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 이 시대에 읽어야 할 명저 강의
박찬운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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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가을엔가 <오마이뉴스>에서 주최하는 김호기 교수님의 강좌를 들었다. 모두 4강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중에 막스 베버의 책 때문에 강연을 신청했다. 하지만, 역시나 직장인으로 퇴근한 후에 강연 듣기만 참 난망했다. 2강을 듣고 나머지는 포기해 버렸다. 그렇게 나와 하버마스 그리고 푸코의 인연은 멀어져 갔다. 그래도 첫 강의였던 에밀 뒤르켕과 막스 베버의 강의는 참 인상적이었다. 온라인 매체인 <오마이뉴스>에 연재된 박찬운 교수가 고른 16권의 명저 소개에 들어가 있는 뒤르켕의 <자살론>이 그래서 더 반가웠나 보다.

법학자가 꼭꼭 씹어서 들려주는 사회학의 아버지 뒤르켕의 명저 <자살론> 이야기는 흥미롭다. 수사학과 논리학같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학문과는 달리 비교적 후발 주자에 속하는 사회학의 연구 범위와 주제를 설정한 연구가는 철저하게 개인의 행위인 자살이 갖는 사회적 의미에 방점을 찍는다. 39분마다 한 명씩 자살한다는 통계처럼 경쟁 만능주의에 사로잡힌 자살공화국에 사는 우리로서는 심각하게 고민해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뒤르켕은 자살의 이유보다 자살의 사회성에 주목한다. 이 연구과정에서 그가 추론해낸 자살에 대한 사회학적 방법론은 이제 고전이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이기적, 이타적 그리고 아노미적 자살 분류법은 원전을 통해 다시 한 번 접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주자는 여전히 내 사무실 책상에 올려져 있지만 읽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다. 아쉽게도 김호기 교수님의 강좌에서 빼먹은 바로 그 강의다. 평생을 인간의 이성 연구에 소진한 푸코의 글을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하라는 저자의 말에 용기가 용솟음치지만, 여전히 프랑스 본토인들도 어렵다고 말하는 그의 저작은 그야말로 넘사벽일 뿐이다. 이성이 근대의 기초를 이루었다고 생각되지만, 푸코는 반대로 억압된 자유, 통제 그리고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건설된 허상이 아닌 근대사회의 실체를 보라고 주문한다. 그 대안으로 인간의 이성 능력을 찬양하는 실존주의 철학보다 이성 저 너머에 있는 “구조”로 이 세상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감시와 처벌> 각론에서는 기존의 신체형이 아닌 범죄의 예방과 교화 차원에서 자유형으로 대변되는 감옥으로의 전환에 대해 푸코는 설명한다. 더 나아가 근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형 구축을 위한 방법론과 고도로 계산된 정치기술을 분석한다. 우리나라에 한 때 성행하던 국민체조 분석을 통해 신체는 물론이고 정신세계마저 지배하려고 했던 권력자의 의도를 저자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위해서라도 푸코의 책은 꼭 한 번 읽어봐야지 싶다. 과연 그 때가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권위에 대한 복종> 역시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 책이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 세기의 재판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다룬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대해 말했다. 수백만명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몰아넣은 게르만 아저씨들이 절대 원래부터 흉악하거나 난폭한 품성의 소유자가 아니라, 정말 우리 이웃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사람들이 생각한 그런 괴물이 아니라, 한 명의 성실한 관료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 출신의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은 실험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비합리적인 권위에 복종하게 되는가에 대한 비극의 원인을 밝히는데 도전했다. 적당히 살고 좋은 게 좋은 것일까? 우리는 너무 익숙한 이런 표현에 길들여진 게 아닐까? 저자는 비합리적인 권위라면 저항하고 분노하라고 분연하게 주문한다. 버트런드 러셀의 말을 빌려 불편한 진실이라도 반드시 추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박찬운 교수는 이런 딱딱해 보이는 책 말고도 C.W. 세람의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과 같은 인문학적 소양을 넓힐 수 있는 책도 추천한다. 고고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고고학에 정통한 비전문가가 부드럽게 풀이해주는 책이야말로 나같은 문화이방인에게 적합하지 않을까? 세람에 따르면 과거는 미래를 항해하는데 꼭 필요한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 저자가 고른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에 얽힌 부분에 대한 해설은 정말 흥미로워서 당장에라도 원전이 읽고 싶어졌다. 아울러 시민을 압도하는 거대한 건축물이 아니라, 우리의 후손에게 문화 유전자를 물려주기 위해 박물관이나 도서관 같은 공공건물이 필요하다는 실질적인 제안도 마다하지 않는다.

2010년 출판계 최고 베스트셀러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였다. 하버드대학교와 정의라는 코드가 맞물리면서, 공정과 정의에 목마른 많은 이들이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샌델 교수의 책이 인식의 문제였다면, 존 롤스의 <정의론>은 그 인식을 실천의 영역으로 확대한다. 롤스식 세상 바꾸기의 시작은 모든 사람이 수긍할 수 있는 정의에 대한 원칙을 세우는 것이었다. 저자는 본격적인 정의에 대한 설명에 앞서 공리주의와 사회주의적 접근의 장단점을 냉철하게 분석한다. 소수의 권익 보호와 개인의 자유가 합의된 사회를 만드는 것이 바로 롤스의 꿈이었다. 롤스의 요약을 따르면 사회적 부를 배분하는 원칙이야말로 <정의론>의 핵심이란다.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을 분배하는 방식으로 롤스는 사회주의 시스템이 가진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평등적 자유주의가 만병통치약은 아니겠지만, 우리 사회가 가진 모순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무상급식과 건강보험을 우리가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최소한 사회안전망이라고 규정한 부분에서는 정말 벌떡 일어나 격하게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 우리가 읽어야할 고전과 명저를 읽었다면 마땅히 의식의 전환과 그에 따른 실천이 뒤따라야할 것이다. 아무런 깨달음이 없는 관념적 책읽기라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책을 읽고 실천에 나서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독서인이 세상에 답하는 방식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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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 2011년 제7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강희진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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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한 때 리니지 폐인이었다. 레벨 올리는 재미에 낮과 밤이 바뀐 줄도 모르고 그렇게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 시간을 죽이곤 했다. 레벨 40을 달성하지 못하고 어느 날 돈오의 순간이 찾아왔고, 그 순간으로 바로 게임 중독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리니지라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에서 은퇴했다. 그러다 만난 강희진 작가의 <유령>은 다시 나를 아련한 옛 시절의 추억으로 인도했다. 그의 소설 중심에는 리니지 게임의 <바츠 해방 전쟁>이 있었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 탈북자의 이야기를 적절하게 버무린다.

역시 독자는 자신이 체험하거나 관심이 있는 주제에 쏠리기 마련인가 보다. 어제 책을 받았는데 그날로 다 읽어 버렸으니 말이다. 우선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에 앞서 도대체 이놈의 <바츠 해방 전쟁>이 무언가 싶어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이인화 선생의 사설을 만났고, 온라인 게임계의 전설처럼 남은 혁명전쟁의 실체를 접할 수가 있었다. 다중접속 게임의 신화를 창출한 엔씨소프트의 대작 게임 리니지2의 바츠 서버에서 일어난 디케이 연합의 독재와 횡포에 맞선 하층 민중의 반발이 이 엄청난 서사의 실마리를 이루는 발단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현실의 그것과 닮았는지, NPC 몬스터를 사냥하는 사냥터와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는 장터를 장악한 디케이 연합의 증세로 촉발된 이 대서사극은 뼈단검이라는 기본 무기와 변변한 갑옷도 하나 없는 내복단의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영웅적 활약으로 마침내 자유, 평등 그리고 동지애를 앞세운 혁명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물론,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고 승리 후의 혁명군 내부의 분열과 절치부심하며 실력을 기른 디케이연합군의 역습으로 모든 것은 일장춘몽의 신화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니 그런데 그 이야기가 <유령>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데?

소설을 쓰기 위해 <바츠 해방 전쟁>과 리니지 게임을 직접 해봤을 작가는 주인공 화림/주철(그의 정체성도 모호하기만 하다)이 <바츠 해방 전쟁>을 주도한 온라인 게임의 영웅이자 군주 쿠사나기라고 설정한다. 조지프 캠벨의 신화론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비록 온라인의 세계이긴 하지만 남들보다 정말 특이한 체험(<바츠 해방 전쟁>의 지도자이자 영웅)을 한 주인공이 현실 세계에 적응하기란 정말 난망하다. 게다가 그는 아사가 만연한 북한에서 탈출한 탈북자 출신이다. 게다가 백석 시인의 필명을 딴 백석공원에서 벌어지는 엽기적인 연쇄살인이라는 미스터리까지 가세해서 이야기는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사실 소설에서 그 범인이 누구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와 현실세계를 도대체 구분하지 못하는 주인공 삶의 궤적에 더 관심이 간다. 솔직히 온라인 세계에서는 최고 절정의 기량과 리더십을 자랑하는 전사가 현실세계에서는 정말 찌질한 캐릭터일 수도 있다는 설정은 진부하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현실세계에서 잘 나가는 놈이 가상현실에서도 짱이다라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말이다. 하긴 현실세계에서 그렇게 바쁜 사람이 온라인 게임에 투자할 시간이 어디 있겠냐만서도.

작가가 또 다른 이야기의 축으로 삼은 탈북자의 삶도 왠지 겉도는 느낌이다. 그가 그리는 북한의 실상은 너무 피상적이고 감상적이다. 몇 줄만 검색창에 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바츠 해방 전쟁> 같은 소재 말고, 탈북자들의 진짜 모습을 찾기 위해 고심한 흔적은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인다. 보편적인 이야기가 어쩌면 가장 특수한 예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바츠 해방 전쟁>이 나 같은 보통 독자에겐 특별한 것처럼 어마이를 찾아 남녘으로 내려온 주인공의 신산한 삶에 대해서도 좀 더 정교한 통찰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집단화된 사회주의도 싫지만, 인간미를 찾을 수 없는 자본주의는 더 나쁘다는 식의 양비론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신의 가르침보다 개인의 욕망을 쫓는 전도사를 보니 종교도 답이 아닌가 보다. 그럼 도대체 우리는 어디서 구원과 안식을 얻어야 한다는 말인가.

어쨌든 소설은 참 재밌게 읽었다. 우리나라 소설은 소재가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렇게 온라인 게임에 기초한 디지털 스토리텔링과 예상하지 못했던 서사에서 재밌는 이야깃감을 캐내는 걸 보면 그건 확실히 엄살이다. 강희진 작가가 차기작에서는 또 어떤 기발한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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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 그리고 사물.세계.사람
조경란 지음, 노준구 그림 / 톨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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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만나는 계기는 참 다양하다. 일전에 참가한 어느 독서 모임에서 리뷰 쓰기의 고충을 토로하던 참에, 동료가 조경란 작가의 <백화점>을 인용하면서 아무도 내가 쓰는 리뷰에 관심 두지 않을 거라는 말에 이 책이 읽고 싶어졌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나중에 책에서 직접 찾아보니 원래의 그것과는 많이 달라지만. 그런데 문득 여성작가가 아닌 남성작가가 똑같은 제목으로 책을 썼다면 어떨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이 들었다.

<백화점>은 철저하게 여성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쇼핑 공간 ‘백화점’의 생태보고서 양식을 취한다. 그런데 한 꺼풀 벗겨 놓고 보면, 백화점이라는 특수 공간을 빙자한 작가 노트가 아닌가 싶다. 물론 조경란 작가가 열심히 발품을 팔아 백화점이라는 공간에서 취급하는 다양한 상품군, 백화점의 역사 그리고 자전적 이야기를 하다가도 다시 백화점 공간으로 돌아오는 회귀도 빼먹지 않는다.

백화점은 확실히 기존의 파사주 같은 상가에서 진화한 근대적 공간이다. 백화점은 철저하게 고객의 편리를 위해 지상에 재현된 쇼핑을 위한 장소다. 고객을 위한 동선 구성에서부터 시작해서, 쾌적한 쇼핑을 위해 설계된 널찍한 공간 배치, 여성을 에스코트해 따라온 남성을 위해 배치된 적당히 불편한 의자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계산된 인공의 향취를 풍긴다. 이런 디테일을 남자 작가에게 기대할 수가 있을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말하는 슈어홀릭에 빠진 여성 고객이나 가짓수를 헤아릴 수 없는 그 다양한 잇백의 나열은 또 어떤가. 에코가 말하는 나열을 통한 특정한 지식의 외연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백화점>을 통해 개인적으로 배운 것이 많다. 확실히 목적 구매를 하는 남성에 비해, 발견-필요-구매의 진짜 ‘쇼핑’을 즐기는 여성의 차이는 그야말로 지구와 화성 간의 거리만큼이나 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작가가 백화점 타령만을 하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아련한 옛 추억을 구수하게 연상시키는 어머니가 털실로 직접 떠주신 스웨터, 무릎과 팔꿈치는 기워가며 대대로 물려 입었던 헌 옷의 기억을 주술처럼 불러일으킨다.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를 읽으면서 떠오른 의문에 대해서도 호탕한 방식으로 궁금증을 해결해준다. 과연 소비라는 행위를 통한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담보하는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은 과연 인간의 본성일까? 갖고 싶은 것을 다 살 수 있는 게 행복이라는 등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갖고 싶은 것을 살 수 없는 형편이라면 행복하지 않은 것이라고 작가는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한다(177~178쪽). 다른 부분은 몰라도 이 부분에서는 정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기 중의 장기인 기호학에서 다루는 시니피앙의 예는 물론이고, 독일 사회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게오르크 짐멜은 물론이고 쇼핑과 소비의 미학에 연관되는 주제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작가의 노련미가 참 일품이다. 백화점이라는 소비 공간에 대한 진중한 고찰은 물론이거니와, 한 때 책에 대한 욕심으로 책을 후무릴 계획까지 세웠던 책쟁이의 심오한 내공이 느껴졌다. 문구류에 대한 집착에서는 동지애마저도 느꼈다. 처음 들렀던 긴자 이토야 문구점에서 미처 사지 못한 스탬프 생각에 입맛이 써지기도 했다.

가끔 주제가 본궤도에서 이탈하기도 하지만, 이 책이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정도는 무방하지 않나 싶다. 사실 작가의 어느 작품과 관련된 일련의 스캔들로 일부러 다른 책을 읽지 않았는데 이 책으로 해빙 무드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아마 그 기억마저도 희미해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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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1 - 군중십자군과 은자 피에르, 개정판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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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에 김태라는 필명으로 프레시안에 <십자군 이야기>를 연재하던 이가 있었다. 아주 재밌게 보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연재가 뚝 끊겨 버렸다. 언제 다시 연재가 재개되려나 싶었는데 연재는 재개되지 않았고 그렇게 6년이 흘렀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지난해인가 헌책방에 갔을 때, 이제는 절판되어 구할 수도 없는 <십자군 이야기> 단행본을 보고서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사지 않았다. 그리고 올해 초부터 프레시안에서 다시 <십자군 이야기>가 연재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새롭게 단장한 <십자군 이야기>와 다시 만날 수가 있었다.

십자군 원정의 외형은 중세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 수복이라는 서방 기독교 세계의 대의명분을 따르고 있지만, 전쟁터의 현실과 예루살렘 해방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조명해 보면 철저하게 개인의 욕망의 현현에 충실한 전쟁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통해 전통적 우방인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 세력을 무력화하고, 에너지 자원의 효율적 관리를 기도한 것과 너무나 유사한 현상이다.

우선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고대 지중해 시대를 풍미했던 로마역사부터 개관한다. 그런 후에,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원만하던 서방 기독교 세계와 동방 이슬람 세계의 관계에 설명한다. 그러다 로마 교황과 서방 귀족들이 획책한 계획으로 이슬람에 대한 “비인간화” 과정을 거쳐 이제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버린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 충돌의 원형을 재현한다. 종교 정치 지도자들에게 대중에게 이교도 무슬림과의 평화로운 공존은 불가능하다는 정치, 종교적 선동을 서슴지 않는다. 이런 프로파간다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렇게 부시 행정부가 이끌었던 이라크 침공을 중세 십자군 원정에 비유하는 작가의 재치는 놀랍기만 하다. 하나님의 계시로 시작했다는 두 전쟁이 어쩌면 그렇게 유사하지 모르겠다. 현재의 이라크 전쟁이 중동산 석유 에너지 자원의 안정적인 확보와 중동에서 미국의 패권유지라는 차원에서 진행되었다면, 중세의 십자군 원정은 교황권 강화와 서방 세계에 내재한 모순의 해결이 주된 이유였던 것 같다.

만치케르트 회전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에게 대패하면서 제국의 중추인 아나톨리아를 상실한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서방 가톨릭과의 오랜 갈등을 접고 백척간두의 위기에 빠진 제국을 구하기 위해 가톨릭 교황에게 어쩔 수 없이 구원을 요청한다. 부시로 희화화된 당나귀를 타고 등장한 은자 피에르는 군중을 선동해서 예루살렘 회복을 주장한다. 이에 당시 교황이었던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 종교회의로 화답하여 마침내 십자군 원정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성도 예루살렘 탈환 작전 중에 죽은 이들은 모든 죄가 사면된다는 교황의 선언에 종교적 맹신과 광기로 똘똘 뭉친 군중십자군과 장자상속이 주류를 이루던 서방세계에서 차남을 중심으로 한 기사계급이 이 대원정에 가담하면서 역사의 수레바퀴는 무서운 속도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보급을 도외시한 당시 군중 십자군은 진격 도상에 위치한 각 서방도시에서 약탈을 일삼고, 유대인들을 학살하면서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같은 기독교 세계인 헝가리와 불가리아에서 양민을 학살하고 도시를 약탈하는 만행을 저지른 군중십자군의 쇄도에 놀란 동장 비잔틴 제국의 바실레이오스는 순순히 그들을 셀주크투르크가 지배하고 있던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로 보내준다. 예루살렘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무조건 동방으로 향하던 군중십자군은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이 이끄는 정예 투르크군에게 대패를 당하고 전멸 당한다.

어중이떠중이로 규합된 군중십자군의 패배는 어쩌면 예상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뚜렷한 전략과 보급 체계 없이 무조건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종교적 광신으로 무장한 그들에게 성공을 기대하기란 정말 요원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와중에 애꿎은 유대인에 대한 박해의 역사가 시작됐다. 같은 서방세계에 살지만, 이교도로 부유한 상인들이었던 유대인은 물자부족과 보급에 시달리던 군중십자군의 좋은 목표가 되었다. 같은 기독교도도 약탈하고 학살을 자행하는 마당에, 유대인은 말할 것도 없었으리라.

공교롭게도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같은 제목의 <십자군 이야기>와 비슷한 시기에 출간이 되면서 다시 한 번 십자군 전쟁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늘고 있는 것 같다. 시오노 여사의 십자군 전쟁이 비교적 정통 해석에 따른 것이라면, 김태권 작가의 십자군 이야기는 현대적 상황을 대입한 퓨전 스타일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이중코드 기법을 통해 중세의 십자군 원정의 텍스트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여전히 진행 중인 이라크 전쟁의 부당함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작품에 곳곳에 직접 등장하는 작가의 아바타를 보면서, 독자가 타자로 주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기를 바란다는 인상을 받았다. 딱딱한 역사적 사실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조심스럽게 눙치는 작가의 언어유희는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이런 친근함이야말로 작가의 새로운 해석에 힘을 실어주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살라흐 앗 딘이 이끄는 무슬림 세력에 맞선 서방제국의 사자심왕 리처드의 대결이 펼쳐질, 이제 절반을 지난 십자군 오디세이의 순항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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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 진시황과 이사 - 고독한 권력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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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중국 역사에 많은 관심을 뒀었다. 그래서 읽지도 못하는 한자가 있는 <사기 열전>이며 진순신 선생이 쓴 <황하> 같은 역사서들을 아주 즐겨 읽었었다. 이번에 김태권 작가가 중국 문화의 원형을 이루는 한(漢)나라 시대를 아우르는 <한나라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자그마치 10권이나 되는 대작을 비아북과 출간한다고 해서 많은 기대를 했다. 어제 드디어 <한나라 이야기>와 만날 수가 있었다.

<한나라 이야기>의 김태권 작가를 알게 된 것은 2003년에 한동안 프레시안에 연재된 <십자군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당시 미국을 이끌던 부시를 당나귀에 비유하면서, 천 년 전의 십자군 전쟁을 부시와 공화당 매파가 주도한 이라크 전쟁에 비유하면서 풍자와 해학의 묘미를 보여주던 만화를 보는 재미가 쏠쏠치 않았다. 다만, 무슨 사정인지 시리즈를 매조지 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그 후 작가가 그리스와 라틴 고전을 공부한다는 뉴스를 접했었는데, 이번에는 서양이 아니라 동아시아 그중에서도 중국의 한나라에 대한 만화를 그린다고 해서 많은 기대를 품었다. 한제국의 세운 유방에 앞서,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나라 시대로 김태권 작가는 400년 한제국 역사를 그리는 대장정에 나선다.

역시 중국 최초의 제국을 건설한 진시황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작가에 의하면 <한나라 이야기>의 큰 줄거리는 태사공 선생의 <사기>와 한나라의 반고가 쓴 <한서>를 텍스트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중에서 진나라와 관련되어서는 <사기 열전>의 “이사 열전”이 주를 이룬다고 한다. 진나라가 아직 7개의 제후국 중의 하나였던 시절에 즉위한 진왕 정(훗날 진시황)이 본격적인 친정을 개시하면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작가는 초점을 맞춘다. 노애의 쿠데타, 문신후 여불위의 실각과 자살 등 굵직굵직한 당대의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정치세력의 신구교체를 다룬다. 이사라는 신예 정치세력을 바탕으로 해서 나머지 여섯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킨 진왕 정은, 황제(皇帝)라는 새로운 호칭을 개발해 내면서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동안 후세의 사가들에 의해 아방궁이라는 호화궁궐과 만리장성 같은 대토목 사업으로 백성을 피폐케 하고, 분서갱유라는 희대의 지식인 탄압정책으로 폭군으로 규정된 진시황에 대해 작가는 새로운 해석을 할 것을 주문한다. 진시황은 하루에 30킬로그램에 달하는 죽간을 직접 결제했을 정도로, 국정운영에 왕성한 정력을 자랑했는데 이게 어떻게 해서 폭군의 요건에 해당하느냐는 말이다. 그의 주장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모름지기 폭군이라 하면, 국정은 젖혀두고 주색으로 날을 세우지 않았던가.

전국시대를 주름잡았던 제자백가 사상 중에서 인의를 중시하는 유가사상보다 법치에 의한 국가의 지배를 숭상하는 법가사상을 국시로 삼았던 진시황과 그의 브레인들은 언제나 고래의 종법제도야말로 검증된 국가경영을 위한 이데올로기라는 주장에 넌더리를 낸다. 그래서 결국, 분서라는 후대에 악명을 남길 지식인 탄압과 일단의 방중술사를 처단한 ‘갱제생’이 갱유, 다시 말해 유생들에 대한 탄압으로 왜곡되면서 진시황에 대한 후세의 폭군 이미지가 낙인이 찍혀 버린다.

역시 비주얼을 중시하는 만화답게, 김태권 작가는 고대의 그림들이나 삽화, 화상석들을 참조해서 복식의 치밀한 고증을 보여준다. 작가가 팁을 준 대로, 만화를 보면서 밑에 달린 각주들을 읽다 보면 큰 맥을 잃을 수도 있으니 일단 한 번 스토리만 보고 나서 나중에 재독할 때 각주를 볼 것을 권장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각주, 미주에 신경을 쓰다 보면 이야기의 큰 흐름이 끊어지기 쉬운 게 사실이다.

아무래도 큰 줄기를 짚다 보니 디테일에 있어서 부족한 면이 눈에 띄었다. 예를 들어, 진시황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던 희대의 자객 형가 편에서 보면 형가가 진왕 정을 알현하기 위해 준비한 연나라 독항 땅과 진나라에서 망명한 장수 번어기의 목 등에 대한 부분 그리고 나중에 형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실명까지 해가면서 진왕의 곁에 접근한 축의 명수 고점리에 대한 이야기가 쏙 빠져 있지 않은가.

진시황의 죽음과 2세 황제 호해의 즉위에 관한 음모에 대한 해석도 흥미롭다. 태자인 부소 대신 호해를 황위로 올리자는 환관 조고와 이사의 밀담을 어떻게 태사공 선생이 알았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 사실은 세상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하지 않은가 말이다. 진왕 정의 출새에 얽힌 비밀 역시 마찬가지다. 원래 여불위의 무희였던 조희가 임신한 채,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서 볼모 살이를 하던 자초에게 시집을 가서 진왕 정을 낳았다는 설 역시 그 진위가 의심스럽다. 아마 예나 지금이나 남의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진제국에 처음으로 반기를 들었던 진승과 오광의 난에서 민중의 구호로 사용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더냐”라는 프로파간다는 <한나라 이야기> 2편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될 한고조 유방(劉邦)에게 아주 딱 들어맞는 말이 아닌가. 그야말로 재주는 진승과 오광이 부리고, 돈은 유방이 걷어간 셈이라고 할까. 개인적으로 김태권 작가가 그리는 역사의 재구성이 아주 흥미롭다. 계속해서 출간될 후속편들이 기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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