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훔친 여름 김승옥 소설전집 3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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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쿵 울렸다. 분명히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만일 내 가슴이 북이었더라면 여간 큰 소리가 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북 소리도 비. 애. 장. 중. 희.열...식으로 분류한다면 그때의 내 북소리는 희나 열이었다. -11쪽

더러워진 손을 깨끗이 씻고 내가 사기그릇에 햇빛이 아롱거리는 맑은 물을 떠가지고 돌아오자 -11쪽

나는 저 서울대학교 학생들 대부분이 앓고 있는 정신분열증에 대하여 논문이라도 한 편 쓰고 싶다는 것이다. 얘기는 간단하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자라나면서 어른들의 사랑ㅇ르 충분히 받아온 동물들이다. 여기서 동물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동물은 사랑만 받고 자라면 자기가 제일 잘난 줄로 착각하게 되고 한편 작은 꾸지람에도 샐쭉해지며 작은 비난에도 깊고 험악한 절망의 회오리바람 소리를 들어버리는 법이니까.
서울대학생들 쳐놓고 전국 방방곡곡 어느 작은 귀퉁이에서라도 어렸을 적부터 반장 한 번 안 해보거나 일등 한 번 안 해본 양반은 없다. 따라서 어른들의 사랑과 기대를 받아보지 않은 녀석이 없다는 말씀이다. 그런 결과로 자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사람에게는 멍청할 정도로 고개를 숙이면서 머리를 내밀고, 자기의 뺨을 갈기는 사람에게는 곡괭이로 그사람 그림자의 대가리라도 짓부숴야 속이 시원해하는 성미를 가진, 어린애로서의 상태를 유지하는 어르신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17쪽

영일이가 가리키는 대로 빈 좌석 하나에 앉고 보니 내 맞은편 자리에는 부동 중의 부동, 무표정 중의 무표정은 혼자 다 차지한 듯한, 고추처럼 작고 호박처럼 넓적한, 그러니까 꼭 간장에 절임할 때 쓰는 양파처럼 생긴 처녀가 앉아 있었다.-68쪽

괜히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을 얻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바닷가로 가기를 권한다. 사람이 하는 일들이 그다지도 절대적으로 보이고, 남이란 것이 그다지도 뚫고 넘어갈 수 없는 성벽처럼 생각 될 때는 바닷가로 가기를 권한다.
나는 부두의 포장된 길을 느릿느릿 걸어가면서 좁은 해협은 좁은 대로 충만해 있고 먼 외해는 눈부시게 넓은 대로 내가 흔히 사용하던 계산의 단위와는 다른 계산 단위의 무한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강렬하긴 하지만 인간의 감각으로써는 공허밖엔 아무것도 붙잡아둘 수 없는 듯한 바다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들이 그다지도 눈물을 사랑하고 사람에 대하여 너그려우려고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만일 우리 선조들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에서 자라난 사람들을 지도자로서 대부분 모시어온 대신에 바닷가에 큰 도시를 꾸미려고 애쓰고 바닷가에서 자라난 사람들을 많이 지도자로 모셔왔었더라면 오늘의 우리나라는 좀더 좋게 달라져 있으리라는 엉뚱한 생각조차 했다. 무한 그리고 절대, 그것은 머리로써가 아니라 피부로써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만 사람들은 사람의 어리석음을 감추기에 앞서 노출시켜버릴 수 있는 것이다. 절대는 인간이 아니라 따로 있는 것이기에....
문득 바다가 나에게는 그토록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그토록 멀어보였고 그토록 좁아보이면서도 그토록 넓어 보였던 것이다.-146쪽

오늘 저녁에 가질 집회라는 것도 강동우씨가 내게 말해준 대로 말하면 이런 거야. 이 크지 않은 도시에도 별의별 사람이 다 모여 있다는 거지, 직업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또 뭐가 다르고 뭐가 다르고...그런데 공통된 점은 딱 두가지가 있다는 거야. 하나는 돈을 모으기 위해서 별의별 짓도 다 하겠다는 자세와 또 하나는 다른 직업에 대한 무관심 내지는 경멸이란 점이라는 거야.-162쪽

도인은 주리의 그 말할 수 없이 천박한 화술, 경솔한 행동, 몰염치, 무지, 분수에 맞지 않는 출세욕등에 단박 반하고 말았다. 반했다는 표현에 어폐가 있다면, 그 여자를 동정하고 말았다는 정도로 바꿔도 좋다. 소비만 하기 위하여 태어난 듯한, 서울의 어느 거리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여성 중의 하나라 바로 주리였는데, 도인으로서는 여자의 은박지 같은 그 가벼움에 묘하게 마음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도인의 인간관에 비추어볼 때 도저히 구제의 가망성이 보이지 않는 그러한 여자가, 그런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목구멍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돋보이는 사실이기도 하였다. -255쪽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지금이라도 당장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면 또 누군가를 만날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사람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잘못을 부분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존재들이란 것을. -347쪽

따지고 보면 내가 꼭 없어서는 안 된다는 일이란 없어. 누구에게나 그렇지. 군밤장수도, 자동차 운전사도, 인기 배우도, 대학교수도, 대통령도........ 그 사람이 군밤을 팔지 않으면 누군가가 팔 거야, 그 사람이 운전을 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할 것이고, 그 사람이 인기가 없으면 다른 배우가 인기를 끌 것이고, 그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으면 누군가가 당선되었을 게고...없어서는 안 될 만큼 중요한 것은 이미 아무개 아무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다만 군밤이며 자동차며 극장이며 대학이며 대통령이라는 제도일 뿐이야. 하물며 대한민국 서울의 모 사립고등학교 일반사회 교사 하나쯤이야.
물론 도인은,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자기가 자살하려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책들이 통렬하게 그 점을 비판하고 있었던가! 얼마나 많은 논객들이 그 점을 괴로워하고 있었던가! 그러나 합승버스에 흔들리면서 학교를 향하여 가고 있는 도인은, 그 점이 마치 현대만을 가지고 있는 나쁘게 특이한 현상인 듯이, 그리고 인간들이 노력하면 고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떠들고 있는 저 숱한 저자들과 논객들에게 불복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367쪽

-미국으로 데려가주겠다는 것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그런 여자의 사랑은 싫다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우스운 욕심입니다.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아니어도 그를 사랑한다는 춘향이 얘기를 어디서 주워들은 모양인데, 물론 그런 사랑이 나쁘다거나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만, 그렇지만 사랑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내 생각으로는 사랑 자체는 인간의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사랑은 하나의 수단으로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일 겁니다. 자기를 보다 깨끗하고 보다 덜 불안하고 보다 보람 있는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랑은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제가 얘기한 보다 깨끗하고 보다 덜 불안하고 보다 보람 있는 위치라는 건 정신적인 면을 강조한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것들이 물질적인 면에서의 그것들이라고 해도 상관없을 겁니다. 물질적인 면에서 그런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자기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랑'이라는 자기의 능력을 사용했다고 해서 나무랄 수 있을까요? 사랑이란 어쩌면 사기와 사촌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과 다른 점은 하나는 자기도 돕고 상대자도 돕는 결과를 수반하게 되는데 다른 하나는 자기도 파멸하고 상대방도 골탕을 먹는다는 결과를 수반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애경이한테 미국행 얘기는 꺼내보지도 않은 채 무조건 날 사랑해달라고 한 것은 오로지 당신의 우스운 허영심에서 나온 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만인 애경이가 아무 조건 없아, 다만 당신이 남자이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했다면 오히려 그것은 사랑의 가면을 쓴 일시적인 성욕에 불과했을 겁니다.-4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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