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빛
마이클 온다치 지음, 아밀 옮김 / 민음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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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무려 넉 달 만에 만나게 되는 달궁 모임의 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원래 지난달에 보기로 되어 있었는데, 날짜가 좀 밀렸다. 안도했다고 해야 하나. 요즘 도통 책읽지 못하고 있던 차에, 아 이제 진짜 독서 모임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마이클 온다치의 <기억의 빛>을 읽어야 하는데. 그러다가 지난주에 느닷없이 앤 카슨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부랴부랴 앤 카슨의 책들을 좀 읽느라 <기억의 빛> 완독이 좀 늦어졌다. 그래도 어제 다 읽고 지금 이렇게 리뷰를 쓰고 있는 중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이클 온다치의 <기억의 빛>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가 결국 3년 전에 출간이 됐고, 바로 산 기억이 난다. 그리고 좀 읽다 말았다. 나중에 다시 읽기 시작했다는 어느 순간 멈췄다. 그런 다음에는 책도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서 한참 찾았다는. 다행히 책탑 가운데서 <기억의 빛>을 찾아내고 3번 도전 끝에 완독했다.

 

사실 미스터리-스릴러 형식의 이야기에 좀처럼 초반에는 집중하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소설의 화자는 너새니얼 윌리엄스. 1945년에 시작되는 1부에서 그가 14살 정도라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너새니얼(별명 스티치)은 1931년생 정도 되는 것 같다. 아직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잡지 못하고 있던 전간기에 태어난 모양이다.

 

1부는 대영제국을 초토화시킨 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시작된다. 어느날 아버지와 어머니 로즈가 멀리 싱가포르로 떠나게 된다는 선언을로 소설은 시작된다. 그럼 레이철(렌) 누나와 나는? 엄마의 친구라는 나방 아저씨(월터)가 어린 남매를 돌보게 된다고 엄마는 말한다. 어째 시작부터 좀 찜찜하지 않은가.

 

지금의 상황도 그렇지만, 나이 어린 남매를 낯선 이가 돌본다는 게 말이 되는가. 어쨌든 엄마와 아빠는 그렇게 영국을 떠나 멀리 극동의 아시아로 떠나고, 이제 나방 아저씨와의 낯선 삶이 계속된다. 그리고 루비니 가든의 윌리엄스 남매의 집에는 나방 아저씨의 친구들로 곧 가득차게 된다. 민속지학자라는 올리브 로렌스와 아무래도 과거가 의심스러운 "화살"을 필두로 다양한 인물들이 레이철과 너새니얼의 삶 속에 끼어든다.

 

아마 내가 첫 두 번의 책읽기에 실패한 이유는 이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낯선 상황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 고비를 넘기면서 나의 책읽기는 계속된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기억의 빛>은 화자인 너새니얼의 성장소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재 가운데, 소년 너새니얼은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크라이테리언에서의 힘겨운 나날도, 그리고 또 우연히 알게 된 애그니스와의 철부지 사랑도 다 어른으로 가는 과정에서의 일탈에 가까운 일종의 모험이 아니었을까.

 

 

너새니얼의 청소년 시절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바로 화살이었다. 경주견과 도자기 밀수, 위조와 사기 등의 경력으로 점철된 인물이 바로 화살(Tarter)였다. 모리스를 몰며 수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던 그의 매력에 너새니얼 역시 빠져든 모양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너새니얼은 "그리운 밤의 여정"이라는 말로 그 시절을 기억한다. 싱가포르 유니레버로 떠난 아버지의 부재 가운데, 어쩌면 화자는 화살에게서 father figure 같은 감정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애인 애그니스에게 자신의 아버지로 소개도 하고. 천부적 거짓말쟁이였던 화살은 물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소설의 초반부 등장하는 schwer(슈버)라는 키워드는 너새니얼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상징으로 읽힌다. '어렵다', '무겁다'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궁극적으로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경고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는 말일까? 왜 윌리엄스 남매는 안전하지 못한 상태라는 걸까. 그것은 바로 어머니 로즈의 원죄로부터 시작됐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된다.

 

그러다 우연히 엄마 로즈의 트렁크를 발견하게 된 나는 엄마가 싱가포르로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미스터리한 서사는 힘을 얻기 시작한다. 너새니얼은 언젠가부터 누군가의 추격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결국 사단이 나고 만다. 1부 엔딩에서 모종의 인물들에 납치되었다가 풀려나는 과정에서 이 모든 일에 엄마 로즈가 과거에 정보국 소속으로 비밀업무에 종사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윌리엄스 남매를 보호하던 나방 아저씨가 죽었다는 사실도.

 

<기억의 빛>의 진짜는 2부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전에 진지하게 설치해둔 떡밥들을 회수할 차례가 돌아왔다. 납치 사건이 발생하자 그제야 나타난 엄마를 따라 레이철과 너새니얼은 보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레이철은 연극 무대로, 너새니얼은 엄마의 유전자를 좇아 정부 기록보관소에서 일하게 된다. 그 때는 이미 어머니도 돌아가신 후였다. 어머니의 사인에 대해서는 나중에 드러난다.

 

너새니얼의 지난 10년은 어머니의 종적을 추격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전쟁 중에 화재감시원으로 일했다던 어머니가 전후에 비밀 업무에 적극 가담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전후 특히 1945년부터 1947년까지 유럽의 각지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전투를 필두로 해서 각종 역사 지우기 작업에 어머니가 로즈가 개입했다는 놀라운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어머니 팔에 남은 흉터들도 그 때의 흔적이었으리라.

 

화살과 그의 애인이었던 올리브 로렌스 그리고 이엉장이의 아들 마시 펠론 등도 모두 숨겨진 영웅들이었다고. 화자의 말에 의하면 진짜 영웅들은 어디서 자신의 공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법이다.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사에서 자신의 임무가 끝나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조용한 삶을 살았다. 진짜 영웅들은 그런 거라고. 어머니 로즈, 시대를 풍미한 코드명 비올라라고 알려진 그녀는 시골 마을의 온실에서 자신이 기다리던 운명을 맞았다.

 

화자는 결국 그리운 밤의 여정을 함께 했던 추억의 화살, 노먼을 찾아가지만 현재의 화살은 과거와 완전히 단절되어 소피라는 이름의 아내와 딸과 함께 살고 있다. 너새니얼과 달리 화살은 과거에 대해 아예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결국 너새니얼은 돌아서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찾던 이와 원하던 해답을 얻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너새니얼은 과거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출발에 나선다.

 

마이클 온다치의 <기억의 빛>은 후반으로 갈수록 몰입도를 더해가는 그런 맛이 있는 소설이다. 그의 대표작 <잉글리시 페이션트>처럼 전쟁이라는 주제에 파생된 이야기는 윌리엄스 가정에서 출발해서, 아버지-누나 그리고 어머니를 차례로 분사시키고 난 뒤 우주로 향하는 로켓처럼 엔딩으로 달려 나간다. 어떤 과거의 사실들은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동시에 현실에 충실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또 과거의 진실을 알아야,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또 진실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봤다. 그런 모든 일에는 모름지기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14세 너새니얼 윌리엄스가 14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고 나서야, 전쟁기의 혼란스럽고 흐릿한 "워라이트"로부터 벗어나 보다 명징한 진실의 세계에 도달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3년을 끌어서야 비로소 <기억의 빛>을 다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자, 이제 내일 독서모임에 출격해서 또 어떤 내가 미처 만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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