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를 봤다. 정말 대단했다. 무려 3천년이나 된 이야기를 21세기에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니, 다시 한 번 이야기의 영원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화는 처음부터 배경이 되는 시절이 분명한 마법(apparent magic)의 시대였다고 명토박는다. 그러니 외눈박이 괴물이며, 뱃사람들을 홀리는 사이렌, 인간을 돼지로 바꿔 버리는 키르케와 거인족들의 등장이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아, 그리고 오디시어스의 영민함이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게 될 거라고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가 말했던가.
영화는 오디시어스의 고향은 그리스 서부의 이타카로부터 시작한다.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오디시어스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났는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리고 또 언제 귀향하는지에 대해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타카의 왕비 페넬로페와 재혼하려는 숱한 구혼자들이 '제우스의 법'에 따라 이타카의 궁정에서 매일 같이 파티를 벌이고 이타카의 재정을 고갈시키고 있는 중이다.
오디시어스가 고향을 떠나 있는 동안, 페넬로페는 시아버지의 수의를 짜고 푸는 방식으로 오디시어스의 귀환을 기다리면 자신의 재혼을 미뤘다. 그동안 아들 텔레마코스는 성인에 근접했지만, 여전히 왕국의 후계자가 되기에는 미흡하다. 이런 위기와 갈등 그리고 어머니의 구혼자들에게 당하는 치욕 속에서 텔레마코스는 직접 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 트로이 전쟁에 같이 참전했던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를 찾아나선다. 영화에서 메넬라오스 역은 텔레마코스 역의 톰 홀랜드와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는 "퍼니셔" 존 번설이 맡았다.
자 그러면, 현재 오디시어스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긴 여정의 마지막인 오기기아 섬에서 님프 칼립소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귀향 중에 포세이돈의 아들이자 외눈박이 사이클롭스 폴리메모스의 눈을 찌르고 도주하다가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게 된 오디시어스는 휘하의 부하들을 모두 잃고, 홀로 살아남아 오기기아 섬에 표류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오디시어스는 칼립소가 주는 모든 것을 망각하게 만들어주는 로터스 꽃을 먹고 과거를 모두 잊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를 규정하는 과거는 오디시어스에게 조금씩 트로이 전쟁에 대한 일들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 주었다.
그리스 미케네 문명을 대표하는 미케네 왕국의 왕 아가멤논은 아우 메넬라오스의 마누라 헬레네의 납치로 트로이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진짜 목적은 지중해에서 무역 항로를 장악하는 것이었다고 오디시어스는 분명하게 밝힌다. 그리고 그리스의 제국가들이 트로이 전쟁에 나서지 않는다면 아가멤논의 분노가 당장 이타카에 미칠 것이라고 오디시어스는 출전을 앞두고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에게 말한다.
트로이 원정을 앞두고, 어마무시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아가멤논은 출전에 앞서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산제물로 바치면서,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분노를 사게 됐다. 이 이야기는 훗날 또다른 비극의 씨앗이 된다.
다시 트로이 전쟁으로 돌아가, 엄청난 군세를 자랑하는 함대를 조직해서 트로이 공략에 나섰지만 10년이 넘도록 헬라 원정대는 강대한 트로이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결국 영민한 꾀쟁이 오디시어스의 이른바 “트로이 목마" 작전으로 단숨에 트로이를 함락시켜 버렸다. 이타카에서 안티노오스 대신 징병된 시논의 죽음으로 거의 물에 잠기다시피 했던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목마는 트로이 성안으로 끌려 들어간다.
바닷가에 버려진 목마의 이미지는 왠지 모르게, <혹성탈출> 엔딩신에 등장한 자유의 여신상을 연상시킨다. 놀란 감독의 해당 영화에 대한 오마주로 봐야 할까. 곧 불타고 파괴될 트로이 문명에 대한 연출자의 계시였는지도 모르겠다. 목마에 갇힌 이들 가운데 두 명이 익사하는 와중에서도, 꿋꿋하게 버틴 헬라 특공대들은 결국 트로이 성내로 침투하는데 성공한다.
오디시어스와 메넬라오스가 주축이 된 비밀 특공대들은 성벽의 파수를 보던 트로이 병사들을 해치우고, 성벽 밖에서 대기 중이던 아가멤논의 군대들을 성으로 불러 들이는데 성공한다.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패배한 헬라 군대의 공물이라는 목마는 트로이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된 셈이었다. 어쩌면 헬라 문화를 공유하는 이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제우스의 법'의 붕괴가 이제 막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후, 이타카 페넬로페와 메넬라오스가 걱정하던 이른바 바다민족(people from sea)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세력들이 등장해서 찬란했던 미케네 문명을 끝장내고, 동방의 힛타이트까지 아우리는 청동기 시대(Bronze Age)를 종식하고 400년 간의 암흑기가 도래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불타던 트로이로 돌아와, 장장 10년간에 걸친 오랜 전쟁으로 분노에 차 있던 헬라 원정대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슬로우컷으로 잡은 신전 앞에서 무력하게 불타 오르던 트로이와 마구잡이로 트로이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하던 장면을 바라보던 오디시어스의 공허한 눈길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트리오 낙성에 앞서, 가장 먼저 성으로 진입한 이가 압도적 존재감의 아가멤논이었다. 헬라 원정대의 총사령관이 가장 위험한 순간에 진두 지휘를 했다는 점도 놀랍지만, 그만큼 존재감도 막강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오랜 원정을 마친 헬라 원정대는 이제 고향에 돌아갈 일만 남았다. 하지만 운명을 거스르는 자, 오디시어스의 귀향이 만만하지는 않았다. 미션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내러티브는 어쩌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출발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서사에서 반드시 필요한 어떤 갈등의 발생과 미션의 해결 그리고 엔딩은 결국 귀향으로 귀결되지 않는가 말이다. 일이 끝났다면, 집으로 돌아가라. 호메로스는 3천 년의 서사시에서 그 원형을 제공한다.
오디시어스가 마주하게 되는 첫 번째 시련은 사이클롭스 폴리메모스와의 조우였다. 이타카 원정대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물과 식량 같은 보급품이었다. 오디시어스는 필요하면 빌리거나 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빼앗았다고 회상한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 그는 남쪽으로 가면 무서운 것을 만나게 될 거라는 촌로의 말을 들었다.
어느 외딴 섬에서 양치는 괴물 폴리메모스를 만나 동료들을 잃은 오디시어스는 기지를 발휘해서, 폴리메모스의 눈을 찌르고 갇혀 있던 동굴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동료들을 두 명씩 잡아 먹은 다음에야, 숙면을 취하는 괴물이라니. 나중에 아이아이에 섬에서 만나게 되는 키르케가 오디시어스에게 한 말처럼 현지인의 눈에 오디시어스의 병사들은 친절한 나그네가 아니라, 약탈자로 비춰지지 않았을까. 스스로를 문명인이라고 생각하던 헬라인들이 생존을 위해 저지른 일들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이 폴리메모스와 다를 게 뭐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는 죽은 동료들의 복수를 위해 화살 한 대 정도를 날리는 것으로 끝나지만, 원전에서는 자신을 노바디(우티스)라며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난 오디시어스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바람에 분노한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트로이에서 얼마 걸리지 않는 이타카로 바로 가지 못하고 오랜 시간에 걸친 방랑길에 내몰리게 된다. 결국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자기 꾀에 넘어간 셈이라고 해야 할까.
라이스트리고네스 섬에서는 거인족들을 만나 그들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한다. 결굴 3척의 배 가운데, 2척이 파괴되고 오디시어스 일행만 간신히 살아남아 탈출한다. 부하들은 오디시어스의 지도력에 반감을 품기 시작하고, 거의 반란 직전까지 내몰린다.
그 다음에 아이아이에 섬에서는 전설의 마녀 키르케와 마주하게 된다. 에우릴로코스를 필두로 한 부하들은 오두막에서 음식이 풍부하다는 키르케의 말에 속아 그녀가 내준 음식을 먹다가 그만 모두 돼지로 변해 버렸다. 그전에 보면, 오두막 주변에 병사들의 갑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걸 보고서도 무시했던 걸까. 의심하고 영민한 오디시어스는 키르케가 제공하는 음식을 먹지 않고, 위기에서 벗어나고 돼지로 변한 부하들도 구할 수가 있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드를 모두 다루려고 하다가, 순간 지쳐 버렸다. 이제부터는 그냥 내가 느낀 점들을 시간 순서에 상관없이 기록하고 마무리지어야겠다.

<일리아스>의 후속편에 해당하는 <오디세이아>는 영웅 오디시어스가 만들어낸 10년 전설로 시작해서, 또다른 10년에 걸친 고난의 방랑길 그리고 귀환해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를 핍박하던 원수들에 대한 복수에 이르는 거의 완벽한 서사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마법의 시대가 배경이라 많은 신들이 등장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젠데이야가 맡은 신계 보다는 인간계에 보다 더 가까운 인본적인 모습의 아테나 여신의 구현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 점에서 나그네로 변장한 신들을 대접하라는 제우스의 법이 그 시절에 통용되었는지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모든 신탁에 등장하는 터부(금기)들은 모두 깨질 수밖에 없고, 그에 따른 처벌도 피할 길이 없다는 점도 새삼 깨닫게 됐다. 태양신 헬리오스 섬에서 신성한 소들을 잡아 먹지 말라고 오디시어스가 그렇게 신신당부했지만 부하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허기를 못이겨 몰래 소를 잡아 먹었다가 결국 바다에서 모두 망자가 되지 않았던가.
오기오기아 섬에서 칼립소와 보낸 7년의 시간에 대한 서사는 왠지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탄호이저 행성에서의 전투를 회상하며 쏟아지는 빗속에서 생명의 끝을 다해 가던 로이 배티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모든 세상의 번뇌를 잊고, 자신과 영원히 살자는 칼립소의 유혹. 하지만 그동안 숱하게 신의 분노를 경험한 오디시어스는 '영원'은 신의 영역이라며 낮은 자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구한 난파한 뱃조각들로 만든 뗏목을 타고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들을 참회하며, 운명을 거스른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이번에는 운명에 자신을 내맡긴다. 어쩌면 오기오기아 섬에서 칼립소와 별다른 일 없이 행복하게 노년을 보내는 것이 오디시어스에게는 행복할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내 운명을 거스르던 오디시어스는 귀향이라는 자신의 마지막 선택지를 순순히 받아 들였다. 테이레시아스의 신탁대로, 에우릴로코스를 필두로 한 오디시어스의 모든 동료들은 모두 바다에서 죽었지만 결국 영웅 오디시어스는 살아서 고향 이타카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뗏목 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오디시어스의 모습은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탐 행크스가 떠올랐다.
아들 텔레마코스를 암살 위기에서 구해내고, 마침내 이타카에 도착한 오디시어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어릴 때부터 그를 따르던 늙은 사냥개 아르고스는 거름더미 위에서 주인의 귀환을 알아보고 반가움에 꼬리를 흔들며 생을 마친다. 이 에피소드를 회화로 표현한 그림에 대한 설명을 일전에 우연히 본 것 같은데, 기시감 때문인지 확실하게 내 기억 속에 각인이 되었다.
영화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오디시어스의 분노에 찬 복수극은 트로이 멸망의 정확한 재현이었다. 아울러 당장은 아니지만, 곧 닥쳐올 바다민족의 예고편에 해당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놀란 감독은 오디시어스가 텔레마코스에게 왕의 자리를 양위하고, 아내 페넬로페와 함께 서쪽으로 트로이 전쟁과 오랜 방랑길에서 저승으로 간 망자들을 위로하러 역시 배를 타고 떠나는 것으로 영화의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오디세이>를 아이맥스로 감상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안되다 보니 돌비시네마 애트모스 관람으로 대신했다. 확실히 평범한 스크린과 차이가 있었고 사운드는 압도적이었다. 12채널 서라운드 시스템은 영화에 몰입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특히 오디시어스 일행이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바다에서 대결을 벌이는 장면에서는 그야말로 좌석이 흔들릴 정도였다. 앞으로 아이맥스가 안되면 최소한 돌비시네마 애트모스로는 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인류사에 길이 기억될 고전에 대한 크리스토퍼 놀란 스타일의 재해석은 소문대로 대단했다. 모두가 아는 익숙한 내러티브를 배경으로 유명한 배우들을 기용해서 거하게 벌인 소문난 잔치 속에서 유한한 필멸의 존재인 인간,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가 있었다. 나는 운명에 거스르는 자인가, 아니면 바람 부는대로 순응하는 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