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루이스 스카파티 그림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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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용하는 램프의 요정 중고서적을 이용해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사서 바로 다 읽었다. 오래전에 네이버 오늘의 책 리뷰어 도전을 하겠다고 도서관에서 빌리긴 했었는데 완독하지 못하고 반납한 기억이 난다. 지난주 번개에 나갔다가 만난 분에게 요즘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뭐냐고 물었더니 카프카의 <변신> 이야기를 해서 다시 호기심이 동했다. 얼마 전에 카프카의 다른 책인 <소송>도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끝을 맺지 못했다. 아니 시작만 했다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그레고르 잠자라는 출장 영업사원이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더라는 이야기다. 그렇게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인간에서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했다. 문제는 벌레로 변한 이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연달아 벌어지는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우선 그레고르는 잠자 집안의 청년 가장이다. 아버지는 5년 전 사업 실패로 자신감을 잃은 무능력한 가장이다. 아침에 읽은 어느 잡지의 기사에서 보니 경제력을 상실한 가장은 가장으로서의 존재감을 상실한 거라고 했던가. 전업주부인 어머니 그리고 아직 십대소녀인 동생 그레테는 철부지 소녀다. 그러니 생존을 위해 돈 버는 일과 아버지의 빚을 갚은 일은 모두 그레고르의 몫이다.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출장 영업사원으로 월급을 꼬박꼬박 집으로 가져올 때만 하더라도 모든 가족이 그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이제 벌레인간이 된 그레고르를 환영하는 가족은 아무도 없다.

시계같이 정확하게 근무를 하던 잠자가 출근하지 않자 바로 매니저가 쫓아온다. 일상으로부터 일탈을 거부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한 단면을 읽을 수가 있다. 조직의 정교한 부품으로 돌아가야 할 그레고르라는 한 개의 나사가 빠진 것 때문에 매니저는 화가 난 것이다. 그의 건강이나 안위는 문제가 아니다. 벌레인간이 된 개인의 이슈는 그대로 묻혀 버리고 가족과 조직의 원리가 날것 그대로 그레고르에게 청구된다.

그레고르가 노동의 대가로 돈을 가져 오지 못하면서 잠자 집안의 경제위기는 현실로 다가온다. 현업에서 은퇴한 아버지는 다시 은행안내원으로, 어머니는 바느질로 그리고 동생 그레테도 취업전선으로 내몰린다. 철저하게 노동과 밥벌이에서 소외된 그레고르는 가족에게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그나마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던 동생마저 경제적 독립체로 ‘변신’하면서 벌레인간 그레고르를 냉랭하게 대하기 시작한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마저 버림받은 그레고르는 살아갈 힘을 잃는다.

비록 육신은 벌레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의 사유를 하는 그레고르는 이 상황을 견딜 수가 없다. 그가 왜 벌레가 되어야 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거세된 상태에서 과연 그가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튀어나온다. 실존의 불안을 다룬 카프카의 글이 그런 동화로 귀결될 리는 만무하다. 벌레인간의 등장이 비극이었던 것처럼, 비극의 수레바퀴는 결말을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소설 <변신>에는 프라하의 유대계 독일인으로 살았던 프란츠 카프카 자신이 느꼈던 고독과 불안이 그대로 스며 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이 해체되기 전 프라하에 살던 카프카는 유대인이면서도 시온주의에 동조하지 않아, 동포 유대인에게도 그리고 독일인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수많은 유럽 청년들의 생명을 앗아간 전쟁의 참화 속에서 카프카는 필연적으로 시대의 불안과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 그리고 사회의 부조리라는 자신의 문학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변신>에 등장하는 각충에 대해 원작자인 카프카는 그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하는데, 내가 읽은 문학동네 버전에서는 아르헨티나 출신 일러스트레이터 루이스 스카파티가 다양한 형태의 각충/말똥구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그레고르가 완벽하게 각충으로 변신을 했는지 아니면 여전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궁금했었는데 스카파티는 그런 독자의 호기심에 대답이라도 하듯, 다양한 모습의 그레고르/각충의 모습을 선보여 주고 있다. 디테일보다는 벌레인간으로 변한 그레고르의 실존적 불안에 초점을 맞춘 일러스트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림이 풍부하게 담긴 고전을 좋아하는데 다음 번에는 괴테 선생의 <파우스트>에 도전해봐야겠다. 진짜 입으로는 백번 읽은 고전과 친해져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카프카의 <변신>과의 만남은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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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 가든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6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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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장르 소설은 읽는 재미가 있다. 플롯에 푹 빠져 읽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기리노 나쓰오 작가 신작 <로즈 가든>도 마찬가지였다. <로즈 가든>은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외전(外傳) 격이라고나 할까. 유년 시절 미로와 미래의 그녀의 남편이 되는 히로오의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된다.

사실 인도네시아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미로의 남편 이야기는 기억의 창고 저 너머에 아스라하게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인스톨인 <로즈 가든>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영업 사원으로 맹활약 중인 히로오라는 이름과 시리즈의 주인공 미로가 결합하자 바로 번쩍이는 기억의 화학 반응을 이끌어냈다. 아 그랬구나, 히로오는 미로라는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갔구나. 아니 그 반대였나? 뭐 상관없다.

한 때 연상의 여자가 진짜 여자라고 생각하던 히로오는 어느 날 동급생인 미로와 만나 같이 땡땡이를 치면서 파멸의 전주곡을 시작한다. 현재와 과거의 연결점을 넘나드는 구성이 참신하게 다가오며, 미로가 친 덫에 빠져 이제는 변태 소녀킬러(물론 연쇄살인범의 그 “킬러”는 아니다)로 바뀐 자신을 탓하는 장면도 빠지지 않는다. 너무 성에 대한 직설적인 표현이 나오는지라 이 소설은 어쩌면 19금으로 분류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외전을 통해 미로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던 과거의 속살을 기리노 나쓰오 작가는 헤집는다.

첫 번째 인스톨이 과거의 회상이었다면 나머지 세 이야기는 무라노 미로의 활약이다. 귀신잡기라는 소재를 다룬 <표류하는 영혼>는 그냥 그랬다. 맨 마지막의 SM 클럽에서 여신으로 활약하던 메구미의 마지막 행적을 추적하는 인스톨은 아무래도 일상에서 많이 벗어난 이야기라 그런지 공감대 형성이 쉽지 않다. 그렇다, 이 소설집에서 내가 가장 추천하고 싶은 인스톨은 바로 <혼자 두지 말아요>다.

남편과 사별하고 삼십대 초반에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아 탐정으로 활약하는 무라노 미로는 참 용감하다. 어떤 일은 아무리 보수가 좋아도 선뜻 나서지 않지만, 또 어떤 사건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감으로 끝까지 성실하게 수행하기도 한다. <혼자 두지 말아요>는 상하이 클럽에서 일하는 유미라는 중국 베이징 출신의 절세미인을 사랑하다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어느 남자의 이야기다.

기리노 나쓰오는 일단 치자꽃 같은 얼굴을 한 어떤 남자라도 한 번 보면 넋이 나가는 그런 절세미인을 등장시킨다. 집중과 선택이라는 소설 작법의 기법을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미로가 이미 맡고 있는 불륜사건에 미야시타라는 남자가 의뢰한 자신이 사랑하는 유미의 마음을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중첩시킨다. 물론, 그런 사적 감정에 대한 판단은 아무리 유능한 명탐정이라도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정중하게 거절한다. 하지만 미야시타가 날카로운 칼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에 미로는 아마도 억울하게 죽었을 미야시타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로 결심한다.

이웃에 사는 호모 도조 씨에 대한 야릇한 감정도 빠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탐정이라는 생리상 남자의 역할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미로는 주저 하지 않고 이 든든한 사내의 힘을 빌린다. 상하이 클럽에 침투할 적에도 여자 혼자 가기에 뭣하니 바로 이 도모 씨를 동원한다. 아마 현실세계에서라면 쉽지 않을 텐데 소설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정체불명의 유미라는 전형적 팜므 파탈의 등장, 살인사건의 발생 그리고 미스터리까지 적절하게 결합된 느와르를 방불케 하는 현란한 인스톨이 너무나 매혹적이다.

소설의 곳곳에 심어둔 복선과 암시의 부비트랩을 너무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다 보니 나의 의식 세계는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기리노 나쓰오 작가가 독자를 위해 준비한 힌트는 보지 못한 채, 엉뚱한 것에만 한눈을 팔았나 보다. 아주 간단한 트릭도 잡아내지 못하면서 너무 큰 스케일의 상상이 문제였다. 아니 어쩌면 그런 엉뚱한 상상 때문에 더 재밌게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독도 또한 독서의 즐거움이 아니던가.

참, 그런데 표지와 챕터마다 등장하는 이 얼룩말 녀석의 정체는 뭘까?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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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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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황석영 선생 대담에서 “일상의 위대함”이란 표현을 들었다. 어쩌면 정말 위대한 작가는 일상과 괴리된 다른 별천지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네 먹고 사는 그런 평범한 일상 가운데 피어나는 삶의 고갱이를 다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만난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미국식 삶의 방식을 관통하는 평범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모두 열편의 중단편이 실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얼핏 제목만으로는 이거 물리학에 대한 책이 아닌가 하는 경계심을 품게 만든다. 하지만, 독자여 걱정하지 말지어다. 이 책은 소설이니까. 미국 출신 신예 작가인 앤드루 포터는 1인칭 화자의 관점에서 무난하면서도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1인칭 화자는 자기 아버지뻘 대학교수와 연애도 아닌 그렇다고 우정으로 부르기에도 뭣한 관계의 늪으로 빠져드는 여대생이기도 했다가, 때로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겠다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추억하는 아들이기도 했다가, 아버지를 여의고 이제 막 결혼을 앞두고 유럽 여행에서 약혼자를 에스파냐에 ‘버리고’ 온 누나를 감싸는 남동생 역도 맡는 둥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변신을 거듭한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어느 부부가 교환학생으로 들인 벨리즈 출신 십대 소년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위험한 줄타기 같은 게임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독자는 물론 소설집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앤드루 포터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어떤 이야기에 그의 삶이 투영되지 않았나 하는 부질없는 추리를 거듭한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숨기고 싶은 삶의 비밀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독자를 놀래게 만들기도 한다. 의사였던 아버지가 어느 날 정신병으로 잠정 은퇴를 하게 되자, 홀로 남은 어머니는 이웃에 사는 아줌마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은 당황과 혼란 속에서 방황한다. 십대 소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세월에 더께가 앉으면서 이해가 되더라는 자조적인 고백 앞에서는 마음이 풀어지기도 한다. 젊은 친구들에게는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만큼 무책임해 보이는 조언도 없겠지만 어쩌랴 그것이 사실인 것을.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곳곳에서 미국식 성장통의 흔적을 엿볼 수가 있다. 교환학생을 맡은 부부가 아직 미성년인 피후견인의 알콜 파티를 허용하고 마리화나를 훔쳐 피우는 이율배반적인 상황, 대학 진학을 앞둔 고등학생 동생의 시선으로 본 백수건달 형의 무위도식하는 삶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아이들은 대개 부모가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서 성장하기 마련이지 않던가. 앤드루 포터는 고리타분하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여 주고, 독자에게 판단을 맡길 뿐이다. 새롭지 않은 시도지만 아주 매력적이다.

언제나 그렇듯, 삶의 찬란한 비밀은 거창한 성취에 있지 않다고 믿는다. 난 오늘 앤드루 포터의 책을 만났고, 아주 소박한 기쁨을 맛볼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짧은 단편이 주를 이루는 소설집이다 보니 앤드루 포터의 생각을 제대로 읽었나 하는 우려가 든다. 다음번에는 좀 더 긴 호흡의 장편과 만나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현재보다 미래가 더 기대되는 작가와의 만남 아주 행복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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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듀어런스 - 어니스트 섀클턴의 위대한 실패, 보급판
캐롤라인 알렉산더 지음, 김세중 옮김 / 뜨인돌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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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에 구입한 캐롤라인 알렉산더의 기록 <인듀어런스>를 오늘에서야 다 읽었다. 사실 작정하고 읽었더라면 금세 읽을 수 있었는데 왜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는지 모르겠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이 책을 읽으면서 가히 올해 내가 읽은 최고의 책으로 꼽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탐험의 시대가 저물어 가던 20세기에 남극 대륙을 정복하겠다고 나선 일단 사내들이 있었다. 이들의 리더인 어니스트 섀클턴 경은 이미 1909년 인류 역사상 가장 남극점에 가까이 도달한 업적으로 영국 국왕으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수여받았다. 남극 정복의 영예는 비록 노르웨이 출신 아문센에게 빼앗겼지만, 이 책의 제목이자 섀클턴 탐험대의 <인듀어런스>로 그는 세 번째 남극 탐험에 나선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섀클턴 탐험대는 남극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후세에 우리는 그들이 보여준 불굴의 노력에 대해 “위대한 실패”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실패가 어떻게 위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인듀어런스>는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이다. 섀클턴 탐험대는 1914년 8월 6일 영국을 떠나 남극으로 향한다. 장장 634일 간의 탐험에서 총 28명의 이질적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탐험대는 인간이 극지방에서 처할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조건을 체험한다. 가장 먼저 부빙에 갇혀 <인듀어런스> 호가 침몰하는 위기를 맞는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서 모선 없이 탐험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남극점을 지척에 두고 섀클턴은 철수를 결정한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한 리더 섀클턴 경은 불필요한 짐을 모두 버리고 가장 가까운 육지로 귀환하기로 한다. 탐험대장 섀클턴을 비롯한 선장 프랭크 월시를 비롯한 고급대원들은 리더십의 모범을 보인다. 보급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일반대원을 우선했다. 침몰한 <인듀어런스> 호를 뒤로 하고 사람이 빙원에서 보트를 끄는 장면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사진은 호주 출신의 사진가 프랭크 헐리가 찍었다. 온갖 역경 속에서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던 섀클턴 탐험대의 실상을 헐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위기상황에서 빛나는 지도자의 리더십은 섀클턴 경을 통해 형상화된다. 그 어떤 불평불만도 솔선수범하고 앞장 서는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육지인 엘리펀트 섬에 도착한 탐험대는 다시 선발대를 조직해서 포경기지가 있는 사우스 조지아 섬으로 구조요청을 하러 가기로 한다. 문제는 제대로 된 배도 아닌 작은 보트로 1,000km나 떨어진 난바다를 항해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섀클턴을 비롯한 6명의 선발대는 탐험대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혀 가능해 보이지 않는 임무에 뛰어든다.

엄청난 강풍과 절벽을 피해 마침내 사우스 조지아 섬의 킹 하콘 만에 도착하지만, 포경기지가 있는 스트롬니스가 있는 섬의 반대편까지 가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마지막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섀클턴 팀은 엘리펀트 섬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 대원들을 위해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사우스 조지아 섬 내륙의 빙벽을 넘어 마침내 스트롬니스에 도착한다. 포경기지의 노르웨이 사람들은 죽음의 바다를 건너온 이 위대한 뱃사람들에게 아낌없는 경의를 표했다. 이후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동화 속 해피엔딩이다.

섀클턴 탐험대의 생환에는 물론 아슬아슬한 행운도 함께 했다. 만약 섀클턴 일행의 허술하기 짝이 없는 보트가 사우스 조지아 섬에 닿기 전에 허리케인 같은 엄청난 강풍에 만나 침몰되었거나, 섀클턴이 사우스 조지아 내륙의 빙벽 도전에 실패했다면 그들의 ‘위대한 항해’는 모두 수포로 돌아갔을 것이다. 섀클턴이 기록에 남긴 것처럼 모든 위험한 순간에 함께 했던 신의 도움이 그들이 갈망해 마지않던 마지막 퍼즐의 한 조각이었다.

섀클턴 탐험대가 무사하게 귀환할 수 있던 가장 결정적 요소는 어떤 상황에서도 저버리지 않았던 상호간의 절대적 신뢰였다. 섀클턴 경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어떤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항상 앞장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위기상황에서 갈등과 분열 때문에 비극으로 끝난 다른 탐험대의 그것과 변별된다. 스트롬니스 포경기지에서 구조된 후에도 아직 엘리펀트 섬에 남아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던 동료들의 구조에 전력을 다하던 섀클턴 경의 모습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지도자의 전범이었다.

모든 역경을 이겨낸 인간 드라마에는 상상 그 이상의 아우라가 있지만, 오늘 읽은 <인듀어런스>의 그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비록 그들의 남극 도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의 바다”를 극복한 섀클턴 탐험대의 드라마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왜 지인이 이 책을 읽어 보라고 권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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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길 2 - 노르망디의 코리안
이재익 지음 / 황소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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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익 씨의 <아버지의 길>은 어쩔 수 없이 똑같은 소재로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인 조정래 선생이 쓴 <사람의 탈>과 비교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조정래 선생의 <사람의 탈>이 일본군-소련군 그리고 독일군으로 수많은 변신을 거듭하면서 생존의 끈을 놓지 않았던 조선인의 운명을 그렸다면 이재익 씨는 그 위에 조국에 남겨 두고 온 아들에 대한 부정(父情)에 방점을 찍는다. 아비규환의 전쟁터에서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너무나 뚜렷하다.

<아버지의 길> 두 번째 이야기는 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연합군 쪽으로 완전하게 돌린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일인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유타 해변에서 포로로 잡힌 독일 동방대대 소속 한국계 독일군 사진의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로 귀착된다. 1939년 8월 소련군과 일본군이 만몽국경에서 격돌한 노몬한에서 관동군으로 강제 징집된 김길수는 다시 소련군의 포로가 된다. 악몽 같은 소련의 굴락 수용소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길수와, 영수 그리고 스기타는 1941년 6월 22일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에 맞서 심각한 병력부족에 시달리던 소련의 결정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던 모스크바 전선에 투입된다.

길수의 이야기가 한 축이라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 있던 “붉은 여우”이자 길수의 아내 월화 이야기는 소설의 다른 한 축을 구성한다. 길수의 도움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한 월화가 일본군에게 다시 잡힐 뻔한 순간에 다시 한 번 소련 공군의 일본군 기지 공습이라는 개연성이 개입한다. 위안소에 있던 명선과 함께 고향길을 재촉하던 월화는 정대를 합류한다. 위안소에서 일본군의 만행으로 거의 정신이 나간 명선은 정대와 월화가 보는 앞에서 자결한다. 조국을 잃은 사람들의 비극은 멈출 것 같지 않다. 귀향길의 마지막 순간에 일본군 포수들에게 사살당할 위기에 처해 있던 월화는 영물 호랑이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이 부분은 길수가 모스크바 공방전이나 스탈린그라드 전투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살아남는 씬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것 같다.

7년이라는 세월을 거쳐 점점 더 조국과 용암포에 두고 온 아들과 멀어지는 기구한 운명 속에서 정말 놓칠 수 없었던 희망이라는 이름의 가냘픈 끈은 엷어진다. 길수는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만난 어느 미군에게 아들 건우에게 전해주라는 편지를 전해주고 포로수용소를 탈출한다. 그리고 그 미군은 해방된 조국에 길수와의 약속대로 건우와 월화를 찾아 약속을 지킨다.

조정래 선생의 <사람의 탈>에서 구사일생으로 소련군 포로로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소련으로 송환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으로 끝난다. <아버지의 길>에서 이재익 씨가 보여주는 비극의 정도 역시 그에 못지않다. 이 소설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어머니의 행적이라는 두 가지 줄기에 식민지 조선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려 넣는다. 길수를 아버지처럼 따르는 14세 소년병 영수, 조국을 배신하고 일제의 앞잡이로 나선 스기타 대위,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순정으로 일본군에 지원했지만 결국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되는 정대 등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전장의 영웅이 아닌 어떻게 보면 보통 사람의 삶의 궤적에 소설은 방점을 찍는다.

<아버지의 길>의 소설적 재미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높이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역사소설을 표방하는 책에서 보이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잘못된 기록은 좀 바로 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래도 소설 주인공들이 빚어내는 내러티브에 주력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그 내러티브의 핵심이 되는 역사 부분에 대해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자주 들었다. 1권의 도조 히데키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관동군 출신으로 일본 군부에서 작전의 신으로 불렸던 쓰지 마사노부의 최후도 사실과 다르지 않은가. 이 부분에 대해서도 ‘소설이니까’라고 한다면 더 할 말은 없겠지만.

어쩌면 역사소설에서 역사와 소설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울 일이지도 모르겠다. 이오지마 전투에 등장하는 일본군 수비대 사령관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중장이나 미군 소속 홀랜드 스미스 중장(167-168쪽) 같은 인명의 경우에도 좀 더 세심하게 교정을 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작품의 완성도가 더 높아지지 않겠는가.

며칠 동안 몰입해서 열심히 읽었다. 그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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