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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 그리고 사물.세계.사람
조경란 지음, 노준구 그림 / 톨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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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만나는 계기는 참 다양하다. 일전에 참가한 어느 독서 모임에서 리뷰 쓰기의 고충을 토로하던 참에, 동료가 조경란 작가의 <백화점>을 인용하면서 아무도 내가 쓰는 리뷰에 관심 두지 않을 거라는 말에 이 책이 읽고 싶어졌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나중에 책에서 직접 찾아보니 원래의 그것과는 많이 달라지만. 그런데 문득 여성작가가 아닌 남성작가가 똑같은 제목으로 책을 썼다면 어떨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이 들었다.

<백화점>은 철저하게 여성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쇼핑 공간 ‘백화점’의 생태보고서 양식을 취한다. 그런데 한 꺼풀 벗겨 놓고 보면, 백화점이라는 특수 공간을 빙자한 작가 노트가 아닌가 싶다. 물론 조경란 작가가 열심히 발품을 팔아 백화점이라는 공간에서 취급하는 다양한 상품군, 백화점의 역사 그리고 자전적 이야기를 하다가도 다시 백화점 공간으로 돌아오는 회귀도 빼먹지 않는다.

백화점은 확실히 기존의 파사주 같은 상가에서 진화한 근대적 공간이다. 백화점은 철저하게 고객의 편리를 위해 지상에 재현된 쇼핑을 위한 장소다. 고객을 위한 동선 구성에서부터 시작해서, 쾌적한 쇼핑을 위해 설계된 널찍한 공간 배치, 여성을 에스코트해 따라온 남성을 위해 배치된 적당히 불편한 의자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계산된 인공의 향취를 풍긴다. 이런 디테일을 남자 작가에게 기대할 수가 있을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말하는 슈어홀릭에 빠진 여성 고객이나 가짓수를 헤아릴 수 없는 그 다양한 잇백의 나열은 또 어떤가. 에코가 말하는 나열을 통한 특정한 지식의 외연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백화점>을 통해 개인적으로 배운 것이 많다. 확실히 목적 구매를 하는 남성에 비해, 발견-필요-구매의 진짜 ‘쇼핑’을 즐기는 여성의 차이는 그야말로 지구와 화성 간의 거리만큼이나 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작가가 백화점 타령만을 하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아련한 옛 추억을 구수하게 연상시키는 어머니가 털실로 직접 떠주신 스웨터, 무릎과 팔꿈치는 기워가며 대대로 물려 입었던 헌 옷의 기억을 주술처럼 불러일으킨다.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를 읽으면서 떠오른 의문에 대해서도 호탕한 방식으로 궁금증을 해결해준다. 과연 소비라는 행위를 통한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담보하는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은 과연 인간의 본성일까? 갖고 싶은 것을 다 살 수 있는 게 행복이라는 등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갖고 싶은 것을 살 수 없는 형편이라면 행복하지 않은 것이라고 작가는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한다(177~178쪽). 다른 부분은 몰라도 이 부분에서는 정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기 중의 장기인 기호학에서 다루는 시니피앙의 예는 물론이고, 독일 사회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게오르크 짐멜은 물론이고 쇼핑과 소비의 미학에 연관되는 주제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작가의 노련미가 참 일품이다. 백화점이라는 소비 공간에 대한 진중한 고찰은 물론이거니와, 한 때 책에 대한 욕심으로 책을 후무릴 계획까지 세웠던 책쟁이의 심오한 내공이 느껴졌다. 문구류에 대한 집착에서는 동지애마저도 느꼈다. 처음 들렀던 긴자 이토야 문구점에서 미처 사지 못한 스탬프 생각에 입맛이 써지기도 했다.

가끔 주제가 본궤도에서 이탈하기도 하지만, 이 책이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정도는 무방하지 않나 싶다. 사실 작가의 어느 작품과 관련된 일련의 스캔들로 일부러 다른 책을 읽지 않았는데 이 책으로 해빙 무드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아마 그 기억마저도 희미해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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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1 - 군중십자군과 은자 피에르, 개정판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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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에 김태라는 필명으로 프레시안에 <십자군 이야기>를 연재하던 이가 있었다. 아주 재밌게 보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연재가 뚝 끊겨 버렸다. 언제 다시 연재가 재개되려나 싶었는데 연재는 재개되지 않았고 그렇게 6년이 흘렀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지난해인가 헌책방에 갔을 때, 이제는 절판되어 구할 수도 없는 <십자군 이야기> 단행본을 보고서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사지 않았다. 그리고 올해 초부터 프레시안에서 다시 <십자군 이야기>가 연재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새롭게 단장한 <십자군 이야기>와 다시 만날 수가 있었다.

십자군 원정의 외형은 중세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 수복이라는 서방 기독교 세계의 대의명분을 따르고 있지만, 전쟁터의 현실과 예루살렘 해방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조명해 보면 철저하게 개인의 욕망의 현현에 충실한 전쟁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통해 전통적 우방인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 세력을 무력화하고, 에너지 자원의 효율적 관리를 기도한 것과 너무나 유사한 현상이다.

우선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고대 지중해 시대를 풍미했던 로마역사부터 개관한다. 그런 후에,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원만하던 서방 기독교 세계와 동방 이슬람 세계의 관계에 설명한다. 그러다 로마 교황과 서방 귀족들이 획책한 계획으로 이슬람에 대한 “비인간화” 과정을 거쳐 이제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버린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 충돌의 원형을 재현한다. 종교 정치 지도자들에게 대중에게 이교도 무슬림과의 평화로운 공존은 불가능하다는 정치, 종교적 선동을 서슴지 않는다. 이런 프로파간다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렇게 부시 행정부가 이끌었던 이라크 침공을 중세 십자군 원정에 비유하는 작가의 재치는 놀랍기만 하다. 하나님의 계시로 시작했다는 두 전쟁이 어쩌면 그렇게 유사하지 모르겠다. 현재의 이라크 전쟁이 중동산 석유 에너지 자원의 안정적인 확보와 중동에서 미국의 패권유지라는 차원에서 진행되었다면, 중세의 십자군 원정은 교황권 강화와 서방 세계에 내재한 모순의 해결이 주된 이유였던 것 같다.

만치케르트 회전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에게 대패하면서 제국의 중추인 아나톨리아를 상실한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서방 가톨릭과의 오랜 갈등을 접고 백척간두의 위기에 빠진 제국을 구하기 위해 가톨릭 교황에게 어쩔 수 없이 구원을 요청한다. 부시로 희화화된 당나귀를 타고 등장한 은자 피에르는 군중을 선동해서 예루살렘 회복을 주장한다. 이에 당시 교황이었던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 종교회의로 화답하여 마침내 십자군 원정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성도 예루살렘 탈환 작전 중에 죽은 이들은 모든 죄가 사면된다는 교황의 선언에 종교적 맹신과 광기로 똘똘 뭉친 군중십자군과 장자상속이 주류를 이루던 서방세계에서 차남을 중심으로 한 기사계급이 이 대원정에 가담하면서 역사의 수레바퀴는 무서운 속도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보급을 도외시한 당시 군중 십자군은 진격 도상에 위치한 각 서방도시에서 약탈을 일삼고, 유대인들을 학살하면서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같은 기독교 세계인 헝가리와 불가리아에서 양민을 학살하고 도시를 약탈하는 만행을 저지른 군중십자군의 쇄도에 놀란 동장 비잔틴 제국의 바실레이오스는 순순히 그들을 셀주크투르크가 지배하고 있던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로 보내준다. 예루살렘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무조건 동방으로 향하던 군중십자군은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이 이끄는 정예 투르크군에게 대패를 당하고 전멸 당한다.

어중이떠중이로 규합된 군중십자군의 패배는 어쩌면 예상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뚜렷한 전략과 보급 체계 없이 무조건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종교적 광신으로 무장한 그들에게 성공을 기대하기란 정말 요원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와중에 애꿎은 유대인에 대한 박해의 역사가 시작됐다. 같은 서방세계에 살지만, 이교도로 부유한 상인들이었던 유대인은 물자부족과 보급에 시달리던 군중십자군의 좋은 목표가 되었다. 같은 기독교도도 약탈하고 학살을 자행하는 마당에, 유대인은 말할 것도 없었으리라.

공교롭게도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같은 제목의 <십자군 이야기>와 비슷한 시기에 출간이 되면서 다시 한 번 십자군 전쟁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늘고 있는 것 같다. 시오노 여사의 십자군 전쟁이 비교적 정통 해석에 따른 것이라면, 김태권 작가의 십자군 이야기는 현대적 상황을 대입한 퓨전 스타일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이중코드 기법을 통해 중세의 십자군 원정의 텍스트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여전히 진행 중인 이라크 전쟁의 부당함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작품에 곳곳에 직접 등장하는 작가의 아바타를 보면서, 독자가 타자로 주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기를 바란다는 인상을 받았다. 딱딱한 역사적 사실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조심스럽게 눙치는 작가의 언어유희는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이런 친근함이야말로 작가의 새로운 해석에 힘을 실어주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살라흐 앗 딘이 이끄는 무슬림 세력에 맞선 서방제국의 사자심왕 리처드의 대결이 펼쳐질, 이제 절반을 지난 십자군 오디세이의 순항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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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 진시황과 이사 - 고독한 권력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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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중국 역사에 많은 관심을 뒀었다. 그래서 읽지도 못하는 한자가 있는 <사기 열전>이며 진순신 선생이 쓴 <황하> 같은 역사서들을 아주 즐겨 읽었었다. 이번에 김태권 작가가 중국 문화의 원형을 이루는 한(漢)나라 시대를 아우르는 <한나라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자그마치 10권이나 되는 대작을 비아북과 출간한다고 해서 많은 기대를 했다. 어제 드디어 <한나라 이야기>와 만날 수가 있었다.

<한나라 이야기>의 김태권 작가를 알게 된 것은 2003년에 한동안 프레시안에 연재된 <십자군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당시 미국을 이끌던 부시를 당나귀에 비유하면서, 천 년 전의 십자군 전쟁을 부시와 공화당 매파가 주도한 이라크 전쟁에 비유하면서 풍자와 해학의 묘미를 보여주던 만화를 보는 재미가 쏠쏠치 않았다. 다만, 무슨 사정인지 시리즈를 매조지 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그 후 작가가 그리스와 라틴 고전을 공부한다는 뉴스를 접했었는데, 이번에는 서양이 아니라 동아시아 그중에서도 중국의 한나라에 대한 만화를 그린다고 해서 많은 기대를 품었다. 한제국의 세운 유방에 앞서,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나라 시대로 김태권 작가는 400년 한제국 역사를 그리는 대장정에 나선다.

역시 중국 최초의 제국을 건설한 진시황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작가에 의하면 <한나라 이야기>의 큰 줄거리는 태사공 선생의 <사기>와 한나라의 반고가 쓴 <한서>를 텍스트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중에서 진나라와 관련되어서는 <사기 열전>의 “이사 열전”이 주를 이룬다고 한다. 진나라가 아직 7개의 제후국 중의 하나였던 시절에 즉위한 진왕 정(훗날 진시황)이 본격적인 친정을 개시하면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작가는 초점을 맞춘다. 노애의 쿠데타, 문신후 여불위의 실각과 자살 등 굵직굵직한 당대의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정치세력의 신구교체를 다룬다. 이사라는 신예 정치세력을 바탕으로 해서 나머지 여섯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킨 진왕 정은, 황제(皇帝)라는 새로운 호칭을 개발해 내면서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동안 후세의 사가들에 의해 아방궁이라는 호화궁궐과 만리장성 같은 대토목 사업으로 백성을 피폐케 하고, 분서갱유라는 희대의 지식인 탄압정책으로 폭군으로 규정된 진시황에 대해 작가는 새로운 해석을 할 것을 주문한다. 진시황은 하루에 30킬로그램에 달하는 죽간을 직접 결제했을 정도로, 국정운영에 왕성한 정력을 자랑했는데 이게 어떻게 해서 폭군의 요건에 해당하느냐는 말이다. 그의 주장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모름지기 폭군이라 하면, 국정은 젖혀두고 주색으로 날을 세우지 않았던가.

전국시대를 주름잡았던 제자백가 사상 중에서 인의를 중시하는 유가사상보다 법치에 의한 국가의 지배를 숭상하는 법가사상을 국시로 삼았던 진시황과 그의 브레인들은 언제나 고래의 종법제도야말로 검증된 국가경영을 위한 이데올로기라는 주장에 넌더리를 낸다. 그래서 결국, 분서라는 후대에 악명을 남길 지식인 탄압과 일단의 방중술사를 처단한 ‘갱제생’이 갱유, 다시 말해 유생들에 대한 탄압으로 왜곡되면서 진시황에 대한 후세의 폭군 이미지가 낙인이 찍혀 버린다.

역시 비주얼을 중시하는 만화답게, 김태권 작가는 고대의 그림들이나 삽화, 화상석들을 참조해서 복식의 치밀한 고증을 보여준다. 작가가 팁을 준 대로, 만화를 보면서 밑에 달린 각주들을 읽다 보면 큰 맥을 잃을 수도 있으니 일단 한 번 스토리만 보고 나서 나중에 재독할 때 각주를 볼 것을 권장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각주, 미주에 신경을 쓰다 보면 이야기의 큰 흐름이 끊어지기 쉬운 게 사실이다.

아무래도 큰 줄기를 짚다 보니 디테일에 있어서 부족한 면이 눈에 띄었다. 예를 들어, 진시황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던 희대의 자객 형가 편에서 보면 형가가 진왕 정을 알현하기 위해 준비한 연나라 독항 땅과 진나라에서 망명한 장수 번어기의 목 등에 대한 부분 그리고 나중에 형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실명까지 해가면서 진왕의 곁에 접근한 축의 명수 고점리에 대한 이야기가 쏙 빠져 있지 않은가.

진시황의 죽음과 2세 황제 호해의 즉위에 관한 음모에 대한 해석도 흥미롭다. 태자인 부소 대신 호해를 황위로 올리자는 환관 조고와 이사의 밀담을 어떻게 태사공 선생이 알았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 사실은 세상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하지 않은가 말이다. 진왕 정의 출새에 얽힌 비밀 역시 마찬가지다. 원래 여불위의 무희였던 조희가 임신한 채,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서 볼모 살이를 하던 자초에게 시집을 가서 진왕 정을 낳았다는 설 역시 그 진위가 의심스럽다. 아마 예나 지금이나 남의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진제국에 처음으로 반기를 들었던 진승과 오광의 난에서 민중의 구호로 사용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더냐”라는 프로파간다는 <한나라 이야기> 2편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될 한고조 유방(劉邦)에게 아주 딱 들어맞는 말이 아닌가. 그야말로 재주는 진승과 오광이 부리고, 돈은 유방이 걷어간 셈이라고 할까. 개인적으로 김태권 작가가 그리는 역사의 재구성이 아주 흥미롭다. 계속해서 출간될 후속편들이 기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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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브램 스토커 지음, 홍연미 옮김, 찰스 키핑 그림 / 열림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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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읽었다. 부끄럽게도 재독(再讀)이 아니고, 처음으로 읽었다. 원전을 읽기에 앞서 오래전에 본 프랜시드 코폴라 감독 연출의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1992)에 대한 기억이 책을 읽는 동안 이미지의 형상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랑하는 애인을 “언데드”로 만든 불구대천의 원수 루마니아의 드라큘라 백작을 추격하는 흥미진진한 모험담이 아주 인상적인 영화였다. 언제나 그렇듯, 원작을 읽으면서 영화가 미처 다루지 못한 디테일과 문학 특유의 서사가 주는 흥취를 만끽할 수가 있었다. ‘아, 이래서 원전을 읽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당대에 최고의 배우로 이름을 날린 헨리 어빙의 매니저로도 유명한 브램 스토커는 동유럽에 떠돌던 뱀파이어 이야기를 근간으로 삼아 <드라큘라>라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겼다. 모든 뱀파이어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로 우리의 주인공이자 변호사 대리인인 조너선 하커가 찾아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해가지지 않는 제국 출신의 하커는 루마니아 모처에 사는 드라큘라 백작으로부터 런던의 토지 거래 건을 위탁받아 긴 여행 끝에 드라큘라 성에 도착한다.

소설의 초반부는 조너선 하커의 일기를 통해 주로 전개된다. 소설 <드라큘라>는 하커에 이어, 그의 애인으로 이 불가사의한 사건을 탁월하게 기록한 미나 머레이 양과 정신병리학자 존 수어드 박사의 일기와 편지 그리고 뱀파이어 사냥꾼이자 팀리더 반 헬싱 박사의 메모로 구성돼 있다. 한 명의 주인공이 아닌 다양한 캐릭터가 하나의 사건에 대해 다양한 시선을 보여주는 기록은 소설적 구성에 충실하면서도,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데 성공적으로 작동한다.

하커의 도움으로 고향인 트란실바니아를 탈출해서 영국 런던에 도착한 드라큘라 백작은 이 세계적인 대도시에서 수세기 동안 준비한 자신의 야심을 실현시키는데 전력한다. 한편, 드라큘라 성에 갇혀 있던 하커는 천신만고 끝에 탈출해서 애인이 기다리는 런던으로 돌아온다. 한편, 드라큘라 백작은 미나의 친구이자 퀸시 모리스, 존 수어드 그리고 아서 홈우드에게 차례로 청혼을 받은 루시 웨스튼라 양을 언데드로 만든다. 그리고 모두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미나마저 공격하자, 하커들은 드라큘라 백작이 런던에 비밀리에 만든 은신처를 파괴하고 드라큘라 백작의 고향인 트란실바니아까지 그를 추격한다.

오래전 어느 영화 리뷰에서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19세기말 귀족을 대신해서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갈등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분석을 읽은 기억이 난다. 인간의 피, 그중에서도 유독 어린아이와 여성의 피(노동자 계급)를 흡혈하는 드라큘라 백작은 물론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막대한 이윤을 추구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상징이라는 주장이 참신했다. 자본의 확장은 드라큘라 백작의 고향인 트란실바니아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시장을 찾아 세계도시 런던으로 흘러든다. 이런 자본의 무제한적 확장에 대항하는 반 헬싱 그룹의 선택은 연대와 적에 대한 철저한 연구다. 소설에서 미나가 드라큘라 백작에 대한 모든 자료를 정리해서 문서화하는 과정은 교육을 통한 노동자 계급의 자각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19세기말의 흐름에 발맞춰, 드라큘라 백작을 추격하는 장면에서 미나에 대한 최면술이 위력을 발휘하는 장면 역시 눈여겨 볼 대목이다. 드라큘라에게 조종당하는 미나를 역이용해서, 무의식의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자 드라큘라를 잡겠다는 반 헬싱 박사의 결심에서 마침내 자연을 정복한 인간 승리의 단면을 읽을 수가 있었다. 드라큘라와 조너선 하커 사이의 호모섹슈얼리티 가능성, 루시와 세 뱀파이어 여인을 죽인 말뚝과 드라큘라의 흡혈이 의미하는 성적 상징성, 억압된 빅토리아 시대 여성성에 대한 분석도 흥미로운 대입이다.

한편, 수어드 박사가 일하는 정신병동에 갇힌 렌필드라는 조연도 눈여겨볼 만하다. 자연계의 먹이사슬을 이용해서 기행을 일삼은 이 정신병자는 런던이라는 생태계에서 활개치는 드라큘라 백작의 충실한 하수인이자 영원불멸을 꿈꾸는 욕망의 포로다. 드라큘라가 상징하는 거대자본과 영원불멸이라는 두 가지 요소 앞에 그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동 그림 작가로 유명한 찰스 키핑이 그린 다양한 일러스트는 딱딱해 보이는 고전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의외로 키핑은 영화에서 게리 올드만이 연기한 사악한 드라큘라 백작을 유머스럽게 묘사한다. 반면, 드라큘라 백작의 희생양인 언데드와 루시는 관능적이면서도 치명적인 특징을 멋들어지게 잡아냈다. 개인적으로 드라큘라 백작에게 흡혈당해 언데드의 길에 들어선 미나의 이마가 어떻게 그려졌는가에 대한 궁금증은 키핑의 일러스트를 보는 순간 바로 풀렸다. 키핑의 이미지는 문학적 상상력을 제한하는 역기능보다, 상상력의 형상화라는 긍정적인 점에서 높은 평가를 하고 싶다.

처음 출판되었던 빅토리아 시대에 환영받지 못하던 <드라큘라>는 영화화되면서 비로소 영생을 얻었다. 복수에 불타는 남자들의 모험극으로, 혹은 다양한 성적 코드가 담긴 에로틱 판타지로 읽히던 고전 호러 소설의 환생이 마냥 반가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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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소설가의 고백 - 세상의 모든 지식을 읽고 쓰는 즐거움
움베르토 에코 지음, 박혜원 옮김 / 레드박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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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젊은 소설가가 있다. 올해 우리 나이로 80세, 이 소설가는 이제 겨우 데뷔 30년밖에 안 된 젊은 소설가란다. 그런데 그의 데뷔 작품이 바로 <장미의 이름>이다. 그렇다, 그 소설가는 바로 움베르토 에코다. 기호학자, 문학평론가, 철학자만으로는 부족해서 이제 아예 소설을 쓰는 작가로까지 나섰다. <젊은 소설가의 고백>은 모름지기 언젠가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작가 지망생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에세이집에 나오는 에코가 쓴 소설의 뒷이야기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는 다독가로 알려진 에코는 작품에 자신이 가진 지식의 총합을 모두 투영한 게 아닐까 하는 발칙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역설적이게도 소설과 현실을 냉정하게 구분하라는 당부를 하면서도, 독자가 허구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드는 영업 비밀을 슬쩍슬쩍 보여주기도 한다. 작가 못지않게 대단한 사람이 잘 훈련받은 독자다. 아무리 텍스트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스스로의 길을 개척한다고 하지만 다양한 기호로 무장한 에코의 텍스트는 정말 다양한 해석의 보고가 아닐 수 없다.

에코의 작품을 읽고, 현실 세계에서 답을 구하는 독자의 모습은 차라리 순례의 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의 현실성을 더하기 위해, 거리를 수없이 걸었다는 작가의 말에 저절로 존경심이 생겨난다. 나 같은 얼치기 독자에게는 그저 한 줄에 불과한 문장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생산되었는지 그 배경을 알게 되니 움베르토 에코가 새삼 다르게 보인다. 동시에 어떤 방식으로 작가의 성장과 무의식의 세계에 미친 영향이 어떻게 작품을 통해 구현되었는지에 대한 작가 나름의 분석도 인상적이었다.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쓰면서 14세기 이탈리아를 휩쓸었던 사회, 종교적 혼란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글을 읽으면서 장 자크 아노 감독이 만든 영화판 <장미의 이름> 그리고 오래 전에 읽은 오리지널 텍스트를 떠올렸다. 바로 다시 한 번 <장미의 이름>을 읽고 싶다는 욕망에 책을 찾았지만 도대체 어디에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어 포기했다. 섬광처럼 떠오른 아이디어가 이 거대한 이야기의 모티프로 작용했다는 말도 인상적이었다. 이런 아이디어에 살을 입히는 작업은 오로지 작가의 몫이다.

글쓰기에 대해서도 역시 고수다운 생각을 들려준다. 자기만족적인 글쓰기를 하는 이들도 없지 않겠지만, 본래의 목적은 어떤 방식으로든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문학 이론가답게 포스트모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중코드 기법(double coding)에 대한 텍스트 간의 상호작용에 대해서도 예리한 통찰력을 에코는 유감없이 보여준다. 자신의 텍스트가 어떻게 소수 엘리트 집단과 다수 대중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지, 문학에서 자주 통용되는 토포스(topos)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물론, 소설가의 핵심적인 ‘영업 비밀’은 자기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알려 줄 없다며 교묘하게 눙치고 넘어가기도 한다. 역시 고수답다.

소설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에 몰입하는 독자의 심리에 대해서 심리학자 뺨치는 실력으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 사실 가족이나 친구 중에 누가 죽었다고 해서, 비탄에 잠겨 따라 죽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오랜 격언처럼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마련이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괴테가 창조해낸 베르테르의 실연 때문에 주인공과 함께 유명을 달리한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에코는 자신이 완벽하게 창조해낸 허구의 공간이나 캐릭터에 몰입하는 독자의 심리를 내러티브의 합의에 따라 “가능 세계”로 받아들이고 허구 속에 자신을 투영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라는 냉정한 분석을 내놓는다. 이런 독자의 감정적 착각을 기호학적 분석과 수사학적 중요성을 예로 들어가며 풀이해내는 대가의 실력 앞에서 정말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나마 세 개의 챕터는 그나마 버겁게나마 쫓아갈 수가 있었지만, 네 번째 이야기인 <궁극의 리스트>에 등장하는 다양한 나열과 텍스트의 외연 확장에 대한 에코의 설명 앞에서 완전히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초반에 가볍게 시작한 에코 읽기는 후반으로 갈수록 힘들어졌고, 가까스로 완독한 자신이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역시 에코의 책은 한 번 읽기로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왕성하게 집필 활동을 하는 이 ‘젊은 소설가’의 신작 <프라하의 공동묘지>가 이번 가을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에코의 신작 소설과 만나기 전에 아직 읽지 못한 <푸코의 진자>와 <전날의 섬>은 새롭게 그리고 기존에 읽은 <장미의 이름>과 <바우돌리노>는 다시 한 번 읽고 싶다는 생각이 <젊은 소설가의 고백>을 들으면서 불쑥 들었다. 우리시대의 고전을 만들어 내고 있는 노작가에게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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