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이후 아프간)에서 대테러 전쟁을 벌여온 미군이 철수할 계획을 외신으로 접했다. 원래 올해 9월 11일로 계획된 미군의 철수는 탈레반 게릴라들이 아프간 전역과 수도 카불까지 석권하면서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었다. 20년 전, 탈레반 집권했을 당시를 기억하는 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프간을 떠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국가수반인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돈다발을 들고 이웃 우즈베키스탄으로 도주했다고 한다. 아직 확인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미국은 지난 20년 동안 자그마치 1조 달러의 전비를 아프간에 투입했는데 결국 실패로 끝이 나 버렸다.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이 9-11 테러의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을 10년 전에 제거하는 것 말고는 아프간에 건실한 민주주의 정부를 세우는데 실패한 것이다.
지난 주말에 장피에르 필리유와 다비드 베가 협업해서 제작된 <만화로 보는 중동, 만들어진 역사>를 보면서 미국 건국 이래 중동에 개입해온 그동안 미처 몰랐던 역사를 알게 됐다. 미국이 세워진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부터 미국은 트리폴리의 이슬람 해적들과 무력투쟁을 벌여왔다. 미국의 군함들이 이슬람 해적들에게 나포되고 미해군 소속 장병들이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중동에서 미국의 최우선 파트너가 된 와하비왕조의 사우디 아라비아의 역사를 시작으로 해서 1950년대 이란의 민족주의 모사데그 정권의 전복활동에 미국 CIA가 개입했다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루홀라 호메이니가 모사데그 시절부터 활동했다는 점도 새로 알게 됐다. 중동의 석유자원은 미국으로서는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중동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이라크의 후세인을 부추겨서 8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에서는 이라크를 지원했다. 그렇게 미국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괴물인 후세인이 미국에 반기를 들자 이번에는 걸프 워라는 이름으로 그를 응징했다.
아프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79년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국은 소련에 대항하는 무자헤딘 전사들을 자유의 전사라고 추켜올리며 스팅어 미사일 같은 최신 군사장비들을 대량으로 제공했다. 군사고문단을 파견해서 무자헤딘 전사들에게 소련의 정규군을 상대할 게릴라 전술을 훈련시켜 준 것도 바로 미군이었다. 무자헤딘은 1994년 아프간에 등장한 탈레반의 전신이었다.

소련이 철수하고 나서는 탈레반을 상대로 미국이 전쟁을 시작했다. 오사마 빈 라덴을 양도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탈레반 정권이 무시하자, 미국이 전쟁을 개시한 것이다. 물라 무하마드 오마르가 이끄는 탈레반 정권은 미국이 아프간에 공습으로 전쟁을 시작한 지 3개월만에 수도 카불을 버리고 패주해 버렸다. 아프간에 파견된 미군에게 20세기 초 그레이트 워에서 영국군과 싸우고 냉전 시절 미국와 양강이었던 소련을 패퇴시킨 아프간 게릴라들은 장장 20년에 걸친 전쟁 끝에 결국 다시 승리했다. 놀랍지 않은가.
미국과의 정규전에서 혹독한 패배를 경험한 탈레반은 아프간의 다수를 차지하는 파슈툰족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 그리고 파키스탄의 지원이라는 3박자를 바탕으로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인터뷰에서 탈레반이 그렇게 빨리 아프간을 장악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는 전략적 판단 착오를 인정했다. 종교와 인종이 다른 미군을 아프간 사람들은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을 도와주러 온 우방이 아닌 침략자로 인식하지 않았나 싶다. 미군 역시 예전의 소련군과 마찬가지로 간선도로와 도시들을 잇는 거점 확보에만 주력했지, 사실상 아프간의 바닥 민심을 대변하는 부족주의 정신을 간과하지 않았나 싶다. 그 결과가 미국의 아프간에서의 비참한 패퇴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군의 철수도 철수지만, 구 아프간 정부가 스스로를 지키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냉정하게 짚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국가수반인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앞장서서 타국으로 도주했다는 점이다. 미국 시민권자로 알려진 가니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하는 아프간 민중들의 생명과 자산을 지키기보다 자신의 생명과 재산 수호에 열심이었다. 이런 정부가 무너지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영국의 그레이트 워 이래 아프간이 중앙아시아의 전략 요충이라는 사실을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미국과 달리 탈레반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온 중국과 러시아는 탈레반 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대사관을 유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천명했다. 아프간은 미국이 비슷한 시기에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한 이라크와는 달리 석유라는 자원이 전무했다. 한 마디로 말해 먹을 게 없는 그런 전쟁이었다는 점이다.
1조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전비를 들이고서 도대체 미국이 얻은 게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질문에 바이든은 물론이고 전임자였던 트럼프 시절부터 아프간 철군은 이미 결정되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대통령이었던 트럼프가 결정하고 바이든이 시행한 철군 결정에 대해 46년 사이공 철수를 운운하는 공화당의 비판이 힘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프간과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 제국(諸國)에 민주주의 이식이란 정말 요원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