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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소설가의 고백 - 세상의 모든 지식을 읽고 쓰는 즐거움
움베르토 에코 지음, 박혜원 옮김 / 레드박스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어느 젊은 소설가가 있다. 올해 우리 나이로 80세, 이 소설가는 이제 겨우 데뷔 30년밖에 안 된 젊은 소설가란다. 그런데 그의 데뷔 작품이 바로 <장미의 이름>이다. 그렇다, 그 소설가는 바로 움베르토 에코다. 기호학자, 문학평론가, 철학자만으로는 부족해서 이제 아예 소설을 쓰는 작가로까지 나섰다. <젊은 소설가의 고백>은 모름지기 언젠가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작가 지망생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에세이집에 나오는 에코가 쓴 소설의 뒷이야기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는 다독가로 알려진 에코는 작품에 자신이 가진 지식의 총합을 모두 투영한 게 아닐까 하는 발칙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역설적이게도 소설과 현실을 냉정하게 구분하라는 당부를 하면서도, 독자가 허구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드는 영업 비밀을 슬쩍슬쩍 보여주기도 한다. 작가 못지않게 대단한 사람이 잘 훈련받은 독자다. 아무리 텍스트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스스로의 길을 개척한다고 하지만 다양한 기호로 무장한 에코의 텍스트는 정말 다양한 해석의 보고가 아닐 수 없다.
에코의 작품을 읽고, 현실 세계에서 답을 구하는 독자의 모습은 차라리 순례의 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의 현실성을 더하기 위해, 거리를 수없이 걸었다는 작가의 말에 저절로 존경심이 생겨난다. 나 같은 얼치기 독자에게는 그저 한 줄에 불과한 문장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생산되었는지 그 배경을 알게 되니 움베르토 에코가 새삼 다르게 보인다. 동시에 어떤 방식으로 작가의 성장과 무의식의 세계에 미친 영향이 어떻게 작품을 통해 구현되었는지에 대한 작가 나름의 분석도 인상적이었다.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쓰면서 14세기 이탈리아를 휩쓸었던 사회, 종교적 혼란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글을 읽으면서 장 자크 아노 감독이 만든 영화판 <장미의 이름> 그리고 오래 전에 읽은 오리지널 텍스트를 떠올렸다. 바로 다시 한 번 <장미의 이름>을 읽고 싶다는 욕망에 책을 찾았지만 도대체 어디에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어 포기했다. 섬광처럼 떠오른 아이디어가 이 거대한 이야기의 모티프로 작용했다는 말도 인상적이었다. 이런 아이디어에 살을 입히는 작업은 오로지 작가의 몫이다.
글쓰기에 대해서도 역시 고수다운 생각을 들려준다. 자기만족적인 글쓰기를 하는 이들도 없지 않겠지만, 본래의 목적은 어떤 방식으로든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문학 이론가답게 포스트모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중코드 기법(double coding)에 대한 텍스트 간의 상호작용에 대해서도 예리한 통찰력을 에코는 유감없이 보여준다. 자신의 텍스트가 어떻게 소수 엘리트 집단과 다수 대중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지, 문학에서 자주 통용되는 토포스(topos)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물론, 소설가의 핵심적인 ‘영업 비밀’은 자기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알려 줄 없다며 교묘하게 눙치고 넘어가기도 한다. 역시 고수답다.
소설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에 몰입하는 독자의 심리에 대해서 심리학자 뺨치는 실력으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 사실 가족이나 친구 중에 누가 죽었다고 해서, 비탄에 잠겨 따라 죽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오랜 격언처럼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마련이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괴테가 창조해낸 베르테르의 실연 때문에 주인공과 함께 유명을 달리한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에코는 자신이 완벽하게 창조해낸 허구의 공간이나 캐릭터에 몰입하는 독자의 심리를 내러티브의 합의에 따라 “가능 세계”로 받아들이고 허구 속에 자신을 투영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라는 냉정한 분석을 내놓는다. 이런 독자의 감정적 착각을 기호학적 분석과 수사학적 중요성을 예로 들어가며 풀이해내는 대가의 실력 앞에서 정말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나마 세 개의 챕터는 그나마 버겁게나마 쫓아갈 수가 있었지만, 네 번째 이야기인 <궁극의 리스트>에 등장하는 다양한 나열과 텍스트의 외연 확장에 대한 에코의 설명 앞에서 완전히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초반에 가볍게 시작한 에코 읽기는 후반으로 갈수록 힘들어졌고, 가까스로 완독한 자신이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역시 에코의 책은 한 번 읽기로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왕성하게 집필 활동을 하는 이 ‘젊은 소설가’의 신작 <프라하의 공동묘지>가 이번 가을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에코의 신작 소설과 만나기 전에 아직 읽지 못한 <푸코의 진자>와 <전날의 섬>은 새롭게 그리고 기존에 읽은 <장미의 이름>과 <바우돌리노>는 다시 한 번 읽고 싶다는 생각이 <젊은 소설가의 고백>을 들으면서 불쑥 들었다. 우리시대의 고전을 만들어 내고 있는 노작가에게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