편 자리에는 부동 중의 부동, 무표정 중의 무표정은 혼자 다 차지한 듯한, 고추처럼 작고 호박처럼 넓적한, 그러니까 꼭 간장에 절임할 때 쓰는 양파처럼 생긴 처녀가 앉아 있었다.-68쪽

괜히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을 얻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바닷가로 가기를 권한다. 사람이 하는 일들이 그다지도 절대적으로 보이고, 남이란 것이 그다지도 뚫고 넘어갈 수 없는 성벽처럼 생각 될 때는 바닷가로 가기를 권한다.
나는 부두의 포장된 길을 느릿느릿 걸어가면서 좁은 해협은 좁은 대로 충만해 있고 먼 외해는 눈부시게 넓은 대로 내가 흔히 사용하던 계산의 단위와는 다른 계산 단위의 무한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강렬하긴 하지만 인간의 감각으로써는 공허밖엔 아무것도 붙잡아둘 수 없는 듯한 바다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들이 그다지도 눈물을 사랑하고 사람에 대하여 너그려우려고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만일 우리 선조들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에서 자라난 사람들을 지도자로서 대부분 모시어온 대신에 바닷가에 큰 도시를 꾸미려고 애쓰고 바닷가에서 자라난 사람들을 많이 지도자로 모셔왔었더라면 오늘의 우리나라는 좀더 좋게 달라져 있으리라는 엉뚱한 생각조차 했다. 무한 그리고 절대, 그것은 머리로써가 아니라 피부로써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만 사람들은 사람의 어리석음을 감추기에 앞서 노출시켜버릴 수 있는 것이다. 절대는 인간이 아니라 따로 있는 것이기에....
문득 바다가 나에게는 그토록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그토록 멀어보였고 그토록 좁아보이면서도 그토록 넓어 보였던 것이다.-146쪽

오늘 저녁에 가질 집회라는 것도 강동우씨가 내게 말해준 대로 말하면 이런 거야. 이 크지 않은 도시에도 별의별 사람이 다 모여 있다는 거지, 직업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또 뭐가 다르고 뭐가 다르고...그런데 공통된 점은 딱 두가지가 있다는 거야. 하나는 돈을 모으기 위해서 별의별 짓도 다 하겠다는 자세와 또 하나는 다른 직업에 대한 무관심 내지는 경멸이란 점이라는 거야.-162쪽

도인은 주리의 그 말할 수 없이 천박한 화술, 경솔한 행동, 몰염치, 무지, 분수에 맞지 않는 출세욕등에 단박 반하고 말았다. 반했다는 표현에 어폐가 있다면, 그 여자를 동정하고 말았다는 정도로 바꿔도 좋다. 소비만 하기 위하여 태어난 듯한, 서울의 어느 거리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여성 중의 하나라 바로 주리였는데, 도인으로서는 여자의 은박지 같은 그 가벼움에 묘하게 마음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도인의 인간관에 비추어볼 때 도저히 구제의 가망성이 보이지 않는 그러한 여자가, 그런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목구멍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돋보이는 사실이기도 하였다. -255쪽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지금이라도 당장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면 또 누군가를 만날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사람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잘못을 부분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존재들이란 것을. -347쪽

따지고 보면 내가 꼭 없어서는 안 된다는 일이란 없어. 누구에게나 그렇지. 군밤장수도, 자동차 운전사도, 인기 배우도, 대학교수도, 대통령도........ 그 사람이 군밤을 팔지 않으면 누군가가 팔 거야, 그 사람이 운전을 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할 것이고, 그 사람이 인기가 없으면 다른 배우가 인기를 끌 것이고, 그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으면 누군가가 당선되었을 게고...없어서는 안 될 만큼 중요한 것은 이미 아무개 아무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다만 군밤이며 자동차며 극장이며 대학이며 대통령이라는 제도일 뿐이야. 하물며 대한민국 서울의 모 사립고등학교 일반사회 교사 하나쯤이야.
물론 도인은,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자기가 자살하려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책들이 통렬하게 그 점을 비판하고 있었던가! 얼마나 많은 논객들이 그 점을 괴로워하고 있었던가! 그러나 합승버스에 흔들리면서 학교를 향하여 가고 있는 도인은, 그 점이 마치 현대만을 가지고 있는 나쁘게 특이한 현상인 듯이, 그리고 인간들이 노력하면 고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떠들고 있는 저 숱한 저자들과 논객들에게 불복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367쪽

-미국으로 데려가주겠다는 것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그런 여자의 사랑은 싫다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우스운 욕심입니다.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아니어도 그를 사랑한다는 춘향이 얘기를 어디서 주워들은 모양인데, 물론 그런 사랑이 나쁘다거나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만, 그렇지만 사랑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내 생각으로는 사랑 자체는 인간의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사랑은 하나의 수단으로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일 겁니다. 자기를 보다 깨끗하고 보다 덜 불안하고 보다 보람 있는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랑은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제가 얘기한 보다 깨끗하고 보다 덜 불안하고 보다 보람 있는 위치라는 건 정신적인 면을 강조한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것들이 물질적인 면에서의 그것들이라고 해도 상관없을 겁니다. 물질적인 면에서 그런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자기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랑'이라는 자기의 능력을 사용했다고 해서 나무랄 수 있을까요? 사랑이란 어쩌면 사기와 사촌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과 다른 점은 하나는 자기도 돕고 상대자도 돕는 결과를 수반하게 되는데 다른 하나는 자기도 파멸하고 상대방도 골탕을 먹는다는 결과를 수반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애경이한테 미국행 얘기는 꺼내보지도 않은 채 무조건 날 사랑해달라고 한 것은 오로지 당신의 우스운 허영심에서 나온 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만인 애경이가 아무 조건 없아, 다만 당신이 남자이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했다면 오히려 그것은 사랑의 가면을 쓴 일시적인 성욕에 불과했을 겁니다.-4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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