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듀어런스 - 어니스트 섀클턴의 위대한 실패, 보급판
캐롤라인 알렉산더 지음, 김세중 옮김 / 뜨인돌 / 2003년 11월
평점 :
예약주문


지난 여름에 구입한 캐롤라인 알렉산더의 기록 <인듀어런스>를 오늘에서야 다 읽었다. 사실 작정하고 읽었더라면 금세 읽을 수 있었는데 왜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는지 모르겠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이 책을 읽으면서 가히 올해 내가 읽은 최고의 책으로 꼽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탐험의 시대가 저물어 가던 20세기에 남극 대륙을 정복하겠다고 나선 일단 사내들이 있었다. 이들의 리더인 어니스트 섀클턴 경은 이미 1909년 인류 역사상 가장 남극점에 가까이 도달한 업적으로 영국 국왕으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수여받았다. 남극 정복의 영예는 비록 노르웨이 출신 아문센에게 빼앗겼지만, 이 책의 제목이자 섀클턴 탐험대의 <인듀어런스>로 그는 세 번째 남극 탐험에 나선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섀클턴 탐험대는 남극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후세에 우리는 그들이 보여준 불굴의 노력에 대해 “위대한 실패”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실패가 어떻게 위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인듀어런스>는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이다. 섀클턴 탐험대는 1914년 8월 6일 영국을 떠나 남극으로 향한다. 장장 634일 간의 탐험에서 총 28명의 이질적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탐험대는 인간이 극지방에서 처할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조건을 체험한다. 가장 먼저 부빙에 갇혀 <인듀어런스> 호가 침몰하는 위기를 맞는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서 모선 없이 탐험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남극점을 지척에 두고 섀클턴은 철수를 결정한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한 리더 섀클턴 경은 불필요한 짐을 모두 버리고 가장 가까운 육지로 귀환하기로 한다. 탐험대장 섀클턴을 비롯한 선장 프랭크 월시를 비롯한 고급대원들은 리더십의 모범을 보인다. 보급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일반대원을 우선했다. 침몰한 <인듀어런스> 호를 뒤로 하고 사람이 빙원에서 보트를 끄는 장면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사진은 호주 출신의 사진가 프랭크 헐리가 찍었다. 온갖 역경 속에서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던 섀클턴 탐험대의 실상을 헐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위기상황에서 빛나는 지도자의 리더십은 섀클턴 경을 통해 형상화된다. 그 어떤 불평불만도 솔선수범하고 앞장 서는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육지인 엘리펀트 섬에 도착한 탐험대는 다시 선발대를 조직해서 포경기지가 있는 사우스 조지아 섬으로 구조요청을 하러 가기로 한다. 문제는 제대로 된 배도 아닌 작은 보트로 1,000km나 떨어진 난바다를 항해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섀클턴을 비롯한 6명의 선발대는 탐험대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혀 가능해 보이지 않는 임무에 뛰어든다.

엄청난 강풍과 절벽을 피해 마침내 사우스 조지아 섬의 킹 하콘 만에 도착하지만, 포경기지가 있는 스트롬니스가 있는 섬의 반대편까지 가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마지막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섀클턴 팀은 엘리펀트 섬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 대원들을 위해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사우스 조지아 섬 내륙의 빙벽을 넘어 마침내 스트롬니스에 도착한다. 포경기지의 노르웨이 사람들은 죽음의 바다를 건너온 이 위대한 뱃사람들에게 아낌없는 경의를 표했다. 이후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동화 속 해피엔딩이다.

섀클턴 탐험대의 생환에는 물론 아슬아슬한 행운도 함께 했다. 만약 섀클턴 일행의 허술하기 짝이 없는 보트가 사우스 조지아 섬에 닿기 전에 허리케인 같은 엄청난 강풍에 만나 침몰되었거나, 섀클턴이 사우스 조지아 내륙의 빙벽 도전에 실패했다면 그들의 ‘위대한 항해’는 모두 수포로 돌아갔을 것이다. 섀클턴이 기록에 남긴 것처럼 모든 위험한 순간에 함께 했던 신의 도움이 그들이 갈망해 마지않던 마지막 퍼즐의 한 조각이었다.

섀클턴 탐험대가 무사하게 귀환할 수 있던 가장 결정적 요소는 어떤 상황에서도 저버리지 않았던 상호간의 절대적 신뢰였다. 섀클턴 경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어떤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항상 앞장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위기상황에서 갈등과 분열 때문에 비극으로 끝난 다른 탐험대의 그것과 변별된다. 스트롬니스 포경기지에서 구조된 후에도 아직 엘리펀트 섬에 남아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던 동료들의 구조에 전력을 다하던 섀클턴 경의 모습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지도자의 전범이었다.

모든 역경을 이겨낸 인간 드라마에는 상상 그 이상의 아우라가 있지만, 오늘 읽은 <인듀어런스>의 그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비록 그들의 남극 도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의 바다”를 극복한 섀클턴 탐험대의 드라마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왜 지인이 이 책을 읽어 보라고 권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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