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아이덴티티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9
로버트 러들럼 지음, 최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영화 <본 아이덴티티>의 원작 소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나온 책의 소개로 처음 알게 되었다. 더그 라이만 감독의 영화에 나온 맷 데이먼의 연기를 보고 단박에 제이슨 본이라는 캐릭터에 빠져 버렸다. 본이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과정은 수도자의 고행이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멋진 시리즈의 원작이 따로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2011년 초여름, 로버트 러들럼 원작 소설과의 만남은 가히 충격이었다. 영화에서 접한 제이슨 본의 이야기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소설의 디테일은 섬세하면서도 화려하다. 자, 이제 본격적인 썰을 풀어 보도록 하자.

영화를 먼저 봤기에 어쩔 수 없이 원작소설과의 비교는 불가피했다. 트레드스톤이라는 비밀 첩보작전의 정예요원으로 양성된 제이슨 본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 영화의 주요한 줄거리라면, 소설에서는 이 맛깔스러운 줄기에 고명을 한 가지 더 얹는다. 전설적 테러리스트이자 인간병기로 실존인물인 카를로스 재칼과의 목숨을 건 대결이 소설의 다른 한 축을 차지한다. 영화에서는 소설이 쓰인 1980년대 초반보다 훨씬 발전한 최첨단 기술을 도입해서, 올드 스쿨 스타일의 원작과 차별을 시도한다. 휴대전화 감청이나 인공위성을 이용한 위치 파악 같은 소재는 정말 <본 아이덴티티> 같은 스파이물에 더할 나위 없이 들어맞지 않은가 말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원작소설 <본 아이덴티티>에서는 팔색조 같이 멋지게 변신하고 자신도 모르는 기술과 훈련받은 동물적 감각을 이용해서 위기에서 벗어나는 제이슨 본 캐릭터를 훨씬 더 충실하게 그려냈다. 영화에서 제이슨 본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부분을 편집했다면, 소설에서는 상대적으로 제이슨 본이 도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해서 전설적 암살자 카를로스 재칼에 버금가는 킬러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는지 스스로 밝히는 과정이 긴장감 넘치게 묘사된다.

영화에서 사이드킥이자 연인으로 등장한 마리 생자크가 조금은 수동적으로 그려졌다면, 소설에서는 본에게 극적 상황을 연출하기 위한 기폭제인 동시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는 동지라는 차원에서 적극적 활약을 연출한다. 자신을 쫓는 킬러들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불가피하게 잡은 인질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스톡홀름 신드롬의 전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카를로스 재칼과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트레드스톤 작전 입안자들에게 쫓기는 제이슨 본은 과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이 소설이 발표된 1980년은 동서냉전과 미국과 소련의 군비경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스파이 픽션 스릴러’라는 레테르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본(Bourne) 시리즈의 창조자 로버트 러들럼은 이미 그 시절에 소련을 필두로 한 공산진영의 몰락을 예언이라고 한 듯, 스파이 소설하면 빼놓고 등장하는 사악한 공산주의 스파이 대신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헤게모니를 잃기 시작한 패권국가 미국으로부터 존재를 부정당한 제이슨 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이제는 새로울 것도 없지만, 공공의 적이었던 소련 출신 스파이 대신 내부의 변절자가 국가와 조직에 얼마나 위험한 존재로 돌변할 수 있다는 작가의 설정은 획기적이다.

소설 <본 아이덴티티>는 공교롭게도 지난 5월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우리에게 처음으로 소개된 영화 <카를로스>와도 묘한 접점을 이룬다. 영화판 <본 아이덴티티>에서는 쏙 빠진 캐릭터인 카를로스 재칼을 전면에 세운 영화로 프랑스 출신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5시간 30분이라는 엄청난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영화 <카를로스>는 지난해 세계 유수의 영화잡지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일리치 라미레즈 산체스라는 본명의 카를로스 재칼은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수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제이슨 본 못지않은 변신의 귀재로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세기의 대결을 벌이는 캐릭터로 소설을 장식한다.

영화가 제이슨 본을 ‘클린’하려는 세력에 맞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주인공의 활약에 초점을 맞췄다면, 원작소설은 좀 더 긴 호흡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한 꺼풀씩 벗겨지는 자신의 정체에 괴로워하는 자연인 제이슨 본의 내적 고뇌와 갈등에 방점에 찍는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이 목표물이나 장애물을 죽여야 하지만, 자위적 방어를 위한 ‘킬링’ 외에는 의미 없는 살인을 피하려는 착한 킬러의 모습은 역설 그 자체다. 마치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살인병기”로 훈련된 손과 발이 알아서 척척 움직이는 모양새라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탄도 척척 피해내는 그런 슈퍼맨 같은 스타일의 첩보원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인질과 사랑에 빠지고, 압도적인 적에 둘러싸여 총알도 두어방 맞고 그런 올드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 어떻게 보면 진부할지도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떠나야 한다는 마음과 함께 위기를 극복해 나가자고 갈등하는 장면 역시 인간적이다. 사람이 구닥다리여서 그런지 제임스 본드 같이 세련된 여유보다, 투박하면서도 어느 정도 운빨도 서는 그런 제이슨 본 스타일이 더 좋다.

책 선전에서 내일 출근하려면 이 책을 펴지 말라고 경고했던가. 솔직히 말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제대로 낭패를 봤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2편을 미리 장만해 두지 않은 점이다. 하마터면 날밤을 꼬박 세울 뻔 했다. 이제 곧 새로운 시리즈인 <본 레거시>가 촬영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또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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