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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어린 시절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말하는나무 / 2026년 9월
평점 :

다시 존 맥스웰 쿳시의 책을 읽는다. 마지막으로 만난 <폴란드인>에서는 왠지 노작가의 섹슈얼 판타지에 대한 소회가 들어 있는 것 같아서 좀 아쉬웠다. 2013년에 발표된 <예수 삼부작>의 첫 작품인 <예수의 어린 시절>은 주저하면서도 그놈의 옛정 때문에 또 읽게 됐다. 우리네 독서 여정이 늘 그렇지 아니한가.
책의 제목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먼저 말한다, <예수의 어린 시절>에는 전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종교 관련 이런 서사라는 생각을 갖지 말지어다. 그냥 (아마도 스페인?) 어느 곳에 흘러든 난민 시몬과 다비드에 대한 이야기다.
벨스타 수용소를 거쳐 노비야라는 곳에 도착한 시몬과 다비드가 소설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이다. 다비드는 사이드킥 정도고,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과거를 알 수 없는 시몬이다. 굳이 소설을 역사에 연결시키자면, 시몬이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제자였던 시몬 베드로고, 다비드는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두 번째 왕이라는 사실 정도라고 해둘까.
시몬과 다비드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도 아니다. 하지만, 벨스타로 향하는 배 안에서 다비드에 대한 서류는 분실되었고 어머니와도 헤어져 버렸다. 결국 스페인판 "엄마 찾아 삼만리"라고 할까. 그 나라 말도 못하고 일자리도 없으며, 뿌리마저 갖지 못한 시몬과 다비드를 환영해 주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노비야 센터에서 그들에게 임시 거처를 마련해 준 아나에게 시몬을 애걸하지만, 별무소용이다.
난민들을 대하는 현지인들의 냉정한 태도에서 그들의 존재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쿳시 작가는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환기시켜 준다. 임시거처 담당자가 퇴근하는 바람에 노숙을 하게 된 시몬과 다비드. 그들의 처량한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어쨌든 그들은 당국으로부터 정식 거주를 받고, 임시거처에서 지낼 아파트도 공급받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45세라고 자신의 나이를 '정한' 시몬은 부두노동자로 곡물 하역하는 허드렛일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동료들에게 '비예호(늙은이)'라는 별명도 얻는다. 당연히 처음 하는 일은 그야말로 다리가 후둘거리는 고된 노동이었다.
그런 자신의 후견인 시몬의 고된 노동에 5세 꼬마 다비드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나이 아이답게 시몬이란 녀석은 목이 마르고 배고프다며 칭얼거리고, 자신의 안위에만 관심을 갖는 쾌락주의자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부두가의 책임자 알바로는 시몬과 다비드를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소설을 읽으면서 시몬이란 캐릭터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궁금해졌다. 부두 현장에서 왜 크레인을 사용해서 좀 더 효율적으로 곡물 자루를 나르지 않는지 시몬은 알바로에게 말한다. 그런데, 정말 크레인을 도입해서 곡물 자루들을 손쉽게 운반한다면 부두노동자들은 전혀 필요 없게 되는게 아닌가. 스스로 자신의 일자리를 잘라 달라는 건가.
그의 동료 에우헤니오를 필두로 한 다른 동료들은 교육원에서 철학이나 삶에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배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시몬은 그들의 모습에 냉소적이다. 철학 수업에 들어갔다가 바로 튀어나오지 않았던가. 노비야에서의 단조로운 삶은 그와는 도저히 맞지 않는다고 그는 고백한다. 도대체 과거에 무슨 일을 했기에? 라틴어까지 구사하는 실력을 보면 아무래도 그는 지식인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다비드와 우연히 들르게 된 라 레지덴시아라는 곳에서 삼십대 여성 이네스를 만나게 되고 다짜고짜 다비드의 엄마가 되어 달라는 황당한 부탁을 하지 않던가. 놀랍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부탁에 이네스는 다비드의 엄마 노릇을 하기 시작한다.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그냥 그렇게 엄마가 되겠다고 나선다구? 시몬-다비드-이네스로 구성된 유사 가족의 좌충우돌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어쩌면 이런 황당한 전개가 소설을 이끌어 가는 힘일 지도 모르겠다. 아니 도대체 그래서 이야기가 어떻게 되려고 하는 걸까하고 결론이 너무 궁금하지 않은가 말이다. 이제 6살이 되어 학교에 간 다비드는 담임 선생님인 레온과 사사건건 부딪히고, 결국 시몬과 이네스는 학교로 소환된다. 하지만 그들은 결정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으니, 그들이 다비드의 친부모가 아니라는 점이다. 시몬은 파드리스 정도, 이네스는 그럼? 레온 선생님은 수업에 방해가 되는 다비드가 푼토 아레나스에 있는 특수학교에 보내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전인가 시몬은 부두에 도입된 크레인 때문에 사고를 당해서 몸이 온전치 않은 상태에서 푼토 아레나스에 끌려갔다가, 자신이 꿈꾸던 탈출전문가 흉내를 내어 탈출한 다비드 그리고 이네스와 함께 북쪽으로 경찰을 피해 도주에 나선다. 아, 그전에 다비드와 이네스가 사는 집에 변기 고장으로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모두가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어하지만, 생각과 달리 우리의 삶이란 그렇게 비루한 것이라고. 아울러 아무것도 부족한 게 없다는 환상 덕분에 우리의 삶이 더 고단해지는 건 아닌지.
등장하면서부터 문제를 일으켰던 에밀리오 다가가 둥지를 떠나는 다비드에게 선물한 보이지 않는 망토와 마법의 가루 덕분에 화상을 입고 실명의 위기까지 말썽쟁이 꼬마 소년은 위기에 처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세 명으로 구성된 이 유사 가족이 에스트레리타라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결의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그래서 쿳시 작가가 <예수의 어린 시절>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새로운 곳에 정착을 시도하는 난민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이야기? 모든 가치가 붕괴되고, 가족의 가치마저 무너져 내리는 현대에 기묘하게 구성된 유사 가족에 대한 이야기일 지도 모르겠다. 예수 그리스도와 등치될지도 모르는 다비드 아버지 부재에 대한 경우도 그렇다. 시몬 아저씨는 다비드에게 엄마를 찾아 주려고 하지 아버지를 찾아 주거나 자신이 대신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문제적 인간 시몬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캐릭터가 아니다. 다비드 문제가 해결되면, 그는 언제라도 노비야를 떠날 태세다. 그리고 시몬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간이다. 자신과 어떤 접점을 만드는 여성들에게서 욕망을 추구한다. 결국 다비드의 친구 피델(리토)의 어머니 엘레나와 깊은 관계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동료 에우헤니오에게 철학 공부를 하는 대신 여자를 만나는 게 어떠냐는 노골적인 질문도 하지 않았던가. 개인이 삶에서 추구하는 바가 다를진대 시몬은 자신의 기준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그런 스타일의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 삼부작>은 이제 시작이다. <예수의 어린 시절>의 후속편인 <예수의 학창시절>에서 다비드는 댄스 아카데미에서 춤을 배우게 되고, 그 다음에는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된다고 한다. 잔잔하고 소소한 이야기에서 무언가 격정적인 서사로 무대가 이동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전작에 비해 신비스러운 설정에 혼란스럽기도 하다는 평이 있는데 어쨌든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