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만세(靑春萬歲)
우리 아파트에 입주자 대표 회장 선거가 있었다. 후보자 3명 중 60대 2명인데 그 중 한 분은 전직 회장이었고, 나머지 한 분은 40대가 출마했다. 은퇴한 이후로는, 나하고 관련이 없는 일이라 생각되는 일들에는 거의 관심을 끊었기에 무심코 지나다녔다.
그런데 우리 할매가 선거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무조건 젊은 사람을 찍으라고 권했다. 그런데 자기는 아는 사람으로부터 부탁을 받아서 전직 회장을 찍겠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100세 시대라는데 40대는 청춘이다. 너무 젊어서 경험이 없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발언권은 있지만 투표권이 없다. 우리집의 의사결정권은 모두 할매가 가지고 있는데, 할매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다 들어 보고, 자기 혼자서, 자기 마음대로 결정한다.
입주 10년이 갓 넘은 우리 아파트는 그 동안 쭉 은퇴한 60대들이 회장직을 맡아왔다. 이력들이 찬란했다. 나도 이전에 현직에 있으면서 작은 아파트 단지의 회장을 맡은 적이 있는데 신축 아파트여서 인지 할 일도 많고, 말도 많고 해서 재임 기간 동안 입에서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임기를 마치고는 후임도 결정되기 전에 회장직을 던져버린 경험이 있다.
나는, 내가 그토록 부담스러워 하던 회장직을 서로 하겠다는 것을 보고 좀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그들이 아니니까 그 속을 알 수는 없다. 그들의 찬란한 경력들과 우리 아파트가 대단지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의 마음속에는 회장이란 타이틀을 달고 어스대면서 어깨 힘도 좀 주고 싶었을 것 같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아니면 내가 모르는 어떤 다른 좋은 점이 더 있을 지도 모르겠고,
왜 그런 생각을 하냐 하면, 그들이 집권하는 10년의 기간 동안 입주자를 위해서 특별히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회장이 바뀔 때 마다 기껏 한다는 일이 재활용 폐지 배출일 변경이다. 수요일, 일요일이었던 배출일을 월요일, 목요일로 바꿨다가, 다시 또 수요일, 일요일로 바꾸고, 또 바꾸고 했다. 회장이 바뀔 때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 있는 일인지? 조사모삼(朝四暮三)이나 조삼모사(朝三暮四)나 무슨 차이가 있는지? 일주일에 두 번 업체에서 폐지를 수거하기 때문에 한 동에 큰 부대 두 개를 놓아두었지만 수거일이 가까워지면 부대가 넘쳐서 보기에
좀 지저분하기는 했다.
한데,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안 되니 10년 동안 똑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회장이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폐지 배출일이 바뀐다. 안내문까지 써 붙여 가면서 입주자를 귀찮게 한다. ‘뭐 그까짓 것’ 하면 그만이지만 매번 그러니까 슬슬 짜증이 난다.
아니 이넘의 동대표들은 입주자들 입장에서, 입주자들 편하게 일 처리할 생각은 안 하고, 모여서 한다는 일이, 저거 마음에 안 든다고, 저거 보기 좋아라고 입주자들을 귀찮게 하다니. 우리가 어딘가에서 많이 들어 본 ‘행정 편의 위주’, ‘권위적인 일 처리’ 등이 생각나 ‘한 번만 더 바꾸면 관리실에 쳐들어가 한 번 따져?’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뭐 어쨌든, 이외로(?) 투표 결과 40대의 젊은 사람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우리 할매는 아쉬워하며 또 걱정이다. “젊은 사람이 경험도 많지 않을 텐데 잘 할 수 있을까?” “야이 사람아, 씰데 없는 걱정을...... 산도 무너진다는데 운동하러 산에는 어찌 다니노?”
어릴 적 시골에서는 나이 40대면 사랑방을 차지하고 장죽 물고 뻐끔뻐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에헴 에헴’하고 노인 행세 했다. 자고로 공자 말씀이 안 그러더
나 ‘四十而不惑(사십이불혹)’이라고. 경험이 부족하다니......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은 “After a man reaches forty, he is responsible for his face.”(남자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
다.)라고 했고,
어린 시절이었지만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쿠바 봉쇄 뉴스를 어른들로부터 전해 듣고 쾌감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제3차 세계대전이 발생할 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하려는 기도를 사전에 원천 차단하여 소련을 굴복시킨 그는, 그때 40대였다. 그런데 경험이 부족하다고?
그런데 우리의 젊은 회장님, 취임하자마자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정문 한 옆에 커다랗게 현수막을 내 걸더니 전 입주민이 희망하던 일들에 착수하였고 그 성과가 즉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 할매가 좋아하며 얘기한다. “당신 말이 맞았어, 역시 일은 젊은 사람이 잘 하네”
‘그럼, 그럼. 젊은 사람들의 사고가 훨씬 유연하고 발상이 기발하잖아.’ 으쓱 해 본다. 그런데 오늘이 폐지 배출일이라 운동 가는 길에 박스 등을 들고 재활용 장으로 향했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이럴 수가? 폐지를 담는 부대가 두 개에서 다섯 개로 늘어나 있다. 그걸로 충분할 것 같다. 날짜 정하지 않고 입주자들 편할 때 아무 때나 버려도 지저분할 것 같지 않다. 자세히 보니 온 벽에 붙어있던 폐지 배출일 안내문도 싹 사라졌다.
현직에 있을 때는 직원들에게 항상 ‘고정관념을 버려라’, ‘유연한 사고를 가져라’ 하면서 내 자신, 누구보다 유연한 사고를 가졌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이건 내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완전히 KO패다.
와우! 십 년을 넘게 입주자들을 귀찮게 했던 폐지 배출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다니, 역시 사고의 전환이 필요했던 것이다. 젊은 회장님, 초심을 잃지 마세요. 오늘까지는, 청춘만세(靑春萬歲)다.
(이 글은 절대 노인을 비하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님을 명백하게 밝혀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