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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역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8
윌리엄 포크너 지음, 이진준 옮김 / 민음사 / 2007년 7월
평점 :

윌리엄 포크너와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지난 달에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로 첫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보니 오래 전에 <소리와 분노>도 읽어 보겠다고 기세 좋게 사서 읽어 보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윌리엄 포크너를 만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매달 한 권 씩 그렇게 포크너의 책들을 읽는 중이다.
1931년에 발표된 <성역>은 두 명의 중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때는 이른바 금주법 시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포크너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남부(Deep South)의 여러 도시들인 제퍼슨, 잭슨 그리고 멤피스 등이 차례로 나온다. 소설의 중심에 서 있는 첫 번째 캐릭터는 18세의 미시시피 출신 여대생인 템플 드레이크다. 아버지는 판사로, 엘리트 계층을 대변한다고나 할까. 가우언 스티븐스와의 두 번째 데이트에 나섰다가 큰 봉변을 당하면서 삶이 꼬이기 시작한다.
다음에 나오는 두 번째로 중요한 캐릭터로는 사십대 남성 호러스 벤보다. 그의 직업은 변호사로, 법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미국 남부 지방에서 별종 같은 양심가라고나 할까. 사실 윌리엄 포크너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복잡하면서도 동시에 비선형적인 구성으로 좀 헷갈리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런 점에서 호러스나 템플 같이 중요한 인물들 그리고 소설에서 계속해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쉽지 않다.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그렇기 때문에 포크너의 소설이 매력적인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조금은 독자들에게 불친절하긴 하지만, 또 어떤 나같은 독자들은 자력갱생의 심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기에 이처럼 조건이 없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 말이지. 템플에 대한 폭행이나 토미나 레드를 대단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살해한 빌런 포파이의 행위들에 대한 구체적 묘사가 보이지는 않는다. 포크너가 준비한 단서들을 바탕으로 해서 독자는 도대체 소설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상상해야 하는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 아, 이런 게 바로 포크너의 스타일이란 말이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걸. 모든 작가의 개성적 스타일에는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법이지.
내가 보기에 포파이 만큼이나 나쁜 악당은 가우언 스티븐스란 녀석이 아닐까. 자동차 사고로 밀주업자들의 소굴에 드레이크 양과 함께 흘러 들어갔지만, 자기만 살겠다고 그곳을 탈출하지 않았던가. 템플에게 지옥 같은 경험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 바로 가우언이었다. 그리고 호러스의 과부 여동생과 썸을 타기도 하지 않았던가.
기독교 근본주의 신앙을 고수하는 남부에서 불우한 이웃을 진심으로 자신들의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나르시사 사르토리스 같은 인물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밀주업자 리 구드윈이 토미의 살해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히게 되고, 오갈데 없는 그의 동거녀 루비 라마와 아이를 절대 자신의 집에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시대고모라는 미스 제니도 마찬가지였다. 포크너는 나르시사와 미스 제니라는 위선적 인물들을 소설에 캐스팅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가르치는 성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남부 사람들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노출한다.
포크너의 <성역>은 다양한 소설적 특징들을 안고 있다. 어쩔 때는 드레이크 양에게 도매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추적하는 탐정소설 같기도 하고, 또 어쩔 때는 범죄소설 같기도 하고 막판에 가서는 법정드라마로 귀결이 된다. 그래도 역시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템플 드레이크가 자리잡고 있다. 템플은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리 구드윈의 억울한 누명을 밝혀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호러스 벤보의 모든 노력을 위증으로 무력화시킨다. 템플은 왜 그런 행동을 했던 걸까? 자신에게 몹쓸 짓을 한 포파이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다는 것일까.
남부의 양심을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한 호러스 벤보는 돈이 없다는 루비 라마의 말을 듣고, 리 구드윈의 무료 변호를 맡는다. 돈도 되지 않는 형사 재판에 누가 호러스처럼 나설까 싶다. 직업이나 과거의 행적으로 사람을 재단하는 자신의 여동생 나르시사와 달리 호러스는 리 구드윈의 무죄를 확신하고 법정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뢰인을 변호한다. 아무리 빌런들이 들끓는 곳이라지만, 호러스 같은 의인도 존재한다는 말을 포크너는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대단히 폭력적이고 잔혹한 강력 사건 사고들이 잇달아 발생하는데, 포크너는 마치 영화 <킹스맨>의 대살륙전에서처럼(영화에서는 상황에 맞지 않는 음악을 도입해서 폭력적인 시퀀스를 경감했다) 생략의 내러티브를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상상력과 모종의 텐션을 극대화시킨다.
개인적으로 소설 <성역>의 하일라이트는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쓰고 투옥된 리 구드윈을 진범으로 간주한 대중들이 가솔린을 이용해서 화형시키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법보다 사적인 복수가 우선하는 남부에서는 법정에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누가 과연 진짜 범인인가 그리고 사실 유무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적 보복이라는 미명 아래, 정의구현에 나선 이들의 행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게 문명국가란 말인가?
그리고 보니 포크너는 남부에서 정말 민감한 문제인 인종주의에 대해서는 적어도 <성역>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그가 좀 더 한발 나가서 리 구드윈을 흑인 가해자로 설정했다면, 화형 엔딩은 또 다른 야만적인 방식으로 확대되지 않았을까. 유대인 출신 변호사에 대한 언급해서는 만연한 반유대주의의 단편을 볼 수도 있었다.
좀 진부하기는 하지만,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결국 포파이는 다른 죄목으로 사법당국에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하게 된다. 워낙에 악행을 밥 먹듯이 저지른 빌런의 최후는 극적인 텐션 폭발로 이어지지 않고, 상대적으로 담담하게 서술된다. 어쩌면 포파이는 자신의 그런 마지막을 예견이라도 한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템플과 아버지 드레이크 판사는 파리의 뤽상부르 공원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삶을 이어가는 모습으로 소설은 끝난다.
널리 알려진 대로 제임스 조이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윌리엄 포크너는 <성역>에서도 의식의 흐름 기법을 채용했다. 포크너가 창조한 캐릭터에 온전하게 몰입을 하지 못한 탓인지, 주인공들의 의식이 흘러가는 지점과 그들의 속마음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최근 읽고 있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책도 비슷하지 않나 싶다. 작가는 아마 명징하게 어떤 뜻을 가지고 그런 주인공들의 의식의 흐름을 기술했겠지만, 모든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확실하게 알아내는 게 가능한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 너튜버들의 리뷰를 참조해 보니, 남부 특유의 슬랭이나 사투리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었다. 하지만 번역서로는 아무래도 그런 지점까지 도달할 수가 없지 않나 싶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성역>을 원서로 읽을 자신은 없고 말이지. 그동안 마냥 어렵다고 생각하고 아예 책장을 펴볼 생각도 못한 포크너의 책들을 잇달아 읽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