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바꾼 사진들 - 카메라를 통한 새로운 시선, 20명의 사진가를 만나다
최건수 지음 / 시공아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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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재밌다. 사진을 바꾼 사진들이라. 세상을 바꾼 사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자꾸만 제목을 들여다보게 된다. 30년 넘게 사진계에서 활동한 최건수 작가의 사진 이야기에는 묘한 울림이 있다. 이제는 사진의 영역을 넘어 기획과 평론에까지 진출한 노련한 사진작가의 이야기를 펼친다.

일단 여느 사진작가의 에세이와 달리 사진보다 글이 많다. 사실 좀 놀랐다. 보통 사진가는 사진으로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아마 소설가가 문장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표현을 하는 것처럼 사진가의 책은 글보다 사진이 더 많을 거라는 예단이 좀 성급했다는 느낌이다. 최건수 작가는 사진을 전복시키겠다는 열망을 드러낸 20명의 작가의 작품에 초점을 맞춘다.

통증의 세계관이라는 타이틀을 단 강홍구 작가의 사진에서는 한때 서구에서 유행했던 해체주의 철학 사조의 잔향을 느낄 수가 있었다. 개발만능주의 사고에 빠진 토목공화국의 현실을 대변하는 파괴와 해체를 피사체로 삼은 김포공항 부근의 오쇠리 연작에는 “소음”으로 야기된 이주와 보상이라는 물질주의가 엿보인다. 천박한 자본주의 개발논리에 내몰려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의 아우성이 일견 밋밋한 보이는 사진을 통해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데비한이라는 작가의 비너스 연작도 흥미진진하다. 초반에 등장하는 비너스 석고상을 조각하는 손을 찍은 사진에서는 “피그말리온”이 연상된다. 분명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모방한 <생각하는 비너스>는 매력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부조화가 느껴진다. 바로 그 다음에 등장하는 <좌삼미신>은 마치 동네 점방에서 고스톱이라도 치기 위해 모인 동네 아낙들의 대화처럼 보였다. 아 내가 너무 속되게 사진을 보는 걸까? 최건수 작가가 표현한 대로 전복적인 유머와 시각적 즐거움이 느껴지는 유쾌한 사진이었다.

사실 예술에서 모더니즘의 개념조차 모르는 무지한 독자에게 조각, 회화 그리고 사진을 오가는 탈장르적인 시도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시도였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이스라엘 출신의 에프라임 키숀은 일찍이 고전 회화예술만 예술로 보고, 정말 이해불가의 현대예술은취급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지 않았던가. 키숀처럼 그렇게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상상을 탐하는 사람들>의 상당 부분을 들여 소개한 작가들의 작품 세계에 공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세상을 읽는 사람들>도 평범한 독자의 수준에 맞는 것도 아니라는 느낌이다. 사진의 기능을 정물이나 배경 혹은 사건의 기록 정도로 치부해온 범인(凡人)에게 최건수 작가가 소개한 사진작가들의 작품은 하나 같이 어려울 따름이다. 그나마 염중호 작가의 무릉기행 시리즈 정도가 이해가능 범주에 들었지 싶다. 최건수 작가의 ‘부유하는 기표’라는 기호학적 시도는 들을수록 머리가 지끈거린다. 보면 볼수록 알쏭달쏭해지는 사진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상상됐다.

아마 사진 전시회에 가서 사진 밑에 걸린 설명이 없다면 “도대체 뭐지?”라는 말을 연발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알쏭달쏭하고 난해한 사진과 그에 대한 미학적 설명에 좌절했다. 피상적으로만 알던 사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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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와인에 빠져들다
로저 스크루턴 지음, 류점석 옮김 / 아우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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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출신의 철학자이자 미학 교수인 로저 스크루톤의 <철학자, 와인에 빠져들다>는 철학의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를 패러디한 <나는 마신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철학자의 와인 가이드>라는 멋진 제목을 원제로 하고 있다. 이 책을 그냥 원제목대로 했으면 어떨까 하는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칠레와의 FTA로 칠레에서 난 질 좋고 값싼 와인을 많이 접할 수 있을 거라는 어느 위정자의 말을 듣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어쨌든 간에 여전히 와인은 보통 사람들이 접하기 쉽지 않은 술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보다는 훨씬 더 나은 조건에서 다양한 와인을 접할 수 있는 로저 스크루톤 교수가 부러웠다. 자신의 전공인 철학은 물론이고, 와인에도 조예가 깊어서 와인 시음회에 초청될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로저 스크루톤은 권두에서 쾌락주의자로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와인/술을 즐기자는 애주가를 위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역시 술을 마실 줄 아는 풍류가의 호방함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그의 철학은 어떨까? 애주가라는 예상을 깨고(?) 철학에 대한 이해와 분석의 폭도 대단하다.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서양 고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에서 시작한 그의 이야기는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작가 스스로 걸출한 영웅이라고 평하는 헤겔과 이태리산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를 연결시킨다. 내가 아는 와인이라고는 고작 좋아하는 독일산 리슬링, 카베르네 쇼비뇽, 메를로 정도인데 정말 낯선 와인의 행진이 이어진다. 도대체 누가 헤겔이 역사에서 퍼 올린 인간 시대정신(Zeistgeist)의 시대적 소명을 토스카나산 와인을 마시는 이유에 대입하는 내공을 시전할 수 있단 말인가!

스크루톤은 또한 음주의 기원에 대해서도 빠뜨리지 않는다. 일찍이 인류는 음주를 신을 맞이하는 제의의 한 종류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흥으로 즐기는 술이 고대에는 접신의 한 가지 방법이었다는 분석이다.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이 뒤따르는데, 음주한 인간의 추태를 인간행위가 아닌 신의 행위로 돌렸다고 한다. 유레카! 이보다 더 애주가들을 위한 멋진 철학적 해석이 있을쏘냐.

본격적인 <나는 마신다>편에서는 자신의 음주 입문을 소상하게 독자에게 전달한다. 엘더베리 과실주로 술의 세계에 들어선 스크루톤이 어떻게 해서 바쿠스의 사제가 되었는지에 대한 소개가 이어진다. 학창시절 그의 동료였던 아일랜드 출신 데스먼드와 지도교수 피킨 박사 그리고 왓킨 박사와 함께 했던 환상적 시절에 대한 향수도 빠지지 않는다.

로저 스크루톤은 어떻게 보면 일견 고리타분해 보이는 철학이라는 주제에 와인이라는 흥미진진한 소재를 곁들여서 독자를 유혹한다. 그의 프랑스 와인 기행을 읽으면서 정말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척의 거리에서 다양한 음식 문화를 발전시켜온 유럽에 사는 이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즐거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도국가의 시민으로서는 정말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프랑스 와인의 예찬론자 스크루톤 교수가 더 얄미웠다 보다.

자, 음주의 기원을 밝혔으니 이제는 와인의 기원을 들려줄 차례다. 소아시아를 원산지로 하는 포도를 원료로 하는 와인은 인류 문명만큼이나 오래됐다고 한다. 와인애호가로서 작가가 사랑해마지 않는 프랑스 와인 외에도 레바논, 그리스 그리고 현대에 가장 많이 소비되는 대중적인 캘리포니아 와인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와인 생산지에 대한 정보를 들려준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대형마트나 와인전문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피노 누아르”가 신세계 포도와 구세계 포도가 이종교배로 만난 새로운 품종의 포도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호주산 와인 편에서는 오래전에 들렀던 애들레이드 와인 투어에서 멋도 모르고 오크통에서 공짜로 한잔씩 제공하는 와인을 사양하지 않고 마셨다가 은근하게 취했던 추억도 떠올랐다. 잊을 수 없는 어느 낮술의 기억이다.

첫 번째 장에서 와인에 대한 개인의 실존적 체험을 들려주었다면, 두 번째 장에서 로저 스크루톤은 보다 “의식과 존재”라는 철학적 논제를 다룬다. 객체에 포위된 세계에서 진정한 자아에 대한 질문이 이어진다. 그리고 의식이 주목하는 대상 끝에서 한 잔의 술과 마주치게 될 것이라고 이 와인애호가는 선언한다. 아울러 의식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한다. 역시 단순하게 술로서 와인을 다룬 부분에서는 비교적 쉬웠지만, 의식과 존재론에 들어오면서도 다시 대취한 다음 날의 숙취 같은 기분이 느껴진다. 어렵다 어려워.

로저 스크루톤이 수년간의 사색의 결과 도달한 내가 의식의 총체라는 의견에는 공감한다. 어떻게 보면 교만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나야말로 이 우주의 중심이 아닌가. 물론 그 점이 현실의 그것과 동조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 다음에는 이어지는 내가 자유로운 의지의 주인인가에 대해서는 좀 생각을 해봐야할 것 같다. 와인보다 맥주를 더 좋아했던 쇼펜하우어가 철학사에서 끝없는 ‘분란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저자의 단언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과학적 탐구가 필요한 게 아닐까?

청교도적인 금주운동에 대해서도 저자는 날카로운 일침을 가한다. 일찍이 사도 바울이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도반 디모데에게 너무 물만 마실 것이 아니라 와인도 좀 마시라는 말이 성경에 담겨 있다고 하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과유불급이라는 격언처럼 와인을 마시는데 있어 중용의 미덕도 빠뜨릴 수가 없다. 한 잔 술의 담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면 와인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와인 옹호론에 흠뻑 취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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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레드 라인
제임스 존스 지음, 이나경 옮김, 홍희범 감수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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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戰史)에 어려서부터 관심이 많았다. 특히 타임라이프-한국일보에서 나온 <제2차 세계대전>은 그야말로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 처음에 10권으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헌책방을 순례하며 이가 빠진 것들을 사 모았다. 이 방대한 전사 시리즈를 통해 유럽전선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전쟁의 향방을 갈랐다면, 거의 미국이 도맡아서 전쟁을 치른 태평양전선에서는 과달카날 전투(Guadalcanal Campaign)가 승부의 분수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바로 이 전투를 주제로 한 전쟁문학의 전설이 바로 제임스 존스의 원작 <신 레드 라인>이었다. 이미 두 번이나 영화화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작품이라고나 할까.

미국 전쟁사에서 한 획을 그은 과달카날 전투에 육군 25사단 보병으로 직접 참전했던 제임스 존스의 일본군과 치열했던 전투에 대한 묘사는 상상 그 이상이다. 사실 본격적인 전투가 개시되기 전까지 소설에 몰입하기란 쉽지 않다. 조국을 지킨다는 이유로 징집되거나 혹은 자원해서 전쟁터를 찾은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차분하게 소개된다. 일견 따분해 보이는 초반부는 작가 제임스 존스가 시연하는 본격적인 전투 이야기에 앞선 워밍업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1942년 11월 10일, 남태평양의 외딴 섬 과달카날에 상륙한 찰리 중대원들의 심리는 복잡하다. 어떤 이는 영웅주의에 빠져 피와 살이 튀는 전쟁터를 낭만적으로 상상하고, 집에 남겨 두고 온 아내가 바람날까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전직 장교가 있는가 하면 지긋지긋한 취사병 생활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소총수로 활약하기 위해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을 누비는 얼치기 쇼비니스트도 있다. 사병들의 안위는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업적을 위해 병사들을 사지로 내모는 이기적인 지휘관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찰리 중대의 수장 버거 스타인 대위는 유대인이라는 콤플렉스를 안고 시시때때로 자신에게 반항하는 병사들을 이끌고 버마, 필리핀 그리고 싱가포르 전장에서 단련된 역전(歷戰)의 일본군을 상대한다.

스타인의 찰리 중대원들의 겪어야 할 고초는 일본군이 쉴 새 없이 쏘아대는 총탄과 박격포탄 뿐만이 아니다. 오한과 고열로 야기하는 말라리아도 보이지 않는 적이다(실제로 8,000여명의 병사들이 말라리아에 시달렸다고 한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극한의 상황에서 병사들 간의 동성애마저 등장한다. 열대의 태양이 작열하는 전장에서의 타는 듯한 갈증 때문에 기절하는 병사가 속출한다. 210고지를 선점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한 일본군으로부터 기관총탄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대대장 톨 중령은 부하 중대장들을 닦달해서 어떻게든 고지를 점령하라는 무모한 명령을 내린다.

순간 버거 스타인 대위는 톨의 명령 때문에 지난 2년간 동고동락한 자신의 병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항명한다. 상명하복이라는 절대적인 명제 아래서 훈련된 군조직의 작은 균열이 드러난다. 병사들이 간절하게 원하는 물 보급도 없이, 그저 명령대로 돌격해서 적의 진지를 유린하라는 현실을 무시한 명령에 스타인 대위는 어이없어 하지만 어느새 휘하 병사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톨 중령의 명령이 실행되었다는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나폴레옹 최후의 전투였던 워털루에서 그루쉬가 내린 1초의 결정이 전 유럽의 역사를 바꾸었듯이, 과달카날의 전장에서도 광기와 우연의 역사는 반복된다.

제임스 존스는 잔혹한 전장의 현실을 가감 없이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곧 죽을 이에게 시간낭비할 것 없다는 구절은 죽음과 삶을 가르는 전장에서 함께 한 동료의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마저도 그대로 무장 해제시켜 버린다. 타인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받는 병사가 아닌 인간의 이중성도 그대로 분출한다. 끔찍한 비명을 질러대며 죽어가는 동료에게 모르핀 주사를 건네주기 위해 사선을 넘는 그네들의 모습은, 아름답게 내리 비치는 남태평양에서 맞이하는 석양만큼이나 이질적이다.

일본군의 잔학행위에 치를 떨며 필리핀 바탄에서의 ‘죽음의 행군’을 기억해내고,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는 미군이 “누렁이” 포로들을 잔인하게 처치하는 장면 역시 비극의 확장이다. 수류탄 하나 제대로 던지지 못하는 얼치기들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범죄인 같은 호모 사피엔스를 학살하는 장면은 상상을 초월한다. 연이은 전투라는 초강도 폭력에 무감각해져 버린 찰리 중대원들이 살인의 쾌감에 빠진 기계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은 갈수록 비참해지는 전쟁의 현실과 궤도를 같이 한다.

그렇게 제임스 존스는 전쟁이 보여 줄 수 있는 최악을 통해 독자에게 반전이라는 명확한 메시지를 날린다. 이런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과연 그 누가 인간다움을 유지하면서 스스로를 문명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단순히 이국적 풍경을 배경으로 한 낭만적인(?) 전투나 극악한 일본군을 무찌르는 미군의 영웅담을 기대하고 <신 레드 라인>을 펼쳤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이 소설은 조국을 위한 전쟁이라는 프로파간다와 거대한 폭력 아래 꽃다운 나이에 스러져간 청춘들에 대한 어느 베테랑의 절절한 오마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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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뉴욕
이숙명 지음 / 시공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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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회사를 그만 두고 유럽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아마 5월 달이었던 것 같은데 의외로 나와 비슷한 루트를 밟아 장거리 여행을 떠난 이들이 많았다. 비슷한 고민을 가진 이들과의 만남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먹고 살 수 있는 걱정만 해결된다면 몇 달 정도 그렇게 외유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럴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겠지만. <어쨌거나, 뉴욕>의 저자 이숙명 씨는 그런 점에서 ‘삽질러스’의 선구자라고 할 수가 있겠다.

모두 열 개의 챕터로 구성된 빅애플 체험기의 첫 장을 선구자 삽질러스는 오롯하게 자신이 어떻게 해서 십년간 밥벌이를 하던 잡지사를 과감하게 때려치우고 뉴욕으로 떠나게 되었는지 소상하게 심드렁한 독자에게 알려준다. 아, 이거 호기심이 점점 달아나기 시작하는 걸. 내가 원한 건 그녀의 지겨운 잡지사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흠……. 하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바로 원하는 뉴욕 이야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첫 번째 빅애플 스토리는 그녀가 어떻게 해서 맨해튼에서 아파트를 구하다가 프랑스 계집애에게 그야말로 피같은 종자돈 2,400달러를 털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눈물겨운 인스톨이다. 그녀의 주장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도움이 있는 법.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NYPD의 도움으로 1/3 가량을 돌려받고 나머지는 퉁쳐야 했다는 도시 전설로 그녀의 활극이 시작된다.

저자는 거창하게 자아를 찾거나, 단시간 내에 영어를 마스터하겠다는 그런 허황된 꿈을 들려주지 않는다. 그저 무료한 삶을 살면서, 얹혀살게 된 룸메이트 보따리 장사와 뉴욕을 헤집으면서 쇼핑질을 해대고, 물 좋다는 클럽 순회를 하는 그야말로 시간 죽이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어쩌면 그런 도전도 그녀 나이에나 가능할지 모르겠다. 손에 쥔 것이 많을수록 쉽게 떠날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녀가 빅애플의 클럽에서 직접 체험한 접신인지 무당 내림굿 댄스인지 구분이 안가는 이야기에서 그야말로 빵 터졌다. 아무래도 다년간의 잡지사 경험이 축적된 모양인지, 어느 시점에서 독자를 현혹해서 웃음을 터지게 해야 하는지 잘 아는 고수의 솜씨다. 동료 룸메이트들을 한국으로 떠나보내고 새로 살 집을 구하는 장면에서는 오래 전에 해마다 아파트를 구하느라 고생한 추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정말 여름만 되면 이사 가기에 앞서 서식처를 구하느라 밤잠을 다 설칠 정도였다. 물가와 집세 비싸기로 유명한 맨해튼에서 1,300달러 우리 돈으로 하면 1,500,000원이나 되는 거금이 든다니 참 놀랍기만 하다. 그렇다고 해서 뉴욕을 꿈꾸는 청춘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호사스러운 생활을 한 것도 아니고.

역시 전공을 살려 참가했던 셀렙의 화보촬영과 인터뷰 이야기는 그야말로 “프로페셔널”스럽다. 서당개가 풍월을 세 번은 더 읊었을 시절을 유수의 잡지사에서 보낸 베테랑답게 현장의 분위기를 적절하게 중계해 주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담백하게 담아낸 글이 그야말로 보석처럼 빛나는구나. 남아도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미소녀들이나 힙합전사의 뒤를 밟는 스릴도 빠지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아리까리 달달한 로맨스도 양념처럼 추가된다. 그 나라 언어를 확실하게 단기간에 배우는 첩경이라는 현지인 남자/여자친구 만들기에도 서슴지 않고 도전한다. 3분에 한 번 꼴로 자신을 웃겨주는 뉴욕 식객과의 만남으로 6개월 간의 뉴욕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책에 담은 이야기만으로도 이렇게 재밌는데 미처 담지 못한 공란에는 또 어떤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하고 말이다. 아마 미국 생활을 접을 무렵에 도전했다는 남미여행기 역시 한 권의 책으로 내기에 충분한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분통 터지는 일조차도 발랄한 에피소드로 승화시킨 이 멋쟁이 삽질러스는 뉴욕을 꿈꾸는 반지원정대 청춘들에게 꼭 필요한 조언도 빠뜨리지 않는다. 오만가지 종류의 뉴욕을 다룬 책이 넘쳐나는 마당에 이렇게 무위도식의 진수를 보여준 책이 이제야 출간되었다니! 굳이 아쉬운 점을 하나 들자면, 글과 사진의 부조화 정도? 뉴욕 생활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면서 곳곳에 실린 사진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초반에 다짜고짜 등장하는 조금은 생뚱맞아 보이는 뉴욕 사진은 좀 아닌 것 같다. 뭐 어쨌거나, 뉴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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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궁금해 미치겠다 - 지구상에서 가장 무모한 남자의 9가지 기발한 인생 실험
A. J. 제이콥스 지음, 이수정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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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서 어떤 책을 읽게 되는가? 아마도 그건 그 책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닐까. 아놀드 스티븐 제이콥스의 <나는 궁금해 미치겠다>는 “스턴트 저널리즘”을 표방하는 이 괴짜 저널리스트가 직접 체험한 기발한 9가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1968년생으로 우리 나이로 44세의 맨해튼에 서식하고 있는 유대인 작가는 이 책 전에 이미 두 권의 기상천외한 책으로 독자를 찾았었다. 한 번은 32권에 달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읽은 경험을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미친 척하고 무려 613가지에 달하는 성경에 나오는 율법대로 1년간 산 경험을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이 정도라면 <나는 궁금해 미치겠다>를 읽을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예전에는 어림도 없었지만 이제는 온라인에서 진화한 데이트 시스템에 의해 인류가 짝짓기를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매력적인 이십대 보모 미셸의 동의 아래 제이콥스는 그녀의 프로필을 온라인에 올리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남자의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든다. 결국 여성의 외모와 몸매에 집착하는 남자들의 속물근성을 예리하게 재단해 내는 개가를 올린다.

다음 과제는 아웃소싱(outsourcing)이다. 인도에 있는 허니와 아샤의 도움으로 자신이 직접 처리해야 하는 일들을 돈을 지불하고 대신 시키는 것이다. 맨해튼의 유력 잡지 <에스콰이아>의 편집인에게는 적은 돈일지 모르겠지만, 월 1,000달러는 적은 돈이 아닌 것 같다. 하긴 그가 사는 맨해튼의 월세가 얼마겠냐만. 어쨌든 현대판 심부름센터에 맛을 들인 제이콥스는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서 자신이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에까지 마수를 뻗친다. 결과는 역시 어떤 경우에는 아웃소싱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더라는 간단한 사실.

“하얀 거짓말”이 과연 인간관계에 있어 나쁘기만 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제이콥스는 “획기적 정직”이라는 명제에 도전하다. 물론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지만 과연 모든 일에 “획기적 정직”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아니 어떻게 세상을 살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산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의 하나인 조지 워싱턴이 남긴 110가지 원칙 가운데 34번째 덕목이 특히 도움이 될 듯 싶다. 그게 무언지 궁금하다구? 그럼 <나는 궁금해 미치겠다>를 직접 찾아보시라. 부록으로 잘 나와 있으니까.

보통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미신을 비롯한 각종 편향을 분석한 “합리성 프로젝트” 역시 흥미진진하다. 교육받은 지성인으로 이성적 판단을 바탕으로 생활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여전히 근거 없는 정보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신에 의지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제이콥스는 논증한다. 특히 음식에 대한 다양한 편견에 대한 그의 분석에는 절로 공감이 갔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의 90퍼센트 이상이 ‘관성’과 ‘게으름’ 탓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그렇다고 해서 제이콥스처럼 자신에게 맞는 치약을 찾기 위해 40개가 넘는 치약을 사다가 테스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런 임무는 이 괴짜 스턴트 저널리스트에게 맡기자.

도무지 운전과 인내심 강한 아내 줄리 말고는 두려움이라고는 모르는 이 스턴트 저널리스트는 심지어 누드 사진에까지 도전한다.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라는 영화에서 히로인을 맡아 열연했던 메리 루이스 파커에게 누드 사진 촬영을 제의했다가 졸지에 자신도 옷을 벗게 된 제이콥스의 좌충우돌 체험기는 정말 압권이었다! 인터넷 시대에 2002년에 제이콥스가 직접 쓴 <메리 루이스 파커가 내 옷을 벗기게 만들었다>라는 기사를 직접 찾아봤다. 이 뻔뻔하기 짝이 없는 편집자는 누드 사진 촬영을 하면서 자기에게는 달랑 다이어트 콜라와 와인이 제공됐지만, 메리 루이스 파커에게는 진수성찬이 제공되었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하! 그가 이 에피소드에서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통제권과 다양한 표현권’을 잃었을 때의 느낌이었노라고 말미에 조용하게 고백한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궁금해 미치겠다>의 저자 제이콥스는 이 모든 실험을 무한한 인내로 참아준 아내 줄리에 대한 헌사로 이 흥미진진한 실험 프로젝트를 끝낸다. 어떤 이에게는 기행으로 보이는 일을 즐기면서, 책을 쓰고 그 책을 팔아 명성과 부를 얻는 제이콥스가 시전하는 재생산 프로젝트는 정말 부럽다. 그런데 과연 나에게 이런 실험을 할 수 있는 돈과 시간을 준다면 선뜻 내가 자원할 수 있을까? 인지부조화 차원에서 그건 아니지 싶다. 어쨌든 <기니아 픽 일기>라는 원제처럼 세 번의 기상천외한 실험적 삶을 마친 제이콥스가 다음번에는 또 어떤 기발한 주제에 도전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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