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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브램 스토커 지음, 홍연미 옮김, 찰스 키핑 그림 / 열림원 / 2011년 7월
평점 :
드디어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읽었다. 부끄럽게도 재독(再讀)이 아니고, 처음으로 읽었다. 원전을 읽기에 앞서 오래전에 본 프랜시드 코폴라 감독 연출의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1992)에 대한 기억이 책을 읽는 동안 이미지의 형상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랑하는 애인을 “언데드”로 만든 불구대천의 원수 루마니아의 드라큘라 백작을 추격하는 흥미진진한 모험담이 아주 인상적인 영화였다. 언제나 그렇듯, 원작을 읽으면서 영화가 미처 다루지 못한 디테일과 문학 특유의 서사가 주는 흥취를 만끽할 수가 있었다. ‘아, 이래서 원전을 읽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당대에 최고의 배우로 이름을 날린 헨리 어빙의 매니저로도 유명한 브램 스토커는 동유럽에 떠돌던 뱀파이어 이야기를 근간으로 삼아 <드라큘라>라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겼다. 모든 뱀파이어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로 우리의 주인공이자 변호사 대리인인 조너선 하커가 찾아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해가지지 않는 제국 출신의 하커는 루마니아 모처에 사는 드라큘라 백작으로부터 런던의 토지 거래 건을 위탁받아 긴 여행 끝에 드라큘라 성에 도착한다.
소설의 초반부는 조너선 하커의 일기를 통해 주로 전개된다. 소설 <드라큘라>는 하커에 이어, 그의 애인으로 이 불가사의한 사건을 탁월하게 기록한 미나 머레이 양과 정신병리학자 존 수어드 박사의 일기와 편지 그리고 뱀파이어 사냥꾼이자 팀리더 반 헬싱 박사의 메모로 구성돼 있다. 한 명의 주인공이 아닌 다양한 캐릭터가 하나의 사건에 대해 다양한 시선을 보여주는 기록은 소설적 구성에 충실하면서도,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데 성공적으로 작동한다.
하커의 도움으로 고향인 트란실바니아를 탈출해서 영국 런던에 도착한 드라큘라 백작은 이 세계적인 대도시에서 수세기 동안 준비한 자신의 야심을 실현시키는데 전력한다. 한편, 드라큘라 성에 갇혀 있던 하커는 천신만고 끝에 탈출해서 애인이 기다리는 런던으로 돌아온다. 한편, 드라큘라 백작은 미나의 친구이자 퀸시 모리스, 존 수어드 그리고 아서 홈우드에게 차례로 청혼을 받은 루시 웨스튼라 양을 언데드로 만든다. 그리고 모두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미나마저 공격하자, 하커들은 드라큘라 백작이 런던에 비밀리에 만든 은신처를 파괴하고 드라큘라 백작의 고향인 트란실바니아까지 그를 추격한다.
오래전 어느 영화 리뷰에서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19세기말 귀족을 대신해서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갈등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분석을 읽은 기억이 난다. 인간의 피, 그중에서도 유독 어린아이와 여성의 피(노동자 계급)를 흡혈하는 드라큘라 백작은 물론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막대한 이윤을 추구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상징이라는 주장이 참신했다. 자본의 확장은 드라큘라 백작의 고향인 트란실바니아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시장을 찾아 세계도시 런던으로 흘러든다. 이런 자본의 무제한적 확장에 대항하는 반 헬싱 그룹의 선택은 연대와 적에 대한 철저한 연구다. 소설에서 미나가 드라큘라 백작에 대한 모든 자료를 정리해서 문서화하는 과정은 교육을 통한 노동자 계급의 자각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19세기말의 흐름에 발맞춰, 드라큘라 백작을 추격하는 장면에서 미나에 대한 최면술이 위력을 발휘하는 장면 역시 눈여겨 볼 대목이다. 드라큘라에게 조종당하는 미나를 역이용해서, 무의식의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자 드라큘라를 잡겠다는 반 헬싱 박사의 결심에서 마침내 자연을 정복한 인간 승리의 단면을 읽을 수가 있었다. 드라큘라와 조너선 하커 사이의 호모섹슈얼리티 가능성, 루시와 세 뱀파이어 여인을 죽인 말뚝과 드라큘라의 흡혈이 의미하는 성적 상징성, 억압된 빅토리아 시대 여성성에 대한 분석도 흥미로운 대입이다.
한편, 수어드 박사가 일하는 정신병동에 갇힌 렌필드라는 조연도 눈여겨볼 만하다. 자연계의 먹이사슬을 이용해서 기행을 일삼은 이 정신병자는 런던이라는 생태계에서 활개치는 드라큘라 백작의 충실한 하수인이자 영원불멸을 꿈꾸는 욕망의 포로다. 드라큘라가 상징하는 거대자본과 영원불멸이라는 두 가지 요소 앞에 그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동 그림 작가로 유명한 찰스 키핑이 그린 다양한 일러스트는 딱딱해 보이는 고전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의외로 키핑은 영화에서 게리 올드만이 연기한 사악한 드라큘라 백작을 유머스럽게 묘사한다. 반면, 드라큘라 백작의 희생양인 언데드와 루시는 관능적이면서도 치명적인 특징을 멋들어지게 잡아냈다. 개인적으로 드라큘라 백작에게 흡혈당해 언데드의 길에 들어선 미나의 이마가 어떻게 그려졌는가에 대한 궁금증은 키핑의 일러스트를 보는 순간 바로 풀렸다. 키핑의 이미지는 문학적 상상력을 제한하는 역기능보다, 상상력의 형상화라는 긍정적인 점에서 높은 평가를 하고 싶다.
처음 출판되었던 빅토리아 시대에 환영받지 못하던 <드라큘라>는 영화화되면서 비로소 영생을 얻었다. 복수에 불타는 남자들의 모험극으로, 혹은 다양한 성적 코드가 담긴 에로틱 판타지로 읽히던 고전 호러 소설의 환생이 마냥 반가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