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세계문학 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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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전, 학교를 통해서는 보편적 교육을 실현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며 <학교없는 사회>를 쓴 이반 일리치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한때 사제였던 철학자 이반 일리치와 톨스토의 이반 일리치가 동일인물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동일인물은 아니다. 톨스토이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쓰기 시작한 것이 1882년이고,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20세기 최고의 지성이라고 불리었으니 시기적으로도 당연히 동일 인물일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동명이인이라는 것 만으로 톨스토이가 쓴 이반 일리치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제목이 말하듯 이 책은 이반 일리치라는 인물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동료들이 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 가족이 바라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 그리고 이반 일리치가 느끼는 그 자신의 죽음과 죽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인에 관한 이야기다.

동료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편으로 죽은자가 자신이 아님에 안도하며, 재판관이었던 그의 뒷자리를 누가 잇는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나름 기대를 걸기도 하고, 그날밤 카드놀이 참석여부 따위에 신경을 집중한다. 그런가 하면 이반 일리치의 아내는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얼마나 더 지급받을 수 있는지에 촉각을 세웠다. 이반 일리치는 동료나 가족의 이러한 모습을 미리 예견하고, 지레짐작하면서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집착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반 일리치 역시 누군가의 죽음을 대할 때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맞는 주변인의 죽음 앞에 나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애통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장 나에게는 직접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불행인양 안도한 적은 없었던가. 오롯이 그의 죽음이 슬프기만 했던 그런 기억은 너무도 멀다. 아마도 어린시절 맞았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는 나에게 미칠 영향따위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아프기만 했던 죽음이었다면 그에비해 그후의 몇번 맞이한 지인들의 죽음은 무작정 슬프기만 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주검앞에서 내 개인적인 안녕을 먼저 생각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면서 매번 내 자신을 추스리기에 바빴다.

톨스토이가 인간과 어떻게 사는가에 집중했던 것은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인것이 아닐까.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 자신을 모델로 했던 레빈은 형의 죽음 앞에 고독과 함께 두려움을 느낀다. 레빈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오히려 몇번의 자살 시도를 통해 벗어나고자 했다.

 

이 책의 번역을 맡은 이강은 교수는 이반 일리치가 죽음의 고통으로 소리내어 울고 싶고, 누군가가 그런 그를 어린아이처럼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같이 울어주는 것만을 바라는 대목에서 이반 일리치와 함께 울었다고 했다. 나역시 그 대목에서 그럴수밖에 없었는데, 누구나 다 혼자일 수 밖에 없다 것을 삶 속에서 이미 절절히 체험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진심어린 위로가 절실한 것이 아닐까.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그 죽음은 주변인이 아무리 많다해도, 결국 나혼자 가는 길이다. 내 고통을 오롯이 느껴주지 않는다 해서 그다지 슬퍼할 것도, 억울해 할 것도, 분해할 것도 없다. 나역시 타인의 죽음을 온전히 내 고통으로 느끼지 못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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