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와인에 빠져들다
로저 스크루턴 지음, 류점석 옮김 / 아우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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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출신의 철학자이자 미학 교수인 로저 스크루톤의 <철학자, 와인에 빠져들다>는 철학의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를 패러디한 <나는 마신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철학자의 와인 가이드>라는 멋진 제목을 원제로 하고 있다. 이 책을 그냥 원제목대로 했으면 어떨까 하는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칠레와의 FTA로 칠레에서 난 질 좋고 값싼 와인을 많이 접할 수 있을 거라는 어느 위정자의 말을 듣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어쨌든 간에 여전히 와인은 보통 사람들이 접하기 쉽지 않은 술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보다는 훨씬 더 나은 조건에서 다양한 와인을 접할 수 있는 로저 스크루톤 교수가 부러웠다. 자신의 전공인 철학은 물론이고, 와인에도 조예가 깊어서 와인 시음회에 초청될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로저 스크루톤은 권두에서 쾌락주의자로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와인/술을 즐기자는 애주가를 위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역시 술을 마실 줄 아는 풍류가의 호방함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그의 철학은 어떨까? 애주가라는 예상을 깨고(?) 철학에 대한 이해와 분석의 폭도 대단하다.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서양 고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에서 시작한 그의 이야기는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작가 스스로 걸출한 영웅이라고 평하는 헤겔과 이태리산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를 연결시킨다. 내가 아는 와인이라고는 고작 좋아하는 독일산 리슬링, 카베르네 쇼비뇽, 메를로 정도인데 정말 낯선 와인의 행진이 이어진다. 도대체 누가 헤겔이 역사에서 퍼 올린 인간 시대정신(Zeistgeist)의 시대적 소명을 토스카나산 와인을 마시는 이유에 대입하는 내공을 시전할 수 있단 말인가!

스크루톤은 또한 음주의 기원에 대해서도 빠뜨리지 않는다. 일찍이 인류는 음주를 신을 맞이하는 제의의 한 종류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흥으로 즐기는 술이 고대에는 접신의 한 가지 방법이었다는 분석이다.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이 뒤따르는데, 음주한 인간의 추태를 인간행위가 아닌 신의 행위로 돌렸다고 한다. 유레카! 이보다 더 애주가들을 위한 멋진 철학적 해석이 있을쏘냐.

본격적인 <나는 마신다>편에서는 자신의 음주 입문을 소상하게 독자에게 전달한다. 엘더베리 과실주로 술의 세계에 들어선 스크루톤이 어떻게 해서 바쿠스의 사제가 되었는지에 대한 소개가 이어진다. 학창시절 그의 동료였던 아일랜드 출신 데스먼드와 지도교수 피킨 박사 그리고 왓킨 박사와 함께 했던 환상적 시절에 대한 향수도 빠지지 않는다.

로저 스크루톤은 어떻게 보면 일견 고리타분해 보이는 철학이라는 주제에 와인이라는 흥미진진한 소재를 곁들여서 독자를 유혹한다. 그의 프랑스 와인 기행을 읽으면서 정말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척의 거리에서 다양한 음식 문화를 발전시켜온 유럽에 사는 이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즐거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도국가의 시민으로서는 정말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프랑스 와인의 예찬론자 스크루톤 교수가 더 얄미웠다 보다.

자, 음주의 기원을 밝혔으니 이제는 와인의 기원을 들려줄 차례다. 소아시아를 원산지로 하는 포도를 원료로 하는 와인은 인류 문명만큼이나 오래됐다고 한다. 와인애호가로서 작가가 사랑해마지 않는 프랑스 와인 외에도 레바논, 그리스 그리고 현대에 가장 많이 소비되는 대중적인 캘리포니아 와인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와인 생산지에 대한 정보를 들려준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대형마트나 와인전문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피노 누아르”가 신세계 포도와 구세계 포도가 이종교배로 만난 새로운 품종의 포도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호주산 와인 편에서는 오래전에 들렀던 애들레이드 와인 투어에서 멋도 모르고 오크통에서 공짜로 한잔씩 제공하는 와인을 사양하지 않고 마셨다가 은근하게 취했던 추억도 떠올랐다. 잊을 수 없는 어느 낮술의 기억이다.

첫 번째 장에서 와인에 대한 개인의 실존적 체험을 들려주었다면, 두 번째 장에서 로저 스크루톤은 보다 “의식과 존재”라는 철학적 논제를 다룬다. 객체에 포위된 세계에서 진정한 자아에 대한 질문이 이어진다. 그리고 의식이 주목하는 대상 끝에서 한 잔의 술과 마주치게 될 것이라고 이 와인애호가는 선언한다. 아울러 의식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한다. 역시 단순하게 술로서 와인을 다룬 부분에서는 비교적 쉬웠지만, 의식과 존재론에 들어오면서도 다시 대취한 다음 날의 숙취 같은 기분이 느껴진다. 어렵다 어려워.

로저 스크루톤이 수년간의 사색의 결과 도달한 내가 의식의 총체라는 의견에는 공감한다. 어떻게 보면 교만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나야말로 이 우주의 중심이 아닌가. 물론 그 점이 현실의 그것과 동조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 다음에는 이어지는 내가 자유로운 의지의 주인인가에 대해서는 좀 생각을 해봐야할 것 같다. 와인보다 맥주를 더 좋아했던 쇼펜하우어가 철학사에서 끝없는 ‘분란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저자의 단언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과학적 탐구가 필요한 게 아닐까?

청교도적인 금주운동에 대해서도 저자는 날카로운 일침을 가한다. 일찍이 사도 바울이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도반 디모데에게 너무 물만 마실 것이 아니라 와인도 좀 마시라는 말이 성경에 담겨 있다고 하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과유불급이라는 격언처럼 와인을 마시는데 있어 중용의 미덕도 빠뜨릴 수가 없다. 한 잔 술의 담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면 와인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와인 옹호론에 흠뻑 취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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