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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25년 5월
평점 :

11년 전 여름에 읽은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다시 읽는다. 이유는? 새로 개정판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모클 60번으로 나왔었다. 이제는 사라진 모클에 대한 추억이라고나 할까. 다시 읽어도 대단한 소설이라는 생각이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파키스탄 동부의 대도시 라호르다. 아나르칼리 거리에서 수상해 보이는 미국인을 만난 화자 찬게즈는 거침없이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여정을 풀어 놓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 중의 하나는 미국 일류대 프린스턴 출신의 찬게즈는 진짜 미국인보다 더 영어를 잘한다는 사실이다. 청자 미국인과의 대화는 그래서 아무런 소통의 문제가 없다.
미국 뉴저지의 명문대에서 좋은 학점을 받고 졸업한 찬게즈의 미래는 그야말로 하이웨이처럼 펼쳐져 있다. 무엇보다 명문대 졸업장은 뉴욕의 감정회사 언더우드샘슨에 취업하는데 있어 하나의 보증서처럼 작동한다. 미국의 직장은 일을 배우기 위한 곳이 아닌, 당장 투입할 수 있는 자본주의 산업 역군을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본토 사람들도 들어가기 어려운 회사에서 뽑는 6명 가운데 찬게즈는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물론 면접에서 전무이사 짐이 낸 모의 문제를 현란한 기술로 풀어낸 찬게즈의 능력 덕분이기도 했다.
프린스턴 대학의 졸업장은 찬게즈가 미국 사회의 편입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그 무엇이었다. 소설의 다른 한 축에서는 여자 친구인지 그냥 친구인지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에리카의 존재가 있다. 찬게즈가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다른 세계에 사는 에리카와 그리스 산토리니 여행 중에 만나, 그는 사랑의 감정을 키워 나간다. 문제는 에리카는 죽은 남자 친구 크리스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산 사람이라면 몰라도 죽은 사람과 경쟁할 수 있을까?
에리카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담은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탈출을 도모한다. 동시에 자신에게 계속해서 접근하는 찬게즈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밀어냈다가 당겼다가를 반복한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밀당의 표본이 아니던가. 정말 자신과 미래를 설계할 수 없을 것 같다면 그냥 찬게즈를 밀어내면 될 텐데 그것도 아니다. 사람 미치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점에서 자신의 본질을 결코 이방인에게는 허용하지 않는 미국의 본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국 에리카가 경험하는 정신적 위기는 찬게즈와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간다.
라호르의 찬게즈와 모종의 임무를 띠고 그곳을 찾은 미국인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언더우드샘슨에서 자신의 특출한 능력을 인정받은 찬게즈는 직장에서 그야말로 승승장구한다. 이윤의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의 신화를 달성하기 위해 냉정한 재정 모델을 개발하라는 회사 전무이사의 짐의 오더는 명징하다. 필리핀 마닐라에서는 레코드 회사를 감정하고, 뉴저지의 케이블 서비스 회사에서도 잇달아 성과를 내는데 성공하는 찬게즈. 그의 삶에 균열은 2001년 9월 11일 월드트레이드 센터 공격으로 시작된다.
역사상 처음으로 외부 세력에게 본토 공격을 당한 미국인들의 노이로제는 극에 달했다. 뉴욕의 잘나가는 비즈니스맨 찬게즈는 마닐라에서 귀국하던 중, 공항에서 거의 발가벗긴 채로 수색을 당하는 수모를 겼는다. 아 그전에 WTC가 공격받는 장면을 보고 일종의 즐거움을 느꼈다고 고백했던가. 거대한 미국이 외부의 공격을 받고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상징성에 모신 하미드 작가는 방점을 찍는다.
찬게즈가 현재 살고 있는 최첨단 자본주의 국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전쟁을 하기 이전부터 자신의 고향 라호르에서는 문명이 꽃을 피웠었는데, 형세가 역전되어 라호르는 그저그런 제3세계 국가의 이름 모를 도시가 되었고, 뉴욕은 이른바 밀레니엄 캐피탈로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되찾아야겠다는 심정의 발로로 WTC 공격을 받아들이지 않았나 싶다.
찬게즈의 숱한 노력에도 에리카와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고, 결국 에리카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어쩌면 에리카와의 만남 그리고 이후의 관계 발전은 찬게즈가 미국에 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 지도 모르겠다. 2001년 9월에서 12월로 이어지는 시간은 이십대 초반의 청년 찬게즈에게 그야말로 위기였다. 설상가상으로 2001년 12월 13일 벌어진 인도 의사당 공격 테러 사건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은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다. 왜 내가 처음에 이 책을 읽을 적에는 이 사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에리카의 실종과 언더우드샘슨에서의 마지막 미션이었던 칠레 발파라이소 일정을 마지막으로 찬게즈는 미국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의 가족들이 고향에서 어쩌면 전쟁에 휘말릴 지도 모른다는 위기 상황에서 자신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미국에 남는다는 건 찬게즈의 양심이 허용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자신의 정체성 위기를 겼던 찬게즈는 발파라이소 출판사 감정 와중에 만난 후안 바우티스타로부터 오스만 제국 시절 용병이었던 예니체리에 대해 듣게 된다. 그전의 리뷰에서는 바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인용해서 리뷰를 쓰지 않았나 싶다. 결국 찬게즈 역시 서방 세계에 고용한 예니체리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쓸모가 있을 적에는 무척 유용하게 쓰이다가 결국에 가서는 용도 폐기되는.
9-11 사건이 일년 정도 지난 시점의 라호르에서 대학 강사로 변신한 찬게즈의 현재 모습이 소개된다. 그 사이에 찬게즈는 서방 세계의 총아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로 변신한 모양이다. 라호르는 무슬림 세계에서 서방의 모로코에 대척점에 놓인 동방의 거점 도시라고 했던가. 물론 동방에도 방글라데시와 말레이시아 그리고 인도네시아 같은 무슬림 국가들이 있긴 하지만, 정통적인 의미에서 무슬림국가의 중요한 도시들 중에서는 라호르가 가장 동쪽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서구식 교육과 자본주의 세례를 받은 유능한 무슬림 청년이 자신의 정체성 위기를 겪으면서 반서방 지식인으로 변신해 가는 과정을 모신 하미드는 유감 없이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아무리 서구식 물질주의가 영혼을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근본을 바꿀 수는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 미국 주류 사회에 편입하고자 했던 청년 찬게즈가 결국 실패하게 된, 더 이상의 모욕과 수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 정도에서 그치게 된 것을 안도해야 할까.
무려 십년 만에 다시 만나는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사반세기 전에 시작된 미국 패권주의의 균열이 가속화되어 가는 시점에 적절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시스템에 적응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이방인의 삶을 통해, 날이 갈수록 맹위를 떨치는 미국 우선주의로 동맹국들의 이탈을 막을 수가 없게 된 2025년을 겨냥한 모신 하미드의 예언이 아닌가 싶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영화는 보지 못했다. 문득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나방 연기>도 읽어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