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은 악마의 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1
에드나 오브라이언 지음, 임슬애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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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작고하신 아일랜드 출신 작가 에드나 오브라이언의 책들을 읽으면서 공통적으로 느끼게 되는 점들이 있다. 주체적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는 소설의 주인공들에게서 일종의 색정증 증세가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데 뭐 어쩌라구. <8월의 악마의 달>이 발표된 해가 무려 60년 전인 1965년이다. 작가는 아일랜드 여성의 지위를 혁신한 중요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수긍되는 지점이었다.

 

제목부터 도발적인 <8월은 악마의 달>의 주인공은 런던에 사는 아일랜드 출신 스물여덟의 빛나는 여성 엘런 세이지다. 남편과는 현재 이혼한 상태고, 7살난 아들 마크와 살고 있다. 마크는 이혼한 남편이 캠핑을 데리고 간다고 해서, 잠시 이별하게 되었다. 어린 아들 마크에게는 조지라는 보이지 않는 친구가 존재한다. 그리고 엘런에게는 휴 휘슬러라는 파트너가 있다. 오로지 성적 관계만 위한 그런 사이였던가. 휴는 엘런의 관계를 진전시킬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애인 미란다를 포기할 생각도 없는 빌런에 가까운 인물이다.

 

휴에게 질린 엘런은 계획한 휴가를 떠나리고 결심한다. 그리고 프렌치 리비에라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휴가지에 만난 이들과의 다양한 관계, 불가피한 원나이트 스탠드 등이 이어진다. 엘런이 휴가지에서 만난 이들은 하나 같이 부유한 인사들이지만, 샐러리맨인 엘런은 당장의 택시비 걱정을 해야 하는 신세다.

 

매력적인 엘런에게 호텔 종업원 위고를 비롯한 숱한 남자들이 꼬인다. 시드니 역시 그 중의 하나다. 사실 엘런은 늙다리 시드니보다 배우 출신 바비에게 더 끌리지만, 바비는 엘런 대신 데니스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 뜨거운 태양이 쏟아지는 프렌치 리비에라의 바닷 바람은 그곳을 찾은 이들에게 어떤 일탈의 기회를 제공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사실 전 남편과 아들 마크에게서 해방된 엘런에게는 세속의 걱정을 잊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런 무한대의 자유가 주어진 것도 사실이니까. 물론 나중에 휴가지에서 사용한 비용이 그녀를 압박하게 되지만.

 

어느날 저녁 떠들썩한 분위기에 취해 시드니의 대저택으로 향하는 길에 마주하게 된 교통사고 현장에서 죽은지 얼마 되지 않는 시신을 목격하게 되는 엘런과 그 일행들. 나중에 후술하게 될 결정적 사건에 대한 하나의 전조처럼 다가온다. 계속되는 시드니의 유혹에 넘어가 엘런은 그와 하룻밤 사랑을 나눈다.

 

자 이제 비극이 벌어질 차례인가. 한 때 간호사를 꿈꾸었던 엘런에게 생각하지도 못한 끔찍한 사고에 대한 뉴스가 전 남편을 통해 전해진다. 그것은 바로 꼬마 마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다. 믿을 수가 없는 소식이다. 엘런이 남프랑스에서 지중해 태양을 즐기는 동안, 아들 마크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지금 같은 세상이라면 휴대전화로 바로 연락할 수가 있었겠지만,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무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이다. 아들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함께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엘런은 그만 무너져 버리고 만다. 과연 "8월은 악마의 달"이라는 제목이 딱 맞아 떨어지는 그런 느낌이다.

 

런던으로의 복귀를 포기하고, 엘런은 휴가지에서 정신없는 그런 나날들을 보낸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곁에서 위로해주는 사람이 바로 바비였다. 바비는 엘런에게 수영도 가르쳐 주고, 맛있는 음식과 드레스도 사주면서 그녀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한다. 바비가 바람둥이 나쁜 남자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엘런은 자신에게 망각을 선사해주는 바비에게 넘어가 오죽하면 그의 안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다 했을까 싶을 정도다. 궁극적으로 바비는 사악한 악마 같은 존재였다.

 

소기의 목적을 이룬 바비는 엘런을 호텔에 놔두고 도망가 버렸다. 도대체 엘런은 왜 이런 불행의 연속선상에서 고통 받아야 하는가. 자신이 내린 잘못된 결정은 엘런은 지속적으로 괴롭힌다. 심지어 수치스러운 몹쓸 병에 걸려 육체적 고통까지 받아야 할 처지가 됐다. 호텔 숙박비까지 밀려, 엘런은 쫓기듯 런던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휴가지에서 처음 마주했던 뜨겁고 맹렬하고 찬란했던 미지의 파랑은 엘런에게 인생에서 가장 쓰라린 경험을 제공했다.

 

집으로 돌아온 엘런은 전 남편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가 젊은 여자가 어디론가 떠났다는 소식을 이웃에게 전해 듣는다. 그 사실은 어쩌면 자신을 평생 괴롭혔을 지도 모를 평생의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자신의 육체만 탐하던 휴 휘슬러와의 관계에도 마침표를 찍는다.

 

<8월은 악마의 달>은 에드나 오브라이언 작가의 모국인 아일랜드를 비롯해서 여러 가톨릭 국가에서 "인간의 심성과 미덕"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소설에서 엘런 세이지는 결혼과 육아라는 전통 자본주의적 가부장 시스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 인간으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스토리 전개상 가장 극적인 사건인 아들 마크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은 그를 돌보고 있던 이혼한 남편이 당연히 져야 했다. 마치 엘런의 책임이기라도 하듯 그가 몰아붙이는 장면은 지독한 책임회피의 전형이었다.

 

아들의 죽음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엘런이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 그녀가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사회적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으리라. 그런 점에서 엘런의 일탈이 이해되기도 했다. 그녀가 그런 일탈로부터 개인의 행복으로 이어졌다면, <8월은 악마의 달>은 더욱 비난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에드나 오브라이언은 몹쓸 병이라는 장치를 동원해서 엘런에게 어떤 탈출구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을 찾아온 휴 휘슬러의 유혹에 넘어 갔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떤 선은 넘지 않는다는 점을 작가는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분량은 얼마 되지 않지만,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여러 사건들 그리고 시시각각 표변하는 주인공 엘런의 심리상태를 따라 가기가 쉽지 않았다. 주인공이 단장의 슬픔을 겪는 장면에서는 잠시 책장을 덮어 두기도 했다. 이제 에드나 오브라이언의 데뷔작인 <시골 소녀들>을 읽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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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5-06-09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작가도 있군요@_@;; 레삭매냐님 덕분에 읽고 싶은 책이 한 권 더 생겼네요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5-06-09 17:21   좋아요 1 | URL
우연히 알게 된 작가인데,
아일랜드에서는 널리 알려
진 작가더라구요.

세상은 참 넓고, 모르는
작가들은 여전히 많네요...