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멘타 하인학교 (양장)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빈프리트 게오르크 제발트의 새로 나온 책을 읽다가 접고, 결국 나는 로베르트 발저의 책을 집어 들었다. 아니 원전을 만나 보지 않고 어떻게 그 원전을 다룬 책을 만난단 말인가. 어디선가 알게 된 고트프리트 켈러의 <초록의 하인리히>도 만나보고는 싶으나 방대한 분량 때문에 패스. 발저의 책이 난해하다고 하더니만 다 읽는데 무려 10일이나 걸렸다. 물론 이 책만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스위스 빌 출신의 로베르트 발저는 이례적인 독일어 사용 문단에 있어 무학의 천재 작가였다. 가정 형편상 어려서 학업을 포기하고, 은행의 수습사원으로 돈벌이에 나서야했다. 글쓰기라는 악덕에 매몰된 발저의 또 다른 취미는 걷기였다. 어쩌면 그도 발로 사유를 했을 지도 모르겠다. 1956년 그는 자발적으로 들어간 멘탈 인스티튜트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훗날 그가 남긴 기록들을 여섯 권의 책으로 펴냈다고 했던가. 1907년부터 해마다 펴낸 베를린 삼부작은 <타너가의 남매들>, <조수> 그리고 <벤야멘타 하인학교>.

 

1905년 로베르트 발저는 27세의 나이로 실제로 하인학교에 입교해서 하인/집사 교육을 받고, 오버 슐레지엔의 성에서 얼마간 하인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벤야멘타 하인학교>에는 그런 그의 체험이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름부터 귀족 출신이 드러나는 우리의 주인공 야콥 폰 군텐은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고전주의 독일 교양소설(bildungsroman)의 기본 플롯을 완전 무시하는 캐릭터가 바로 이단아 야콥이었다. 기존의 규칙대로라면 야콥은 하인학교의 생도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고 무언가 대단한 존재로 거듭나야 했다.

 

하지만 평생 내적 불안에 시달린 작가 발저는 다른 방식으로 구도에 나선다. 그것은 바로 복종이었다. 이런저런 기술들과 언어 혹은 훌륭한 예절들을 배워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하는 소년들의 선두주자는 크라우스다. 이렇다 할 매력이 없어 보이지만, 독일 국가가 원하는 규칙을 준수하며 체제에 순종하는 인간형이 바로 크라우스가 아니었을까. 정식 학교는 아니지만 어쨌든 벤야멘타 하인학교에서 아무 것도 배울 게 없고, 그저 무쓸모인 존재라는 인식 아래 야콥은 일기 형식의 글들을 계속해서 써 갈긴다.

 

때로는 나폴레옹을 따라 전장을 나서기도 하고, 벤야멘타 교장 선생의 여동생인 리자 벤야멘타를 동경하기도 하면서, 학교에 무언가 비밀을 있으리라는 긴장감을 연출하기도 한다. 언젠가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하겠다는 상상을 하다가도 그게 다 무어냐는 식의 널뛰는 감정을 슬쩍 비치기도 한다.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그런 서사의 전개다. 벤야멘타 선생님을 따라 나서는 장면에서는 판타지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걸 신종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의 어느 시점에서 야콥은 깨달음을 얻거나, 성공에 대한 무지막지한 포텐을 터뜨리면서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는 게 정석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독자의 예상을 전복시키고, 야콥은 반항 대신 기존 질서에 대해 복종을 선택한다. 어쩌면 소년에게 복종은 불확실한 세상에서 도피처이자, 유일한 선택지였는지도 모르겠다. 크고 작은 일탈과 쾌락을 추구하는 남자 야콥이 가진 이중성이라고나 할까. 그는 분명 문제적 인간이지만, 도를 넘는 소위 똘기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에게 무언가 화끈한 일탈을 기대했건만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야콥은 작은 것들에 집중한다. 마치 발저 작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흥청거리던 세기말의 대도시 베를린 혹은 빈에 살던 야콥은 복종과 일탈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욕망들이 무시로 충돌하는 가운데, 내적 갈등이나 자아의 분열을 경험했던 게 아닐까. 난해하기로 유명하다는 그의 문장의 행간에서 무언가 핵심적인 것을 찾아내기 위해 나는 고군분투했다. 작가 발저의 페르소나가 분명한 야콥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경을 극복한 영웅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그런 기대와는 달리 소년은 점점 무쓸모한 존재가 되어간다. 이러한 설정은 하인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세심하게 준비한 이력서(마지막 미션이다)를 들고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자본주의 신화를 매섭게 타격한다. 그렇다면 모든 교육의 목적은 사회가 필요한 쓸모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란 말인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문제아 야콥에게 매료되었다는 벤야멘타 교장 선생님은 소년에게 자신과 함께 사막으로 떠날 것을 권유한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일자리를 찾아 떠났고, 야콥만이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마지막 학생이 되었다. 이것은 서구의 산업혁명 이래 시대정신이 된 자본주의 시스템에 맞게 변형을 강요받은 학교 교육의 붕괴를 상징하는 추단이 아닐까. 소설의 처음부터 하인학교에서 딱히 배울 게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순전히 적은 분량을 만만하게 보고 덥석 덤벼들었다가 낭패를 당했다. 저자의 저술 의도를 파악해 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랄까. 발저 작가의 글이 난해하다는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경험했다. 어쨌든 그렇게나마 로베르트 발저의 책을 한 권 읽었으니, 다시 제발트의 책으로 복귀해도 괜찮지 않을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니 그것으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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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뿐호빵 2021-04-30 08: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 로베르트 발저 저도 만났다가
그의 심오함에 한참 헤매다가 기진맥진ㅋㅋ
다음 책을 쉽게 넘기지 못하겠더라고요ㅎㅎ

정말 산책하듯이 천천히 읽히는 ㅎㅎ
발저의 의도, 저는 그리 짐작했습니다

레삭매냐 2021-04-30 09:36   좋아요 2 | URL
분량이 적어서 금방 읽겠지 하고
덤벼 들었다가 아주 곤욕을 치렀습니다.

말씀해 주신 대로,
다른 책의 제목이 왜 ‘산책자‘인지 이번
에 발저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답니다.

coolcat329 2021-04-30 10: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안 읽을 책 목록 상위권에 있는데 제가 잘한거겠죠?

잠자냥 2021-04-30 10:43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ㅋㅋ 굉장히 지루한 고품격 작품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레삭매냐 2021-04-30 10:45   좋아요 3 | URL
우리의 제발트 샘이 독일 문학의
대표선수라고 하는데 도저히
쌩깔 수가 없어서 도전했다가 그만...

나이스 설렉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레삭매냐 2021-04-30 10:46   좋아요 5 | URL
[투잠자냥님]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읽으면서도 내가 당최 무얼 읽고
있는가 싶었습니다. 이런 저런 자료
들을 찾아 보고서야 그나마 이해가
되더군요.

그런 점에서 지금 읽고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스러운 샘의 독자
를 컨텐츠로부터 격리시키는 그런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Falstaff 2021-04-30 12:15   좋아요 5 | URL
읽지 마셔요.
저도 그거 읽다가 뇌 엉켰어요!! 그래서 이 모양인가 봐요. ㅜㅜ

coolcat329 2021-04-30 13:01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ㅋ 뇌가 엉키다뇨!

미미 2021-04-30 12:3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리뷰도 그렇고 댓글도 온통 호기심을 끌어내내요!😳
그리고 ‘발로 사유한다‘니 너무너무 멋진 말입니다!!👍

레삭매냐 2021-04-30 15:34   좋아요 2 | URL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집인 <산책자>
읽겠다고 하다가 나가 떨어졌던 흑역
사가 있답니다.

이번 참에 다시 한 번 도전해 볼까
합니다.

붕붕툐툐 2021-04-30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전의식 생기게 하는 책이네요. 집어 던질 때 던지더라도 일단 읽어보겠습니다!ㅎㅎ

레삭매냐 2021-05-01 09:35   좋아요 0 | URL
하도 데여서 산문집이라는
<산책자> 도전을 못하겠습니다.

하긴 그전에도 읽어 보려다가
망한 적이 있었죠...

우리는 집에 있는 책을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