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 전2권 세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평점 :
절판


요즘 나는 영어땜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 어느수준 이상으론 잘 늘지 않는 실력도 문제이지만 시험신청하기가 어려워 밤을새기도 일쑤라 나는 진심으로 영어에게 온갖 기운을 뺐긴듯 했다.. 원래도 간간히 영어에 질리면 명랑하고 짤랑거리는 한글 문장을 읽곤 했었다.  나는 그 짤랑거림이 참 좋았었는데 이번 고비엔 은근하고 조용하고 나지막하고 그러면서도 그 속에 어떤 힘을 품고 있는 황석영의 글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럴 땐 내가 한국사람이란게 참 좋아지는 것이다. 아아. 난 이 문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자부심. 오래된 정원에 빠져들면서 영어에 대한 증오(?), 시험등록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도서관엘 가면 이 노란빛과 연둣빛의 중간쯤 되는 한국판 '오래된 정원' 옆에 불어판이 나란히 놓여있는데 도대체 이런 말은 어떻게, 요런 말은 어떻게 번역했을까 엄청 궁금했다. '그네'라는 말은 그냥 '그'로 번역했을까? 그건 그 느낌이 아니잖아. 그 페이퍼 백의 하나도 모르는 불어를 ?어보며 왠지 내 맘이 안타까웠다.

그 시절엔 어떠했을까, 나는 그 시절이 궁금했다. 데모하던 시절, 최루탄이 날아다니던 시절, 운동이 당연하던 시절. 엉뚱하게도 책속에서 내 가슴속에 콕 박힌 표현은 '김밥을 신문지로 말았더니 잉크 냄새가 드문드문 배였다'라는 부분이었다. 내가 10살 좀 지났을 적엔가 신문사에서 콩기름 잉크로 바꾼다던가 광고를 대대적으로 했던 기억이 있으니 그 시대, 80년대의 신문내음은 지금과 다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 신기했다. 몇십년 전 '그때'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은 이렇게 조금씩 작은 변화를 거듭하여 이젠  당시를 상상하기 조차 힘들어지고 말았다. 나는 86년생인데 초등학교 시절 매 학기 새 교과서를 받으면 첫 페이지에 이런 말이 씌여있었다. '.....여러분은 21세기를 이끌어 나갈....' 21세기를 이끌어 나가는 지는 모르겠다만 하여튼 21세기에 살아가는 우리 세대로선 그 어떤 상상력을 동원한다 해도 80년대의 치열함을 느낄 수 없다. 노력으로도 그 시대를 짐작하기 어려운 세대가 대학생이 되고, 고시를 치고, 취업을 하는 요즘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운동권에 대해 막연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고 대게의 대학생들은 운동권에 대해 무관심하다. 아마 운동권이었단 과거를 가진 사람중 지금은 그리 아름답지 못한 사람이 많아서 일까. 책을 읽고 든 생각은, 우리는 운동권에 대한 호불호를 여유롭게 흘려가듯 말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운동권이 되느냐 마느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 나이에 가장 어려운건 자신을 속이는 일, 비굴하게 사는 일이 아닐까, 알면 알 수록 더 괴로운 것이 아닐까 그런 것들...참을 수 없는 것들. 그러한데 어떻게 운동권이 되고 말고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 운동권이라는 것도 인간의 정의, 인간의 선긋기 일 뿐인데, 그들은 그저 생각하는 대로, 믿는 대로 행동한 것이 아닐까.

신념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적당한 롤 모델을 직접 눈으로 보기 어려운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 오래된 정원은 신념대로 살았던, 빛나는 누군가의 삶을 보여주었다. 세월과 시대에 부딪혀 상처투성이 일지라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시대의 은근한 말씨가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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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달 2007-03-29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짤랑거림이라..... 신선한데요? ㅋㅋ
 
굶어죽을 각오 없이 일본에서 만화가 되기
배준걸 지음 / 작은씨앗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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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굶어죽을 각오 없이 라는 제목, 그리고 가볍고 널럴해 보이는 표지와는 달리 읽는 내내 가슴을 지긋이 누르는 듯한 느낌의 책이었다.

맨손으로, 일본어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꿈을 위해 일본으로 떠난 저자가 3년만에 일본에서 만화가로 데뷔하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어릴 때 보았던 정주영의 성공담+공부잘하는 요즘 청소년 성공담 정도의 분위기를 풍긴다.

정주영만큼 치열하게 무작정 부딪히고, 요즘 젊은이들처럼 적극적으로 밝게 공부하는 모습.

책은 대부분이 만화이기 때문에 1시간에 걸쳐서 다 읽을만한 분량이었다.

첫 3분의 1정도를 읽고서 든 생각은, 굶어죽을을 각오 없이. 라고 저자는 말하지만 일반인들은 굶어죽을 각오를 하고서도 못 견딜 과정을 거쳤군. 이란 거였다.

하루종일  전단지 돌리기 알바를 하고 일본의 밑바닥 인생들이 모인 6인 1실 기숙사에서 형이 편의점 알바하고 얻어온 유통기한 지난 음식 먹으며 만화가를 꿈꾸는 모습. 6인 1실 기숙사에 책상따위는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만화가라는 꿈을 잃지 않는다는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굶어죽을 각오 없이'라는 말이 나오는건 저자가 한국에서도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했기 때문인듯하다. 6형제의 막내라고 하는데 얼핏 가정사가 불행했다는 눈치를  준다. 형과 함께 군대 휴가 맞춰 나와서 같이 노가다를 했다고 하니..대학을 갈 때도 '한국에서 가장 학비가 싼 미대'라서 간 것이라 한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어서 인지 그저 바라는  것을 향해 거침없이 몸을 던진다.

일어 배울 돈이 없자 자원봉사자를 찾아가 말을 배운다. 마치 공부로 성공한 10대의 '이렇게 공부하면 성공한다'류의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든건 이런 부분 때문이었다. 일본은 더치페이 문화라서 길거리 헌팅으로 돈도 적게 들이고 일본사람과 대화하며 일본어를 배울수 있다는 류의 이야기. 이 부분은 좀 어이가 없기도 했었다. 정말 여자가 좋아서 헌팅한줄 알았더니 단지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라니..

일본에서 정말 만화가로 데뷔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좋은 책.

그냥 일반적인 사람이 봐도 별 4개 정도는 될 것 같다. 직접 체험한 생생한 일본인 친구들과의 에피소드라던지 일본만화업계 이야기, 어시스던트 시스템등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청소년들이 한번쯤 읽어봐도 좋을 듯 하다. 요즘 청소년을 위해 출간되는 성공담 이야기란게 대부분 아이비리그 진학한 수재들이야기 혹은 유엔사무총장의 성장기 처럼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하고 좋아보이는 위치에 이른 사람들 이야기인데 이 책은 학력 국적 모두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남이 뭐라고 할지라도. 저자는 한국에서 '만화는 천한것'이란 소리를 들었다한다)승부해 좋은 결과를 거둔 모습을 그려줘서 신선했다.  책상에 앉아서 거둔 성공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혀서 얻은 성공이란 것도 아이들에게 자극이 되지 않을까 싶고.

무엇보다 정말 좋아하는 걸 향해 달려나가는 게 뭔지 보여줘서 그게 좋았다. 그게 위태롭고 아슬아슬해 보이기도 했다. 보통 사람은 '대안'이란 걸 생각해놓고 살지 않는가. 이 사람은 대안이 없다. 비자기간 만료되기 전에 데뷔하는 걸 목표로 삼고 출국하는 날 새벽까지 만화를 그리고 있다. 보는 사람은 위태롭지만 그런 절박함이 에너지가 되어서 나오는가 보다. 어쨋든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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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7-03-30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소년들이 한번쯤 읽어봐도 좋을 책이란 말에 공감해요.

moonnight 2007-03-30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대단합니다. 어쨌든 해피엔딩. 이라니 다행이네요. 대안이 없다는 게 에너지가 되는 사람. 저도 꼭 읽어봐야겠어요. 그런 절박함이 없는 평온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게 왠지 미안해집니다.

LAYLA 2007-04-01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 역시 읽으셨군요 ^.^

달밤님 어쨌든. 해피엔딩이니까요..작가 스스로도 운이 90%라고 하더군요 ^^
 
마녀와 성녀 - 마성과 성성을 키워드로 한 중근세 유럽 여성사
아케가미 슈운이치 지음, 김성기 옮김 / 창해 / 2005년 11월
품절


악마학이 탄생한 시기는 농촌사회가 변모하는 시대였다. 인구의 증가와 화폐 경제의발전으로 농촌 내부의 계층이 분화되고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어 사람들이 위기의식에 사로잡혔다. 농민들이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아웃사이더인 여성들이었다.-53쪽

농촌은 농촌대로 인구 증가, 경제의 변모, 내부의 계층 분화로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모두가 심각한 위기에 사로잡혔다. 중세 농촌에 존재했던 상부상조의 정신은 과거의 것이 되어, 가난한 자는 부자를 증오하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저주했다. 그런 사오항에서 어떤 재앙이 발생하면 그 책임을 지울 속죄양을 찾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그런 연유로 '마녀'라는 딱지가 붙은 이들은, 건전한 공동체 의식이 자리잡았던 지난날에 사람들의 자선 대상이기도 했던 가난한 여성들이었다. -59쪽

중세에 남성이 여장을 하면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저버리는 행위라며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악마가 종종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신해 남성을 유괴한다는 설도 여장을 하는 남성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즉, 남자가 여자로 바뀌는 것은 추락이자 치욕이었다.
그렇다면 여성이 남장을 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적으로는 보통 남자에게만 허락된 높은 수준의 영성을 얻기 위해 남자와 똑같은 외모로 똑같이 생활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결혼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과거의 간통을 뉘우치는 의미에서 남자 복장을 하였다.
...
실제로 남장한 여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명확치 않다. 하지만 여성, 특히 성녀의 남장과 그 이미지가 커다란 의미를 지녔던 시기는 중세 초기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중세 초기의 수녀가 이상으로 여긴 존재는 남성의 미덕을 지닌 '무성의 성녀'였기 때문이다.-74쪽

그녀들은 교회 당국자로부터 좀더 먹으라는 주의를 받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남자의 육체는 더러워도 간단히 정화할 수 있지만, 여자의 육체는 결코 정화할 수 없다. 하지만 몸을 정화하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믿음에 따라 자신의 몸을 내맡긴 것이다. 따라서 그녀들은 남자들이 흔히 행하는 한정된 단식이 아닌 끝없는 단식을 감행했거, 그 대부분은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녀들은 남성을 거치지 않는 영혼의 구원을 추가하며 거식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녀들이 토대로 삼은 가치관은 여전히남성의 그것이었다. 남성에게 종속된 여성, 그 뿌리부터 오염된 여성의 육체. 이런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거식증에 걸렸던 것이다.
...오늘날의 젊은 여성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거식증과 마찬가지로 성녀들의 거식증에는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 있다고 한다. 현대의 거식증이 뒤틀린 모자 관계나 '살찐 여자는 추하다'는 남성의 사고방식때문이라면 과거의 거식증은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 사회에 의한 여성의 억압이 그 배경이라는 것이다.-88쪽

마리아는 특별한 여성이다. 왜냐하면 그녀만이 '처녀이자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처녀이면서 어머니가 되기란, 보통의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평생 처녀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마리아가 종교생활의 모델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가 영원한 '처녀'였기 때문이다. 당초에는 그 모성보다 처녀성에 이목이 모아졌다. 이브가 처녀성의 상실로 낙원에서 추방되었다면 마리아는 그 처녀성을 보존해 승리를 획득하는 것으로, 그녀는 완전무결한 존재인 것이다.
,,,
성스러운 처녀는 남성의 저주를 면하게 된 것이다. -121쪽

중세 후기는 '가족 시대'다. 이탈리아에서 먼저 시작되기는 했지만, 어느 나라든 핵가족화한 가정이 사회의 기본 구성원으로 차츰 권리를 주장하게 되었다.
핵가족화와 그 가정생활을 중시하는 풍조가 확산되자, 인문주의자와 크리스트교 지도자들, 그리고 예술가들은 가족과 더불어 부부와 결혼, 더 나아가 어머니에 대해 새로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게 된다. 이탈리아의 한 인문주의자는 '가족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제도로 미덕이나 애국심의 육성은 물론이며 교육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이 시대의 여성을 생각할 때 특히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과거 천 년에 걸쳐 어머니라는 위치와 성성은 부합되지 ㅇ낳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마침내 이 시점에 이르러 어머니라는 위치가 성성의 길로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전까지는 처녀야말로 성성에 이르는 유일한 수단이고, 그 다음이 과부고, 마지막이 아내였다. 아내 중에서도 어머니는 날마다 성행위를 하는 존재로밖에 인식하지 않았다. 성모 마리아의 모성도 그 처녀성의 그늘에 가려 중세 후반까지는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다. 그러나 13세기 이후에는 결혼한 여성, 어머니인 여성이 점차 성자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142쪽

중세에는 여성이 도시에서 정치에 참여하는 등, 관리직은 될 수 ㅇ벗었지만 상당한 권리를 지니고 있었다. 여성들은 길드나 신심회에 가입했고, 양친이나 남편의 유산을 상속받았으며, 자기 재산을 소유했다. 또한 금전 대차 계약을 체결.서약하거나 소송을 걸 수도 있었다.
단, 그것은 여성이 '가정'에 소속된 경우에 한해서였다. 여성은 결혼해야만 시민으로서 도시의 보호를 받았다. 중세 도시는 원래 가정 및 가족 연합체였기 때문이다. 가정은 징세의 단위이자 도시 방어를 위한 인력 공출의 단위였다.
도시의 각 가정은 시민으로 서약하고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은 남성 가장이 지배하고 보호한다. 그리고 그 가정의 구성원인 처자식은 일정한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도 가정에 소속되면 '시민'으로 불리며 다양한 권리를 누린다. 또한 그녀들이 가장이 되면 완전힌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에는 이와 같은 여성의 권리가 사라진다. 중세 후기에 도시에서 일종의 '민주혁명'이 일어나면서 도시의 단위가 가정이 아닌'개인'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혁명으로 그동안 권리를 부여받지 못했던 하류층 남성에게는 권리가 주어지지만, 여성의 권리는 줄어들게 된다.-178쪽

도시의 여성들은 상당히 다양한 일에 종사했다. ..여성들은 거의 모든 경제 분야에 참여하고 있었다..여성이 할 수 없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중세후기에는 여성의 직업 선택의 폭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4세기 피렌체의 인문주의자 프란체스코 다 바르베리노는 거의 저서 <여성의 태도와 습관>에서 여성의 직업에 대한 위험성을 언급했다. 그는 여성들이 모든 직업에서 손님을 속인다고 했다. 따라서 여성은 장인이나 가장으로는 부적당하므로 임금노동을 시키는 데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는 남성의 가부장적 권력 구조가 노동계까지 침투해있던 시대다. 그런 상황에서 독립적인 여성 길드는 남편이나 길드의 장인, 도시 당국자가 지닌 남성의 권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17.18세기가 되자 도시의 여성 노동자들은 대부분 직물업에 종사하거나 상류층의 하녀로 일하게 된다.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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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와 비밀의 부채 1
리사 시 지음, 양선아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12월
구판절판


시댁에서는 그들의 발 모형을 보내왔다. 우리는 남편들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키가 큰지, 얼굴에 마마자국이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남편들의 발 크기만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는 어린 처녀들이었고 그 또래 처녀들처럼 충분히 낭만적이었다. 우리는 발 모양을 보고 장래 남편들에 대해 온갖 상상을 했다.-175쪽

야오족 사람들이 딸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은 다 거짓이었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나 또한 한 여인의 딸이었고 내 딸의 어미이기도 하니까.
그들의 말대로 딸들은 쓸모없을지도 모른다. 딸들은 웃자란 가지처럼 거추장스럽고, 쓸데없는 걱정거리이며, 다른 가족을 위해 기르는 자식일지도 모른다.
많은 어머니들은 주문을 걸듯 그렇게 독한 말을 스스로에게 되풀이한다. 딸을 위해 어떤 감정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사랑은 물론 동정, 가여움. 희생, 귀여움 등등의 그 어떤 감정도 배제하려 한다. 될 수 있드면 독하고 쌀쌀맞은 어미로 남기를 원한다. 그래야 멀리 남의 집으로 시집간 딸이 더 이상 친정 생각을 하며 눈물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아무리 사랑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친정식구들은 딸을 사랑하고 아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야 누슈로 쓴 여자의 은밀한 편지에 "나는 아버지 손 안의 진주였다" 같은 구절이 왜 그렇게 자주 등장하겠는가?
어쩌면 부모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애써 사랑하는 딸을 외면하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 딸을 구박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다. 친정 부모들의 가슴 아픈 구박은 사랑을 빼앗기는 것이 두려워 사랑을 주지 않으려는 연약한 몸부림에 불과할 뿐이다.-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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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 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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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 아는 문장 하나가 있어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에에 그러니까....인간은 자신의 힘에 관한 지식을 획득해서 이들 힘을 사회적 힘으로 조직하고, 그러한 사회적 힘을 더이상 정치적 힘의 형태로 자신과 분리시키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해방을 실현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어쩐지 콧날이 시큰해지더니 자기도 모르게 눈 속이 뜨거워졌지요. 갑자기 그때 당신 생각이 났을까요. 그래그래,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고. 편지라도 써야 하는데. 나는 그에게 조용히 물었습니다.
그게 누구의 책인가요?
맑스라는 털보아저씨의 책입니다. 이때는 그가 청년으로 불리던 시기였지만요. 우리도 여기서 이제 겨우 시작이니까.
나는 얼른 붉어진 눈을 감추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최루탄 때문에 언제나 학교에 갈 때마다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을 가리고도 눈두덩이 부어오를 정도로 울고 나오면서 그건 아무런 감정이 없는 상처 같은 것이었는데, 역시 사람의 말은 위대해요. 물론 나는 그 딱딱한 번역투의 문장이 시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건 당신이 사용하던 말투였기 때문이기도 해요.-18쪽

아줌마가 은결이를 덥석 안아다가 내 팔 사이에 넣어주었고 나는 뽀뽀를 해주었습니다. 은결이는 그 무렵에 엄마는 물론이고 맘마. 찌찌, 빠이빠이, 이뻐, 미워 따위의 간단한 낱말들을 한마디씩 종알거렸는데 내가 입을 맞추자마자 고개를 돌려 빰으로 내 입술을 뿌리치면서 이래요
엄마 미워
나는 한동안 은결이를 꼭 안고 서성였어요. 따뜻한 작은 가슴의 통통대는 박동이 느껴지면서 이것이 내 몸안에 있을 적의 일들이 생각났어요.-23쪽

오현우씨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저 그냥.....친구인데요.
그는 빙긋 웃었어요.
애인입니까?
저어....그. 그래요.
관청이라든가 군에서 여자친구란 성립이 안되는 걸 잘 알아요. 그들에게는 아내면 아내, 애인이면 애인 외에는 정답이 따로 없으니까요. 아무개 애인이 면회 왔다더라는 말은 웃음 섞여 말이 되어도 여자친구?라는 알쏭달쏭한 말은 없는 셈이지요.-30쪽

공연히 그러지들 마라, 느이들 나 포섭할려구 그러는 거 모를 줄 알았니?
진작에 포섭된 게 아니고예? 저두 오선배 얘긴 많이 들었심더.
나는 갑자기 짜증이 났다.
뭐야아, 그딴 소리가 어딨어? 오니 아니 내 앞에서 허튼 소리 하지 말어. 야 송가야, 니가 입 싸게 놀렸어?
송영태나 최미경도 내 돌변한 태도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송이 연신 손을 내저으며 재빠르게 설명했다.
아냐, 그건 오해야 윤희씨. 유신 때부터 지금까지 변혁운동의 모델들을 검토하다 보면 오선배 사건은 언제나 빠짐없이 거론이 되어 있어. 다만 여기서 모임을 가지게 되면서 윤희씨 얘기가 덧붙여진 거야.
제가 잘못했심더. 그렇다꼬 저희가 좋아하는 선배님들을 뒷전에서 비양거리고 할 사람들은 아니라예. 그 반댑니더. 언니, 화 풀으소 고마.
나는 소주를 벌컷 들이켜고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송영태가 술이 깨버렸는지 말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말을 꺼냈다.
한형, 노여움을 풀어. 모두가 당하는 고통을 두고 냉소할 사람은 우리들 중에 아무도 없어. 미경이 후배가 가볍게 얘길 꺼낸 건 잘못이지만 이제 시작이라 워낙 니편 내편이 분명해서 그래. 서툴고 덕 익은 것두 이쁘잖아.-45쪽

한형, 날 어떻게 생각해?
보통 때 같으면 초전박살이라고 아예 그런 분위기를 잡지도 못하게 우악스런 욕이나 농담으로 입을 막았을 텐데 아까부터 그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 그냥 잔잔하게 웃는 표정을 짓자. 나는 공연히 차림표가 붙은 더러운 벽을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그래 어떻게 생각할 거 같니?
그랬더니 이 녀석이 갑자기 탁자를 세게 두드렸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
허, 기가 막혀서 이젠 성질까지 부리네 하는 얼굴로 쳇, 하는 입시늉을 하면서 나는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해 보였다.
너 고거 먹고 벌써 취했니?
우리가 만난 지 일년 거의 되어가지...
혼자서 입속으로 중얼중얼하더니 송영태가 불쑥 말했다.
나, 한형한테 정들었다.
점점 유행가조루 나올 거야? 것보다 한형소리 좀 뺄 수 없어?
너 좋아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정말 그 친구라도 없었으면 진학하고 나서 얼마나 생소하고 심드렁한 시간이 되었을까를 생각했다. 나는 일부러 어긋나게 말해버렸다.
인마, 나두 널 좋아해 .하지만 너하구 그 이상은 절대루 안할 거니까 두 눈에 라이트 꺼라 응?
나 먼저 간다.
하더니 영태는 벌떡 일어나 계산하고 국밥집 밖으로 휭하니 나가버렸다.-99쪽

어깨동무를 하고 거리를 질주하다 위협사격에 쓰러지는 그런 순진무구한 장면말고 행정부 청사를 접수한 혁명위원회가 스스로의 의결기구를 무장으로 지키는 장면 따위는 이젠 없다. 아마 점점 그런 가능성은 사라져가리라. 끊임없는 토론과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설득과 뜨뜻미지근한 합의와 지루한 기다림 끝에 약간의 진전이 있거나 그것마저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될 거야. 그래 기껏 조합이 아니면 선거를 하게 되겠지. 엉망으로 헝클어진 실타래의 시초를 찾을 수도 없이 방금 놓쳐버린 실 끝이라도 잡게 되면 다행일 거야. 이 실끝을 붙잡고 씨름하다 보면 모두 어슷비슷해질걸. 다시는 출발점을 향하여 돌이킬 수도 없이. 제도를 부숴버리는 동안에 그것을 부수는 제도가 만들어지겠지. 누구나 언제든 투쟁하는 전사로 남아 있지는 않는다. 혁명위원회도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내는 아이를 낳거나 식량배급이 늦는다고 투덜대고 좀 일찍 들어올 수 없냐고 바가지를 긁고 생활비가 거덜이 났다고 하소연하고. 식구들은 모두들 끊임없이 먹어대고 마셔대고 싸우다가 성교도 하고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 새옷으로 갈아입고 출근하고 다시 토론해야 한다. 그가 출발했던 땅에서 이제는 아득한 미래로 날아간 하늘 사이에는 무한 천공이 입을 벌리고 있다. 혁명이라고. 그건 정지된 섬광이야. 오현우처럼 유혜되거나 그의 아우들같이 바리케이드 앞에서 연발사격에 쓰러지지 않는 한 그는 출퇴근하는 토론자로 기진맥진 살아가게 될 테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혁명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환멸에 치를 떨게 된다 할지라도 피부를 찌르는 듯한 전율로 나는 살아 있다고 중얼거리게 하는 사업. -109쪽

나는 어둡지만 눈에 익은 오솔길을 올라 집으로 돌아왔다. 내려올 때 켜두었던 형광등 불빛으로 방문이 하얗게 밝혀져 있다. 밖에서 보면 격자 창살이 더욱 선명했다. 누군가 저 방안에 있는 것 같고 내 발걸음 소리를 듣고 그림자와 함께 방문이 열릴 것만 같았다. 이제 와요? 하는 목소리와 그네의 어두운 실루엣이 툇마루 위로 나타날 것이다. 나는 신을 벅소 툇마루에 올라 방문을 열고는 안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다. 방안에 들어서지 않고 마루에 털퍼덕 주저앉아 봄밤을 수놓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봐, 별똥이 진다. 또 누가 세상을 떠나는가보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고즈넉하게 들려왔다. 어딘가 살아 있다 하더라도 같은 장소에서 함께 있었던 사라므이 부재는 거기 남은 한사람까지도 존재하지 않게 만든다. -126쪽

공안수든 시국사범이든 간첩조작사건이든 이른바 집시법 사건이든 가리지 않고 머릿속의 사상을 바꿀 것을 끈질기게 강요했다. 요즈음 뱃속을 관찰하는 투시기가 나온 것처럼 머리에다 대고 비추어보면 붉고 푸른 색깔이 판명되는 기계라도 발명해야 할 판이었다. 내가 빨갱이인지 퍼랭이인지는 나도 잘 몰랐다. 나는 이 땅에서 무력으로 양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일분 군부와 그에 붙어서 온갖 이권과 특혜를 누려온 독점자본을 반대했다. 유신시대와 오월의 학살을 겪으면서 나와 타자를 알게 되고 여러번의 좌절감에 시달린 젊은이들은 북쪽이 타자가 아니라는 너무도 뻔한 사실에 눈을 떴다. 육십년대에는 가지고만 있어도 사형이라던 문건들이 바다 밖에서 들어왔는데 숨을 죽이고 그런 자료들을 접하기 시작한 게 팔십년대 초반의 일이다. 동우가 그런 자료들을 모으고 내부 문건에 반영했던 것은 좌편향이었을까. 내가 줄곧 감옥에 있으면서 세상이 바뀌어갔던 길을 돌이켜보면 그런 따위는 차츰 보편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갔다. 세월은 저절로 균형을 잡아간다. 그것 봐라, 별일도 아니었잖아.-127쪽

그는 분명히 과학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환경공학 계통이어서 지혜가 있는 기계쟁이처럼 보였거든요. 사람의 일에 관한 잡지식이 제법 많은 듯했어요. 여기서의 쓰레기나 산업폐기물의 처리과정을 연구한다던가 그랬어요. 하지만 내가 그맘때의 한국에서 보았던 친구들처럼 급진적이진 않았어요.이야기를 조용조용 유머러스하게 진행하고 다분히 상식적이었습니다. 나는 소싯적부터 그런 남자를 처음 보았거든요. 물론 정서는 안정되어 있었고. 그는 어려서부터 중산층 집안에서 햇빛과 바람이 잘 드나드는 창가에 놓인 관엽식물처럼 파란없이 자란 게 분명해요. -223쪽

이선생은 셔츠바람에 가슴까지 올라오는 앞치마를 두르고 오븐 앞에서 씨름하고 있었어요.
뭘 하는 거예요?
내가 그의 등뒤로 다가서며 물었더니 그가 나를 가볍게 밀어냈어요. 어허, 여자가 부엌에 들어오면 안되는데....
반대말놀이 하는 건가요?
신유교라구 아시는지.
그는 나에게 식탁을 가리켰습니다
거기 앉으세요. 오늘 메뉴는.......참, 양고기 먹어봤어요?
그럼요, 향료와 양념을 많이 쳐야 할 텐데.
.....
나는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햄과 멜론을 곁들인 스페인풍의 전채도 ?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쌉싸름한 맛이 감도는 트로켄류의 화이트와인을 마셨는데 이선생이 한장의 잎을 돌돌 말아서 가느다란 실로 묶은 원뿔 모양의 담배를 주었어요. 한모금 빠니까 연기가 좀 독하기는 했지만 향긋하고 구수한 원래의 풀잎냄새가 나서 쌉쌀한 술맛과 잘 어울렸지요
이거 담배 맞죠?
터키 상점에서 팔아요. 파키스탄 거라구 그러던데
씨가보다 훨씬 토속적인데요
이런 광경이 영화장면에라두 보이면 나는 귀밑에 소름이 돋아서 딴청을 부릴걸. 생각해보면 그것두 과장이었어요. 시시한 멋 좀 부린들 어때. 내일이면 모든 조명과 장치를 표백시켜버리는 한낮의 태양이 뜰 텐데.
저 동네가 왜 좋죠?
나는 잎담배로 벽에 걸린 부처님을 지시했어요.
중생일체란 소리가 근사하고 폭력이 없잖소
세계를 단순히 해석하는 건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에요
그걸 누가 해석하는데. 사람들은 자기 사는 동안의 생을 통해서 계절에 의미를 붙이고 그러지요. 세상은 그 누구와 상관없이 저 혼자 있는 거요.-225쪽

유월이 되어 날씨가 변덕이 심해졌을 때 나는 몹시 앓았어요. 앍으면서도 나는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에 나는 주변에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벼락같이 병이 찾아와 탈진하도록 앓고 일어나곤 했거든요. 어린아이들은 한번씩 앓을 때마다 몸도 마음도 성숙해가는 법이지만 어른인 나는 어쩌면 노화와 쇠락으로 가는 게 아닌지.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봄비가 감미롭게 새싹을 키우는 것과 가을비가 땅속 깊은 뿌리를 든든히 해주는 것과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나는 마음속의 저 깊은 곳으로 더 아래로 내려갔으면 했어요.-230쪽

알코올을 조금 줄이세요. 식사를 빼먹지 말구요.
그래 알고 있어. 처음엔 난방비를 줄이려고 저녁마다 잘 때만 마셨는데 차츰 양이 늘어나는 거야. 그런데 그 남자친구 이야기 좀 해줄래요?
나도 아직 잘 몰라요. 나이는 마흔 셋, 이혼했고, 아들이 하나 있고.
오, 그건 관청 서류에 나오는 기록 아냐?
나는 맥없이 웃었습니다.
무슨 얘기를 해요?
내 느낌으로는 서로 호감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걸 마리가 어떻게 알아요?
그네는 주름잡힌 자기 콧장등을 검지로 콕콕 찍어 보였죠.
여기서 알지. 나는 깊은 밤 어둠속에서도 병 속에 보드카가 들었는지 쉬납스인지 꼬냑인지 다 알아요. 술처럼 사랑에는 남다른 향기가 있는거야.
마리는 슈테판이 요양원으로 가버린 뒤에 다른 남자가 없었어요?
왜......몇번 있었지. 가끔 만나던 평범한 의사도 있었고 가난한 연극 연출가도 있었고 마지막이 언제쯤이었는지 모르겠네.
그가 요양원에서 아직 살아 있었을 때의 일인가요?
물론이야. 그건 전혀 다른 거야. 유니는 지금 감옥의 남자를 생각하고 있군. 잠잘 때를 생각해봐. 온 밤내 같은 줄거리의 꿈을 꾸게 되지는 않아. 깨고 나면 몇 장면만 또렷하게 남곤 하지. 아무도 그 ?을 미리 예상할 수는 없어요. 생이 어떤 결말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것들이 서로 끼여들지 않고는 어떤 대목이 중요했는가를 모르고 죽게 될 거야.
카밀레차에 넣은 스카치 탓이었는지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졸음이 왔어요. 마리가 내 이불깃을 여며주었지요.
늘 같은 끔을 꿀 수도 없고 그것마저 전부가 아니야. 잘 자요.-231쪽

나는 그 남자와 여러번 잤어요. 그의 목소리와 까칠한 면도자리와 뻣뻣한 살갗을 기억해요. 그의 상식적이고 안정된 정서가 얼마나 편안했는지 몰라요. 그리고 따뜻하잖아요. 열정이 도대체 무슨 독감 따위인지 이제는 기억조차 없지만, 바람부는 날 어느 언덕 위에서 오리나무 같은 데 기대어 서면 좋잖아요. 작별할 때 한맺힌 핏물도 내게 덮어씌우지 않고 조용히 한걸음 물러서는 그림자같이요. 아버지의 감 이야기에 나오는 색시처럼 내색 않고 같은 선에 서서 넉넉한 시선으로 한 방향을 바라보아주는 아낙이 되고 싶었지요. 그렇지만 헤어지진 말고 오랜 같이 살 수 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을.-249쪽

나는 언젠가 친구를 비판하면서, 우리는 그 시대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 라고 절망적으로 외쳤던 적이 있어요. 그렇지만 요새 와서 나는 이 말을 수정할 작정입니다. 지상에서 어느 때에나 사람들은 사랑을 했어요. 세상에 드러나는 모양이 시대마다 다르기는 했어도. 물살에 씻기어 닳아지고 부서지는 돌멩이처럼 일상에 시달리는 벗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회한에 잠기지 않기를 바래요. 지금 그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풍요로운 인생의 깊이를 존중하라고. 그리고 더욱 성숙한 사랑으로 지난날과 미래를 껴안게 될 것을 기대하구 있어요.-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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