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박범신 지음 / 문예중앙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박범신 선생의 최신작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그의 39번째 장편이라고 하는데, 난 정말 박 선생의 책을 많이 읽지 않은 모양이다. 꼴랑 작년에 <고산자>와 <은교>를 읽은 게 전부니 말이다. 이번에 새로 나온 소설이 콜롬비아 출신의 거장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주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킨다는 말에 잔뜩 호기심이 일었다. 인터넷 연재와 책을 번갈아 보면서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확인할 수가 있었다. 참고로 아쉽게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은 읽기 시작은 했는데 끝까지 읽지는 못했다.

약간 그로테스크한 제목의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말굽청년인 “내”가 화자로 등장해서 사건의 전모를 소개하는 구성을 따른다. 소설에서 손이 점점 쇠말굽으로 변해 가는 청년의 물리적 트랜스포메이션에 제목은 초점을 맞춘다. 주인공은 분명 샹그리라라는 현실계에 존재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온갖 비밀과 추문이 숨겨진 명안진사[밝은 눈]라는 속(俗)과 성(聖)의 경계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캐릭터로 나온다. 그는 동시에 이 쇠말굽이 가진 폭력성도 잘 파악하고 있다. 화상으로 흉측해진 얼굴로, 이제는 시력을 잃은 옛 사랑 여린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불러올 재앙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청년의 가슴을 시리게 하는 “해맑은 날의 어떤 풍경”은 금세 “포악한 그리움”으로도 치환가능하다.

풍진세상에서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청년은 세상을 유랑하다가 검을 휘두르는 이사장에게 발탁되어 마침내 샹그리라에 안착한다. 그리고 소설의 서두에서 밝히듯이, 살인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청년은 광안리의 횟집주인, 자신의 동태를 살피는 이사장의 수하 땅딸보와 노과장을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쇠말굽으로 가차 없이 처단한다. 오래전부터 몸에 익힌 클라이밍 기술로 샹그리라와 명안진사(일상과 이상)를 오가며 이사장이 한사코 감추려고 하는 비밀의 화원에 도전한다.

연비와 세족식 같이 기성 종교 의식으로 짬뽕이 된 사이비 종교 교주를 찜쪄먹는 실력의 이사장은 작가가 구사하는 주술적 리얼리즘의 중심에 서 있다. 그는 소녀시대의 “Gee"와 슈스케 강승윤의 노래를 흥얼대며 춤추는 애기보살(관음보살)과 눈먼 처녀 안마사 여린을 세지보살, 이 환상의 복식조를 이용해서 대중을 혹세무민한다. 여느 사이비 종교처럼 이사장의 ‘밝은눈’도 결국 물질로 귀착된다. 말기 환자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명안수라는 해괴한 물을 팔고, 단식으로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달콤한 말로 신자들을 현혹한다. 작가는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종교를 비판하는 동시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이비 종교에 매달리는 현대인의 불안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말굽 청년의 아슬아슬한 감정의 통제는 박범신 선생이 전작에서부터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오욕칠정”과 일맥상통한다. 말굽이 가진 “폭력에 대한 추앙과 관성”은 우리가 가진 부질없는 욕망의 형상화다. 사무치는 그리움을 정면으로 해결하지 못한 말굽 청년의 말로는 불가피하게 비극으로 치닫는다. 해피엔딩으로 소설을 마무리하기엔 청년의 연쇄 살인은 너무 멀리 나갔으니까.

인터넷 연재와 소설을 번갈아 읽다 보니 아주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가 있었다. 인터넷 연재 때와 단행본으로 나온 책의 소제목이 다른 것도 발견했다. 인터넷 연재 때 보인 오탈자도 단행본에선 거의 개선이 된 것 같다. 기존의 신문 연재 대신 인터넷 연재라는 참신한 시도에 계속적으로 도전하는 노작가의 시도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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