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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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 들어 오늘까지 정확하게 99권의 책을 읽었다. 그 중에 가히 최고로 꼽을 만한 책이 바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보라색 히비스커스>라고 말하고 싶다. 그녀와의 인연은 예전에 나온 <아메리카나>를 원서로 사면서 시작됐다. 물론 원서로도 그리고 번역서로도 다 읽지는 못했다. 뭐랄까 나이지리아 출신으로 미국인이 된 그녀의 정체성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할까. 단편집 <숨통>에 실린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 받는 과정을 그린 단편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돌고 돌아, 그녀의 데뷔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만나게 됐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내가 소설에서 좋아할 만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캄빌리 아치케는 15세 소녀로 타인들에게는 고결한 사람이자 오멜로라(고장을 위해 일하는 자)라고 불리는 아버지 유진의 폭압적인 슬하에서 자라고 있다. 영국 유학생 출신으로 일찍이 선교사들에 의해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독실하다 못해 광신자(zealot)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유진은 성공한 사업가이자 진보 언론 <스탠더드>의 사주로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문제는 가정이다. 캄빌리와 그녀의 오빠 자자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며, 자신이 만든 규칙과 매일의 일과표를 지키라고 강요한다. 한 치라도 자신의 규칙에서 어긋나면 상상 이상의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진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은 쿠데타로 나이지리아 헌정 질서를 어지럽힌 군사 정권의 그것과 정확하게 궤를 함께 한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굉장한 정치 소설로도 읽을 수 있지 않나 싶다. 군사 정권을 맹렬하게 비판하는 지식인들에게 폭탄 테러를 가하고, 살해한 다음 산성 용액을 붓는 만행에서 군사 독재정권 시절의 기시감이 떠올랐다.

 

나이지리아판 스카이 캐슬도 주목할 만하다. 자자와 캄빌리가 다니는 가톨릭계 사립학교에 거액의 기부를 하는 유진은 자식들이 항상 1등을 강요한다. 2등을 한 캄빌리에게 라이벌의 머리가 두 개냐며 묻는 장면에서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전통주의자인 아버지 파파은누쿠를 이교도라 부르며 상종도 하지 않는 막장 드라마를 연출하기도 한다. 파파은누쿠는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아버지와 아들이 동등하다는(삼위일체) 이유로 아들 유진이 자신과 맞먹으려고 한다며 혹독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균열이 있는 법. 은수카의 나이지리아 국립대학에서 남편을 잃고 교수를 하던 고모 이페오마의 크리스마스 방학을 보내러 가면서 캄빌리와 자자는 자신들이 처해있는 억압적인 상황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이런 면에서는 성장소설의 수순을 따르기도 한다. 세 명의 사촌 아마카, 오비오라 그리고 치마는 당장 쓸 가스가 없고 먹을 게 없는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들 가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토론과 웃음 그리고 자유는 캄빌리를 충격 속으로 밀어 넣는다. 아니 도대체 이런 별천지가 있었던가.

 

그 즈음에 등장할 법한 매력적인 아마디 신부는 또 어떤가. 항상 억눌린 삶을 살아온 십대 소녀 캄빌리는 자유분방하고 순수 그 자체인 아마디 신부를 사랑하게 된다. 문제는 경쟁자가 사람이 아닌 신이라는 점이라고 작가는 못 박는다. 아니 어쩌면 지극히 속물근성의 집합체인 아버지와 달리 민중을 사랑하는 아마디 신부의 모습에 캄빌리는 반했던 게 아닐까. 캄빌리에게 아버지는 공포의 대상인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인정받고 싶은 대상이기도 했다. 이런 다채롭게 펼쳐지는 스토리텔링이야말로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진가가 아닌가 싶다.

 

데뷔작으로 이런 소설을 쓰는 게 과연 가능할까? 예전에 천명관 작가의 <고래>를 보고 느낀 전율감 비슷한 게 느껴지기도 했다. 서구에서 들어온 가톨릭과 전통주의의 충돌, 외부에서는 고결한 지식인의 면모를 보이지만 집에 돌아오면 가차 없이 벨트를 풀러 아이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폭군 아버지, 나이지리아 국가를 바꿀 의식과 능력이 있는 이들은 군사 정권의 폭력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조국을 떠나게 되는 현실. 아니 아프리카 유수의 산유국인 나이지리아에서 기름이 없어서 대학 교수가 차를 굴리지 못한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느냔 말이다.

 

나이지리아 전통 음악을 즐기는 아마카의 자주적 캐릭터는 캄빌리가 속으로만 생각하는 롤모델이 아니었을까. 이페오마 고모가 그렇듯, 캄빌리가 처한 상황과 달리 자유로운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들만의 자신감이 보였다. 미국으로 가지 않고 조국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아마카의 주장은 파파은누쿠의 주장과 결을 함께 한다. 아마카의 동생 오비오라는 나이지리아에 미련이 없다는 듯 당장이라도 미국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미국에 가서 2등 국민으로 살아야 한다는 숙명에 대한 고민도 빠지지 않는다. 의사가 청소부가 되고, 변호사가 택시운전사로 살지만 최소한 잦은 정전과 허기는 면하게 되리라는 희망. 그 뒤의 이야기는 아마 후속작 <아메리카나>에서 아디치에가 다룬 것으로 보인다.

 

중후반까지의 놀라운 스토리의 전개에 비해 결말이 다소 미흡한 게 아쉽다. 엔딩이 좀 작위적이라고나 할까. 역자 후기에 보면 당대 나이지리아 현실에 대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고 한다. 1960년 이래 6번의 군사 쿠데타와 참혹한 비아프라 내전을 겪은 다민족 연방국가 나이지리아의 역사를 살펴 보면, 과연 소설에서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혁신적 민주주의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 싶다. 만연한 부정부패, 종교 갈등, 석유 개발이권 등의 다양한 사회적 난제들을 연이어 등장한 무능력하고 정통성 없는 군사 정권이 해결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외부인의 시각으로 본다면, 그런 만큼 소설을 위한 다양한 이야깃감을 제공한다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너무나 재밌게 읽었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담은 스토리텔링에 반해 버렸다. 가지고 있는 <아메리카나><숨통>도 기회가 되는 대로 도전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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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9-07-19 10: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99권 중 가히 최고라니...저도 도전해봐야겠어요. 아버지 유진이란 사람이 흥미롭네요.글 잘 읽었습니다.

레삭매냐 2019-07-19 10:02   좋아요 2 | URL
아... 어젯밤에 회사 회식하고서
음주 독서로 달렸는데 도저히
다 읽지 않고서는 잘 수가 없더라구요.

술이 다 깰 정도로 재미지더군요.

유진 아치케, 정말 문제적 인물입니다.

coolcat329 2019-07-19 1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주독서...흑! 대단하세요!

목나무 2019-07-19 10: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99권이라구요!!! 아놔~~~ 느므 책만 읽으시는 거 아니에요! ㅋㅋㅋ
이 작가의 작품은 소설이 아닌 페미니스트 관련 책만 읽었네요.
레삭매냐님이 올해 읽은 책 중 으뜸으로 손꼽으신다 하니 또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ㅎㅎ

레삭매냐 2019-07-19 11:02   좋아요 2 | URL
뭐 예전보다 독서량이 확~ 줄었습니다...

페미니스트 작가로도 유명하다는 말을
저도 들었네요.

자자, 이제 두 분 낚았으니 좀 더~

잠자냥 2019-07-19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을까말까 하다가 일단 넘겼는데.... ㅋㅋㅋㅋ 이 글 보고 장바구니에 담아둡니다.

레삭매냐 2019-07-19 11:39   좋아요 0 | URL
여기 한 분 더 추가요 ~~~

정말 재밌더라구요. 다양한 스토리가 적절하게
섞인 짬뽕밥 정도라고나 할까요.

moonnight 2019-07-19 1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레삭매냐님이 꼽으신 올해 최고의 책이라니 놀랍고 아직 7월인데 99권이라니 또 놀랍습니다. @_@;;; 저도 행복하게 낚여봅니다^^

레삭매냐 2019-07-19 13:24   좋아요 0 | URL
도저히 신인 작가가 쓴 책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구성
그리고 다채로운 스토리텔링의 향연
이 가득한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Falstaff 2019-07-19 1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어제 아디치에 읽었습니다.
이 책도 그냥 넘기지 못하겠군요. ^^

레삭매냐 2019-07-19 13:24   좋아요 1 | URL
오옷 공교롭게도 같은 작가의 책을 ~

어떤 책을 읽으셨는지 궁금하네요 :>

psyche 2019-07-20 2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벌써 99권의 책을 읽으셨고 그 중 제일이라 하시니 무척 끌리네요. 읽고 싶어요에 추가.

레삭매냐 2019-07-21 10:22   좋아요 0 | URL
감히 압도적 재미가 있는 책이었습니다.
아디치에의 다른 책도 재도전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답니다.

고양이라디오 2019-07-24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벌써 99권이나 읽으셨다니 대단하십니다ㅎ 친구신청 받아주세요~~ㅎㅎ

120퍼센트 2019-08-27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저도 바로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