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레드 라인
제임스 존스 지음, 이나경 옮김, 홍희범 감수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전사(戰史)에 어려서부터 관심이 많았다. 특히 타임라이프-한국일보에서 나온 <제2차 세계대전>은 그야말로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 처음에 10권으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헌책방을 순례하며 이가 빠진 것들을 사 모았다. 이 방대한 전사 시리즈를 통해 유럽전선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전쟁의 향방을 갈랐다면, 거의 미국이 도맡아서 전쟁을 치른 태평양전선에서는 과달카날 전투(Guadalcanal Campaign)가 승부의 분수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바로 이 전투를 주제로 한 전쟁문학의 전설이 바로 제임스 존스의 원작 <신 레드 라인>이었다. 이미 두 번이나 영화화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작품이라고나 할까.

미국 전쟁사에서 한 획을 그은 과달카날 전투에 육군 25사단 보병으로 직접 참전했던 제임스 존스의 일본군과 치열했던 전투에 대한 묘사는 상상 그 이상이다. 사실 본격적인 전투가 개시되기 전까지 소설에 몰입하기란 쉽지 않다. 조국을 지킨다는 이유로 징집되거나 혹은 자원해서 전쟁터를 찾은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차분하게 소개된다. 일견 따분해 보이는 초반부는 작가 제임스 존스가 시연하는 본격적인 전투 이야기에 앞선 워밍업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1942년 11월 10일, 남태평양의 외딴 섬 과달카날에 상륙한 찰리 중대원들의 심리는 복잡하다. 어떤 이는 영웅주의에 빠져 피와 살이 튀는 전쟁터를 낭만적으로 상상하고, 집에 남겨 두고 온 아내가 바람날까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전직 장교가 있는가 하면 지긋지긋한 취사병 생활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소총수로 활약하기 위해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을 누비는 얼치기 쇼비니스트도 있다. 사병들의 안위는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업적을 위해 병사들을 사지로 내모는 이기적인 지휘관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찰리 중대의 수장 버거 스타인 대위는 유대인이라는 콤플렉스를 안고 시시때때로 자신에게 반항하는 병사들을 이끌고 버마, 필리핀 그리고 싱가포르 전장에서 단련된 역전(歷戰)의 일본군을 상대한다.

스타인의 찰리 중대원들의 겪어야 할 고초는 일본군이 쉴 새 없이 쏘아대는 총탄과 박격포탄 뿐만이 아니다. 오한과 고열로 야기하는 말라리아도 보이지 않는 적이다(실제로 8,000여명의 병사들이 말라리아에 시달렸다고 한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극한의 상황에서 병사들 간의 동성애마저 등장한다. 열대의 태양이 작열하는 전장에서의 타는 듯한 갈증 때문에 기절하는 병사가 속출한다. 210고지를 선점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한 일본군으로부터 기관총탄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대대장 톨 중령은 부하 중대장들을 닦달해서 어떻게든 고지를 점령하라는 무모한 명령을 내린다.

순간 버거 스타인 대위는 톨의 명령 때문에 지난 2년간 동고동락한 자신의 병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항명한다. 상명하복이라는 절대적인 명제 아래서 훈련된 군조직의 작은 균열이 드러난다. 병사들이 간절하게 원하는 물 보급도 없이, 그저 명령대로 돌격해서 적의 진지를 유린하라는 현실을 무시한 명령에 스타인 대위는 어이없어 하지만 어느새 휘하 병사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톨 중령의 명령이 실행되었다는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나폴레옹 최후의 전투였던 워털루에서 그루쉬가 내린 1초의 결정이 전 유럽의 역사를 바꾸었듯이, 과달카날의 전장에서도 광기와 우연의 역사는 반복된다.

제임스 존스는 잔혹한 전장의 현실을 가감 없이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곧 죽을 이에게 시간낭비할 것 없다는 구절은 죽음과 삶을 가르는 전장에서 함께 한 동료의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마저도 그대로 무장 해제시켜 버린다. 타인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받는 병사가 아닌 인간의 이중성도 그대로 분출한다. 끔찍한 비명을 질러대며 죽어가는 동료에게 모르핀 주사를 건네주기 위해 사선을 넘는 그네들의 모습은, 아름답게 내리 비치는 남태평양에서 맞이하는 석양만큼이나 이질적이다.

일본군의 잔학행위에 치를 떨며 필리핀 바탄에서의 ‘죽음의 행군’을 기억해내고,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는 미군이 “누렁이” 포로들을 잔인하게 처치하는 장면 역시 비극의 확장이다. 수류탄 하나 제대로 던지지 못하는 얼치기들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범죄인 같은 호모 사피엔스를 학살하는 장면은 상상을 초월한다. 연이은 전투라는 초강도 폭력에 무감각해져 버린 찰리 중대원들이 살인의 쾌감에 빠진 기계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은 갈수록 비참해지는 전쟁의 현실과 궤도를 같이 한다.

그렇게 제임스 존스는 전쟁이 보여 줄 수 있는 최악을 통해 독자에게 반전이라는 명확한 메시지를 날린다. 이런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과연 그 누가 인간다움을 유지하면서 스스로를 문명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단순히 이국적 풍경을 배경으로 한 낭만적인(?) 전투나 극악한 일본군을 무찌르는 미군의 영웅담을 기대하고 <신 레드 라인>을 펼쳤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이 소설은 조국을 위한 전쟁이라는 프로파간다와 거대한 폭력 아래 꽃다운 나이에 스러져간 청춘들에 대한 어느 베테랑의 절절한 오마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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