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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2
페터 플람 지음, 이창남 옮김 / 민음사 / 2025년 2월
평점 :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제 <타임 쉘터>를 빌리러 도서관에 들렀는데, 사서분이 내일까지 반납해야 하는 책이 있다고 하신다. 누군가 예약 도서를 걸어서 연장이 안된다고. 그렇지 오늘까지 반드시 읽어야 한다. 페터 플람의 <나?> 이야기다. 이렇게 읽지 않고 반납한 책은 다시 빌리지 않게 되더라. 그러니 어떻게든 오늘 중으로 다 읽어야지.
결국 책을 들고 도서관에 가서 마저 남은 부분들을 모두 읽었다. 비가 줄줄 내리는데 정말 집에서 나가기 싫었지만.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다 읽고 나서는 뭐랄까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점에서 뿌듯했다고나 할까.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1926년 그러니까 99년 전에 발표된 페터 플람의 데뷔 소설이라고 한다. 항스 슈테른이라는 군의관 출신 의사가 전장에서 베를린으로 복귀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이다. 참 초반에 재판장에게 운운하는 걸로 봐서는 그 사이에 재판정에 설 만한 무슨 일이 발생했다는 걸을 암시한다.
4년간의 치열한 전쟁을 마치고 베를린으로 복귀한 한스 슈테른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가 전장에서 전사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스 슈테른의 진짜 정체는 누구란 말인가. 그는 바로 제빵사 빌헬름 베투흐(침대보)다. 그 둘이 바뀐 경위는 중요하지 않다. 프랑스 베르됭의 두오몽 요새에서 벌어진 미친 전쟁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고지 하나를 빼앗기 위해 수십만 명의 청년들의 목숨이 전장에서 사라져 버렸다.
어쨌든 그런 미친 전쟁이 끝난 뒤, 베를린은 혁명의 도시였다. 기나긴 절망을 끝내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희망의 상징이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한스 슈테른의 아내 그레테를 비롯한 이들이 의사의 귀환을 반긴다. 하나 궁금한 점은 겉모습은 한스일지 모르지만, 당장 의사 직무를 수행해야 하는 베투흐가 과연 어떤 식으로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돌파할 것인가였다. 사실 그 부분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대신 멀쩡해 보이는 한스 슈테른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이 하나둘씩 튀어 나온다. 부쉬 산도르 여사와의 스캔들부터 시작해서 친구이자 검찰인 스벤 보르게스가 자신의 아내에게 추파를 보낸 점 등 숱한 이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가장 큰 문제는 살인 사건과 관련된 증거에 대한 감식이었는데, 알고 보니 피의자 에마 베투흐가 자신의 여동생이 아니었던가.
전장터에 나갔다가 실종된 오빠를 대신해서 가정을 이끌게 된 에마는 농장주의 하녀로 취업했다가 농장주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 그리고 모종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농장주 살해자로 몰리게 됐다. 한스 슈테른 아니 빌헬름 베투흐는 명백한 증거를 무시하고 에마에게 유리한 증언을 법정에서 전개한다. 그의 결정적 증언으로 에마는 무죄로 방면된다. 어쩌면 이런 일련의 서사적 배치는 엔딩에 예비된 비극을 위한 준비였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나?>에서 가장 희극적인 장면은 부쉬 산도르 여사와 약속된 만남에 자신의 개(세인트버나드) 네로를 끌고 갔다가 네로가 벌이는 한바탕 소동극이었다. 어쩌면 파국은 이 때부터 이미 예고되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곳곳에서 베이커리 전문가로 빌헬름 베투흐가 보여주는 놀라운 식견도 주인공이 부르주아 계급의 한스 슈테른보다 프롤레타리아 제빵사에 더 가깝다는 진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도플갱어 논란에서 전자보다 후자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베를린에서는 한스 슈테른이었을지 모르지만, 불현 듯 기차를 잡아타고 도착한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다시 빌헬름 베투흐로 변신한다. 자신이 일하던 베이커리에 찾아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전문 지식을 뽐내는 베투흐. 그 다음에는 죽어가는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가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본다. 그 때 잠시 의사로 변신했던가. 에마에게도 진실을 이야기하지만, 자신의 지금 모습으로는 아마 동생을 이해시킬 수 없었으리라.
아마 그 다음의 전개가 작가가 진짜 하고 싶었던 부분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 자신이 싸우던 프랑스 전선, 구체적으로 베르됭 플뢰리의 두오몽 요새를 찾는 베투흐/슈테른. 아무런 의미 없던 포탄과 총알이 난무하던 고지전에서 자신이 느꼈던 전쟁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처참함 그리고 죽음의 이미지들이 그대로 투영된다. 그렇게 전쟁에서 가까스로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잉태된 비극에서 탈출하지 못한 도플갱어 주인공은 결국 스스로 그렇게 무너져 버린다.
책을 읽다가 문득 전쟁터에서 영혼이 부서진 사람이 과연 어둠에서 벗어나 빛 속으로, 그러니까 다시금 일상으로 복귀가 가능한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영화나 많은 문학 작품들에서 전쟁과 관련된 PTSD들을 봐왔지만, 정작 당사자가 아니다 보니 그들의 깊은 내면세계에까지 도달하지 못한 그런 느낌이다. 페터 플람은 전쟁이 끝난 뒤 가까운 시절에 이 작품을 쓰면서 백년 후보다 더 많은 그런 경험들을 하지 않았을까. 지금의 독자와 당대의 독자가 느끼는 간극이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