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최경영 아자씨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자이가르닉 효과”라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 운전 중이어서 메모는 못하고 입으로 계속해서 되뇌였다, 잊어 버릴까봐. 너무 궁금해서 출근한 다음 네이버에게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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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 효과라고도 하는데 완결되지 않은 일에 대한 심리적 미련 혹은 여운 정도라고나 할까. 러시아 심리학자인 블루마 자이가르닉(Bluma Zeigarnik)라는 사람이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들이 주문을 받은 뒤, 바로 다 잊어 버리는 장면에서 창안했다는 것 같다.
발단은 박찬욱 감독의 명성이 자자한 <헤어질 결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 것 같다. 영화에서 주인공 서래가 해준에게 영원한 미결이 될 거라는 여운과 미련이 남는 대사가 그렇게 좋았다고 했던가. 보통 나같이 단순무식한 관객들은 여운이 남는 모호한 결말보다는 딱 정리가 되는 그런 서사를 선호하지만, 또 연출가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계속해서 여운을 남기게 되는 그런 영상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각고의 노력을 하는데 매진하지 않나 싶다.
나의 그 다음 연상은 바로 독서였다. 나의 독서에 자이가르닉 효과를 대입시켜 보니 또 무언가 깨달음이 생겼다. 지난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책들을 만났다. 그리고 다 읽고 난 다음에 가능하면 리뷰 혹은 독후감을 쓰려고 노력을 했다. 그런 다음에는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책에 대한 내용들을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상들을 모두 휘발시켜 버렸다.
왜 그랬을까? 자이가르닉 효과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션이 완결되었기 때문이다. 다 읽은 책에 대해서는 미련이 남지 않았다. 왜, 다 읽었으니까. 나의 머릿 속에 다 읽은 책들에 대해서는 좋고 싫고의 감정을 떠나 다 읽었다는 완결의 심리가 더 강하게 자리잡은 것이다.
반면 몇 차례 읽기 위해 시도했으나 그러지 못한 책들은 나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이었다. 사실 예전 같으면 작정 읽었다면 일주일이면 읽었을 책을 세 번이나 도전한 끝에 읽을 수가 있었다. 물론 그전에 들은 김영하 작가의 팟캐스트 낭독 때문에 마치 다 읽은 것 같더라는 감상도 있었던 것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여하튼 다 읽지 못했다는 일종의 죄책감 때문에 <새벽의 약속>은 계속해서 못 다 읽은 책으로 지근거리에서 나를 괴롭혔다. 물론 지금은 다 읽어서 그것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이루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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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보니 어디 그런 책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츠바이크의 <메리 스튜어트>도 지난 봄에 완독해 보겠다고 기세 좋게 나섰다가 못 다 읽었다. 오늘 새벽에 다시 집어든 앤드루 바세비치의 <워싱턴 룰>도 마찬가지다. 335쪽 짜리 책은 심지어 145쪽이나 읽었더라. 지난 세기의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직업 군인 출신 교사이나 학자의 냉철한 분석이라 기울어져 가는 제국의 몰락을 사유하기에 적합한 판단에 다시 읽기 시작했다.
에이모 토울스의 <링컨 하이웨이>를 읽고 싶어졌다.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은 했는데, 수배하기까지 기다리지 못할 것 같다. 오늘이라도 당장 사러 출동해야 하나 어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