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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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고백하건대 누구의 추천으로 책 읽는 것을 별로 즐기는 편이 아니다. 그저 책의 더미에서 스스로 힘으로 잡아 올리는 월척이 더 반갑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 않기에 때로는 타인의 힘에 슬쩍 묻어가고 싶은 마음도 든다. 이번에 만나게 된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빛나는 데뷔작이 그랬다. 신형철 평론가의 추천도서라는 타이틀로 이 책과 파스칼 키냐르의 <로마의 테라스> 두 권을 읽게 됐다. 나의 우선 선택은 바타유의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 번 놀랐다. 첫 번째는 이 이국적이면서도 성속(성속을 오가는 매력적인 작품이 21살 먹은 청년의 데뷔작이라는 점이 하나였고, 두 번째로는 시하고는 담장을 쌓고 사는 독자가 산문시 같은 아름다움을 행간에서 느꼈다는 점이다. 언제나 흥미진진한 역사 속의 실존 인물들이 뛰노는 매력덩어리 팩션은 그야말로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프랑스 절대왕정 시대의 종언을 알린 프랑스 혁명에 앞서 세계의 끝 동방에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있었단다. 농민 봉기로 제위에서 쫓겨난 베트남 황제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프랑스에 파견해서 강력한 프랑스 군주에게 자신이 복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비등점에 달해 있던 사회적 갈등 봉합이 우선이었던 루이 16세는 세상의 끝에 있는 작은 나라를 도울 겨를이 없었다. 한 마디로 자기 코가 석자였다. 어린 황제는 그렇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가운데 멀리 타지에서 유명을 달리한다.

하지만 일단의 사제들이 선교를 위해 베트남 행을 자원하면서 사위어가던 잉걸불을 되살린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팩션의 전반부가 이런 정치적 상황에 대한 묘사였다면, 후반부는 선교에 나선 수도사와 수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흔히 선교사가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으로 활동했다는 지적이 있다. 기독교라는 서양 종교로 동양의 공동체 사회를 재편하고, 서양문물을 전파하는 식민 활동의 전초 역할을 선교사들이 수행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다다를 수 없는 나라>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도미니크 수사와 카트린 수녀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까?

도미니크와 카트린이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조국 프랑스를 떠나 베트남으로 간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처음 상륙한 베트남의 바딘에서 평화롭게 현지인들과 공존하는 법을 배웠다. 그들의 후손들이 먼 훗날 식민지에서 그랬던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인류애를 담아 현지 사람들의 말을 배우고, 그들과 같이 벼농사를 짓고 뻑뻑한 ‘포’ 국수를 즐겨 먹으면서 베트남 사람들에 동화됐다.

지구 반대편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격동의 역사 현장은 선교사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대상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국왕이 기요틴에서 처형당하고,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는 공화국 시대에 프랑스에서 베트남으로 파견된 선교사 일행도 서서히 잊혀져 갔다. 베트남에서의 정변으로 초기 정착지는 쑥대밭이 되지만, 위기에 앞서 바딘을 떠난 도미니크와 카트린은 베트남의 고원지대에 안착하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이 짧은 소설을 통해 벽안의 청년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종교라는 엄숙한 테두리에서 벗어나 태초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간 아담과 이브를 그리고 싶었던가. 아니면 새로운 세기에도 여전히 탈식민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베트남을 ‘안남(Annam)'으로 인식하는 못난 제국주의 시선에 사로 잡혀 있는 걸까. 신형철 평론가는 “적요”라는 단어를 이 소설의 화두로 던졌는데, 여전히 서구인들의 사고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국적 풍물이 주는 아름다움과 폭력적 야만성의 묘한 공존이 느껴졌다.

역자가 쓴 후기에서 소설의 완성을 위해 실제 역사마저 약간 비튼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대담함이 눈에 띈다. 보통 후기는 거의 읽지 않는 편인데, 베트남 근대사를 관통하는 역자의 후기는 아주 유용했다.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통해 호치민, 월남전 혹은 포 국수 같은 기억의 편린에 의존해서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베트남에 한 발짝 더 다가선 느낌이다. 어디라고 꼭 집어 말할 순 없지만, 참 아름다운 책이었다. 곁에 두고 여러 번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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