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
엔도 슈사쿠 지음, 송태욱 옮김 / 뮤진트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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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쯤 죽어라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여러 군웅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가히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 버금갈 만한 인물들이 줄지어 등장했고, 군웅할거의 시대는 흥미진진했다. 그중에서도 오슈(현재 센다이현)의 패자로 30년만 더 일찍 태어났다면 도쿠가와 대신 일본의 패자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도쿠간류 다테 마사무네를 알게 됐다. 이 야심가는 게이초 연간에 대형 선박을 건조해서 동아시아를 장악한 스페인 상인들을 거치지 않고, 대양 건너 멕시코와 직접 거래를 트겠다는 원대한 꿈의 소유자였다.

 

내가 만난 역사의 한 끄트머리를 소재로 삼아, 엔도 슈사쿠 작가는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을 엮어 <사무라이>라는 팩션을 창조해냈다. 1613년 가을, 센다이 번의 하급 사무라이였던 하세쿠라 로쿠에몬은 영주의 명을 받아 다른 세 명의 메시다시슈들과 함께 태평양 너머 멕시코와 해외무역을 요청하는 서한을 들고 대원정에 나선다.

 

대전란의 시기에 줄을 잘못 섰던 하세쿠라 집안은 기존의 영지였던 구로카와를 빼앗기고, 척박한 야곡지를 봉토로 받아 거의 농민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 전장을 누빈 역장의 노장이었던 그의 숙부는 다시 공을 세워 구로카와를 되찾을 생각에 여념이 없다. 숙부 같은 속세에 대한 미련이 없었던 하세쿠라 로쿠에몬은 그저 아내 리쿠와 두 명의 아이들과 기근이 상례적으로 발생하는 골짜기에서 조용하게 살다가 죽기를 소망한다. 그들을 두렵게 만드는 건 전쟁이 아니라 혹심한 기근이었다. 순종과 인고 그리고 체념의 상징인 하세쿠라에게 왜 이시다 영주는 그런 중요한 임무를 내린 걸까?

 

하세쿠라가 더블 캐스팅의 한 축이라면, 역시 실존 인물이었던 루이스 소텔로를 모델로 삼은 스페인 출신의 벨라스코 신부가 다른 축을 맡고 있다. 간파쿠 히데요시의 기리스탄 탄압이 시작되면서 비교적 용이했던 남만 출신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은 극도로 위축되었다. 게다가 신교도 국가들인 영국과 네덜란드는 포교보다 무역에 방점을 두면서 가톨릭 선교사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도 이런 부분들이 소개된 바 있다.

 

나중에 드러나게 되지만, 벨라스코 신부는 우레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야고보를 떠올리게 한다. 격정에 넘치는 자기 확신에 찬 이 신부는 장차 일본의 주교가 되어 교활한 일본인들을 반드시 개종시키겠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종교 전사였다. 그의 스승과 동료들 그리고 가족들은 그런 그를 우려했지만, 벨라스코 신부의 불타는 신념 앞에 그런 걱정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직접 만나기도 했던 벨라스코 신부는 센다이 번의 번주 다테 마사무네와 능숙한 일본어 실력을 이용해서 멕시코와의 거래를 성사시킨다면 자신의 영내에서 포교 활동을 눈감아 주겠다는 언질을 받는다.

 

일본 포교에서 숱한 실책을 범한 베드로회에 경쟁 관계에 있던 바울회 소속의 벨라스코 신부의 광신이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목표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대원정에 나선 사무라이 사절단을 속이는 건 기본이고, 온갖 회유와 술책을 구사한다. 그 모든 것이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라는 자기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그런 광신은 위험한데, 21세기에도 그런 광신이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걸 보면 예나지금이나 다를 게 무얼까 싶기도 하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왜 다테 마사무네는 자신의 중신이 아닌 하급 사무라이들인 메시다시슈를 기용한 걸까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영지를 잃고 척박한 땅에서 궁핍한 삶을 사는 이들이었다. 대전란의 시대가 끝나고, 공을 세울 수가 없게 되어 평정소나 영주에게 달리 하소연할 수가 없었다. 그런 참에 대양을 건너 멕시코까지 가는 소임을 완수하고 난다면 어쩌면영지 교환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영주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사무라이들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지도 모를 그런 위험한 여정에 몸을 내맡긴다.

 

어쨌든 하세쿠라는 어려서 자신의 곁을 지킨 하인 요조와 다른 세 명의 시종들과 함께 정든 골짜기를 떠나 대원정에 나선다. 멕시코로 가는 배 위에서 네 명의 사절단원 중의 하나로 영악했던 마쓰키 주사쿠는 그들이 영주의 버리는 돌이라는 표현으로 그들의 처지를 냉정하게 분석한다. 영주로서는 그들이 이 위험한 임무를 성공해도 그만, 실패해도 그만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하세쿠라는 보통 소설에서 사무라이라는 특별한 호칭으로 언급되는데, 다른 동료인 다나카나 니시와 구분되는 느낌이다. 다나카는 보수적인 사무라이를 대표하고, 보다 젊은 니시는 스페인 말부터 시작해서 모든 새로운 문물을 받아 들이는데 있어 적극적이다.

 

두 번의 폭풍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며 멕시코의 아카풀코에 상륙한 사무라이 사절단은 멕시코시티로 가서 아쿠냐 총독을 만나 영주의 서한을 전달하지만 총독은 자신에게 그럴 권한이 없다며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3세에게 떠넘긴다. 한편, 그들과 함께 대원정에 나섰던 38명의 상인들은 현세의 이로움을 위해 기리스탄으로 세례를 받는다. 아카풀코, 멕시코시티, 푸에블라, 코르도바를 거쳐 베라크루스에 도달하는 그들이의 여정은 험난하기 짝이 없다. 멕시코시티에서 사절단의 소임이 이미 실패했다는 걸 파악한 마쓰키 주사쿠는 다른 상인들과 함께 본국행을 결정한다. 그 중에서 가장 현명했던 판단이 아닐까 싶다.

 

벨라스코 신부는 그야말로 땅끝까지 가서 스페인의 국왕과 교황을 만나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결기를 보인 진짜 사무라이 다나카의 버프를 받아 결국 스페인의 세비야, 톨레도, 마드리드를 거쳐 프랑스와 로마에 도달하는 어마어마한 여정에 나선다.

 

소설의 한 축에는 격변하는 정치적 배경이 있다면, 또 다른 한 편에는 엔도 슈사쿠의 장끼라고 할 수 있는 종교적인 측면이 자리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엔도 슈사쿠는 현세의 왕과 내세의 왕을 만나는 힘겨운 여정에 방점을 찍는다. 역설적으로 현세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펠리페 3세나 로마의 바오로 5세는 사무라이 사절단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사무라이들이 그토록 원하는 자신이 봉토 반환이라는 숙원에 1도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주교회의의 논쟁은 일본에서의 포교 활동에 대한 최종심이 아닐 까 싶다. 벨라스코 신부보다 앞서 일본에 파견되어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베드로회 소속의 발렌테 신부는 격정에 휩싸여 천지분간하지 못하고 자신을 주교로 세워 주기만 한다면 일본에서의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겠다고 나선 벨라스코 신부를 어린아이에게 훈계하듯 달랜다. 그래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은 3명의 사절단 사무라이들까지 표면적으로나마 개종시킨 업적을 바탕으로 주교회의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려던 순간, 동방에서 날아온 긴급 서한 한 통은 모든 것을 무위로 돌려 버렸다. 도쿠가와 막부가 그동안의 유화적인 제스처를 포기하고 본격적인 기리스탄 박해에 나섰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게 만사휴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무라이 사절단의 로마행과 교황 알현은 영광이 아니라 슬픈 귀환을 위한 마지막 희망이자 간절한 호소일 뿐이었다. 그리고 슬픈 귀국에 이은 조국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배신의 드라마가 준비되어 있었다. 목숨을 무릅쓰고 나섰던 위험한 임무에 대한 포상이나 격려 따위는 출발 때와는 180도 바뀐 정치적 상황으로 기대할 여지조차 없었다. 마쓰키 주사쿠의 예언대로, 사무라이들은 버리는 돌일 뿐이었다. 본대보다 일찍 귀국한 마쓰키 주사쿠는 시류에 잘 편승해서 평정소의 감찰로 활동하고 있었다. 우직하게 소임을 다한 사무라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비참한 결말이었고, 그때그때 급변하는 시류를 잘 이용한 이들은 호의호식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엔도 슈사카는 소설 <사무라이>에서 다시 한 번 잘 보여준다.

 

소설의 한 축을 차지하는 종교 이야기를 하자면 또 한참 걸릴 것 같다. 하세쿠라 로쿠에몬은 벨라스코 신부가 태평양을 건너는 배 안에서부터 내내 들려준 예수 그리스도의 생에와 그의 가르침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 또한 지극히 현세중심적인 일본인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에 건너가서는 소임을 완수하기 위해 비록 기리스탄에 귀의하긴 했지만, 그의 본심을 그게 아니었다. 벨라스코 신부는 어떤 방식으로라도 신의 아들과 관계하게 된다면 신에게 언젠가는 돌아갈 것이라는 신념 아래 자신이 믿는 바를 그대로 밀어 붙인다. 유럽의 모든 도시와 수도원 성당에서 만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왕과의 대면은 그를 회의하게 만든다.

 

귀국 후, 쇄국정책으로 돌아선 막부의 관리들에게 심문을 받던 중 경솔한 니시의 발언으로 그들의 운명은 비극으로 결정됐다. 마닐라나 멕시코의 수도원에 거주하면서 설교할 수 있었던 안락한 삶 대신 막부의 박해에 시달리던 일본의 기리스탄들을 위해 밀항했던 벨라스코 신부는 결국 막부의 관헌에 체포되어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화형에 처해졌다.

 

저자는 인간사의 덧없음을 잔잔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가치를 위해 맹렬하게 돌진했지만, 나의 마음을 풀어줄 보상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버리는 돌일 뿐이었다. 어쩌면 그런 순간에 인간은 초월적 존재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 어쩌면 어떤 종류의 보상을 바라고 우리가 한 행동들이 결국 헛되고 헛되다는 말일 지도 모르겠다.

 

신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제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오류와 실책들을 동료 사제에게 고백한다. <침묵>의 로드리고가 바로 떠올랐다. 우리가 신이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다른 방식으로 역사하는 게 아닌가.

 

엔도 슈사쿠 작가는 실제 역사와 상이하게 소설의 결말을 냈다. 나는 책을 받자마다 단 이틀 만에 다 읽어 버렸다. 졸음이 와서 눈꺼풀이 무시로 내려앉는 가운데서도 도저히 끝까지 읽지 않고서는 잠이 들 것 같지 않아서. 2021년에 만난 최고의 소설 가운데 하나였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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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8-14 10:2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와 최근에 나온 책을 벌써 읽으셨군요. 정치와 종교가 버무려진 이야기군요. 저는 제목만 봤을 때 종교이야기는 아닌줄 알았어요.

레삭매냐 2021-08-14 10:39   좋아요 8 | URL
예약도서로 주문했는데
받는데 3일인가 걸렸습니다.

기다리다가 사리 나오는 줄.

너무 재밌었습니다, 영주에게
농락당한 하세쿠라는 정말...

엔도 슈사쿠 작가의 작품에는
거의 종교가 녹아 있는 것 같
습니다.

새파랑 2021-08-14 10:51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직접 별 다섯개를 그리실 정도라니~!!

레삭매냐 2021-08-14 12:08   좋아요 5 | URL
기대한 작가의 작품이라
그런지, 너무 재밌게 읽었답니다.

잠자냥 2021-08-14 11:1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걸 벌써! 전 장바구니에 담아두기만 했는데요!

레삭매냐 2021-08-14 12:09   좋아요 5 | URL
지난주에 신간으로 보고
주초에 주문장을 날렸는데
빨랑 배송이 되지 않아 아
주 기냥.

페넬로페 2021-08-14 14: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제가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가가 엔도 슈사쿠인데 신간이 나왔네요^^
벌써 읽고 리뷰 올리시는 레삭매냐님은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매번 책사진도 무척 아름다워요.
전 사진이 항상 크게 들어가는데 레삭매냐님의 사진은 크기가 적당하네요^^

레삭매냐 2021-08-14 18:20   좋아요 2 | URL
좋아하는 작가에 주제 그리고
시대상 같이 두루 갖춘 팩션
이니 어찌 아니 읽을 수가...

별 건 아니지만 후닥닥 찍고
약간의 뽀샵 처리를 했습니다.

그레이스 2021-08-14 14: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침묵>만 2번 읽었는데
이 책, <침묵>의 후속편이라고 봐도 좋을듯 하네요.
이 작가는 뮤진트리, 포이에마, 홍성사, 카톨릭출판사....
책마다 출판사가 다 다르네요.
그 이유가 흥미로울듯^^

레삭매냐 2021-08-14 18:21   좋아요 2 | URL
좋아하는 작가에 주제 그리고
시대상 같이 두루 갖춘 팩션
이니 어찌 아니 읽을 수가...

별 건 아니지만 후닥닥 찍고
약간의 뽀샵 처리를 했습니다.

stella.K 2021-08-14 14: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졸음을 참아가면서 읽으셨다니.
문득 학창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전 그때 외엔 졸음을 참아가며
뭘 했던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요
저는 책을 좋아하지만 잠 보다 더 좋아하진 않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매냐님이 부럽기도하고 순수해 보이기도 하고.ㅋ
그럴실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침묵>이 생각나기도 하고.
올해 읽은 최고의 책 반열이 놓으셨으니 저도 기억했다 읽어보도록 하겠슴다.^^

레삭매냐 2021-08-14 18:26   좋아요 4 | URL
저는 학창 시절엔 그냥
졸리면 잤던 것 같습니다.
잠을 이길 수가 없었거든요...

<사무라이>는 <침묵>의
연장선에 서 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바보>도 구해 두었고, 오늘
도서관에 가서 <깊은 강>도
빌렸습니다. 읽을 수록 진국
이라는 생각이 드는 슈사쿠
선생입니다.

붕붕툐툐 2021-08-14 23: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엔도 슈샤큐는 제가 읽은 몇 안되는 일본 작가인데, 이 책도 넘나 흥미롭네용! 소개 감사드려용^^

레삭매냐 2021-08-15 00:38   좋아요 2 | URL
<침묵>으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한 이래, 꾸준하게 읽고
있습니다.

mini74 2021-08-14 23: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깊은 강 무지 감명깊게 읽었어요. 이 책 읽고싶은데 침묵의 연장선에 있는 책이라고 하시니, 그럼 침묵 먼저 읽고 사무라이를 읽는게 더 나은가요. *^^* 즐거운 휴일 보내세요 에삭매냐님 ~~

레삭매냐 2021-08-15 00:40   좋아요 2 | URL
어제 도서관에서 <깊은 강> 빌려
왔는데 분량이 제법 되더라구요.

지금 읽고 있는 고지마 노부오의
<포옹가족>을 다 읽고 나면 도전
해 볼 생각입니다.

<침묵> 그리고 <사무라이>를
추천해 드립니다.

위드업 2022-01-06 1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나오기를 두 손 모아 기도 했고, 출간되어 여러 번 읽었습니다. 정말 훌륭한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