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황석영 선생 대담에서 “일상의 위대함”이란 표현을 들었다. 어쩌면 정말 위대한 작가는 일상과 괴리된 다른 별천지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네 먹고 사는 그런 평범한 일상 가운데 피어나는 삶의 고갱이를 다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만난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미국식 삶의 방식을 관통하는 평범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모두 열편의 중단편이 실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얼핏 제목만으로는 이거 물리학에 대한 책이 아닌가 하는 경계심을 품게 만든다. 하지만, 독자여 걱정하지 말지어다. 이 책은 소설이니까. 미국 출신 신예 작가인 앤드루 포터는 1인칭 화자의 관점에서 무난하면서도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1인칭 화자는 자기 아버지뻘 대학교수와 연애도 아닌 그렇다고 우정으로 부르기에도 뭣한 관계의 늪으로 빠져드는 여대생이기도 했다가, 때로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겠다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추억하는 아들이기도 했다가, 아버지를 여의고 이제 막 결혼을 앞두고 유럽 여행에서 약혼자를 에스파냐에 ‘버리고’ 온 누나를 감싸는 남동생 역도 맡는 둥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변신을 거듭한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어느 부부가 교환학생으로 들인 벨리즈 출신 십대 소년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위험한 줄타기 같은 게임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독자는 물론 소설집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앤드루 포터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어떤 이야기에 그의 삶이 투영되지 않았나 하는 부질없는 추리를 거듭한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숨기고 싶은 삶의 비밀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독자를 놀래게 만들기도 한다. 의사였던 아버지가 어느 날 정신병으로 잠정 은퇴를 하게 되자, 홀로 남은 어머니는 이웃에 사는 아줌마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은 당황과 혼란 속에서 방황한다. 십대 소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세월에 더께가 앉으면서 이해가 되더라는 자조적인 고백 앞에서는 마음이 풀어지기도 한다. 젊은 친구들에게는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만큼 무책임해 보이는 조언도 없겠지만 어쩌랴 그것이 사실인 것을.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곳곳에서 미국식 성장통의 흔적을 엿볼 수가 있다. 교환학생을 맡은 부부가 아직 미성년인 피후견인의 알콜 파티를 허용하고 마리화나를 훔쳐 피우는 이율배반적인 상황, 대학 진학을 앞둔 고등학생 동생의 시선으로 본 백수건달 형의 무위도식하는 삶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아이들은 대개 부모가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서 성장하기 마련이지 않던가. 앤드루 포터는 고리타분하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여 주고, 독자에게 판단을 맡길 뿐이다. 새롭지 않은 시도지만 아주 매력적이다.

언제나 그렇듯, 삶의 찬란한 비밀은 거창한 성취에 있지 않다고 믿는다. 난 오늘 앤드루 포터의 책을 만났고, 아주 소박한 기쁨을 맛볼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짧은 단편이 주를 이루는 소설집이다 보니 앤드루 포터의 생각을 제대로 읽었나 하는 우려가 든다. 다음번에는 좀 더 긴 호흡의 장편과 만나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현재보다 미래가 더 기대되는 작가와의 만남 아주 행복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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