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독립 빵집 이야기
닐 패커 지음, 홍한별 옮김 / 꽃피는책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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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 책을 사러 알라딘 수원점으로 출동했다. 사실 <홈랜드 엘레지>를 사려고 했다가 <라우루스>를 만나게 됐고, 과연 내가 조만간 이 책을 읽을 것인가를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아무 것도 사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신 서가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닐 패커의 <아주 특별한 독립 빵집 이야기>는 읽었다. 감상 한 조각을 기록해 보려고 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나라에 대형 빵집들이 생기기 전, 동네 빵집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 자신들의 실력을 자랑하던 그야말로 춘추전국시절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어느 도시에 작은 빵집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 빵집들은 제각각의 레시피로 고객들의 선택을 받았다는 거지. 하지만 도시 외곽에 자리잡은 대자본 프랜차이즈 빵집의 등장으로 그런 도시의 빵집 생태계가 교란되기 시작했다.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소규모 빵집들이 각종 혜택과 이벤트, 프로모션으로 무장한 대기업 베이커리를 상대하기란 역부족이었다. 사람들은 편리함이라는 이유로, 발길을 작은 빵집에서 대형 프랜차이즈 베이커리로 옮기게 됐다.

 

그것으로 끝인가? 노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빵집에 마수가 뻗치기 시작한다. 대형 빵집은 계속해서 그리고 꾸준하게 노부부에게 빵집을 팔라고 부추긴다. 몇 번이고 노부부는 거절하지만, 자본의 유혹은 집요하기만 하다. 세 번의 시도와 더불어 인수 가격도 계속해서 올라간다. 결국 그들의 제안에 지친 노부부는 빵집을 접고, 받은 돈으로 세계일주를 떠난다.

 

자 그럼 그동안 도시의 빵집 생태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도시 사람들은 흐물흐물하고 맛없는 빵을 누구나 공평하게 먹게 됐다. 그것이 바로 문제였다.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은 소비자에게서 자신이 먹고 싶은 빵을 먹을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빼앗아 가버렸다. 도시의 특색 있는 작은 빵집들이 사라지면서, 소비자들은 그야말로 울며 겨자먹기로 원하지 않는 맛없고 흐물흐물한 빵을 먹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이 노리는 독과점의 명백한 폐해가 아닌가 말이다.

 

우리도 실생활에서 제빵업계를 독접한 기업의 폐해를 똑똑히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제분업계와 협작해서 끝없이 올라가는 가격인상을 주도하고, 소비자들에게 비싼 빵을 먹으라고 강요하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밀가루 가격이 내려갔지만, 빵값은 요지부동이다. 지금은 사라진 작은 빵집들이 있었다면 아마 그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프랜차이즈 빵집의 고사작전이 작금의 상황을 만들어낸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컴백한 노부부는 다시 빵을 만들어 팔지만, 온 도시 사람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란 역부족이다. 결국 그들이 생각해낸 것은 스스로 빵을 먹자는 것이다. 물론 품과 시간이 드는 일이지만, 자신이 직접 생산에 참여해서 먹거리를 만드는 즐거움은 또 다른 차원의 무엇이 아닐까. 그리고 친절하게도 마지막은 빵 만들기 레시피로 마무리한다.

 

짧지만 강력한 서사의 힘, 닐 패커의 <아주 특별한 독립 빵집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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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어린 시절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말하는나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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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존 맥스웰 쿳시의 책을 읽는다. 마지막으로 만난 <폴란드인>에서는 왠지 노작가의 섹슈얼 판타지에 대한 소회가 들어 있는 것 같아서 좀 아쉬웠다. 2013년에 발표된 <예수 삼부작>의 첫 작품인 <예수의 어린 시절>은 주저하면서도 그놈의 옛정 때문에 또 읽게 됐다. 우리네 독서 여정이 늘 그렇지 아니한가.

 

책의 제목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먼저 말한다, <예수의 어린 시절>에는 전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종교 관련 이런 서사라는 생각을 갖지 말지어다. 그냥 (아마도 스페인?) 어느 곳에 흘러든 난민 시몬과 다비드에 대한 이야기다.

 

벨스타 수용소를 거쳐 노비야라는 곳에 도착한 시몬과 다비드가 소설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이다. 다비드는 사이드킥 정도고,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과거를 알 수 없는 시몬이다. 굳이 소설을 역사에 연결시키자면, 시몬이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제자였던 시몬 베드로고, 다비드는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두 번째 왕이라는 사실 정도라고 해둘까.

 

시몬과 다비드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도 아니다. 하지만, 벨스타로 향하는 배 안에서 다비드에 대한 서류는 분실되었고 어머니와도 헤어져 버렸다. 결국 스페인판 "엄마 찾아 삼만리"라고 할까. 그 나라 말도 못하고 일자리도 없으며, 뿌리마저 갖지 못한 시몬과 다비드를 환영해 주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노비야 센터에서 그들에게 임시 거처를 마련해 준 아나에게 시몬을 애걸하지만, 별무소용이다.

 

난민들을 대하는 현지인들의 냉정한 태도에서 그들의 존재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쿳시 작가는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환기시켜 준다. 임시거처 담당자가 퇴근하는 바람에 노숙을 하게 된 시몬과 다비드. 그들의 처량한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어쨌든 그들은 당국으로부터 정식 거주를 받고, 임시거처에서 지낼 아파트도 공급받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45세라고 자신의 나이를 '정한' 시몬은 부두노동자로 곡물 하역하는 허드렛일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동료들에게 '비예호(늙은이)'라는 별명도 얻는다. 당연히 처음 하는 일은 그야말로 다리가 후둘거리는 고된 노동이었다.

 

그런 자신의 후견인 시몬의 고된 노동에 5세 꼬마 다비드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나이 아이답게 시몬이란 녀석은 목이 마르고 배고프다며 칭얼거리고, 자신의 안위에만 관심을 갖는 쾌락주의자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부두가의 책임자 알바로는 시몬과 다비드를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소설을 읽으면서 시몬이란 캐릭터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궁금해졌다. 부두 현장에서 왜 크레인을 사용해서 좀 더 효율적으로 곡물 자루를 나르지 않는지 시몬은 알바로에게 말한다. 그런데, 정말 크레인을 도입해서 곡물 자루들을 손쉽게 운반한다면 부두노동자들은 전혀 필요 없게 되는게 아닌가. 스스로 자신의 일자리를 잘라 달라는 건가.

 

그의 동료 에우헤니오를 필두로 한 다른 동료들은 교육원에서 철학이나 삶에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배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시몬은 그들의 모습에 냉소적이다. 철학 수업에 들어갔다가 바로 튀어나오지 않았던가. 노비야에서의 단조로운 삶은 그와는 도저히 맞지 않는다고 그는 고백한다. 도대체 과거에 무슨 일을 했기에? 라틴어까지 구사하는 실력을 보면 아무래도 그는 지식인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다비드와 우연히 들르게 된 라 레지덴시아라는 곳에서 삼십대 여성 이네스를 만나게 되고 다짜고짜 다비드의 엄마가 되어 달라는 황당한 부탁을 하지 않던가. 놀랍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부탁에 이네스는 다비드의 엄마 노릇을 하기 시작한다.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그냥 그렇게 엄마가 되겠다고 나선다구? 시몬-다비드-이네스로 구성된 유사 가족의 좌충우돌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어쩌면 이런 황당한 전개가 소설을 이끌어 가는 힘일 지도 모르겠다. 아니 도대체 그래서 이야기가 어떻게 되려고 하는 걸까하고 결론이 너무 궁금하지 않은가 말이다. 이제 6살이 되어 학교에 간 다비드는 담임 선생님인 레온과 사사건건 부딪히고, 결국 시몬과 이네스는 학교로 소환된다. 하지만 그들은 결정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으니, 그들이 다비드의 친부모가 아니라는 점이다. 시몬은 파드리스 정도, 이네스는 그럼? 레온 선생님은 수업에 방해가 되는 다비드가 푼토 아레나스에 있는 특수학교에 보내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전인가 시몬은 부두에 도입된 크레인 때문에 사고를 당해서 몸이 온전치 않은 상태에서 푼토 아레나스에 끌려갔다가, 자신이 꿈꾸던 탈출전문가 흉내를 내어 탈출한 다비드 그리고 이네스와 함께 북쪽으로 경찰을 피해 도주에 나선다. 아, 그전에 다비드와 이네스가 사는 집에 변기 고장으로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모두가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어하지만, 생각과 달리 우리의 삶이란 그렇게 비루한 것이라고. 아울러 아무것도 부족한 게 없다는 환상 덕분에 우리의 삶이 더 고단해지는 건 아닌지.

 

등장하면서부터 문제를 일으켰던 에밀리오 다가가 둥지를 떠나는 다비드에게 선물한 보이지 않는 망토와 마법의 가루 덕분에 화상을 입고 실명의 위기까지 말썽쟁이 꼬마 소년은 위기에 처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세 명으로 구성된 이 유사 가족이 에스트레리타라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결의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그래서 쿳시 작가가 <예수의 어린 시절>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새로운 곳에 정착을 시도하는 난민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이야기? 모든 가치가 붕괴되고, 가족의 가치마저 무너져 내리는 현대에 기묘하게 구성된 유사 가족에 대한 이야기일 지도 모르겠다. 예수 그리스도와 등치될지도 모르는 다비드 아버지 부재에 대한 경우도 그렇다. 시몬 아저씨는 다비드에게 엄마를 찾아 주려고 하지 아버지를 찾아 주거나 자신이 대신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문제적 인간 시몬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캐릭터가 아니다. 다비드 문제가 해결되면, 그는 언제라도 노비야를 떠날 태세다. 그리고 시몬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간이다. 자신과 어떤 접점을 만드는 여성들에게서 욕망을 추구한다. 결국 다비드의 친구 피델(리토)의 어머니 엘레나와 깊은 관계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동료 에우헤니오에게 철학 공부를 하는 대신 여자를 만나는 게 어떠냐는 노골적인 질문도 하지 않았던가. 개인이 삶에서 추구하는 바가 다를진대 시몬은 자신의 기준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그런 스타일의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 삼부작>은 이제 시작이다. <예수의 어린 시절>의 후속편인 <예수의 학창시절>에서 다비드는 댄스 아카데미에서 춤을 배우게 되고, 그 다음에는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된다고 한다. 잔잔하고 소소한 이야기에서 무언가 격정적인 서사로 무대가 이동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전작에 비해 신비스러운 설정에 혼란스럽기도 하다는 평이 있는데 어쨌든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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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닥> ㅣ 빨강의 자서전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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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독서모임에서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앤 카슨의 책들을 읽었다고 자랑했다. 시니컬한 열혈 독서가 동지는 굳이 읽어야 하냐고 했다. 모름지기 독서가를 자처하는데, 그래도...라고 나는 말을 흐렸다. 그리고 앤 카슨의 <레드 닥>을 읽었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고백도 붙였다.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그리고 고대 그리스 문학의 전문가라는 작가가 파편화된 스테시코로스의 <게리오네스>에서 <빨강의 자서전>을 퍼올린 것처럼, 나 역시 독서 가운데 얻게 된 파편화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아주 부족한 리뷰를 써보려고 한다.

 

그리스 로마 고전들을 마음껏 이용해서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재창조(re-creation)를 할 수 있는 그네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고대 클래식은 이제 거의 공공재에 가깝지만, 짧은 지식으로 그네들만큼의 이해와 분석에 기반해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기란 새로운 창조만큼이나 어렵지 않나 싶다.

 

전작 <빨강의 자서전>의 속편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전작에 등장한 G(게리온)과 새드(헤라클레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을 뺀다면 굳이 시퀄이라는 표현이 맞나 싶기도 하다. 파편화된 정보는 상대적으로 그만큼 빈 공간과 여백을 작가 자신의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다는 말도 되지 않을까. 그만큼 부서진 파편들은 새로운 서사를 위한 강력한 요소들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중년에 이르러 다시 만나게 된 G와 새드 중사(PTSD에 시달린다)는 로드 트립에 나선다. 그리고 도중에 이다(아이디어를 상징한다)를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서사들은 어쩌면 소설 <레드 닥>에서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렇다면 또 중요한 건 뭔데? 독자들이 앤 카슨의 의도를 깨닫지 못하고 제대로 따라 오지 못한다고 해서 작가가 또 아쉬워할 것 같지도 않아 솔직히 말해서.

 

한 때 서로 사랑했던 이들이 만나 여행길에 오른다. 서로에게 친절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여전히 무언가 부족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해서 상처 받은 영혼들에게 구원이 약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서로 공유했던 기억들은, 그리고 시간들은 하염없이 흘러갈 뿐이다. 로드 트립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그들의 여행이 요양원에서 조용히 죽어가는 G의 엄마를 낫게 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험난한 세상살이를 통해 어느덧 중년에 도달한 주인공들은 그냥 살아갈 뿐이다.

 

청춘들에게는 어쩌면 서글픈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나이듦은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시간과 경험이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타인의 상실 같은 슬픔을 대하는 태도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무덤덤하게 그 또한 지나가리라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게지. 이렇게 하면 너무 숙명주의자 같은 말일지도.

 

소설 속의 새드처럼 너무 많은 기억들 때문에 우리는 고통 받고 있지 않은가. 어떤 기억을 의도적으로 잊고 싶다고 해서 잊어지던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오디세이>의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겪은 PTSD에 시달리는 것처럼, 어쩌면 새드 역시 이라크 팔루자에서 경험한 처참한 전쟁으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에 대한 구원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앤 카슨은 냉정하게 아마 그러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대개의 문학은 구원을 약속하지만, 모든 작품이 그래야 하는 건 아닐테니까. 그래서 어쩌면 마치 미로를 걷는 듯한 느낌 속에 <레드 닥>이 가르키는 방향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다.

 

앤 카슨의 <레드 닥>은 종이책으로도 그리고 전자책으로도 읽었는데, 확실히 종이책의 방향성(?)이 뛰어난 것 같다. 책 양쪽으로 인쇄된 반쪼가리 붉은 레드도트들은 책을 읽다가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나같이 부족한 독자들의 멘탈을 바짝 잡아주는 길라잡이 같은 역할이라고나 할까. 파편화된 고전과의 끊임 없는 대화를 통해 대담하고 창의적인 시도와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앤 카슨의 <레드 닥>은 아무래도 한 번 읽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영역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다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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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6-10-19 2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앤 카슨의 책들에 대한 별점을 계속 3점 주시는군요.
저는 지금 <빨강의 자서전> 읽고 있는데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더라고요.
고전과 연결되었지만 현대성이 많았어요.

레삭매냐 2026-10-19 21:40   좋아요 1 | URL
아마 제 탓이기도 하겠지만...
읽으면서도 제가 이해한 게
맞나 싶기도 하고 -
막 와 좋다, 그런 느낌이 들진
않아서 말이죠.
저도 <빨강의 자서전>은 비
교적 수월하게 읽었던 것 같
습니다 ^^
<레드 닥>은 빡세더군요.
 
기억의 빛
마이클 온다치 지음, 아밀 옮김 / 민음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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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무려 넉 달 만에 만나게 되는 달궁 모임의 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원래 지난달에 보기로 되어 있었는데, 날짜가 좀 밀렸다. 안도했다고 해야 하나. 요즘 도통 책읽지 못하고 있던 차에, 아 이제 진짜 독서 모임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마이클 온다치의 <기억의 빛>을 읽어야 하는데. 그러다가 지난주에 느닷없이 앤 카슨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부랴부랴 앤 카슨의 책들을 좀 읽느라 <기억의 빛> 완독이 좀 늦어졌다. 그래도 어제 다 읽고 지금 이렇게 리뷰를 쓰고 있는 중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이클 온다치의 <기억의 빛>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가 결국 3년 전에 출간이 됐고, 바로 산 기억이 난다. 그리고 좀 읽다 말았다. 나중에 다시 읽기 시작했다는 어느 순간 멈췄다. 그런 다음에는 책도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서 한참 찾았다는. 다행히 책탑 가운데서 <기억의 빛>을 찾아내고 3번 도전 끝에 완독했다.

 

사실 미스터리-스릴러 형식의 이야기에 좀처럼 초반에는 집중하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소설의 화자는 너새니얼 윌리엄스. 1945년에 시작되는 1부에서 그가 14살 정도라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너새니얼(별명 스티치)은 1931년생 정도 되는 것 같다. 아직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잡지 못하고 있던 전간기에 태어난 모양이다.

 

1부는 대영제국을 초토화시킨 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시작된다. 어느날 아버지와 어머니 로즈가 멀리 싱가포르로 떠나게 된다는 선언을로 소설은 시작된다. 그럼 레이철(렌) 누나와 나는? 엄마의 친구라는 나방 아저씨(월터)가 어린 남매를 돌보게 된다고 엄마는 말한다. 어째 시작부터 좀 찜찜하지 않은가.

 

지금의 상황도 그렇지만, 나이 어린 남매를 낯선 이가 돌본다는 게 말이 되는가. 어쨌든 엄마와 아빠는 그렇게 영국을 떠나 멀리 극동의 아시아로 떠나고, 이제 나방 아저씨와의 낯선 삶이 계속된다. 그리고 루비니 가든의 윌리엄스 남매의 집에는 나방 아저씨의 친구들로 곧 가득차게 된다. 민속지학자라는 올리브 로렌스와 아무래도 과거가 의심스러운 "화살"을 필두로 다양한 인물들이 레이철과 너새니얼의 삶 속에 끼어든다.

 

아마 내가 첫 두 번의 책읽기에 실패한 이유는 이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낯선 상황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 고비를 넘기면서 나의 책읽기는 계속된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기억의 빛>은 화자인 너새니얼의 성장소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재 가운데, 소년 너새니얼은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크라이테리언에서의 힘겨운 나날도, 그리고 또 우연히 알게 된 애그니스와의 철부지 사랑도 다 어른으로 가는 과정에서의 일탈에 가까운 일종의 모험이 아니었을까.

 

 

너새니얼의 청소년 시절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바로 화살이었다. 경주견과 도자기 밀수, 위조와 사기 등의 경력으로 점철된 인물이 바로 화살(Tarter)였다. 모리스를 몰며 수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던 그의 매력에 너새니얼 역시 빠져든 모양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너새니얼은 "그리운 밤의 여정"이라는 말로 그 시절을 기억한다. 싱가포르 유니레버로 떠난 아버지의 부재 가운데, 어쩌면 화자는 화살에게서 father figure 같은 감정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애인 애그니스에게 자신의 아버지로 소개도 하고. 천부적 거짓말쟁이였던 화살은 물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소설의 초반부 등장하는 schwer(슈버)라는 키워드는 너새니얼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상징으로 읽힌다. '어렵다', '무겁다'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궁극적으로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경고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는 말일까? 왜 윌리엄스 남매는 안전하지 못한 상태라는 걸까. 그것은 바로 어머니 로즈의 원죄로부터 시작됐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된다.

 

그러다 우연히 엄마 로즈의 트렁크를 발견하게 된 나는 엄마가 싱가포르로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미스터리한 서사는 힘을 얻기 시작한다. 너새니얼은 언젠가부터 누군가의 추격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결국 사단이 나고 만다. 1부 엔딩에서 모종의 인물들에 납치되었다가 풀려나는 과정에서 이 모든 일에 엄마 로즈가 과거에 정보국 소속으로 비밀업무에 종사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윌리엄스 남매를 보호하던 나방 아저씨가 죽었다는 사실도.

 

<기억의 빛>의 진짜는 2부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전에 진지하게 설치해둔 떡밥들을 회수할 차례가 돌아왔다. 납치 사건이 발생하자 그제야 나타난 엄마를 따라 레이철과 너새니얼은 보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레이철은 연극 무대로, 너새니얼은 엄마의 유전자를 좇아 정부 기록보관소에서 일하게 된다. 그 때는 이미 어머니도 돌아가신 후였다. 어머니의 사인에 대해서는 나중에 드러난다.

 

너새니얼의 지난 10년은 어머니의 종적을 추격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전쟁 중에 화재감시원으로 일했다던 어머니가 전후에 비밀 업무에 적극 가담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전후 특히 1945년부터 1947년까지 유럽의 각지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전투를 필두로 해서 각종 역사 지우기 작업에 어머니가 로즈가 개입했다는 놀라운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어머니 팔에 남은 흉터들도 그 때의 흔적이었으리라.

 

화살과 그의 애인이었던 올리브 로렌스 그리고 이엉장이의 아들 마시 펠론 등도 모두 숨겨진 영웅들이었다고. 화자의 말에 의하면 진짜 영웅들은 어디서 자신의 공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법이다.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사에서 자신의 임무가 끝나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조용한 삶을 살았다. 진짜 영웅들은 그런 거라고. 어머니 로즈, 시대를 풍미한 코드명 비올라라고 알려진 그녀는 시골 마을의 온실에서 자신이 기다리던 운명을 맞았다.

 

화자는 결국 그리운 밤의 여정을 함께 했던 추억의 화살, 노먼을 찾아가지만 현재의 화살은 과거와 완전히 단절되어 소피라는 이름의 아내와 딸과 함께 살고 있다. 너새니얼과 달리 화살은 과거에 대해 아예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결국 너새니얼은 돌아서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찾던 이와 원하던 해답을 얻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너새니얼은 과거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출발에 나선다.

 

마이클 온다치의 <기억의 빛>은 후반으로 갈수록 몰입도를 더해가는 그런 맛이 있는 소설이다. 그의 대표작 <잉글리시 페이션트>처럼 전쟁이라는 주제에 파생된 이야기는 윌리엄스 가정에서 출발해서, 아버지-누나 그리고 어머니를 차례로 분사시키고 난 뒤 우주로 향하는 로켓처럼 엔딩으로 달려 나간다. 어떤 과거의 사실들은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동시에 현실에 충실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또 과거의 진실을 알아야,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또 진실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봤다. 그런 모든 일에는 모름지기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14세 너새니얼 윌리엄스가 14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고 나서야, 전쟁기의 혼란스럽고 흐릿한 "워라이트"로부터 벗어나 보다 명징한 진실의 세계에 도달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3년을 끌어서야 비로소 <기억의 빛>을 다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자, 이제 내일 독서모임에 출격해서 또 어떤 내가 미처 만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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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아름다움 - 스물아홉 번의 탱고로 쓴 허구의 에세이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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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카슨의 책들을 잇달아 읽고 있다. 이북의 시대, 언제라도 원하는 책을 집에서 편하게(다만 누워서 보기에는 조금 불편한) 빌려서 볼 수 있게 되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빨강의 자서전>에 이어 <남편의 아름다움>도 바로 주파했다.

 

저자의 그리스 문화, 특히 호메로스에 대한 사랑은 노골적이다. 굳이 넣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은 내가 영원히 알 수 없었던 기원전 413년의 아테네군의 시켈리아 원정 당시 벌어졌던 에피폴라이 전투까지 자신의 작품에 인용하는 발군의 실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조금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단면을 보았다고나 할까. 대단하다 대단해.

 

아름다움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는 고백을 들어 보면, 화자의 남편은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얼굴 뜯어 먹고 살 일 있냐는 속된 표현을 자주 들었지만, 삶에서 어떤 형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걸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데 개개인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이데아란 과연 무엇일까? 모두가 동의하는 그런 수준의 아름다움일까? 현대 문명에서 아름다움조차 획일적으로 평가되고, 또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 화폐가치로 환산되어 거래가 되고 있는 건 아닌지하는 상상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남편의 아내의 몸보다 나폴레옹이 치른 보로디노 전투에 더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놀랍군 그래. 그렇다면 그는 현재가 아닌 과거에 사는 사람일까? 그런데 계속해서 꾸준하게 거짓말을 하고, 바람을 피워대는 걸 보면 또 그런 거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남편은 어제 앤 카슨의 작품에서 한자락 배운 이칸티카(아무리 수행해도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구제불능의 중생) 같은 인물이 아닐까.

 

작가의 남편이 구사하는 거짓말에 대한 현란한 분석이 마음에 들었다. 삶의 대부분이 거짓과 위선으로 점철되어 어느 순간에는 심지어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마구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심지어 상대방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걸, 인지하면서도 내 거짓말을 멈출 수 없다고. 모든 게 거짓이라는 블록으로 쌓아 올린 것이기에, 단 하나의 블록이라도 빠지면 삶 전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어서 거짓말을 계속했다는 정도의 변명이 조금은 위로가 되려나. 모두가 알겠지만, 삶에서 어느 정도의 거짓말의 춤추기가 또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 않나.

 

작가는 스스로를 이른바 ‘비주얼 아티스트’라는 말로 표현했다고 하는데, 책의 곳곳에서 번득이는 앤 카슨의 문장력을 감탄을 자아낼 만하다. 말과 사물의 연결점은 신들의 방식이라고 했던가. 의사소통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인 말이 내 의사에 반해서 상대에게 도달할 때, 난감해 하던 적이 한두번이던가. 존재는 아름다움에 의존한다는 표현도 너무 마음에 들었다. 존재는 아름다움에 이를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추상적 혹은 현실적 아름다움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반복되는 작가의 시적 구사의 모호함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독자의 상상력을 그야말로 무한대로 끌어 올린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제낀 자신감의 표출일까 과연.

 

낮 세계는 밤의 그것에 비해 저속하고 명백하다는 구절도 마음에 들었다. 낮의 빛은 타인은 절대 알 수 없는 아름다운 남편 사이에서 벌어지는 위선과 갈등, 증오를 상징하는 밤의 어둠과 대조되는 이미지를 창조한다. 어쩌면 부부간의 결혼생활이란, 대혼란 혹은 아수라장을 의미하는 팬더모니엄처럼 무질서 가운데 질서를 구축해 나가는 지난한 과정이라는 생각도 잠깐 해봤다. 아름다운 남편이 툭하면 내세우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사랑과 전쟁>을 떠올렸다면 무리수일까나. 그 외에도 아름다움의 주사위나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분절과 편린들이 오간다. 그걸 하나하나 다 이야기하자면 리뷰가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다. 단시간에 과다하게 입력된 정보들을 다루려다 보니 지친다.

 

여하튼 탱고 검색의 알고리즘은 나를 다시 한 번 탱고의 세계로 인도했다. 어려서 좋아하다가 까먹은 <라 쿰파르시타>의 그야말로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 올리며, 야릇하게 간드러지는 연주가 일품이다. 역시 너튜브의 도움으로 반도네그로라는 밴드를 알게 됐는데, 아주 마음에 든다. 앤 카슨은 탱고를 ‘순전한 방탕함’이라고 표현했는데 왠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더라.

 

무엇이 나를 삶의 의지로 그리고 튼튼하게 만드는가?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아마도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 더 나아가서는 욕망이라고. 우리는 나와 구별되는 바깥의 우주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남편의 아름다움>은 다 읽고 나서 리뷰를 쓰다 보니, 읽을 때보다 더 많은 사유를 하게 만드는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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