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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지
조세핀 하트 지음, 공경희 옮김 / 녹색광선 / 2026년 6월
평점 :
오래 전에 루이 말 감독이 연출을 맡고 제레미 아이언스와 줄리엣 비노슈가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 <데미지>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정말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조세핀 하트의 원작 소설로 <데미지>를 만나게 됐다. 작가는 파멸의 에로티시즘과 채워지지 않은 갈망에 대한 서사의 파편들로 독자들에게 '데미지'를 선사한다.
소설 <데미지>의 줄거리는 정말 소설스럽다.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중산층 가장이자 의사, 국회의원인 스티븐 플레밍의 삶에 어느 날 재앙의 기운이 내뻗친다. 그 주인공은 바로 아들 마틴의 약혼녀 안나 바턴. 자신이 아닌 것 같은 삶을 살아온 스티븐에게 안나는 파멸의 안내자였다. 이미 영화를 통해 알고 있던 이야기였지만, 조세핀 하트가 들려주는 소설의 플롯은 또 다른 차원의 충격이었다. 더 큰 문제는 스티븐이 안나와의 관계가 플레밍 집안에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이라는 걸 빤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안나에게 빨려 들어갔다는 점이다. 그것은 마치 재난에 가까운 결말이 예견된 그리스 비극의 재현이라고 해야 할까.
책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추구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은 도덕의 굴레에서만 가능한 걸까?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와 관계를 갖는단 말인가. 도대체 이 스티븐이란 작자는 양심과 도덕은 없는 사람이라는 말인가. 스티븐만큼이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인물이 바로 안나였다. 물론 어려서 사랑하는 오빠 애스턴의 비극적 죽음과 그에 따른 부모의 이혼 등 그녀가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가 남달랐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한 집안의 근간을 송두리째 무너뜨려 버리는 건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스티븐과 안나는 만나는 순간부터 위선이라는 가면을 써야 했다. 사랑하는 아내 잉그리드, 전도유망한 청년 저널리스트 마틴, 역시 빼어난 재능의 샐리 등 삶의 오점 하나 보이지 않는 중산층 가정에 외도와 파격적 불륜의 그림자가 엄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종착역에는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관계의 파탄이 대기 중이다. 조세핀 하트는 여성 특유의 세심한 감성으로 일그러져 가는 부부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잡아낸다.
스티븐은 위선자다. 철저하게 사회에서 인정받는 남편이자 자상한 아버지로 위장한 스티븐은 아들의 연인을 탐하는 사악한 욕망에 사로잡혀 “영원에 존재한 단 한 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그에게 안나는 자기 욕망의 대상이고, 노예일 뿐이다. 일반적 상식의 사랑을 파괴하다 못해 일탈의 극치를 보여주는 소설 <데미지>를 읽으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다. 그들의 사랑을 연민의 시선으로 보기엔 솔직히 말해서 역부족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기분이 얼떨떨하다. 조세핀 하트는 <데미지>로 충격적인 데뷔를 했다고 한다. 스티븐과 안나의 파멸적 사랑에 대한 평가만큼이나 작품 자체에 대해서도 평가를 유보해야 하는 게 아닌지 얼얼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