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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박범신 지음 / 문예중앙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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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선생의 최신작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그의 39번째 장편이라고 하는데, 난 정말 박 선생의 책을 많이 읽지 않은 모양이다. 꼴랑 작년에 <고산자>와 <은교>를 읽은 게 전부니 말이다. 이번에 새로 나온 소설이 콜롬비아 출신의 거장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주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킨다는 말에 잔뜩 호기심이 일었다. 인터넷 연재와 책을 번갈아 보면서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확인할 수가 있었다. 참고로 아쉽게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은 읽기 시작은 했는데 끝까지 읽지는 못했다.

약간 그로테스크한 제목의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말굽청년인 “내”가 화자로 등장해서 사건의 전모를 소개하는 구성을 따른다. 소설에서 손이 점점 쇠말굽으로 변해 가는 청년의 물리적 트랜스포메이션에 제목은 초점을 맞춘다. 주인공은 분명 샹그리라라는 현실계에 존재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온갖 비밀과 추문이 숨겨진 명안진사[밝은 눈]라는 속(俗)과 성(聖)의 경계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캐릭터로 나온다. 그는 동시에 이 쇠말굽이 가진 폭력성도 잘 파악하고 있다. 화상으로 흉측해진 얼굴로, 이제는 시력을 잃은 옛 사랑 여린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불러올 재앙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청년의 가슴을 시리게 하는 “해맑은 날의 어떤 풍경”은 금세 “포악한 그리움”으로도 치환가능하다.

풍진세상에서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청년은 세상을 유랑하다가 검을 휘두르는 이사장에게 발탁되어 마침내 샹그리라에 안착한다. 그리고 소설의 서두에서 밝히듯이, 살인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청년은 광안리의 횟집주인, 자신의 동태를 살피는 이사장의 수하 땅딸보와 노과장을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쇠말굽으로 가차 없이 처단한다. 오래전부터 몸에 익힌 클라이밍 기술로 샹그리라와 명안진사(일상과 이상)를 오가며 이사장이 한사코 감추려고 하는 비밀의 화원에 도전한다.

연비와 세족식 같이 기성 종교 의식으로 짬뽕이 된 사이비 종교 교주를 찜쪄먹는 실력의 이사장은 작가가 구사하는 주술적 리얼리즘의 중심에 서 있다. 그는 소녀시대의 “Gee"와 슈스케 강승윤의 노래를 흥얼대며 춤추는 애기보살(관음보살)과 눈먼 처녀 안마사 여린을 세지보살, 이 환상의 복식조를 이용해서 대중을 혹세무민한다. 여느 사이비 종교처럼 이사장의 ‘밝은눈’도 결국 물질로 귀착된다. 말기 환자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명안수라는 해괴한 물을 팔고, 단식으로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달콤한 말로 신자들을 현혹한다. 작가는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종교를 비판하는 동시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이비 종교에 매달리는 현대인의 불안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말굽 청년의 아슬아슬한 감정의 통제는 박범신 선생이 전작에서부터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오욕칠정”과 일맥상통한다. 말굽이 가진 “폭력에 대한 추앙과 관성”은 우리가 가진 부질없는 욕망의 형상화다. 사무치는 그리움을 정면으로 해결하지 못한 말굽 청년의 말로는 불가피하게 비극으로 치닫는다. 해피엔딩으로 소설을 마무리하기엔 청년의 연쇄 살인은 너무 멀리 나갔으니까.

인터넷 연재와 소설을 번갈아 읽다 보니 아주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가 있었다. 인터넷 연재 때와 단행본으로 나온 책의 소제목이 다른 것도 발견했다. 인터넷 연재 때 보인 오탈자도 단행본에선 거의 개선이 된 것 같다. 기존의 신문 연재 대신 인터넷 연재라는 참신한 시도에 계속적으로 도전하는 노작가의 시도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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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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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고백하건대 누구의 추천으로 책 읽는 것을 별로 즐기는 편이 아니다. 그저 책의 더미에서 스스로 힘으로 잡아 올리는 월척이 더 반갑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 않기에 때로는 타인의 힘에 슬쩍 묻어가고 싶은 마음도 든다. 이번에 만나게 된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빛나는 데뷔작이 그랬다. 신형철 평론가의 추천도서라는 타이틀로 이 책과 파스칼 키냐르의 <로마의 테라스> 두 권을 읽게 됐다. 나의 우선 선택은 바타유의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 번 놀랐다. 첫 번째는 이 이국적이면서도 성속(성속을 오가는 매력적인 작품이 21살 먹은 청년의 데뷔작이라는 점이 하나였고, 두 번째로는 시하고는 담장을 쌓고 사는 독자가 산문시 같은 아름다움을 행간에서 느꼈다는 점이다. 언제나 흥미진진한 역사 속의 실존 인물들이 뛰노는 매력덩어리 팩션은 그야말로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프랑스 절대왕정 시대의 종언을 알린 프랑스 혁명에 앞서 세계의 끝 동방에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있었단다. 농민 봉기로 제위에서 쫓겨난 베트남 황제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프랑스에 파견해서 강력한 프랑스 군주에게 자신이 복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비등점에 달해 있던 사회적 갈등 봉합이 우선이었던 루이 16세는 세상의 끝에 있는 작은 나라를 도울 겨를이 없었다. 한 마디로 자기 코가 석자였다. 어린 황제는 그렇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가운데 멀리 타지에서 유명을 달리한다.

하지만 일단의 사제들이 선교를 위해 베트남 행을 자원하면서 사위어가던 잉걸불을 되살린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팩션의 전반부가 이런 정치적 상황에 대한 묘사였다면, 후반부는 선교에 나선 수도사와 수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흔히 선교사가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으로 활동했다는 지적이 있다. 기독교라는 서양 종교로 동양의 공동체 사회를 재편하고, 서양문물을 전파하는 식민 활동의 전초 역할을 선교사들이 수행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다다를 수 없는 나라>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도미니크 수사와 카트린 수녀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까?

도미니크와 카트린이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조국 프랑스를 떠나 베트남으로 간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처음 상륙한 베트남의 바딘에서 평화롭게 현지인들과 공존하는 법을 배웠다. 그들의 후손들이 먼 훗날 식민지에서 그랬던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인류애를 담아 현지 사람들의 말을 배우고, 그들과 같이 벼농사를 짓고 뻑뻑한 ‘포’ 국수를 즐겨 먹으면서 베트남 사람들에 동화됐다.

지구 반대편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격동의 역사 현장은 선교사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대상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국왕이 기요틴에서 처형당하고,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는 공화국 시대에 프랑스에서 베트남으로 파견된 선교사 일행도 서서히 잊혀져 갔다. 베트남에서의 정변으로 초기 정착지는 쑥대밭이 되지만, 위기에 앞서 바딘을 떠난 도미니크와 카트린은 베트남의 고원지대에 안착하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이 짧은 소설을 통해 벽안의 청년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종교라는 엄숙한 테두리에서 벗어나 태초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간 아담과 이브를 그리고 싶었던가. 아니면 새로운 세기에도 여전히 탈식민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베트남을 ‘안남(Annam)'으로 인식하는 못난 제국주의 시선에 사로 잡혀 있는 걸까. 신형철 평론가는 “적요”라는 단어를 이 소설의 화두로 던졌는데, 여전히 서구인들의 사고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국적 풍물이 주는 아름다움과 폭력적 야만성의 묘한 공존이 느껴졌다.

역자가 쓴 후기에서 소설의 완성을 위해 실제 역사마저 약간 비튼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대담함이 눈에 띈다. 보통 후기는 거의 읽지 않는 편인데, 베트남 근대사를 관통하는 역자의 후기는 아주 유용했다.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통해 호치민, 월남전 혹은 포 국수 같은 기억의 편린에 의존해서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베트남에 한 발짝 더 다가선 느낌이다. 어디라고 꼭 집어 말할 순 없지만, 참 아름다운 책이었다. 곁에 두고 여러 번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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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아이덴티티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9
로버트 러들럼 지음, 최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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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화 <본 아이덴티티>의 원작 소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나온 책의 소개로 처음 알게 되었다. 더그 라이만 감독의 영화에 나온 맷 데이먼의 연기를 보고 단박에 제이슨 본이라는 캐릭터에 빠져 버렸다. 본이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과정은 수도자의 고행이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멋진 시리즈의 원작이 따로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2011년 초여름, 로버트 러들럼 원작 소설과의 만남은 가히 충격이었다. 영화에서 접한 제이슨 본의 이야기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소설의 디테일은 섬세하면서도 화려하다. 자, 이제 본격적인 썰을 풀어 보도록 하자.

영화를 먼저 봤기에 어쩔 수 없이 원작소설과의 비교는 불가피했다. 트레드스톤이라는 비밀 첩보작전의 정예요원으로 양성된 제이슨 본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 영화의 주요한 줄거리라면, 소설에서는 이 맛깔스러운 줄기에 고명을 한 가지 더 얹는다. 전설적 테러리스트이자 인간병기로 실존인물인 카를로스 재칼과의 목숨을 건 대결이 소설의 다른 한 축을 차지한다. 영화에서는 소설이 쓰인 1980년대 초반보다 훨씬 발전한 최첨단 기술을 도입해서, 올드 스쿨 스타일의 원작과 차별을 시도한다. 휴대전화 감청이나 인공위성을 이용한 위치 파악 같은 소재는 정말 <본 아이덴티티> 같은 스파이물에 더할 나위 없이 들어맞지 않은가 말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원작소설 <본 아이덴티티>에서는 팔색조 같이 멋지게 변신하고 자신도 모르는 기술과 훈련받은 동물적 감각을 이용해서 위기에서 벗어나는 제이슨 본 캐릭터를 훨씬 더 충실하게 그려냈다. 영화에서 제이슨 본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부분을 편집했다면, 소설에서는 상대적으로 제이슨 본이 도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해서 전설적 암살자 카를로스 재칼에 버금가는 킬러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는지 스스로 밝히는 과정이 긴장감 넘치게 묘사된다.

영화에서 사이드킥이자 연인으로 등장한 마리 생자크가 조금은 수동적으로 그려졌다면, 소설에서는 본에게 극적 상황을 연출하기 위한 기폭제인 동시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는 동지라는 차원에서 적극적 활약을 연출한다. 자신을 쫓는 킬러들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불가피하게 잡은 인질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스톡홀름 신드롬의 전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카를로스 재칼과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트레드스톤 작전 입안자들에게 쫓기는 제이슨 본은 과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이 소설이 발표된 1980년은 동서냉전과 미국과 소련의 군비경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스파이 픽션 스릴러’라는 레테르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본(Bourne) 시리즈의 창조자 로버트 러들럼은 이미 그 시절에 소련을 필두로 한 공산진영의 몰락을 예언이라고 한 듯, 스파이 소설하면 빼놓고 등장하는 사악한 공산주의 스파이 대신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헤게모니를 잃기 시작한 패권국가 미국으로부터 존재를 부정당한 제이슨 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이제는 새로울 것도 없지만, 공공의 적이었던 소련 출신 스파이 대신 내부의 변절자가 국가와 조직에 얼마나 위험한 존재로 돌변할 수 있다는 작가의 설정은 획기적이다.

소설 <본 아이덴티티>는 공교롭게도 지난 5월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우리에게 처음으로 소개된 영화 <카를로스>와도 묘한 접점을 이룬다. 영화판 <본 아이덴티티>에서는 쏙 빠진 캐릭터인 카를로스 재칼을 전면에 세운 영화로 프랑스 출신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5시간 30분이라는 엄청난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영화 <카를로스>는 지난해 세계 유수의 영화잡지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일리치 라미레즈 산체스라는 본명의 카를로스 재칼은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수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제이슨 본 못지않은 변신의 귀재로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세기의 대결을 벌이는 캐릭터로 소설을 장식한다.

영화가 제이슨 본을 ‘클린’하려는 세력에 맞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주인공의 활약에 초점을 맞췄다면, 원작소설은 좀 더 긴 호흡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한 꺼풀씩 벗겨지는 자신의 정체에 괴로워하는 자연인 제이슨 본의 내적 고뇌와 갈등에 방점에 찍는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이 목표물이나 장애물을 죽여야 하지만, 자위적 방어를 위한 ‘킬링’ 외에는 의미 없는 살인을 피하려는 착한 킬러의 모습은 역설 그 자체다. 마치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살인병기”로 훈련된 손과 발이 알아서 척척 움직이는 모양새라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탄도 척척 피해내는 그런 슈퍼맨 같은 스타일의 첩보원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인질과 사랑에 빠지고, 압도적인 적에 둘러싸여 총알도 두어방 맞고 그런 올드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 어떻게 보면 진부할지도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떠나야 한다는 마음과 함께 위기를 극복해 나가자고 갈등하는 장면 역시 인간적이다. 사람이 구닥다리여서 그런지 제임스 본드 같이 세련된 여유보다, 투박하면서도 어느 정도 운빨도 서는 그런 제이슨 본 스타일이 더 좋다.

책 선전에서 내일 출근하려면 이 책을 펴지 말라고 경고했던가. 솔직히 말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제대로 낭패를 봤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2편을 미리 장만해 두지 않은 점이다. 하마터면 날밤을 꼬박 세울 뻔 했다. 이제 곧 새로운 시리즈인 <본 레거시>가 촬영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또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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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들의 중국사
사식 지음, 김영수 옮김 / 돌베개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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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출신의 역사학자로 태평천국 전문가인 사식(史式) 선생의 <황제들의 중국사>는 기존의 역사 서적과 그 결을 달리한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역사란 자고로 승자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특히 왕조가 오래될수록 그 왕조의 녹을 먹은 사관들이 적은 역사의 기록은 아무래도 해당 왕조의 군주에 대해 관대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반대로 단명한 왕조의 역사에 대해 아무런 도의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후대가 사가들은 냉혹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황제들의 중국사>에는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중국의 제왕들에 대한 비평이 들어 있다.

책을 접하고 가장 먼저 읽은 인물은 바로 명나라 태조 주원장 편이었다. 중국에 수많은 왕조의 개국 군주 중에서 그 바탕이 가장 비천한 사람이 바로 주원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주원장은 거지이자 승려 그리고 건달을 두루 섭렵한 인물로 근거지를 바탕으로 칭왕을 뒤로 미루고, 자신에 앞서 원나라의 폭정에 맞서 기의한 민족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사실일까? 주원장은 교활하게도 각지에서 일어난 군웅들이 몽골족과의 격전으로 모두 지쳐 쓰러질 때까지 마냥 기다리다가 마지막 순간에 결실을 거뒀다. 만약 그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대몽항쟁에 나섰더라면, 다른 군웅처럼 역사 속에서 스러졌을 거라는 것이 사식 선생의 냉철한 분석이다. 선생은 제국 수립 후에, 수많은 개국 공신을 숙청하고 독재권 강화를 위해 공포정치를 실시한 주원장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명나라의 개국 군주 주원장을 차가운 시선으로 보고 있다면, 반면에 명나라의 망국 군주인 숭정제에게는 반대로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조선출병과 수년간의 실정, 환관의 발호 그리고 여진족 후금의 침략으로 만신창이가 된 명나라의 멸망을 청년 황제가 홀로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오히려 제국의 무너지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선언했던 숭정제의 용기를 사식 선생은 극찬한다. 어느 제국의 일인자가 그렇게 정치적 책임을 지려고 했던 적이 있었던가. 숭정제는 모든 것은 황제가 결정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았던 황제 제도의 모순에 역행하는 드문 황제였다. 북경이 이자성의 반란군에 함락당하는 순간 자진하면서도 백성의 안위를 걱정했던 이 청년 황제에게 사식 선생은 다른 황제와는 다른 평가를 매긴다.

우리가 <삼국연의>로 익히 알고 있는 유비와 제갈량의 <삼고초려> 고사를 사식 선생은 정면으로 부인한다. 정사로 인정받고 있는 진수의 <삼국지>외에도 다양한 사료를 교차분석하면서, 유비가 제갈량을 초빙하기 위해 공명을 찾아갔다는 고사는 허구였다는 사실을 밝힌다. 제갈량이 아무런 밑천도 없는 유비의 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관우가 죽고 형주를 잃으면서 비이성적인 동오 침공으로 결국 제갈량의 원대한 국가대계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국제 정세를 냉철하게 들려준다. 경쟁국이었던 조조의 위나라나 손권의 동오에 비해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촉나라가 앉아도 죽고 일어서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일견 무모해 보이는 북벌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사식 선생은 증언한다.

아울러 촉한의 망국 군주였던 아두 유선에 대해서도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자신보다 뛰어난 신하들에게 국정을 맡겨 백성의 피해를 최소로 했다는 사실을 피력한다. 능력이 부족한 군주가 전면에 나서서 국정을 수행하려고 하다가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물론 절대 군주가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고, 타인에게 위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촉한의 후주 유선에 대해 나름대로 후한 평가를 내린다. 사식 선생은 촉한의 후주 유선, 남당의 후주 이욱, 북송의 휘종 그리고 초나라의 항우 같이 역사의 패자에게도 정사(正史)라는 이름으로 승리자에 편중한 역사의 기록에 치우치지 말 것을 주문한다. 특히 사성(詞聖)으로까지 추앙받는 남당의 이후주에 대해서도 패배자가 아니라 문인으로 성공한 인물이었다는 평가가 참신하다.

요순시대의 선양제도를 흉내낸 동한과 위, 위와 진의 그것을 저자는 정치적 쇼라고 폄하한다. 이미 정치적 실권을 모두 장악하고 호가호위하는 조씨 집단과 사마씨 집단의 찬탈을 아무리 좋은 모양새로 꾸며도 후대의 평가는 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시대를 풍미한 간웅으로 현대에 새로이 조명받고 있는 맹덕 조조에 대해서도 그의 평가는 냉혹하다. 유가에서 중요시하는 도의나 도덕 대신 오로지 실력과 능력만으로 인재를 채용한 위나라 정권의 말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천하를 얻기 위해 내달린 조씨 집단은 역시 비슷한 루트로 성장한 사마씨 집단에게 왕조를 뺏기고, 사마씨 집단의 진나라 역시 일족간의 혈투로 엉망이 되고 흉노를 필두로 한 북방 외래민족에게 중원이 유린당하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 저자의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래서 조조의 등장이 민중에게는 재앙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회주의 국가 출신의 역사학자라 그런 진 몰라도 사식 선생의 중국 황제 제도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중국사가 지속적으로 정체된 이유가 성군과 암군이 교대로 등장하면서 선대에 축적된 유무형의 자산들을 후대의 암군들이 한 방에 날려 버리면서 연속성이 떨어졌다는 저자의 주장이 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현대 같은 민주 사회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황제 일인독재가 횡행하던 전제 군주시대에는 다반사였다.

<황제들의 중국사>처럼 역사에 대한 다양성과 새로운 시선이 담긴 책을 환영한다.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역사 해석보다 아날학파의 미시사 연구나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중국 역사 탐구 같은 신선한 결과물이 더 끌린다. 기회가 되면, 사식 선생의 또다른 저서 <청렴과 탐욕의 중국사>도 도전해 보고 싶다. 비오는 주말의 유익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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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쾌한 논어, 21세기에 답하다 - 알기 쉽게 풀어쓴 알기 쉽게 풀어쓴 동양철학 시리즈 2
푸지에 해설, 이성희 옮김 / 베이직북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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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일이지만, 지금까지 동양 고전 중의 고전으로 불리는 사서삼경을 읽어 보지 못했다. 책 좀 읽는다고 하지만, 어떻게 지금까지 성현의 말씀이라는 사서삼경을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사서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책이자,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논한 내용을 공자 사후에 기록했다는 <논어>의 현대판 주석에 해당하는 <명쾌한 논어, 21세기에 답하다>를 읽으면서 그런 마음의 짐을 좀 덜 수가 있었다.

중국 항저우 출신의 푸지에 교수는 마냥 고리타분할 것으로 생각되는 고전을 현대 감각에 맞춰 주해한다. 원래 상론 10편, 하론 10편 모두 20편으로 구성된 <논어>를 강의 형식으로 7부 67강으로 재구성했다. 비슷한 내용으로 묶다 보니, <논어>의 원래 순서를 고집하는 것으로 보인다. <논어>의 전문이 아니라 핵심만 뽑은 엑기스 형식으로 보면 무난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오래전에 홍신문화사에서 나온 <사서오경> 시리즈를 참고하면서 읽으니 더 도움이 된 것 같다.

어려서부터 항상 해온 질문에 대한 답으로 푸지에 선생의 <논어>는 시작된다. 배움이 주는 즐거움은 본질은 무엇일까? 공자의 말씀대로 책을 외우고, 복습의 심화로 깨닫는 즐거움의 도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반성하게 됐다. 그 옛날의 성현도 항상 배움에 힘썼거늘, ‘이제 공부는 됐어’라는 생각은 자만이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내외적 성장, 경험의 확대, 자기반성의 심화” 중에 한 마리의 토끼만 배움을 통해 얻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은 각별한 인연으로 잊을 수 없는 문장인데 <논어>에 나오는 구절이란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어려서 서예를 배울 적에, 수도 없이 썼던 문장이다. 자기 수양을 위해 배운 붓글씨던만, 지금은 거실 벽에 얌전하게 걸린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옛 것에 되새기는 과정에서 새로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공자의 말씀이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로 다가온다.

유가에서 최고의 도덕준칙으로 꼽히는 <中庸>의 미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혼탁하기 그지없는 세상에서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은 그야말로 중용의 실천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지근거리에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쉽게 얻을 수 삶의 경지라는 것이 푸지에 선생의 설명이다.

고등학교 시절 고문 시간에 무슨 공식처럼 죽어라고 외웠던 윤선도 선생의 어부사시사에도 드러나는 ‘안빈낙도’ 역시 <논어>에 나오는 말이었다. 작금의 가난함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배움에 있어서 상하를 가리지 않는 자세야말로 군자의 정신이라고 했던가. 모든 근심걱정의 원인이 바로 스스로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참으로 와 닿는다. 나의 사람 됨됨이는 어떤지 자문하게 된다. 나의 즐거움의 여부를 물질적 환경에서 찾지 말라는 말은 모든 것이 물질로 환산되는 현 세태에 대한 선인의 가르침이리라.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깊이 없는 SNS 소셜네트워크가 만연하는 시대에 ‘친구를 사귀는 즐거움’에 대한 공자의 말씀은 독자의 폐부를 찌른다. 이익을 매개로 한 친구가 아닌, 군자끼리의 도리에 의한 사귐이야말로 우정의 정수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친구를 사귀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항상 그렇게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인가.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부리지 못하는 현대인이 깊이 반성해야 할 점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관계의 황금률은 다음의 문장에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이목을 집중하게 만든다. “내가 원치 않는 일은 남에게도 강요하지 말라.” 개인적으로 <논어>에서 최고로 꼽는 명문장이다. 이 역시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보편 준칙이면서 실천은 또 다른 문제다. 특히 직장생활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푸지에 선생의 <명쾌한 논어>를 읽으면서 기회가 된다면, 원전 <논어>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경전이나 그렇듯, 미시적인 접근과 더불어 거시적인 방법론도 동시에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많은 책을 읽고 있지만 여전히 배움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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