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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 그리고 사물.세계.사람
조경란 지음, 노준구 그림 / 톨 / 2011년 5월
평점 :
어떤 책을 만나는 계기는 참 다양하다. 일전에 참가한 어느 독서 모임에서 리뷰 쓰기의 고충을 토로하던 참에, 동료가 조경란 작가의 <백화점>을 인용하면서 아무도 내가 쓰는 리뷰에 관심 두지 않을 거라는 말에 이 책이 읽고 싶어졌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나중에 책에서 직접 찾아보니 원래의 그것과는 많이 달라지만. 그런데 문득 여성작가가 아닌 남성작가가 똑같은 제목으로 책을 썼다면 어떨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이 들었다.
<백화점>은 철저하게 여성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쇼핑 공간 ‘백화점’의 생태보고서 양식을 취한다. 그런데 한 꺼풀 벗겨 놓고 보면, 백화점이라는 특수 공간을 빙자한 작가 노트가 아닌가 싶다. 물론 조경란 작가가 열심히 발품을 팔아 백화점이라는 공간에서 취급하는 다양한 상품군, 백화점의 역사 그리고 자전적 이야기를 하다가도 다시 백화점 공간으로 돌아오는 회귀도 빼먹지 않는다.
백화점은 확실히 기존의 파사주 같은 상가에서 진화한 근대적 공간이다. 백화점은 철저하게 고객의 편리를 위해 지상에 재현된 쇼핑을 위한 장소다. 고객을 위한 동선 구성에서부터 시작해서, 쾌적한 쇼핑을 위해 설계된 널찍한 공간 배치, 여성을 에스코트해 따라온 남성을 위해 배치된 적당히 불편한 의자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계산된 인공의 향취를 풍긴다. 이런 디테일을 남자 작가에게 기대할 수가 있을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말하는 슈어홀릭에 빠진 여성 고객이나 가짓수를 헤아릴 수 없는 그 다양한 잇백의 나열은 또 어떤가. 에코가 말하는 나열을 통한 특정한 지식의 외연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백화점>을 통해 개인적으로 배운 것이 많다. 확실히 목적 구매를 하는 남성에 비해, 발견-필요-구매의 진짜 ‘쇼핑’을 즐기는 여성의 차이는 그야말로 지구와 화성 간의 거리만큼이나 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작가가 백화점 타령만을 하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아련한 옛 추억을 구수하게 연상시키는 어머니가 털실로 직접 떠주신 스웨터, 무릎과 팔꿈치는 기워가며 대대로 물려 입었던 헌 옷의 기억을 주술처럼 불러일으킨다.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를 읽으면서 떠오른 의문에 대해서도 호탕한 방식으로 궁금증을 해결해준다. 과연 소비라는 행위를 통한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담보하는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은 과연 인간의 본성일까? 갖고 싶은 것을 다 살 수 있는 게 행복이라는 등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갖고 싶은 것을 살 수 없는 형편이라면 행복하지 않은 것이라고 작가는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한다(177~178쪽). 다른 부분은 몰라도 이 부분에서는 정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기 중의 장기인 기호학에서 다루는 시니피앙의 예는 물론이고, 독일 사회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게오르크 짐멜은 물론이고 쇼핑과 소비의 미학에 연관되는 주제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작가의 노련미가 참 일품이다. 백화점이라는 소비 공간에 대한 진중한 고찰은 물론이거니와, 한 때 책에 대한 욕심으로 책을 후무릴 계획까지 세웠던 책쟁이의 심오한 내공이 느껴졌다. 문구류에 대한 집착에서는 동지애마저도 느꼈다. 처음 들렀던 긴자 이토야 문구점에서 미처 사지 못한 스탬프 생각에 입맛이 써지기도 했다.
가끔 주제가 본궤도에서 이탈하기도 하지만, 이 책이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정도는 무방하지 않나 싶다. 사실 작가의 어느 작품과 관련된 일련의 스캔들로 일부러 다른 책을 읽지 않았는데 이 책으로 해빙 무드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아마 그 기억마저도 희미해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